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네가 바로 그 여자다

허태수 목사 | 2012.12.16 23:57:2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4:16-24
설교자
허태수 목사
참고
2011.8.28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네가 바로 그 여자다.  
요4:16-24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의 증오의 역사는 뿌리가 깊습니다. 열하17:24절 이하에 보면, 사마리아 지역은 인종이 다양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 다섯 남편은 그들이 섬긴 신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은 다양한 신들을 섬겼습니다. 주전 722년에 북방의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정복자 앗시리아는 많은 이스라엘인을 그 지역에서 내 쫓았습니다. 그 대신 다양한 인종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혼합주민이 된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이 자기들의 신을 섬기면서도 야웨 예배를 받아 들였습니다. 남쪽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의 이런 종교적 행태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5경 즉 율법서 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시편 등을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거부하고 그림신 산에 따로 성전을 세웠습니다. 주전 120년대에 그 성소마저 유대인과 요하네스 힐카누스가 파괴하였기 때문에 두 백성들 사이의 적대감은 심화되어 갔습니다. 사마리아인이란 말 자체가 욕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유대인에게 금기된)의 살을 먹는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가 수가성 우물가에서 대화는  예사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전후 문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는 물로 시작해서 예수가 생명수를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여인의 과거의 삶이 들추어지고, 이어서 예배문제가 논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인은 예수와의 대화에서 귀가 솔깃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가 주신다는 물이 ‘다시 목마르지 않고 계속 솟아나는 샘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시어 여기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가 하시는 말씀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요3장에서 이스라엘 선생이요 의회원인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증생重生)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겨우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정도로 생각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예수는 갑자기 여인의 아픈 곳을 찌릅니다. 남편을 데려 오라는 것이었죠.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의 수치가 폭로되자 재빨리 말머리를 다른 주제로 돌리는 기민함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도덕적인 주제를 이제 종교적 주제로 바꿔서 예배 처소를 쟁점화 합니다. “우리 사마리아인 조상들은 그림신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네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이다.” 사마리아인들이 오랫동안 예배드린 곳이 그림신 산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진입하여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 바로 이 산이었습니다(신 27:4절은 에발산이라 하지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산이었으며,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곳도 거기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림산 산은 성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림신 산이 하나님 예배 처소라는 것을 부정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 22절에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왜냐면 바울이 말했듯이 인류 구원사에서 보면 첫째는 유대인이고, 그 다음이 이방인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림신 산과 마찬가지로 이 예루살렘도 예배처소 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말하자면 그림신 산이냐 아니면 예루살렘이냐는 논쟁에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던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지만, 요한복음이 기록될 때는 예루살렘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 첩 놓이지 않고 파괴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 공동체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은 의미가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요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있지도 않는 예루살렘 성전예배를 여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은 다윗 왕조 이래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으며 초대교회의 발전은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가 기자는 예루살렘 지향적인 복음서를 쓰고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사마리아, 유대와 땅 끝까지(행 1: 8) 이르는 초대교회사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은 예루살렘을 비하했습니다. 마가에게는 예수를 처형한 곳이 예루살렘이오, 예수를 죽일 음모세력의 집결지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가에게서 갈릴리는 예수의 활동무대였으며 민중은 그를 따르고 환호한 땅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땅 갈릴리를 복음의 전진기지로 삼아 갈릴리 지향적 복음서를 쓴 것입니다. 4복음서 중에서 제일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유대인과 집요하게 맞서시는 예수 상을 전해 줍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유대인과 적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공생애가 끝나는 수난 주간 벽두에 성전정화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의 공생애 초반에 성정정화를 하신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요한의 예수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은 일찍부터 정화대상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본문에서 예수가 예배처소로서 예루살렘을 거부하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죠.

그림신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소도 아니라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요? 예수는 예배드릴 장소로서 그림산 성소도 예루살렘 성전도 거부하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를 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다.”라고 말입니다. 진짜 예배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하는 예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주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은 이 가르침을 주요 내용으로 언급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셨듯이 우리의 기도는 골방에서 은밀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금식을 하되 마치 금식하지 않는 자처럼 해야 합니다. 구제를 하되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 사람들을 더 의식하고 기도합니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종교적 몸짓을 합니다. 마틴 루터는 진노하는 하나님 앞에서 번민하고 전율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노하는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기피합니다. 그런 하나님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들기에 찾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자비로운 하나님에 다가섭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모세는 호렙산에서 활활 타는 불길 속에서 야웨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 아니라 무서운 하나님, 전율케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어라“는 말씀에 모세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런 하나님 경험으로 모세는 에집트의 바로와 맞섰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동굴에 숨었다가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역시 자비의 하나님 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의 호렙산 경험을 흠모하거나 세미한 하나님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신앙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속에는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고 그 전능한 행위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와 함께 두려워 떠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체험은 항상 자애로운 어머니의 손길을 넘어서서 불같이 무서운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내가 예배하는 분이 어떤 하나님인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는 매 순간 ‘나는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두렵고(여기서 두려움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경외로 인해)전율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건성건성 딴전을 부리며, 다른 욕망을 꿈꾸며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전율케 하는 분이고,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 안에 계시며 만유를 통해서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어떻게 성의 없는, 집중하지 않는 예배를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예배처소가 쟁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전통적인 의전절차를 따라서, 말하자면 외형적이고 의식적인 절차에 따라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의식적 절차로 세련된 예배가 진행된다고 해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종교적 유희에 불과할 것입니다. 미가 예언자이 말씀대로 물량적 제사만 있고 정의 실천이 없는 예배(미가 6:7-8)가 참 예배가 아니듯이, 하나님이 자비하듯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말씀을 살아내지 못하는 예배도 참 예배는 아닙니다.

영으로 혹은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니고데모는 영생을 소망했습니다. 그는 진리의 탐구자였습니다. 그래서 야밤에 랍비 예수를 찾았습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분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가 들은 예수의 말씀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생한다는 것(born again)은 새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랍어 아노센(anothen)은 위로부터 나야 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5절에서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고 합니다. 매우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아래의 차원으로부터 신령한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중생의 차원으로 우리를 불러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1단에서 2단으로 불려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생을 거듭하는 한 주간의 삶의 절정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보세요, 하나님! 며칠 동안 저 이만큼 달라졌죠?”하고 내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차원에서, 평범한 의식구조에서, 문득 전체를 의식하며, 순수의식으로부터 진리의 빛에 노출되어, 잠자던 상태의 영성이 각성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매우 소유욕구적 존재요, 탐욕의 존재로서 살아 왔음을 참회하는 순간, 참으로 그러할 때 우리는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근원에서 다시 보고 하찮은 일에 매달렸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겉으로 태연하지만 실상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자기존재를 순화하려는 몸짓이 영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진리는 일반적으로 사실에 일치하는 것, 거짓이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그리스도교적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적 계시’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그 자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순간이요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그 예수님이 길이요 빛이요 생명이며 진리라는 것을 깔고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예배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진리이신 예수에게 소급되는 것일 뿐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나 사건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신실함 그리고 진리이신 그리스도’에 당도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배를 통해서 내가 바라는 뭔가를 얻어내려는 것이나, 내가 기대하지 않는 것 이상의 어떤 욕망을 충족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찾는 예배하는 자’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드리는 예배의 진위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림신 산이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 예수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우리가 지금 진실로 예수 안에 있는가? 이걸 물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취향과 사상과 희망에 부응하는 예수만을 찾고 모시고 섬기고 때로는 모른 체 하는 게 아닌지 물어야 하는 겁니다. 예배에는 오로지 예수만 만나고, 그 예수를 계시로 드러내는 하나님 앞에서 내 존재가 전율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예배가 이렇지 못하다면 오늘날 내가 그 때 그 수가성의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 다섯인 그 여인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하시는 생생한 말씀입니다.

“나는 여태 하나님께만 신령과 진실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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