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 가장 위대한 고백

김필곤 목사 | 2010.09.11 22:33:4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막8:27-29
설교자
김필곤 목사
참고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2007년 8월 5일/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우리 교회 주보를 보면 3면 맨 위에 매주 마다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아름다운 사회]라는 말이 쓰여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그래서 주보에도 이 목적에 맞추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열린 가정]난에 매주 유익한 정보를 올려놓습니다. 아마 10년 동안 이 난을 꾸준히 읽으신 분은 가정에 대하여 대학에서 전공한 자 못지 않은 상당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회, 감동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매주 [열린 이야기]란에 가슴 찡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올려놓습니다. 매주 읽어보신 분들은 쉽게 읽어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늘 세상에 시달린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지난 주 주보에 나온 열린 이야기 ‘만 원짜리 수술’을 읽고 진한 감동을 느낀 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안면 장애 성형 수술 분야에서 독보적 실력을 갖춘 한성익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서울대를 나와 치과와 성형외과 의사 면허를 받고 일본과 독일에서 7년 동안 공부하여 이 분야에 최고 의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암이 걸려 얼굴이 망가진 사람, 선천적인 기형이나 교통사고로 귀가 없는 사람, 누군가 뿌린 황산으로 얼굴 화상을 입고 입술마저 붙어버린 사람 등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얼굴이 망가져 절망가운데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한 달에 한 명씩 1만원의 수술비를 받고 수술을 해 주신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 방안에 갇혀 희망도 미래도 잃어버린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존심을 살려 주기 위해 1만원의 수술비를 받고 수술을 해 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수술을 받은 사람이 49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그분은 희망의 등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베푸는 삶을 사는 밑바탕에는 아버지의 신앙이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동대문 운동장을 설계한 건축가로서 독실한 신자였는데 “자신은 굶더라도 남을 돕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신앙을 이어 받았답니다. 그는 현재의 삶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참 잘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할 줄 아는 게 안면 장애인을 고쳐주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봉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한 평범한 인간의 삶을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아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라고, 메시아라고 믿고 살기 때문입니다. 진솔하고 정직한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직한 신앙 고백을 하게 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구주로 고백하게 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면서 상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이 정직하고 신실하다면 인생이 어떻게 됩니까? 사랑을 고백한 그 남자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남자가 아닙니다. 그 남자의 사회적 지위과 물질적 부요, 가정이 전에는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사랑 고백을 하고 결혼을 하면 전혀 달라집니다. 사랑을 고백한 그 여자는 그 때부터 평범한 여자가 아닙니다. 상대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상대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며 상대의 삶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상대의 희망이 내 희망이 되고 상대의 관심이 내 관심이 됩니다. 상대를 위해 살게 됩니다. 상대의 부모가 내 부모가 되고, 상대의 형제가 내 형제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고백이란 단순한 것 같지만 이렇게 인생을 바꾸어 놓아 버립니다.

1. 세상 사람들의 고백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마을로 들어 가셨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빌립이 황제 디베료 가이사와 자기 자신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곳은 각종 우상 숭배의 도시입니다. 오랜 전에는 바알의 도시였습니다. 농사의 신, 풍요의 신, 음란한 신 바알을 숭배하던 도시였습니다. 언덕 꼭대기에 큰 동굴에서 그리이스의 자연의 신인 Pan이 출생했다고 당시 사람들은 믿었다고 합니다. 당시 세계의 지배자이며 신과 같이 간주되었던 가이사의 신성을 위해 세워진 흰 대리석의 찬란한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주민들 대부분 이방인이고 헬라와 로마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종교적 집합지입니다. 풍요와 물질 생산의 신을 섬기는 곳입니다. 돈이 판을 치고 몸이 판을 치고 힘이 판을 치는 곳입니다.
그런 화려한 도시에서 초라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각종 우상으로 가득한 이 도시에서 예수님은 길을 가시면서 물어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예수님은 물질과 우상, 쾌락이 판을 치는 이 세상 길에서 우리에게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얼 짱, 돈 짱, 몸 짱들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물어 보는 것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십자가는 그야 말로 초라하고 관심에서 제외되어 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이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 중간 고사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였습니다.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귀머거리를 고쳐 주었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친히 목격하였습니다. 이제 이 사실을 친히 목격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의 견해를 물어 보는 것입니다. 황제를 섬기고 풍요와 물질과 쾌락을 섬기는 거리를 거닐면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십자가 사역을 앞에 놓고 여론 조사를 먼저 하는 것입니다. 여론이 중요합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지지하면 졸지에 대통령이 됩니다. 수와 인기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여론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론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여론을 무시하고 거역하고 생각하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말4:5),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의 하나입니다.”라고 말한다고 당시 여론을 전해 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헤롯이 자신의 부정을 책망한 세례 요한을 죽였는데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헤롯이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두려워했습니다(막6:14) 자신의 한 때 충격적인 사건에 집착하면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고 세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 과거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과거 자신의 죄악 때문에 예수님을 바르게 볼 수 없었습니다.
대중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나 선지자 또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였습니다(6:15).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목격했지만 아직 들을 귀가 없고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은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천지를 개벽하는 것같은 기적이 일어나도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메시아가 아니고 메시아의 전령 정도로 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말 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라고 말씀하였는데 바로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고 메시아가 오기 전에 오실 엘리야로 이해한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신 18:15)”라고 했는데 바로 그 선지자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 하에 살고 있었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은 가난과 질병으로 정치적 폭력 앞에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시대 때 나라의 독립을 기다리는 것처럼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다윗 시대처럼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참으로 자유롭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윗의 가계에서 정의와 권력을 가지고 그들을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 왕이 일어나는 날을 꿈꾸어 왔습니다(사9:7; 11:1 렘22:4, 23:5, 30:9). 바로 이 분이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열 지파는 앗시리아에 끌려가서 영원히 잃어 버렸습니다. 두 지파는 바벨론에 의해 정복되고 파괴되었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페르시아가 그들의 지배자가 되었고 다시 희랍 사람들이 그리고 로마 사람들이 그들을 지배해 버렸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원수들을 완전히 소멸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새 예루살렘에 모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팔레스틴은 세계의 중심이 되고 전 세계는 그들에게 복종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후 평화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힘없는 자, 병든 자를 고쳐 주기는 하지만 권력 앞에 무기력하고 원수를 소멸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저마다 이런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돈을 메시아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을 메시아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을 메시아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가정을 행복하게 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

2. 가장 위대한 고백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어 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 문에 베드로가 기막힌 대답을 합니다. 중간 고사에 100점을 맞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고백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백입니다. 가장 위대한 발견입니다. 세상 그 어떤 발견보다 가장 위대한 발견입니다. 인류를 변화시킨 위대한 발견입니다.

1)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당시 주는 가이사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이사가 주가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 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배자가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지배자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 내 가정의 주인,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싶어하고 자신이 모든 것은 판단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나의 판단자이고 우리 주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2)우리 주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라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 시킬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낼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여자의 후손에서 태어날 것(창3:15)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창22:18), 유다 지파(창49:10), 다윗의 자손(삼하7:12-13)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해 주었습니다. 선지자(신18:15)로, 제사장(시110:4)으로, 왕으로(스가랴9:9) 탄생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싹으로(사4:2) 의로운 가지로(렘23:5, 33:15) 순으로(슥3:8, 6:12) 임마누엘(사7:14, 8:10) 하나님으로, 한 아기(사9:6)로, 의의 왕(사32:1-8)으로, 이방의 빛(사49:1-7)으로,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사52:13-53:12)으로 오실 것을 예언해 주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인간의 죽음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의 잃어버린 에덴에서 범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우리의 왕적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권한을 주고 영원한 복을 주시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창1:28에서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만물 지배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나무를 섬기고, 돌을 섬기고, 동물을 섬기고, 물질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만 섬기며 그것들을 다스리도록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눅 9:1)"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1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예수님은 우리의 대 제사장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참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메시아 밖에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히 9:11)...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선지자로써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길을 제시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3)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사대 성인 정도가 아닙니다. 역사를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라틴어 우리 주님의 시대에 라는 뜻)로 나누는 정도의 슈퍼스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수님을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한다고 참람죄를 저질렀다고 했습니다(요10:33) 예수님의 가족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미쳤다고 했습니다.(요7:5,막3:21)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혁명적인 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고백을 하면 참람죄로 처형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참으로 위대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고백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주시오, 메시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돈이 최고가 된 직장에서 만약 이 고백을 하면 승진에 지장이 있고 불이익이 온다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텔레반에게 억류된 우리의 믿음의 형제들처럼 죽음의 위기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초라하게 보이고 화려하고 거대한 과학 문명 앞에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교회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불신 친구들 앞에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삶의 현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은혜로 할 수 있는 고백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습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위대한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알게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깨닫게 했다는 말입니다. 은혜로 고백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롬 10:10)”데 우리 하나님께서 마음으로 믿게 만들고 입으로 시인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대단한 것 같지만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 몸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직하게 자신을 살펴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을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믿게 해주시고 시인할 수 있도록 해 주셔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겠습니까? 어떻게 모세가 홍해를 가릅니까? 어떻게 불이 하늘에서 떨어집니까?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합니까?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유추원리, 비평의 원리, 원인과 결과의 원리에 의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성경 고린도 전서 12장 3절을 찾아보세요.
고린도전서 12:3에서 그는 "아무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을 통하여 믿어지게 하고 시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4. 위대한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
이 위대한 신앙 고백 위에 주님께서는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교회는 바른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는 어디에 세우신다고 하였습니까? 반석 위에 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질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견고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이 신앙 고백에 근거해야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비바람이 몰아 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 (엡2:22, 신4:10, 출5:1, 신31:30),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엡 1:22-23), 교회를 다스리시는 성령 (행 20:28)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만든 이익 단체도 아니고 우연히 발생한 사교 모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히8:5),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마16:16-18),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고전3:16-17)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교회를 가리키어 하나님의 집(딤전3:15)이라고 했고, 그리스도의 몸(엡1:23), 성령의 전(엡2:21) 하늘의 예루살렘(히12:22,계21:2)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엡2:20-22) 이 교회에 참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한(고후11:2) 영적인 한 가족으로 이 교회를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계2:16,고전3:17)

이 고백 위에 교회를 세워 가는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다.(17)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음부의 권세는 죽음의 권세, 긍극적으로는 사탄의 권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 위해 세워진 교회라면 절대로 사탄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교회에 천국 열쇠를 줄 것을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기도의 권세, 전도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감당합니다. 세상 어느 기관도 이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공동체들 가운데 교회만큼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미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 앞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정직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2007년 8월 5일/열린교회/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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