설교누가복음 › 너희 소유를 팔아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궁극이 | 2022.04.25 13:14:2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12:33-38
설교자
김경형 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12장 33절-38절: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3절-34절: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는 채워 넣어도 무한으로 들어간다. 우리 모두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가져야 한다. 육신의 주머니 즉, 육신의 생각,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주머니가 한정이 돼 있다. 세상 것만 들어가는 한정이다. 세상은 아무리 집어넣어도 세상이다.

 

세상에서는 고작해야 부귀 명예 영광 장(長)자리 그 이상 없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한정이 돼 있다. 그런데 영적인 차원에서는 그 주머니가 무한으로 크다.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영적인 이치가 무한하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66권 성경 속에 다 함축이 돼서 들어가 있다. 그래서 성경에 능통하면 세상을 다 본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얼마나 무한하냐?

 

예수 믿으면서 이치적으로 깨닫는 그 면에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도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믿는다면 그 깨달음은 한정이 돼 있으니 그 깨달음은 공통적으로 한 마디로 세상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본질적으로는 세상이라는 것에 차이가 없다. 그런데 세상에서 여러 면으로 차등성을 보여주는 것은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하나의 매개물이다. 하나의 그림책이다.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해 주려고 없어질 것을 갖고 와서 무한한 것을 보여주는 거다.

 

무한으로 들어가는 주머니는 무한으로 깨닫고 무한으로 큰 건데, 이 주머니는 신령한 하늘에 속한 주머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하늘에 속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예수 믿고 부자 되고 편안히 살고 하는 건 전부 땅에 속한 주머니, 세상에 속한 주머니이다. 세상 주머니는 다 낡아지고, 잊어버려지고, 구멍 났고, 도둑맞고, 좀먹는다. 선악과 먹은 지식에서 만들어지는 주머니, 선악과 먹은 지식에서 만들어지는 그 이상, 선악과 먹은 지식에서 나온 그 사고방식 그 발상 전부는 도둑맞고 좀 먹는다. 그러나 생명과 먹는 지식에서 만들어지는 주머니는 낡아지지 않는다. 이건 신령한 주머니, 한없이 채워지는 주머니, 다함이 없는 주머니이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하는 말씀이 있는데, 자기 속에서 어느 쪽으로 헤아리느냐?

 

다함이 없는 주머니, 신령한 주머니,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 한없이 채워지는 주머니, 천국 쪽으로 그 사고발상의 주머니, 여기는 도둑도 없고, 도둑이 감히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도둑이 들 수도 없고, 훔쳐갈 수도 없고, 빼가지를 못한다. 즉 알지를 못한다. 이 주머니를 가진 사람은 사단 마귀가 거짓 종들이나 이단자들 붙잡고 아무리 성경구절을 들고 말을 해도 그 차원을 알고 그 질을 알고 그 결과와 목적을 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안 속는다. 예수님은 안 속았다.

 

예수 믿는 우리가 그 정신을, 그 말씀을, 그 사상을 잘 좇으면 안 속을 텐데 왜 속느냐? 왜 속고도 속은 줄도 모르느냐? 어째 그러냐? 몰라서 속는 거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교인들만 불쌍한 것이다. 먼저 알아야 할 목사가 그걸 모르면 그 밑에서 배우는 교인들만 참 불쌍한 거다.

 

예수를 믿지만 눈을 감았지, 영적으로 보면 문둥병이지, 성격도 못 고쳤지, 성질도 못 고쳤지, 자기 기분대로 예수를 믿으니 그게 뭐가 되겠느냐? 사람이 바로 못 서니 가정이 바로 서겠느냐? 못 선다. 그러면 자식의 교육이 바로 되겠느냐? 이것도 안 되는 거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없더라도 이치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도둑은 들고 가고 가져가는 것이란다면 좀은 자체적으로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가는 것이다. 해가 지면 산 그림자가 동네를 파먹어 들어간다. 또 아침 해가 뜨면 어두운 산 그림자는 점점 물러가고 환하게 동네를 살리고 활동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신을 만드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면 그 사람은 구원을 모르는 거다. 구원을 모르면 자기의 존재목적을 모르는 거다. 재세기간의 목적도 모르는 거고. 말하자면 영인성장이나 영적 기능 지능 면의 영적인 면을 모르는 거다. 각 교회마다의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이거 모르는 분이구나. 장(長)이라는 분이 모르는구나’ 그게 있다.

 

모르면 그 사람은 세상이라는 정신이 주격이 되어 있다. 즉 선악과 따먹은 차원의 지식이 신앙의 주격처럼 들어가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이루고 가야 할 현재적 자기를 세상정신이 쌀에 있는 좀처럼 그 사람을 야금야금 파먹어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세상이라고 하는 세월에 통째로 먹힌 것이다. 먹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으로 자라고 살아나는 것은 없다. 기독교 교리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영이 중생이 됐지만 사망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자기 평생이 영적 차원에서 살아나는 건 없고 전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의 사해바다로 흐르는 것뿐이다. 성경이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걸 깨달으라고 갈릴리 바다에서 요단강으로 사해로 흐르는 그걸 지구 한복판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 물에 들어가니 죽음의 바다로 흐르던 강물이 섰다. 이게 기독교 신앙사상이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소원 목적으로 하고 ‘이게 내 일생이다’ 하고 둘러 멘 자가 있느냐?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둘러메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권사 집사 장로 목사라고 할런지 모르지만, 직분을 받았어도 산 것은 없다. 산 것이 있다면 내놔봐라. 없다. 네 말로 네 속에 있는 것은 죽었다고 표명이 된다. 산 것이 없으니 든 대로 죽은 게 그대로 나오는 것이다. 이게 기독자들의 현실이요 교회의 현실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자기 속에는 허무밖에 없는 것을 느끼게 된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진리이치로 많이 깨우침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던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는 종이다. 이 사람에게서는 말씀증거가 나오게 돼 있다. 하다못해 일반적으로 보면 학교의 선생이 안 됐어도 자기가 잘 알아서 어느 동네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친다면 이건 잘하는 것이다. 모르면 못 가르친다.

 

목사가 사회적 용어로 정년퇴직을 하면 뭐 하느냐? 할 일이 없느냐? 한 이치 속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느냐? 하나님의 종은 죽을 때까지 종이다. 이 말씀을 들은 어떤 종은 정년퇴직을 하려고 하다가 다시 기운을 얻어서 목회하는 목사도 있다. 내가 다 안다는 게 아니라 성경을 모르는 목사들이 정말로 많다.

 

예수를 믿어도 잘못 깨달아서, 또는 깨닫지를 못한 채 좀이 먹어가는 것과 같은 믿음 없는 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자는 생각할수록 자기는 좀 집의 거미줄처럼 너덜너덜 보기가 흉한 인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나간 옛 추억만 생각하고 눈물만 흘리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월이 좀 먹느냐’ 하는 말도 있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이 다 지나가고 있다. 자기가 이 시간 속에서 어떤 소원 목적적으로 노출이 되어 있는지 그걸 심사하라. 예수 믿으면서도 ‘세월이 좀 먹느냐’ 하는 식으로 살지 말아라. 세월이 좀 먹으면 늙어진다. 그러면 힘이 없다. 예수 믿으면서도 이 면을 못 깨달으면 그 자기는 그 다음에 거미줄을 친 것처럼 보기가 흉해진다.

 

녹두알에 좀이 먹으면 껍데기는 그대로인 것 같으나 속을 다 파먹었다. 겉으로 보면 잘 모른다. 그러나 물에 띄워보면 좀이 먹은 알갱이는 둥둥 뜬다. 속이 빈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라는 그 정신 사상에 잘 떠내려간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많은 세상 사람들이 갖는 정신 사상으로 자기 일생을 세상에 흘려버리는 사람이 많다. 이걸 못 느끼느냐? 좀먹은 알갱이를 다음 농사에 씨로 쓰겠느냐? 사람이 먹을 수 있느냐? 그래도 모르겠느냐? 그래도 예수 믿는 이치를 모르겠느냐?

 

진리생명 길 신앙노선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깨달음이 충만해진다. 알곡처럼 여물어진다. 그러나 사람이 깨닫지를 못하면 허망하게 살다가 죽는 수밖에 없다. 이룰구원을 가진 참 신앙은 좀먹지를 않는다. 질적 차원적으로 고차원적 신령성이기 때문에 도둑과 좀이 달려들지를 못한다. 이것은 늘 깨어있는 신앙이다.

 

세상정신 사상은 질적으로 보면 그 사람의 신앙차원은 아래다. 그래서 올라갈 수도 없고, 올라갈 능력도 없고, 그러니 알곡처럼 진리신앙 길을 가는 그걸 침범을 못한다. 고차원적으로 살아야 할 자기의 정신 사상이 세상으로 뚝 떨어지면 이건 마냥 세상이라는 좀이 파먹고 들어가는 거다. 그냥 노출이 돼 있다.

 

자기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신앙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천국의 보화를 무한히 채울 수 있는 다함이 없는 자루가 될 것이고, 자기가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살면 구멍 뚫린 자루와 같은 사람이 된다.

 

34절: 그러니까 ‘자기의 보물이 뭐냐’ 하는 게 문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자기의 보물이 장롱 속에 있으면 예배한다고 이 자리에 앉아있어도 마음은 거기에 가 있게 된다. 자기의 보물이 무엇이냐? 물질이냐, 사람이냐, 진리냐? 자기 마음속에 무엇을 보물로 여기느냐에 따라서 그 쪽으로 가게 돼 있다. 자기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사람들이 보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보통 금은 진주 등 그런 보화들을 보물이라고 한다. 그런 것들을 은행에 뒀다면, 또는 장롱 속에 두었다면 그곳에 늘 마음이 갈 것이다. 성도가 자기의 보물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자기 마음이 늘 성경을 볼 것이다. 성경으로 자꾸 들어간다. 성경 속에는 천국보물이 있다. 그 천국보물이 이 세상의 보물만도 못할까?

 

자기의 보물이 땅의 것이라면 자기 마음이 땅으로 갈 것이고 마귀가 가자는 대로 잘 따라갈 것이다. 하늘의 것이라면 마음이 하늘 것에 갈 것이다. 이건 성령님의 인도로 그렇게 된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것에 사람의 마음이 가는 것이다. 미운 데로 자꾸 마음이 가면 이건 마귀 짓이다. 시험에 든다. 믿는 자로서 자기의 보물이 뭐냐?

 

35절: 허리에 띠를 띠면 활동이나 일을 하겠다는 자세다. 그래야 배에 힘이 있어서 일을 하게 된다. 허리띠를 안 매면 힘든 일을 못한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허리띠를 매면 첫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일을 하려고 할 때 허리띠를 띠게 된다. 두 번째는 일을 할 때 배에 힘이 들어가서 힘을 쓰게 된다. 세 번째는 달릴 때 옷이 벗어지면 못 뛴다. 그 때도 허리띠를 매야 한다. 네 번째는 신앙 면의 참 일꾼은 진리로 허리띠를 동인다. 그러니까 진리로 자기 힘을 삼는다는 말이다.

 

자기가 사는 데 있어서 뭐로 힘을 삼느냐? 돈 힘? 밥 힘? 믿는 사람은 진리로 자기 힘을 삼아야 한다. 이건 정말 강한 사람이다. 진리의 정신 사상은 정말 강한 사람이다. 그 속에는 지혜가 있고, 권면이 있고, 능력이 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신다.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등불은 왜 켜느냐? 어두우니까 등불을 켠다. 어둡다는 것은 영의 눈으로 보면 그 시대에 진리가 없다 그 말이다. 진리가 없는 시대는 어두움의 시대다. 그래서 진리의 등불을 붙여야 한다. 선지가가 있는 시대는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고, 사랑이 있고, 역사가 있다. 그러나 선지자가 없다면 암흑시대다. 남조유다가 멸망하고 그 이후로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의 400년, 그게 말라기 시대인데, 그 이후 시대는 마카비 시대이다. 하나님의 일꾼 선지자가 없는 시대이다. 흑암의 시대이다.

 

하다못해 교회가 있는 나라는 밝다. 문명도 개발되고 빠르다. 그런데 기독교회가 없는 나라는 어둡다. 문명개발이 안 된다. 맨 집안 자기들끼리 세력다툼이다. 하나님의 기준을 주격으로 놓고 지나간 과거도 볼 줄 알아야 한다.

 

말세시대에 거짓 종들이 많이 나온다고 했으니 거짓 종을 빨리 알아볼 수 있도록 자기 속에 진리의 등불을 밝혀야 한다. 깨달음의 등불이 있어야 한다. 이건 없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이게 뭐냐? 하나님 앞에 기본자세도 없고 하면 그게 뭐냐? 교회에 나오는 시간이, 말씀 듣는 시간이 아이들의 학교공부만도 못한 것이냐? 교회가 대학생들이 강사 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만도 못한 거냐? 우리가 성경에서 보지 않느냐?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못 드리니 가인이 어떻게 됐느냐? 인간 편에서 보는 거다. 예배를 우스꽝스럽게 드리는 그 속에는 가인의 속성이 들어가 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그걸 보라고 성경에 기록이 돼 있는 거다.

 

일반적으로도 학교에 다닌다면 집에서 놀 때보다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 아는 것도 많아지고, 공동생활을 어떻게 하고 공중도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배웠다는 게 나오는 거다. 또한 가르치기도 해야 한다. 그런 것처럼 교회에 오래 다니면 사람이 정신 사상적으로 규모가 잡혀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어떻게 장돌뱅이처럼 살 것이냐? 누가 그런 사람을 알아주겠느냐? 진리가 어두운 밤, 거짓 종들이 많이 나오는 밤, 시대적인 밤, 영적인 밤에 진리 깨달음의 등불을 켜라.

 

두 번째는 불이 있어야 사람을 알아보듯이 진리의 등불이 있어야 사람이 속성적으로 분별이 된다. 어떤 정신 사상을, 소원 목적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그게 다 분별이 된다.

 

세 번째는 불이 있어야 길을 바로 갈 수가 있듯이 진리의 등불이 있어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적중성으로 갈 수가 있고, 또 다른 사람을 그렇게 가도록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전도할 때 ‘가까운 교회로 나가십시오’ 그 말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가까운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내가 알지 못하고서는 말해주기가 어렵다. 그래서 “성경을 사서 계속 보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말씀을 바로 가르쳐 주고 평생을 말씀대로 순종하고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라”고 한다.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실 테니까. 가까운 교회에 가라고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왜냐? 거짓된 교회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그 성도는 이용당하고 사기당하게 된다.

 

사람을 바로 세우는 게 사랑이다. 사람을 바로 세우지는 않고 등 두들겨주고 업어주고 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바르게 깨우쳐서 하나님 앞에 적중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살아생전 동안에 하나님의 복을 다 받고 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사랑이다.

 

등불은 밤에 켜는 거다. 시대의 때를 아는 사람은 진리의 등불을 켠다. 시대가 어두운 밤에, 진리가 어두운 밤에, 구별이 어두운 밤에. 진리의 등불을 가진 자는 자기가 신분을 밝힌다. 즉 자기부터 밝혀져 있다는 말이다. 자기 신분이 밝혀져 있기 때문에 손님을 영접할 수 있고, 손님을 인도할 수 있다. 신앙의 성격과 성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반드시 등불을 가지고 다닐 것이다. 깨달음을 가지고 다니라는 말이다. 성령의 불은 깨달음이 들어있다. 깨달음이 없는 성령의 불은 없다.

 

마지막 시대에는 거짓된 세상적인 신앙사상을 가진 자들과 이단자들과 여러 가지 귀신들린 자들이 많이 나온다. 교회 안에도 그렇다. 왜 목사가 중과 악수를 하느냐? 왜 어두움과 밝음이 악수를 하느냐? 하나님이 부처와 악수를 하더냐? 이치가 금방 나오는 거다. 그러니 그 사고방식의 차원이 어떻다는 건 벌써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감정과 흥분뿐이지, 자기의 사고방식일 뿐이지 거기에는 일반적인 이치도 없는 거다. 이들은 뭐가 기준이냐? 세상이 기준이다. 기독교회가, 예수님이 세상을 기준했느냐?

 

진리의 등불을 밝게 하고 다녀야 한다. 깨달음이 밝아야 한다. 비진리가 난무한 어두운 때 여기저기 집회한다고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앉아있지 말고 서 있으라. 항상 준비된 마음을 말한다. 무슨 말이냐? 명령만 떨어지면 즉시 순종이다.

 

만일 캄캄한 밤에 등불이 없이 서 있으면 자기 옆으로 다가온 사람이 깜짝 놀란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켜고 있으면 신분이 바른 사람이구나. 자기가 불을 켜고 있으면 자기부터 밝아지니까 신분이 밝은 사람이구나. 목사들이 진리의 등불도 켜지 않은 채 도둑처럼 서 있는 목사가 많다. 불 없이 어디로 인도가 되겠느냐? 인도가 되는 거냐?

 

36절-38절: 어떤 종이 복이 있느냐? 혼인집에 갔다가 늦은 시간에 돌아왔는데도 종이 그 집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집주인의 기분이 좋을까, 나쁠까? 최고로 기분이 좋다. 그런데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열어라’ 했는데 종이 잠을 잤거나 자리를 이탈했다면 그 종에게 어떤 상을 줄까, 형별이 내려질까?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이경이나 삼경에 오더라도 즉, 밤 9시나 12시나, 또는 12시에서 새벽 3시까지 오더라도, 그러니까 한참 깊이 잠든 때이다. 그 때에 왔는데도 여전히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잠을 안 자고 깨어있는 것을 보고 주인이 얼마나 기뻤으면 그 종을 자리에 앉히고 주인이 띠를 띠고 수종을 든다고 한다. 완전히 바꼈다. 말하자면 주인이 자원적으로 종에게 하는 특대우다.

 

영의 눈으로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가 금방 나오는 건데 오늘날 목사님들이 맨 세상위주로 돌아가서 세상이 알아주고 교인 숫자가 많으면 목회성공이니 그런 말을 한다. 목사님이 뭘 어떻게 해야 성공이냐?: 예배당 건물 크게 짓고 교인이 많은 것을 성공이라고 보는 눈은 안 믿는 사람들이 보는 눈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공의 눈은 그런 게 아니다.

 

본문은 종은 어떤 종이냐? 주인의 자원적으로 하는 특대우를 받고 있다. 주인이 이 정도로 대우를 한다는 것은 아마도 다른 많은 종들은 주인을 실망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깨어있는 종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나 종을 부르는 주인의 목소리의 음량 음색을 금방 알아차리고 얼른 열어준다. 그런데 만일 종이 졸고 있다거나 잔다고 하면 주인의 목소리를 얼른 알아듣지를 못한다. 이런 자는 개 짖는 소리도, 도둑고양이 소리도, 미친 여자의 소리도 주인의 소리로 착각을 하고 혼이 빼여 평생 이용당하고 죽는 거다.

 

그런 식으로 죽는 목사도 참 많다. 무슨 말인지 아느냐? 각 교회마다 목사님이 말씀을 전할 때 ‘이걸 누가 하는 말이냐?’ 하고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세상축복’ 운운하면 누가 그 목사를 잡고 말을 하는 것이냐? 마귀다. 따라서 그 목사는 세상이 세운 종이다. 이걸 알아들어야 한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는 그 의미가 말 속의 말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르면 죽는 거다.

 

마지막 시대의 종들은 밤 9시로부터 12시까지는 테레비 보는 시간이고, 밤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는 전도한답시고 채팅하는 시간이고, 그러면 잠은 언제 자느냐? 대낮에 자야 한다. 그 다음 날 또 그렇게 반복이고. 그러면서 성경을 본다고 해도 주님이 만나지겠느냐?

 

밤에 신랑이 온다고 했는데 워낙 늦게 오니까 기름준비를 한 자도 졸고, 기름준비를 안 한 자도 졸았다. 그런데 드디어 신랑이 온다고 하니까 기름을 준비한 자는 벌떡 일어나서 등불을 켠다.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교회 목사님들은 설교를 준비해놓고 놀든지 말든지 하라. 기름준비는 낮에 하는 거냐, 밤에 하는 거냐? 낮에 하는 거다. 요즘은 전기불이라 아무 때고 불을 켜지만.

 

본문에 깊이 잠든 시간대를 말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교회가 거의가 세상 이방인들의 소원 목적으로 세상 넓은 길, 사망 길로 가기 때문에 예수님 오시기 직전의 신앙상태와 같아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암시를 한다. 그러니까 지금이 마지막 때가 맞느냐? 그렇다면 준비를 해야 한다. 자기 일생의 때도 있을 것이고, 시대의 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지엽적인 면에서 국지적으로 마지막도 있을 수 있다. 항상 준비를 하라. 그런 정신으로 예수 믿고 바로 살아야 한다.

 

이 죄악의 깊은 밤에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가는 신앙이 생명 길이요 구원의 길이다. 그런데 세상 마지막이 될수록 신앙의 본질을 모른 채 계속 부피 덩어리만 키우는 것이 부흥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본질을 찾아서 자기를 하나님의 진리 본질화 시켜라. 그게 하나님의 온전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