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궁극이 | 2021.10.19 13:31:0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11:5-13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115-13: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5-8: 과연 인간들 중에 이런 친구가 있을까? 친구가 찾아올까봐 안에서 문도 걸어놓고 신발도 감추고 쥐 죽은 듯이 고요하게 있는 경우가 있다.

 

친구, 벗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벗이 되겠느냐? 생각도 같고, 마음도 같고, 취미도 같고, 소원도 같고, 목적도 같고, 의사성이 잘 통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기 일처럼 돌보는 친구가 된다. 친구를 사겨도 이런 친구를 사겨라. 생각도 다르고 목적도 다른데도 제 눈에 보기 좋다고 해서 친구를 삼는 건 안 된다. 고통이 된다.

 

나그네로 같이 가려면 의사성이 같아야 한다. 서로가 의사성이 다른데도 같이 가게 되면 그런 지옥이 없고 그런 고역이 없고 그런 고통이 없다. 나그네 길을 같이 가려고 한다면, 한 무리로서 같이 간다고 하면 의사성이 같아야 한다. 안 그러면 그 속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세상이란 다 같을 수는 없으나 그러나 옳은 쪽으로 가는 면에서 성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립적인 성격을 띤 반대는 같이 있을 수는 없다. 이건 떨어져 나가든지 해야 한다. 고통이다. 가정에서도 부부가 의사대립이 되면 고통이다. 싸우면서 어떻게 구원을 이루느냐?

 

그리고 소원 목적이 같다고 해도 말하자면 두 목사가 한 교회에서 일하기는 힘들다. 각자 의견에 좋은 대로 일을 하는 게 옳다. 그리고 장사를 해도 한 형제끼리 동업은 정말 힘들다. 정말 예수님의 마음 같지 않으면 힘들다.

 

혹 나보다 먼저 결혼한 친구가 있으면 이제는 그 친구의 가정을 생각을 해줘야 한다. 옛날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 결혼을 안 했을 때처럼 결혼한 친구와 밤늦게까지 밖에서 논다든지 밖에서 불러내면 안 된다.

 

본문을 보면 서로 친한 친구 세 사람이 등장한다. 떡 있는 친구를 1, 중간에서 떡을 얻어가는 친구를 2, 여행 중에 밤에 찾아온 친구는 3번이라 할 때 이 세 사람은 좋은 친구사이다. 이 친구 사이에서 3번의 친구가 여행 중에 한 밤중에 배가 고파서 2번의 집으로 갔다. 2번이 3번을 보니까 며칠을 못 먹었는지 허기진 상태다. 말하자면 곧 쓰러질 것 같은, 넘어지면 못 일어날 것 같다. 그런데 2번 친구가 먹을 것이 없어서 줄 수가 없다.

 

그렇지만 3번의 친구가 허기가 져서 곧 쓰러질 것 같기 때문에 2번의 친구는 그냥 자자할 수도 없다. ‘내일 두 그릇을 주마할 수 없다. ‘내가 떡이 있는 1번 친구의 집의 약도를 그려줄 테니 찾아가 봐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러다간 저 친구가 굶어주겠구나. 내가 1번 친구 집에 갔다 와야지한다.

 

이런 친구가 있다면 아름다운 마음이다. 사람의 상태를 봐서 내가 갖다 와야지하며 다른 사람의 불편한 점을 볼 줄 안다는 것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볼 수 있는 사람이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자기가 어려울 때 남의 도움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자기가 일어나서 내가 갔다 와야지하는 자원적인 게 있어야 한다. 명령이 아닌 자원적으로 나오는 게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편하고 늘 기쁘고 복을 갖고 다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물질이 없어도 자기의 언행심사로써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이 풍부한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갔다 와야지하면서 2번이 1번의 집으로 쏜살같이 달린다. 그 친구의 집이 가깝게 있다면 좋겠지만 산을 넘고 강을 건넌다면 생각을 해 봐라. 날씨가 좋아도 밤중에 갔다 오기가 힘든 건데 만일 번개치고 비바람 부는 밤이라면?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보면 2번의 친구가 배고픈 친구를 생각해서라도 간다. 눈이 오더라도 간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간다.

 

이런 친구가 세상에 있을까? 자기 친구 중에 이런 친구가 있느냐? 친구를 사겨도 이런 친구를 사겨야지 돈이 있을 때는 친구라고 하고, 자기가 병이 들면 찾아오지도 않고 이런 친구는 친구도 아니다. 전쟁 중에 친구를 구하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는 친구도 있다. 세상에서는 주로 자기 이해타산으로 사는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참 아름답다.

 

2번 친구가 1번 친구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3번 친구의 사정을 말한다. 그 안에서 그 사정을 듣는 1번 친구의 입장에서 배가 고파서 지쳐있는 3번이 오지 않고 2번이 대신 온다는 그 마음을 헤아리면 2번 친구의 그 마음이 고맙다. 그러니 1번 친구가 안에서 그 사정을 듣고 내일 줄 테니 내일 다시 와라할 수가 있겠느냐?

 

만일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어른도 놀라고 아이들도 놀라서 아이가 일어나서 울고, 여자소리도 날카롭게 들리고, 남자의 큰소리도 들리고, 그 차에 무엇을 던지는지 그릇이 깨지는 소리도 들리는 등 밤중에 난리가 난 것처럼 되어버리면 떡을 얻으러 간 친구의 마음이 어떨까? 되돌아오면서 1번 친구와 다시 친구를 하고 싶을까?

 

억수 비가 오는데도 2번의 친구로부터 3번 친구의 사정을 듣고 보니 3번 친구가 상황이 급박한 것을 알고 얼른 부엌에 가서 떡 세 덩이를 가지고 와서 또 무엇이 필요하냐고 한다면 이런 친구는 평생 못 잊을 것이다.

 

왜 떡이 세 덩이일까? 아침에 한 덩어리, 점심에 한 덩어리, 저녁에 한 덩어리일까? 어쨌든 떡이 세 덩이면 아침 점심 저녁, 1일의 양식이다. 일용할 양식이면서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양식이다. 먹지 못하면 죽는다.

 

밤중이란 양식을 구할 수 없는 시간대이듯이 시대적 영적 면으로 보면 진리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없는 환난의 밤을 말한다. 어디를 가든 생명양식을 얻기가 힘든 때이다.

 

성경에 저녁 때 벳새다 광야에서 모이는 걸 시간이 저녁때로만 보면 안 된다. 계시적으로 시대적으로 어두워져 가는 그 때를 영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천기의 변화는 볼 줄 알면서 왜 시대적 징조는 모르느냐?’ 그러니까 영적으로라야 알아볼 수 있는 것, 특히 진리이치를 깨닫는 사람은 당장 알아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문화 문명적으로 찬란한 꽃을 피우면 이것은 해가 중천에 뜬 것과 같은 거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만 보면 안 된다. 영육을 가진 인간이 육적으로 뭔가가 활발하게 팽창이 되면 그 안에서 무엇이 기준이 돼서 팽창이 되고 있는지? 세상 이성적으로 팽창이 돼 있는 건지, 영적인 면이 주격이 돼서 팽창이 되고 있는지? 이걸 못 보면 이게 천국인가하다가 심판에 들어가게 된다.

 

자기로부터 좋은 것이 발단이 돼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자기로부터 뭔가가 부정적으로 돼 나간다면 심판이요 앙화다. 무서운 거다. 자기가 그렇게 함으로 해서 세상이 소돔 고모라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성경을 먼저 깨닫는 사람이 얘기를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구나해야지 개인감정으로 듣는다면 앙화다. 우리 기독자들은 의의 옳은 행실을 입어야 하는데, 그게 사람들에게 보여져서 감동으로 품행적으로 들어가게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닌 본능적으로만 들어가게 하면 안 된다.

 

자기 마음이 비뚤어지면 모든 면에서 병적인 상태로 되어 들어간다. 몸의 어느 하나가 아프면 그 하나만이 아니다. 하나가 아프면 온 몸에 연관이 돼 들어간다. 이게 자꾸 누적이 돼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환난의 밤, 생명의 양식을 얻기 힘든 때, 이런 시대를 감지할 줄 아는 신앙이 옳은 신앙이다.

 

한 밤중에 나그네 친구가 생명의 양식을 구하러 왔지만 자기에게는 없고, 또 주지 못하는 그 사실을 통감하고 양식이 있는 1번의 친구에 뛰어가서 그 사실을 말할 때 그것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그 어려움 들어준 1번 친구.

 

그런데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주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끈질기게 물고 들어지는 성격을 말하는 것일까? 두 번째는 벗이 아니더라도 그 강청함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주었다는 것일까? 두 번째라면 그게 왜 당연한 것이냐?

 

이 생명의 떡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인성장을 위해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먹어야 할 양식이다. 환난의 밤이라도 생명의 양식은 먹어야 한다. 먹지 못하면 그 믿음은 죽는다. 그러니까 만일 이 생명의 양식을 구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구가 아니더라도 워낙 강청을 하면 준다는 말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함의 당연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어른의 옆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면 그 아이가 내 집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일으켜 세워보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인간이 살 때 당연한 것은 해야 한다. 거기에는 이유를 달 것이 없다. 쓸데없는 일을 하면서 이유를 거는 것보다 당연한 것은 하라. 그러니까 당연한 일을 해놓고 칭찬받을 필요도 없는 거다.

 

이 떡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부터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신령한 생명의 양식을 말한다. 그래서 그 간절함이란 끈질긴 근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적 하나님의 본질의 양식에 대한 간절성을 말한다. ‘친구이기 때문에 봐줘라그게 아니라 영적 양식은 기본적으로 해야 하고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뿌리치면 안 된다.

 

9-10: ‘구하라. 그러면 주신다.’ 주신다고 하는 이 분이 누구며, 무엇을 구해야 준다고 하는 건지? 누구들을 보고 이 말씀을 하시는 건지? ‘구하라이 말씀을 남녀노소 빈부귀천 아무나보고 하셨다면 각 사람마다 네가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은 아무 거나 다 구하라이렇게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방인에게가 아닌 제자들에게 했다.

 

만일 가룟유다에게 일대 일로 너 뭘 갖고 싶으냐?’ 하고 묻는다면 가룟유다는 뭐가 필요하다고 할까? 돈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현대식 가룟유다가 많다. 예배당을 짓다가 돈이 없어서 중단이 되었으면 주님이 그 목사에게 너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겠느냐? 돈이다. 건물을 장만해서 개척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너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역시 돈이다. 주님이 모두 본인들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느냐? 대답하는 그게 자기의 믿음이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되겠느냐? 제일 좋은 것은 주님 당신이 알리이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내 속이 어떤지를 더 잘 아시니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염두에 두고 구하라하심인가? 그냥 막연히 말씀하심인가? 제자들에게 걸맞게 당신의 제자답게 만들어 주시려고 최고의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그냥 각자가 원하는 대로 주고 싶어서 하신 말씀인가?

 

내 쪽에서 아무리 최고의 것을 달라고 해도 주님은 더 잘 아신다. ‘내가 최고의 것을 구하고 싶어도 지금 내 신앙 믿음 차원에서 그걸 구하면 안 되겠다하는 것이 있고, 또 어느 정도 철이 들었다면 그 구함이 고상해야 할 텐데 하나님, 나 돈 100원만 주세요한다면 이게 되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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