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궁극이 | 2021.11.16 17:10:2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11:21-26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1121-26: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1-22: 일반적으로 이해가 되는 말씀이다. 무장해제를 시키고 재산과 재물을 노략해 가서 나눌 수 있는 강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두 구절을 보면 21절은 세상 물질 욕심쟁이로 보여지고, 22절에서는 그렇게 해서 쌓아놓은 것을 빼앗아 나누어 갖는 또는 나누어 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다하는 것을 전제를 하고.

 

23: 예수님과 함께 아니한 자는 전부는 예수님과 반대편에 있는 자로 돼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편이 아니면 전부는 예수님의 대적자가 된다. 크게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 편이고, 안 믿는 사람은 사단 마귀 편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따라간다는 말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따라가고, 사람이 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라고 한다.

 

구원이다하는 기독교에서의 말의 의미가 하나님의 온전성을 떠난, 신령한 성품을 떠난 의미로의 구원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아니다. 육적인 목적으로, 세상적인 목적으로,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지식의 목적으로 구원을 쓴다고 해도 그 목적은 세상에 속한 것이지 신령한 것, 하나님의 의중에 의사성에 적중성에 속한 구원은 아니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다. 주님은 한 분 뿐이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기독자들이 예수이름으로 세상 것을 갖다 달라고 하니 이거는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는 건 아니다. 예수라는 존재는 믿는데 자기 기준에 맞춰진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신념적 신앙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잘 아는 가운데, 그 분의 의중을 잘 아는 가운데 신념적 신앙은 진리지식으로 된 신념적 신앙인데,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안에, 특히 말세 된 오늘날 교인들 거의가 일반사람들이 사고할 수 있는 인본주의 사고방식에 매여진 신념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신앙은 아니다. 인간 자기 주격에서 나온 신앙이다.

 

신앙이라 할 때는 예수님이 하늘로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했으니까 그 천국복음이 사람의 마음 밭에 떨어져서, 생명의 진리씨앗이 떨어져서 그 정신 사상으로 소원 목적으로 나가는 게 신앙이라고 하는 거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세상 것을 예수이름을 이용해서 구하는 신앙이 많다. 흔하다. 어디든지 가서 흔히 듣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예수 편이 아니면 전부는 예수님의 대적자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신 분이 누구며,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면 이 말씀이 마땅히 들리는 것이고 아멘이 된다. 이치가 분명하면 아멘이다. 그런데 이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맞는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통 보면 세상에서 요구하는 자기 소원과 같은 소리를 하니까 아멘을 한다. 이건 옳은 신앙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갖는 욕심과 똑같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예수 믿는 자기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고 있다면 너는 이방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들게 된 원인 동기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즉, 세상 인간 자기를 만들기 전에 영원 궁극적 구원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만들어지는, 그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신령천국에서 영능의 실력대로 누리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으로 실력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구원이고, 신령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그 영능의 실력대로 누리는 것이 구원이다.

 

기독교에서 이 면이 흐려져 있으면 세상을 구하게 돼 있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된다운운하면 그런 데로 찾아가고, 병이 들어 있으면 병 낫게 해 주는 데로 찾아간다.

 

이런 일은 예수님 때도 있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이름으로 병을 고쳐주는 자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그거 못하게 할까요?’ 하니까 그냥 둬라. 예수이름으로 하니까 제자 너희들을 핍박을 안 할 것이다했는데, 그것을 놔두는 것은 오늘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받지 않으면서 육적인 병만 고집하는 자들을 우리에게 보여지게 해서 우리로 구별 분별하게 하려는 건데 오늘날 그게 없다.

 

육신의 병만 고치면 예수가 잘 믿어지겠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영적인 면에서 바로 잡지 못하면 신령한 하나님을 섬기지를 못한다. 육적인 병을 고치면 사람이 육적으로 자꾸 돌아가서 그 면으로 수종들고 그 면으로 나가게 돼 있다. 원리가 그렇다. 원리를 어그러뜨리지 말아라. 안 그렇다는 것은 네 생각이다.

 

원리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법칙도 그렇고. 세상에서는 물질적 이치나 법칙대로 안 되는 게 없다. 법칙을 잘 이용 활용하면 무서운 폭탄도 되고 기계도 된다. 모든 그릇이나 다 물질이치의 법칙으로 되는 것이다. 신앙 면에서도 영적 이치가 있는 것인데 왜 이것을 무시하고 예수를 믿느냐? 그러면 너는 믿음 없다. 믿음이 자라지 않고, 아무리 충성봉사를 하고 목숨을 바친다 할지라도 이용 다 당한다.

 

하나님께서 너를 지은 원인 동기 목적이 1차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2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진리본질로 만들어져 신령천국에 들어가도록 돼 있는데, 이것은 영원 궁극적인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어갈수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게 없다. 그러면 예수학교에 가서 뭘 배운 거냐?

 

우주만물의 창조도 성도들의 영원 궁극적 구원을 위해 쓰임이 되게 지었다. 그래서 만물을 지으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한 것이다. 만물을 만들어 놓으신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에 깨닫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창:에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비유적으로 쓰셨다.

 

이처럼 세상을 구원을 깨닫도록 만물을 만들어 놨고, 이를 위해서 사건 환경을 돌리고 있는데 예수 믿는 자기는 깨닫도록 이치대로 된 게 있느냐? 그냥 배만 부르면 되고 잘만 살면 되는 거냐? 그러니 예수를 믿지만 그런 자기 속의 성격이나 성질이 타락성적인 요소가 잔뜩 들어 있어서 귀신의 장난에 농락을 당하고 있는 데도 그걸 모른다.

 

사람이 귀신들린 것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굶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가 부른데도 무조건 먹고 토하고 또 먹고 토하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안 먹는 사람도 있다. 다이어트도 지혜 있는 사람이 다이어트지 미련한 사람이 다이어트를 하다가는 큰일 난다. 그러니까 인간을 지은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에서 너무 멀리 있다. 예수 믿는 사람도 그런 식으로 믿는구나.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우주만물의 창조도 하셨고, 육해공 동식물을 다 들어 쓴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도 하나님이 만들어 쓴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은 믿는 우리들이니 믿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 들어 쓰신다. 그럼에도 그냥 생활에 안주하고 사니까 그걸 잘 모르는 거다. 그렇게 살다가 무슨 큰 전쟁이나 터지면 하나님, 좀 살려주십시오하겠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인간의 문명의 역사적 진행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진행시키는 것이다. 인간 개개인의 삶도 영원 궁극적 구원이 이뤄지는 삶으로 들어가 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도 먹음으로써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고 성장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도, 진리생명의 말씀을 먹이는 것도 그 면에 성장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살면서 그게 없다면 뭐가 되는 거냐? 세 끼 밥 먹고 세상 만족도로 사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과, 안 믿는 사람들의 삶이 다른 게 뭐냐? 예를 들면 학교에 안 다니고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나, 학교에 다니며 제 멋대로 하며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나 다른 게 뭐냐?

 

인간 개개인의 삶도 영원 궁극적 구원이 이뤄지는 삶이다. 영원 궁극적 구원 안에는 영능의 실력이 들어 있고 누림성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기독교계에서 일반적으로 이런 말을 잘 안 쓴다. ‘예수 믿어 부자 되자. 네 소원이 뭐냐? 구하라. 그러면 이루어진다하는 식의 맨 물질로 가득 찬 소원 목적성이다. 여기엔 물질만 있지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사람이 없다. 영원 궁극적 구원이 이뤄지는 것은 자기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뤄지는 것이 영원 궁극적 구원이다. 현실에서 영원한 것이 자라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하나님의 도덕성이나 하나님이 능력성이 자라야 한다. 자라는 사람은 현실에 살면서도 전부를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 사용이다. 그런데 세상으로 소원 목적이 들어가 있는 사람은 그 물질을 자기 배부른 데 썼으면 썼지, 노후대책에 쓰면 썼지 주님의 일에는 안 쓴다. 그러면 불탈 때 그거 앉고 있어야지.

 

일반적으로 사람이 병이 들어서 죽어 가면 논밭 집도 다 판다. ? 사람을 살리려고. 사람이 그렇게 귀하다. 살릴 수만 있으면 살려야 한다. 젊은 사람이 죽어 가면 부모형제들이 마음과 정신을 다 기울인다. 빗을 내서라도 어떻게 하던 그 젊은이를 살리려고 한다. 그런데 내일 모레 공동묘지에 들어갈 사람이 몸이 아프다고 하면 그렇게 신경이 쓰이느냐? ‘이왕 죽을 거이렇게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나이 드신 분들은 서러워하지 말아라. 하늘나라에 빨리 가는 것이 복이다. 나이 드신 분들이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으면 회개를 하라. 살려주시면 살려주는 거지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 필요가 없다. 왜 죄 많은 세상에서 더 살려고 그 야단이냐? 죽어가는 데도 링겔 꽂고 돈만 자꾸 들어간다. 왜 그런 데는 자꾸 투자하면서 주님의 일에 투자하는 거는 없느냐? 사고방식이 벌써 틀렸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순리대로 돼야 하는데 인위적으로 하니까 큰일이다. 얼마나 부작용이 많은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 네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은 것이 한스럽다면 왜 이룰구원 면에서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안 먹고 마귀가 예수님께 시험을 건 세상을 자랑하는 그 면을 향해서 기도하고 소원하고 왜 그렇게 예수를 믿느냐? 그게 교훈적으로 선악과다. 그거 먹고 믿음이 자란 사람이 있느냐? 신앙양심을 속이면 육신도 끝나는 것이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을 놓고 보면 인류 전체에게 광범위하게 구원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교회적으로 보면 믿는 사람은 천국 간다하는 것은 말은 맞는데 천국에 들어가면 영능의 실력적으로 속성적으로 그 천국을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알맹이가 있어야 되겠는데 그게 없다. 껍데기밖에 없다. 곡식이 껍데기만 있으면 좋으냐? 어시장에서 게를 사도 속이 안 차있고 껍데기밖에 없으면 기분이 나쁘다. 그런 걸 봐서라도 이루구원의 이치에서 인간 자기에게 하나님의 속성이 가득 들어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없다. 껍데기다.

 

사람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인격에 있다. 인격 면에서 결여가 되면 정신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건 일반적인 표현이고, 기독교회에서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속성으로 가득 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고 세상만 가득 들어 있어서 예수 믿어 부자 되고, 예수 믿어 세상에서 어떻고전부가 그런 식이다. 기독교 신문이고 방송이고 전도지고 다 그렇다.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라고 하면서 그 뜻대로를 어디에다 구하는가 하니 사역에서 구한다. 그렇게 되니 이걸 이치적으로 따져보면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이 사역을 못해서, 일손이 모자라서 저를 부른 것이냐? 만능의 능력자 예수님이 전도를 못해서 열두 제자를 불렀느냐? 이렇게 들어가게 된다. 네가 예수란 분을, 기독교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

 

천체의 운행도, 개인적인 종말도, 세계적인 종말도, 하나님의 진노도 재앙도 형벌도 심판도 전부는 인간 너의 영원 궁극적 구원을 위해서이다. 그렇게 설정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그냥 다 사라져 버리는 거다.

 

성경에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떠내려간다고 했느냐, 그대로 있다고 했느냐?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다. 무슨 말이냐? 반석 위란 간단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인데, 좀 더 들어가서 네 신앙 믿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 된 예수로 돼 있느냐? 그걸 말하는 거다. 그런데 그게 안 돼 있다. 그러니까 인생 6, 70100년을 살아도 예수 냄새가 안 난다. 향기가 안 난다. 안 믿는 사람들의 소원 목적을 그대로 따라간 것뿐이지 예수님을 닮은 건 하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때는 성령의 깨달음으로 구원을 이뤄가는 것 즉,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자기가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생활 속에 다 들어 있다. 이 구원을 이뤄가게 하시는 일에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반대자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따른다면 예수처럼 닮아가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 목적이요, 성령님의 소원 목적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 목적인데 이걸 반대를 하며 예수를 따르는 거는 예수님의 반대자이다.

 

:에서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사단이 들어와 있다. 이게 우리에게 계시적으로 보여주는 건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소원 목적이 사단의 마음과 같은 세상을 따르는 자도 있다 그 말이다. 이걸 개체적으로 보면 귀로는 말씀을 듣는데 마음속으로는 세상적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에 육으로 알아듣는다. 예수님께서 내가 말하는 것은 영이니라하니까 육으로 알아듣는 사람은 다 가버렸다. 그러니까 이런 자들은 반대자이다.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음을 모으지 않는 자는 인생 파괴자이다. 자기 파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당연하고 마땅한 말씀이고, 이런 자들에게 이 말씀을 안 하면 안 되는 말씀이다. 꼭 해야 될 말씀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라고 했는데 라는 그 분이 누구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하고 당신 스스로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르는 그 자는 구원이요, 그 성품을 닮아가고 그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하는 이게 구원인데 그게 아니면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 반대자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다.’ 세상에 속한 목사는 이 해석을 어떻게 할까? 종교적 사역과 사업위주로 들어가 있으면서 그런 활동이나 프로그램대로 하는데 거기에 같이 동조를 안 하는 사람을 반대자로 본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성품을 놓고 하는 말이다. 신앙의 적중성을 놓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말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다. 신앙에서는 질이다. ‘예수구원이라 함은 사역의 양이나 사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신령계와 물질계가 다 당신의 것인데 양을 가질 게 뭐가 있겠느냐? 하늘보좌를 버리고 오셨다 함은 당신의 최고의 것을 너에게 주마그런 의미가 들어있다.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상급이다함은 하나님 당신을 아브라함 너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족보적 역사적으로 보면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다. 그건 역사적이지만 너에게 주겠다 그 말이다.

 

자타의 영원 궁극적인 구원에 물질로 시간으로 활동으로 가르침으로 수종들지 않는 자는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요, 주님을 반대하는 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그 대열에서 수종을 들지 않고 충돌 마찰 대립을 일으키고 대적을 하고 대항을 한다. 주님은 그것을 당신의 적으로 간주를 한다. 그러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반대자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자기를 돌아보고 신앙을 점검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모든 언행심사는 인생을 허비하게 만들고 낭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해치는 자는 남도 해치는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그러니까 이건 구원이 안 되는 고집이요 예수님을 못 닮는 고집이다. 고집을 해도 예수님을 닮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닮지 못하는 고집 그거 어디에 쓰겠느냐? 누가 그걸 좋아하겠느냐?

 

그리고 더 나아가서 복음의 일에 방해자나 불순종자도 해치는 자이다. 자타를 해친다.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만 먹는 게 아니라 맛있다고 딴 사람에게도 준다. 딴 사람에게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보겠지만 아니다. 죽는다. 사람을 살리는 면에 사랑이라고 붙이는 거지 왜 죽이는 면에 사랑이라고 붙이느냐? 이치를 모르면 그렇게 된다.

 

자타의 영원 궁극적인 구원이 좋아서 배우고 따르고 소원이 되고 대화하고 같이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일반적인 태도로 나오는 모든 언행심사는 아무리 성경얘기라고 할지라도 해치는 일일 수도 있다. 중단해야 한다. 개인하고 교회 회중하고 차이가 있다. 성장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지혜롭게 해야 한다.

 

24-26: 선악과 먹은 사람의 성격과 성질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귀신이 하는 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악과 따먹은 직후부터는 긍정적인 하나님의 통치는 없고 부정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들어간다. 그렇게 되니 마귀 제 마음대로 하더라. 선악과를 따먹어 놓으니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사망 아래 놓여져 있으니까 죄와 사망이 마음대로 인간 자기 속에서 부린다. 그래서 원망 불평도 나오고, 성격도 꼬부라져 있고, 꺾어져 있고, 휘어져 있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그냥 성질을 내고 한다. 그건 참 자기가 아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그런 자기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랬는고하는 게 많다. 지나고 나면 후회될 일이 많다. 그런데 그 때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을 한다면 그게 참 자기인 것으로 알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깨닫기 전에는 그 당장에는 잘 모른다. 자기 성격 성질이 귀신과 관계가 있는지를 잘 모른다.

 

예수 믿기 전에 자기 신수를 점을 쳐서 알아보려고 점쟁이에게 가고 토정비결도 보고 했느냐? 그렇게 하는 건 귀신들린 것이다. 내가 그런 곳에 가서 좋은 소리를 듣겠다는 것은 귀신들린 것이다. 질은 똑같은 것이다. 나타나는 면만 강약이 다르다 뿐이지 질은 똑같다. 꽃향기와 고무가 타는 냄새는 질이 다른 것처럼 모든 면에서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생길까?’ 하고 성경을 척 펼 때 눈에 딱 보이는 구절이 있어서 그 구절로 그 날을 점을 치는 것은 무당 점쟁이와 똑같은 질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예언하고 방언하고 안수하는 데로 가게 된다. 질이 같기 때문에 잡아당기는 고로 그리로 가게 돼 있다. 그렇게 안 되고 하나님 쪽으로 질이 바로 들어가도록 가르치는 게 설교고 성경의 가르침이다.

 

원어상으로 보면 성령이나 귀신이나 비슷하고, 귀신들린 마음이나 비슷하게 쓰여져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령 받았네. 어쩌고하는 걸 구별 분별을 해야 한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은 그게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그냥 졸아버린다. 그건 악령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성격이 고쳐졌느냐? 성질이 고쳐졌느냐? 소원 목적이 고쳐졌느냐? 고쳐진 건 아무 것도 없다.

 

귀신이 들리는 것과, 자기 성격 성질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온전을 향한 성격 성질로 고치지 않는 한 문제가 심각하다. 인간을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 나를 전문적으로 완전히 아시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니까.

 

사람의 말이면서 귀신의 말이 있고, 귀신의 말이면서 사람의 말이 있다. 분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귀신들린 기도는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끊어져 있다. 구하는 것은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한다. 그건 귀신들린 기도다. 그래서 귀신들린 자가 예수이름을 불러놓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는 거다.

 

예수님은 귀신과는 관계가 없지만 사람과는 관계가 있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들은, 특히 기독교 안에서 귀신이 들린 성격 성질을 보면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이 없다. 인격적 관계가 없는 기도를 한다. 사람이 되어지는 기도는 하나도 없다. 무슨 일을 하는데 충성봉사를 열심히 하는 그 쪽으로만 들어 있지 깨달아져서 그 마음중심이 주님을 향해 가는 성격 성질은 없다.

 

구약성경에 보면 선지자들이 내 말이다하면서 뒤에 가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다하기도 하고, ‘이거는 여호와의 말씀이다하고서는 뒤에 가서는 내 말이다하기도 했다. 어째서 그런 거냐? 본질이 같지 않으면 아니다. 성도들 속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상화 인격화 돼 있으면 그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이면서 내 말이고, 내 말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런데 세상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말은 아무리 성경구절을 붙여서 말을 해도 그건 네 말이다. 소원 목적이 땅의 것이기 때문이다. 땅에 붙은 소원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속한 말을 하는 것은 아무리 성경을 들어서 말을 해도 그것은 네 말이다. 이런 말은 귀신의 말이면서 마귀의 말이면서 네 말이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는 그 귀신이 물이 없는 곳을 찾아서 쉬려고 한다. 물도 물 나름이다. 더러운 물이 있으면 거기에는 모기떼가 잘 찾아간다. 깨끗한 물에는 안 찾아간다. 물이 더러워지면 여러 가지 벌레가 쓸기 시작한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사람들은 물이 오염됐다고 하면서 그 물을 먹으면 육신이 병들까 싶어서 생수다. 청수다하면서 물을 좋은 물을 사 먹는데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연구하고 참신한 것을 먹어야 하겠는데 왜 구정물을 먹으면서도 그걸 모르느냐? 충성봉사를 하면 복을 받느냐? 예수를 안 믿어도 복 받은 사람이 많은데? 복이란 말이 뭐냐? :에도 있지만 복이란 물질이 아닌 사람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귀신은 물이 없는 곳을 찾아가서 쉬려고 한다는 이 말씀을 안 해 주셨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인간은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쉬기도 하고 먹기고 하고 씻기도 한다. 그런데 귀신들은 물이 없는 곳을 찾아가서 쉰다고 한다. 그러니까 물을 준비해야 하겠는데 좋은 물을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를 찾아가더라도 진리이치의 생명수가 없는 곳은 절대로 가지 말 것이다.

 

:에서 교회를 여자로 비유를 한다. 광야로 가면 여자가 많다. 즉 교회가 많다. 그런데 해를 입은 여자가 있고, 이건 참 교회다. 그리고 짐승을 깔고 앉은 여자, 산을 깔고 앉은 여자, 물을 타고 앉은 여자가 있다. 이게 다 교회를 말한다. 교회란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처럼 여러 형태의 교회가 있음을 말씀을 했는데 왜 분별을 못하느냐?

 

일반적으로 학교도 강남이니 강북이니 한다. 또 자기 병이 나으려고 전문 의사를 찾는다. 그런데 교회를 왜 자기 발바닥의 때처럼 여기느냐? 자기의 영원한 존귀 영광성도 현실의 삶도 성경 속에서 나와야 한다. 너에게는 인간 너를 지으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들어 있는 건데 예수를 믿어도 그 원인 동기 목적이 없이 사는구나.

 

죽으면 천국 간다? 기독교 기본교리로 그걸 전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천국에 못 갈까봐 예수를 믿는 거냐? 그건 아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주권과 독권에 들어있는 거고, 예수를 믿는다면 그 예수를 닮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도소를 생각할 수 있는데, 젊은 사람이 왜 죄를 지어서 교도소에 들어간 것이냐? 누구 생각대로 죄를 지은 거냐? 자기 생각대로다. 그렇다면 교육면에서 부모가 생각을 해야 한다. 실수든 고의든 교육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식이 그렇게 돌아가면 부모가 교육을 생각을 해야 하겠는데 안 그렇더라. 그런 식으로 살다가 죄를 지어서 교도소는 불어나더라도 여전히 잘 먹고 잘 살아야지한다. 자꾸 물질적인 면으로 치닫는다. 그러니 이게 어찌 되겠느냐?

 

일반 이치적으로 보더라도 사람의 교육이 문제다. 공부만 잘하면 사람이 바로 될 것 같으냐? 아니다. 사람이 바로 되는 것은 성경이다. 예수를 믿어도 성경을 모르면 너는 불탈 사람, 심판 받을 사람으로 놓여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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