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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이 잉태하매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세기 궁극이............... 조회 수 148 추천 수 0 2019.10.16 16:2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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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6:1-6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토요 성경공부 

(창세기 槪觀)

 

161-6.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성경은 비유요 비사다. 무엇에 대한 비유요 비사냐?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와서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해 주는 거다.

 

사래가 생산치 못한 것은 연령적으로 보면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편에서 보면 생산 불가능이다. 그런데 여종 하갈은 젊다. 이 하갈은 애굽사람이다. 따라서 애굽사람 속에 천국사상이 들었겠느냐, 애굽사상이 들었겠느냐? 애굽사상, 세상사상이다. 인간적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쪽이 생산성이 높으냐? 하갈 쪽이다. 세상사람들이 보통 아는 지식이 바로 이렇다. 하갈은 아브람의 집에서 자란 여종인데, 하갈이 아브람의 집에 있으면서 본질적 신앙으로 얼마나 감염이 되었을까?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인간적으로 보면 젊었을 때 아이를 못 낳았고, 이제 나이가 더 많이 들었기 때문에 영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거다.

 

이런 사래가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생산을 허락지 않았다고 하며 아브람에게 하갈에게 들어가서 자녀를 얻자고 했는데, 사래의 이 말이 일반개념의 생산일까, 이룰구원으로 보는 신앙적 의미의 생산일까? 일반개념이다. 일반개념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지고 와서 아무리 성경구절을 붙여 말을 해도 이건 일반개념이다. 계시개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개념이 아니다.

 

사래는 일반개념의 자녀생산으로 아브람에게 하갈에게 들어가라고 한 거고, 하갈에게 들어간 아브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온 믿음인데도 지금 이 면에서는 일반개념으로 들어있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는 것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일반개념에서 벗어나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게 하려는 것인데 이로부터 한참 세월이 흘렀는데도 일반개념을 벗어나지 못했구나.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예수 믿은 지 꽤 오래 되었는데 일반개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있느냐? 그냥 많지이렇게 말할 게 아니라 아직까지 자기 속에 일반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신이 어떤 것인지 신앙으로 구체적으로 답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은 아브람에게 일반생각으로는 되지 않는 특별한 것을 주실 게 있어서 불러내려고 하신 말씀인데, 여러분들에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사람은 아브람에게 주신 것과 같은 것을 자기에게도 주심을 알아야 한다.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하갈을 주겠다고 한 것은 사래 속에 하갈의 사상이 들어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들이 없는 아브람이 젊은 여자를 첩으로 취했는데, 이러면 아브람이 나이 많은 사래와 젊은 하갈 중에 누구에게로 더 자주 들어갈까? 하갈 쪽으로 자주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기독자들 속에 일반적인 사고방식의 정신이 들어있으면 매사에 일반사람들의 이해타산을 따라 살게 되는 거다. ‘안 그렇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는 거다. ‘아이고 이건 신앙이 아닌데라고 하면서 그렇게 한다는 게 아니라 말로는 믿음으로 한다고 하면서 합리화 시키며 그렇게 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개념을 따라 살면 안 믿는 사람들도 호응을 하고 좋아한다. 매사에 이해타산 평가를 하나님 쪽으로 내리고 믿음을 따라 하는 것을 안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 이해를 못한다. 바로 믿는 사람도 밥 먹고 일하고 사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보일지라도 그러나 목적적인 면은 안 믿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다.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동침을 하였더니라고 하는 것은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안 믿는 이방인들의 사고방식과 사상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이게 동침이다. 예수 믿는 사람의 신앙의 이해타산이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이건 세상과 동침이다. 그리고 동침한 후에는 아기가 나오듯이 반드시 결과가 나온다.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몸과 마음과 뜻이 하갈과 하나가 되니 잉태가 됐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하갈이 얼마 못 가서 아기를 밴 걸 알게 되니까 여주인을 멸시한다. 이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본주의 신앙으로 교회가 부흥 발전을 하면 여기에는 반드시 아브라함의 약속이 들어있는 신앙성을 무시하게 되어있다 것을 보여준다. ‘안 한다가 아니라 원리적으로 무시하게 되어있다.

 

그러면 이 무시성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을 기준 삼아서 그렇지 못한 사람을 향해 너는 신앙이 있네. 없네하는 말을 하게 된다. 눈에 보여지고 손에 잡혀지는 것을 가지고 이걸 기준 삼아서 그렇지 못한 사람을 향해 신앙이 있네. 없네하게 되어있다. 교인들이 여기에 거의가 속는다.

 

속사람이 변화된 것은 잘 안 나타난다. 속사람은 변화가 됐는데 세상 물질성에 풍부하지 못하면 속사람이 변화된 것을 사람들이 알지를 못한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서는 좋은 생각과 바른 말이 나온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런 것에 마음을 두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여지는 것에 마음이 많이 동요가 된다. 외모 외형 활동을 기준으로 해서 신앙이 있네. 없네한다. 이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거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금방 달라지고 변질될 것을 기준으로 삼고 사는 거다.

 

우리가 살면서 보면 일반적으로 고생을 많이 하고 살면서 나이가 든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부잣집에서 고생도 안 하고 자란 새파란 사람이 말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나오는 말이 전혀 다르다. 고생을 많이 하고 나이가 든 사람의 말은 젊은 사람들이 듣고 배울 게 많은데 젊은 사람일수록 인생을 많이 경험한 사람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여러분들의 자녀는 어떠냐? 예수를 믿으면서 구별 분별을 빨리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이건 일반개념이구나. 이건 특수개념이구나이 판단이 빨리 난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았다면 사래가 하는 말을 들어야 했을까, 안 들어야 했을까? 들으면 안 된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한 말이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서 선악과를 같이 따먹은 것과 뭐가 다르냐? 모양새만 달랐다 뿐이지 둘 다 일반개념의 눈으로 보고 판단을 해서 행한 거다. 그러니까 하갈과 아브람도 선악과를 따먹은 거다.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먹어버린 거다. 이게 선악과다.

 

이걸 말로 들으면 이해를 하겠는데 문제는 지금의 여러분들이 실제생활에서 어떻게 하느냐? 이게 중요하다. 말씀으로 사상화 인격화가 안 되면 자기 역시도 현재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 조차 모른다. 못 깨달으면 죽을 때가지 모르는 거다.

 

:에 불못에 들어가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불못에 들어갈 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몰랐다는 게 맞느냐? 그런 지경에 처해져도 몰랐다. 그러면 불못 속에 들어가면 알겠느냐? 들어가기 전까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 통 몰랐는데 불속에 들어가 보니 아이고, 하나님의 뜻이 그렇구나하고 깨달아질까? 안 깨달아진다.

 

좀 더 보면 예수님을 안 믿는 부모들이, 또는 이웃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따라 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까, 모를까? 모른다. 죽어도 모른다. 고난 고통을 당해도 모른다. 고난 고통을 당해도 모르는 이것을 영적인 면에서 좋게 말하면 둔감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재앙을 받을 작정을 하고 산 거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 조차 모르는 거다. 이런 답답한 노릇이 어디 있느냐? 건강한 사람은 오각의 오감성이 굉장히 예민하고 빠르다. 그리고 빠른 만큼 빠른 행동이 나오는 거고, 반대로 무디면 무딘 만큼 행동이 느리게 나오는 거다.

 

동침을 했더니 하갈이 잉태를 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게 용납이 안 되는 거다. 이를테면 남자든 여자든 한 부부는 한 사상으로 결합인데 요즘은 마음대로 동침을 한다. 이건 칼부림 날 일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도 당신의 자녀들에게 엄청난 시기 질투를 하신다. 그러니까 믿는 우리가 세상을 취해서 돌아가는 것은, 세상과 동침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다.

 

어쨌든 동침을 하게 되면 잉태가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동침이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을 취하는 걸 말하는 것이니 동침을 하게 되면 반드시 잉태가 된다. 동침을 한 표시가 나는 거다. 원칙을 말하는 거다. 성도로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얼마나 빗나간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시기 질투를 하신다는 표현을 하셨겠느냐? 이건 엄청난 거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런 죄를 짓고도 덤덤하다.

 

하갈이 왜 여주인을 멸시한 거냐? 여주인이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브닌나도 한나를 멸시했다. 여주인을 멸시하는 이걸 이룰구원 면에서 사상적으로 보면 타락된 교회 역시 그렇다. 무슨 말이냐? 자기 교회는 교인이 많다고 교인이 적은 교회를 무시하고 멸시한다. 그러나 타락된 교회는 아무리 교인이 많아도 그 사상이 계:의 음행으로 된 자녀들이다. 이런 자녀는 아무리 많아도 불쏘시개 감이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여주인을 멸시하게 되어있다. 약속이 있는 자녀를 멸시하게 되어있다.

 

약속의 말씀을 따라가는 진리의 교회가 속화된 교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다면 그런가 보다하겠는데 그들과 똑같이 세상에 속한 작은 교회를 왜 멸시하는 거냐? 교인이 적은 교회의 목사는 세상말로 하면 사람을 모으는 재간이 없다는 거다. 그러면 이런 멸시를 받는 목사는 어떻게 하겠느냐? 교인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재간을 쓰는 거다. 재간을 쓰려면 교회가 부흥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을 찾아다니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해야 한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신앙 사상적으로 진리본질이 아니면 이질적인 교회인데, 이질적인 교회는 창녀는 돈만 주면 아무에게나 자기 몸을 맡기듯이 건물 크게 짓게 되고 돈이 많이 들어온다고 하면 그 어떤 세상적인 방법도 다 쓰는 거다. 이건 교회라는 본질을 모른 채 표면적으로 부흥 발전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보는 거다.

 

거짓 종들은 교인이 줄어들면 아무래도 헌금이 덜 들어오니 어떻게 먹고 사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사상 자체가 자기가 거짓 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다. 그래서 목회를 할 사람은 목회 전에 사건적으로 고생을 해야 한다. 고생이라는 시험을 쳐야 한다. 이건 기본적이다. 일반세상도 밑바닥에서 발발 기는 고생을 하며 일어나야 이 사람의 정신이 깡아리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어려워지면 못 살겠네하며 자기 스스로 시험에 빠진다.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하지 않고 편히 산 사람이 목회를 하겠다고 하면 그 전에 교회에서 자원해서 여러 가지 봉사를 하며 자기를 닦아야 한다. 여기에서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해도 그걸 헤쳐 나갈 수 있는 기질이 생기는 거다. 이런 것도 없이 자라날 때부터 큰 고생도 없이 자라서 목회를 하겠다고 하면 아찔한 거다.

 

하갈의 사상을 가진 자는 반드시 여주인을 멸시하게 되는 건데, 가령 하갈의 멸시로 인해 사래가 속이 썩어서 집을 나가버린다면 이제는 하갈이 안주인이 되는 건데, 이렇게 된다고 하면 후에 사래로부터 신앙의 자녀 이삭이 왔는데, 이 하갈의 자식으로부터 아삭에게 되어진 역사가 전개가 되겠느냐, 그걸로 끝나겠느냐? 애굽 출신 하갈로부터 자식에게 바른 신앙의 교육이 되겠느냐?

 

이게 우리에게 뭘 보여주는 거냐? 이런 걸 우리가 모르면 하나님의 뜻을 모를 수밖에 없는 거다. 하나님이 안 가르쳐 주고 당신의 옳은 종들이 안 가르쳐 주면 알 수 없는 거다.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거다. 우리가 이런 걸 보면서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 어떤 사상을 가지고 걸어왔구나할 때 내가 성경대로 살았다면 큰 은혜를 받는 거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스마엘과 같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자기 가슴을 쳐야 한다. 믿는 우리는 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 원수를 갚아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원수가 누구냐? 다 자기 자신이다. 육의 생각으로 산 자기를 죽여야 한다.

 

하갈이 종의 입장에서 여주인의 덕으로 주인의 아기를 가졌으면 여주인에게 겸손할 법도 한데, 그리고 여주인을 더 받들고 감사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더라. 이게 뭘 가르쳐 주느냐? 하갈은 반드시 여주인을 무시하게 되어있다. 원리가 그런 거다.

 

하갈은 애굽여자인데, 신앙적으로 볼 때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옛사람 애굽성에서 믿음이 생겼다면 이건 육의 믿음성인데, 육의 믿음성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약속 있는 여주인을 무시하게 되어있다. 돌려서 말하면 성도가 하나님의 미래적 약속, 생명적 자녀를 못 보면, 가지지 못하면 애굽성의 성도로부터 무시를 당하게 되어있다.

 

자식이 있는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를 무시했다. 육의 교회는 자손들이 많다. 교인들이 많다. 그러나 이 자손은 약속 있는 자녀가 아니다. 그런데도 약속의 자녀를 무시한다. 참 약속 있는 자녀는 잘 안 보인다. 왜냐? 하나님의 약속이 이 사람의 이룰구원 속에서 역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 약속 있는 자녀는 숫자적으로도 많이 안 보이는 거다. 표면적 액면적 껍데기만 보는 눈은 이걸 보는 눈이 없이 때문에 무시하게 되는 거다.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누가 잘못한 것 같으냐? 남편이냐, 아내냐?

 

사래의 이 말도 선악과를 먹고 나온 말인데, 에덴동산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하와에게 먼저 물었느냐, 아담에게 먼저 물었느냐? 아담에게다. 그런데 하와가 아담의 책임이라고 했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사래 자기가 멸시를 받는 것이 남편의 책임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아브람이 하갈을 달라고 한 게 아니라 사래 자기가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놓고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아브람이 하갈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사래가 그 말을 하니까 아브람이 속으로 옳다라고 하면서 하갈을 취한 건 아닐까? 어쨌든 아브람의 입장에서 자식은 없지, 아내는 늙어가지, 그래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사래가 절대로 자식을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젊은 하갈에게 들어갔을 거다.

 

사래가 나의 받는 치욕을 당신이 받아라라고 하면서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자기의 여종을 자기가 아브람 품에 준 것인데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도 했다.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사래가 잉태했다고 나를 멸시하니 그 책임이 아브람에게 있다고 하실 것을 여호와께서 판단하기를 원한다이 말이다.

 

여러분들은 이 말이 이해가 되느냐? 하나님께서는 이걸 어떻게 판단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누구의 판단이 옳다고 하시겠느냐? 이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래는 자기가 멸시당하는 책임을 아브람에게 돌리고 있다. 에덴동산에서도 그랬다. 선악과를 따먹기는 하와가 먼저 따먹었고, 아담도 하와가 주는 것을 먹었는데 아담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렸느냐? 하와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사래 자기가 말한 대로 아브람이 하갈을 취한 것인데 아브람에게도 탓을 돌리고 있다. 우리가 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느냐? 이걸 넓혀서 생각을 하면 사래의 말인즉 자기가 아브람에게 시집을 와서 다 늙기까지 아기를 낳지 못했는데, 아기가 생기지 않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는 거냐? 아브람에게 있다는 거다. 아브람을 향해서 내가 하갈에게 이런 멸시를 당하지 않도록 진작 나에게 아기를 줬어야지이 말이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아기가 있고 없고 하는 것이 아브람의 책임이라는 거다.

 

아기가 생기고 안 생기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누구의 책임이냐? 하나님의 책임이다. 하나님에게 달려있다. 그러면 하갈이 아기를 낳은 것이 하나님께서 다른 일들을 하다 보니 내가 너무 오랫동안 깜빡 잊었네하고서 사래에게 아기를 낳게 하려고 하니 사래는 이미 너무 늙어서 할 수 없이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서 아기를 낳도록 하신 거냐? 그러니까 아기가 생기고 안 생기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건데 사래가 왜 이런 생각을 할까?

 

사래가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는 말은 남편이 아들을 낳게 하지 않아서 자기가 아들을 얻으려고 아브람에게 하갈을 주어서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아들을 낳은 하갈이 자기를 멸시한 책임이 아브람에게 있다는 말이다. 즉 사래의 말인즉 자기가 아브람에게 하갈을 줘서 하갈이 아들을 낳았고, 이로 인해 사래 자기가 멸시를 당하게 된 것이, 즉 아들을 낳고 안 낳고 하는 것이 아브람 탓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확정해 달라는 거다. 아기를 주고 안 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아브람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계시적으로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아기가 생기는 것이 그냥 저절로 생기는 거냐? 하나님의 계획 하에 되는 거다. 구원문제를 놓고 볼 때도 아기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섭리가 들어있는 거다. 왜 그런가 하니 여기서 하갈을 통해 아들이 태어난 것을 볼 때도 여기에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깨달음이 되는 신앙의 이치와 도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래가 아들을 낳으려고 하갈을 아브람에게 준 것이나,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에게 들어간 것이 둘 다 내가 인본주의를 써야지라고 하면서 그렇게 한 거냐? 그건 아니다. 당시의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믿음의 후손을 생각하면서 그런 방법을 썼던 거다.

 

우리가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그렇게 한 번 인본주의를 쓴 것이 그 후대로 내려오면서 지금까지, 그리고 세상 마지막까지 골치 아픈 일들이 연속된다는 것을 알았겠느냐? 그 이전에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올 때 하갈을 데리고 온 결과가 세상 마지막 날까지 골치 아픈 일들이 연속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겠느냐?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이런 결과가 온 것이 물론 사래도 인본주의를 쓴 거지만 아브람 역시 아내의 말을 듣고 인본주의로 행한 결과로 이런 결과가 온 거다. 하나님의 뜻을 물리친 결과가 이렇게 된 거다.

 

아브람의 말인즉 그대의 결정대로 해서 그대가 하갈로부터 멸시를 당했으니 그 원인자인 그대의 마음대로 하라는 거다. 그러나 아브람의 입장에서 엄밀히 말하면 아무리 사래가 하갈에게 들어가라고 했을지라도 그것을 실행한 자는 아브라함 본인이다. 따라서 그로 인한 고통은 아브람이 다 당할 수밖에 없는 거다. 이로 인해 결국 하갈이 도망을 갔다.

 

오늘날 우리도 사래와 아브람처럼 알지 못해서 잘못하는 게 많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 ‘믿사오니, 하나님의 뜻이니하면서도 알지 못해서 잘못하는 게 너무나도 많다. 믿어나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점점 깨달으면서 말씀의 뜻대로 만들어져 나간다면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이게 없다면 믿으나 마나다. 예수 믿는 효력이 뭐냐?

 

결국 하갈은 도망을 갔는데, 이런 상황에서 도망을 안 가고 배기겠느냐? 하갈은 여주인 앞에 보이면 안 되는 거다. 도망을 가야 한다. 신앙적으로 보면 인본주의 사고방식은 신앙 앞에서 도망가야 하느냐, 나타나서 대들어야 하는 거냐? 도망가야 한다. 나타나서 잘했네, 잘못했네. 당신에게 책임이 있네, 없네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니까 하갈이 도망을 간 것은 잘 한 거다. 안 그러면 여주인이 죽을 때까지 나 죽었소하고 가만있든지. 그러나 자기 속에 세상적인 요소로 된 것이 들어있다면 이로 인해 언젠가는 말썽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는 자기가 자기 속에 넣어두었던 것이 일으키는 말썽인데 누구 탓을 하겠느냐?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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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3 다니엘 전쟁 같은 기도 file [1] 단10:18-19  이익환 목사  2020-01-29 462
16522 다니엘 하나님의 기쁨 file 단9:23  이익환 목사  2020-01-29 371
16521 다니엘 작은 순교 (A Small Martyrdom) file 단6:10  이익환 목사  2020-01-29 276
16520 다니엘 운명의 방향 file 단5:25-28  이익환 목사  2020-01-29 358
16519 다니엘 참된 경외 단4:34  이익환 목사  2020-01-29 209
16518 다니엘 자기 존재감의 기초 file 단3:17-18  이익환 목사  2020-01-29 270
16517 다니엘 제국과 하나님 나라 file 단2:44-45  이익환 목사  2020-01-29 247
16516 누가복음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2) 눅6:1-5  김경형목사  2020-01-28 106
16515 마가복음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1) 눅6:1-5  김경형목사  2020-01-28 168
16514 마가복음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려라 막11:1-10  김기성 목사  2020-01-27 270
16513 요한계시 거룩하게 하라 계 22:11  강종수목사  2020-01-26 145
16512 이사야 큰 빛을 보리라 사9:1-4  강승호목사  2020-01-24 291
16511 잠언 집을 세우는 신앙 잠14;1-4  전원주목사  2020-01-23 520
16510 사도행전 사명감당 하렵니다 행26:1-12  김기성 목사  2020-01-23 361
16509 고린도후 새로운 시선으로 성서를 본다는 것 고후6:2  허태수 목사  2020-01-22 196
16508 에배소서 잘 가 개(犬)그리고 환영 해(亥) 엡4:21-24  허태수 목사  2020-01-22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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