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고린도후 › 고난의 길은 영광으로 통한다

조용기 목사 | 2009.07.11 17:27:4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고후4:17~18
설교자
조용기 목사
참고
2005년 6월 19일 주일2부설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고난의 길은 영광으로 통한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고난은 인생을 깊이 있게 하고 똑같이 고난 당하는 이웃을 가슴으로 깊이 동정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뿐 아니라 고난은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발생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만들어냅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들도 고난 당하게 되면 진지하고 뜨겁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하게 되며 믿음이 향상되고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영광은 고난의 도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본론]

1. 구약시대의 도전과 하나님의 영광

첫째로, 구약에서의 고난의 도전과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많이 볼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을 떠나 그들이 홍해가에 왔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300만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가에 왔는데 앞에는 창열한 바다가 막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마음을 바꾸어서 전군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포로로 잡기 위해서 질풍노도같이 뒤를 쫓아 왔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샌드위치가 되었습니다. 앞에는 홍해수요, 뒤에는 애굽군대인 것입니다. 그들은 절망에 처했습니다. 온 백성들이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그들은 절대절망의 상황에 처하여 모세에게 원망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로 11절에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그들은 살길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모두다 대량학살을 당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난에 하나 다른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면 절망할 수 있지만은 이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같이 계신 백성인 것입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여 좌절과 절망만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이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백성들은 다 원망하고 불평했지만은 그중에 지도자된 모세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엎드려 부르짖어 기도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어떠한 고난에도 그곳에 하나님이 플러스가 되면은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일어날 때 부르짖어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지만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부르짖지도 아니하고 부르짖지도 아니하면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난 다음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로 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고난이 없었으면 야웨 하나님이 나타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역사도 창조되지 않습니다. 고난이 있기 때문에 고난의 문제를 해결할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영광의 역사가 창조해낸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홍해수를 갈라 놓는 전대미문의 기적을 행했던 것입니다. 들어본적이 없는 위대한 기적인 것입니다. 바다가 갈라지다니 웬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가고 뒤를 따라 온 애굽군대 위에는 물이 덮쳐서 다 물에 빠져 죽고만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도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었으면 이런 영광의 기록은 성경에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은 괴로운 것이지만 그러나 영광을 가져오는 길이 되기도 한것입니다. 그들이 광야로 들어가서 사흘길을 걸어갔는데 물이 없어요. 또 고난에 처했습니다. 태양은 내리쬐이지요. 사막길은 뜨겁지요. 온몸의 수분은 다 증발되어 목이 타고 입술이 부르텄습니다. 그들은 물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러던중 연못물을 발견했는데 뛰어가서 마셔보니 물이 써서 마실수가 없습니다. 설상가상입니다. 고난이 다가왔는데 물을 발견했으나 물은 써서 마실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좌절과 절망에 처했습니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쳤습니다. 몸부림을 쳤습니다. “모세야 물을 달라~ 물을 달라!” 고난이 다가왔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놀라운 기회가 다가온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어려움을 당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2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하나님은 이미 그 고난이 다가오고 모세가 기도할 것을 알고서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 쓴 연못물 곁에 나무가지가 있어서 나무가지를 꺽어 던지니 물이 중화가 되어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쓴물이 있으면 물을 달게 하는 나무가지도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의 해답을 언제나 우리곁에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아니하면 해답도 안나타내 주시지만 부르짖으면 문제의 해답을 발견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해답도 멀리있지 않는 것입니다. 또 문제가 있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광은 고난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 들어왔을 때 정말 어려운 고통에 처했습니다. 300만명이 갑자기 애굽에서 떠나왔는데 먹을 양식을 준비하지 않고 왔습니다. 양식을 준비한들 300만이 메뚜기처럼 먹어 치우는데 그 양식을 다 어떻게 감당합니까? 그들은 광야에서 이제 굶어죽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 2절로 3절에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먹을 것이 없으니 굶어 죽을 수밖에 없지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300만명을 어떻게 삼시 세때를 배불리 먹일 수가 있겠습니까? 가장 절망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절망은 하나님이 나타날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일에는 하나님이 나타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이 할수 없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을 찾으니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에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역사상에 체험하지 못한 위대한 기적인 만나가 내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양식을 구하지 못하고 절망에 처하는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답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만나가 임한 것입니다. 그들이 한때는 또 고기를 달라고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어서 비와같이 메추라기가 그들 진에 떨어지게 하므로 그들이 배불리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신명기 8장 15절로 16절에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주님의 뜻은 우리가 고난당하여 파멸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고 연단받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하므로 주의 영광을 나타내어서 마침내 고난이 변하여 복이 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고난이 복이 되지 않습니다. 고난이 화가 되고 멸망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고난이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고난을 통하여 연단을 받아 우리가 변화받고 믿음이 강해지고 더 옛날보다 나아질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이 지금 북한으로 말미암아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지만 한국의 교회들이 일어나서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이 역사적인 고난을 오히려 변화시켜 우리 한국에 더 큰 유익이 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 플러스 성도의 기도는 언제나 유익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때에 기도하지 않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해 버리면 고난은 파멸하는 무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무덤이 되느냐 영광이 되느냐 하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도들은 기도하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조성하신 하나님이 고난을 쉽게 변화시켜 영광으로 만들어 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신약시대의 도전과 하나님의 영광

둘째로, 신약시대의 도전과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오셔서 하늘나라를 전파하실 때도 고난이 바로 신약성경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기록하게 만든 것입니다. 고난이 없었으면 주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구주가 되시고 우리 가운데 계셔서 능력을 나타내신 증거는 바로 고난을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제자들과 함께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한참 혼인잔치가 무르익어 갈쯤에 그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포도주가 잔치의 주음식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는 낭패에 이르고 신혼부부는 아주 곤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서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에 처했을 때 주님이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사람으로써는 그 많은 손님이 다가오고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갑자기 포도주를 구할 수도 없고 절망에 처했지만은 주님은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적을 요한복음 2장 7절로 8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 걸레통, 손발 씻는 물통 여섯 개가 있었는데 물통에 물을 가득히 채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순종해서 물을 가득히 채운즉 주님께서 물을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한즉 갖다주니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아주 질 좋은 맛있는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처음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1절에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고난이 다가오니 영광도 다가오지요. 어려움이 다가오니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지요. 여러분 영광을 체험하고 싶으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난의 깊은 산골짜기에 떨어지면 영광의 높은 산꼭대기도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을 피하면 영광도 다가오지 않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영광은 고난을 통해서 나타나며 고난은 영광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사로의 죽음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거대한 비극이었습니다. 조실부모하고 오라버니 나사로를 의지하고 사는 베다니의 가난한 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들은 형제간에 너무나 오순도순 잘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를 사랑하셔서 예루살렘에 오시면 저녁에는 베다니로 와서 그 집에서 머물고 그 가족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에 멀리 계실 때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자매가 오빠가 병들매 예수님께 빨리 서신을 띄웠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으니 빨리 와서 고쳐주시라고··· 그러나 예수님은 그 편지를 받고도 오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죽었고 무덤에 들어 간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지 않으셨습니까? 나사로가 죽는 그 처절한 절망이 와야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증명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는 사람이 있어야 살리는 기적을 나타낼 수 있지 잘 살아있으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 기적을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죽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죽은 사람이 있어야 예수님이 부활시키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영광으로 통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죽은지 나흘이 되는 나사로의 무덤가에 서셔서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주님 이미 오라버니가 무덤에 들어가서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사람에게는 썩은 냄새가 나니 이제는 끝났습니다만 하나님에게는 죽은지 하루되나 이틀되나 사흘되나 나흘되나 천년이 되나 만년이 되나 관계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말한마디면 무슨 일이든지 생겨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사로가 죽어서 나흘이 되어 무덤에 들어가서 썩은 냄새가 나도록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말 한마디 하시매 나사로는 살아서 싱싱하게 일어나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보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때 일어나라고 말하면 주안에서 죽은 자가 수 천 년 된 무덤에서도 일어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어떤 죽은 사람도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모신 사람에게 죽음은 하나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기회가 되는 것이지 절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절대절망인 죽음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마귀와 세상을 그 몸에 담당하시고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제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그들의 소망이 다 끝나고 좌절과 절망만 다가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그 밑에서 도박을 했습니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교인들은 축배를 올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좌절과 절망하여 모두다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간지 3일 만에 무덤 문을 헤치고 부활에서 일어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으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었냐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죽었기 때문에 그 죽음을 통해서 죄를 대속하시고 마귀와 세상을 이기시고 질병과 저주를 극복하시고 영원한 멸망과 지옥을 극복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승리의 주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승리를 증명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도 있고 죽는 자가 있어야 사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이요, 생명이 되어서 이제는 영원토록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쥘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로 57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사망도 이기고 무덤도 이기고 영원한 천국의 영광으로 가슴이 가득 차게 된 것은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고 승리의 씨앗이 되어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죽음의 고통은 영광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사망의 절망이 부활의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7절로 18절에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공자는 좋은 종교를 주었습니다. 석가모니도 좋은 종교를 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죽고 난 다음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명의 대왕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일 부활하지 못했으면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훌륭한 철학을 줄 수 있고 훌륭한 교훈을 줄 수 있고 훌륭한 종교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망의 벽에 부딪혀서 산산조각이 날 수 밖에 없을 때 그 죽음을 극복하고 일어나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단지 우리 철학자요, 종교가요, 교훈자가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요,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고난은 영광을 가져오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크고 작은 고난이 다가오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고난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이를 통하여 우에게 더 나은 승리의 삶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3. 우리의 삶의 도전과 하나님의 영광

셋째로, 우리의 삶의 도전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을 우리가 알아봐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사람은 고난을 당해요. 고난 안 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큰 고난당하는 사람, 적은 고난당하는 사람마다 차별은 있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은 고난을 당합니다.
욥기 5장 7절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불을 때면 불티가 하늘로 올라감같이 인생은 태어난 사람은 다 고난을 당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또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게 하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호세아 5장 15절로 6장 1절에 보면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렇게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등이 따뜻하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외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할때는 우리에게 얼굴을 돌이키고 우리를 광야로 던져 버리면 그 고난 중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고난을 알고 계실까요?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고통당하는 것을 누가 알아주랴? 하나님도 몰라줄 것이다. 내가 외친들 하나님이 누가 알고서 응답해 주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알아야 될 것은 우리의 머리털수도 다 하나님은 헤아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크고 작은 것을 모두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27절로 31절에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사정을 모른다. 나의 슬픔과 고통은 하나님께 감춰져있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두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웨를 앙망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이 많이 쉬었잖아요. 이번 집회에 얼마나 더운지 화로통 같았습니다. 그런데 비가오니 습기가 차서 온몸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릅니다. 그리고 또 바람은 얼마나 부는지 운동장에서 바람을 하도 마셔서 목이 다 쉬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안타깝잖아요. 3년동안 홍콩에는 부흥회가 없었습니다. 이제 홍콩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려고 하는데 마침 우기라서 비가 얼마나 줄기차게 오는지 말도 다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은 이 사정 알까? 하루 종일 방안에 엎드려서 기도만 하고 하나님이 이 사정을 알까? 이 집회는 하나님 집회인데 나 혼자만 답답하게 하느냐? 하나님, 이 사정을 알고 주님이 이 비를 중지해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난 다음에 제가 기도를 하고 창문을 여는데 아직 비가 내리고 있어요. 집회 시간은 다가오는데 그런데 내가 속으로 ‘하나님이 사정도 모르신다. 나 혼자만 답답하게 여긴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독수리 두 마리가 날라 오더니만 내 앞에서 호텔 앞에서 빙빙 돌면서 자꾸 높은 하늘로 올라가요. 아주 새까맣게 구름 속으로 감춰져서 올라가요. 그런데 성령께서 내속에 말씀하기를 ‘독수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 봤지? 저기압일 때는 독수리가 하늘로 날라 올라가지 아니한다. 고기압이 오면 상승하는 기류를 따라서 그 독수리가 자꾸 올라가기 때문에 내가 바람을 보내어서 이미 고기압을 만들어서 저기압 구름이 떠나가게 만들어 놓았다.’ 야~ 하나님의 응답이 독수리를 통해서 오는 것 내가 처음 봤어요. 완전히 마음이 저기압이 되어 있는데 내 마음이 독수리를 보고 고기압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독수리가 절대로 구름이 내려앉고 저기압이 될 때는 상승하는 기류가 없기 때문에 하늘로 안 올라간다. 그런데 방금 비가 오는데도 독수리 두 마리가 자꾸 내 앞 호텔에서 날라서 하늘 끝까지 올라간다. 왜 홍콩시내에 갑자기 독수리 두 마리가 나타납니까? 그리고 다른 데로 올라가지 않고 내 눈앞에서 올라갑니까? 하나님께서 ‘네 사정 내가 안다. 봐라! 고기압이 된다. 저기압은 사라지고 기압이 하늘로 상승하기 때문에 구름이 높이 뜨게 되고 비는 안 온다.’ 그런데 아닌게 아니라 집회전까지 오던 비가 집회장소에 들어가니까 비가 그쳤습니다. 이게 큰 기적이었습니다. 다른 병 낫는 기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튿날 저녁에도 한가지입니다. 차타고 바로 집회장소로 가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요. 그래서 ‘아이고 하나님! 어제는 비가 안 왔는데 집회장소로 들어가는데 왜 비가 옵니까?’ 마음속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연 에어컨디션이다. 비가 안 오면 오늘 더워서 설교 못한다. 시원한 비가 한줄기 쏟아져야 된다.’ 아닌게 아니라 비가 안 오면 더워서 설교 못해요. 너무 더워서. 그런데 비가 오면 싹 오고 나니까 시원하지요. 앉아 있는 사람이 다 자연비를 맞고서 시원해졌는데 그 다음 강단에 올라가니 바람이 부는데 몇 개 안남은 내 머리털이 바람에 다 날렸어요. 시원하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바람을 많이 마셔서 저의 목은 쉬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사정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실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고 일어서고 앉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늘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실 줄 주님이 다 알고 계세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 광야에 갔는데 남자만 5천명, 여자가 기만명이 함께 모여왔습니다. 말씀을 듣고 해거름이 되니까 그들이 다 배가 고파 절절 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절로 6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우리가 문제를 당할 때는 주님이 어떻게 해결할지 알고 계십니다. 어떻게 해결할지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네가 진짜로 믿느냐, 안 믿느냐, 진짜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느냐 아니냐 진짜로 하나님이 간섭해 줄 것을 기대하냐 안하느냐?’ 주님께서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빌립은 낙제했지요. “주님 이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돈이 필요한데 우리에게는 그런 돈이 없습니다. 광야입니다. 시간도 늦었고 떡살 곳도 없습니다. 못 먹입니다.” 빌립은 낙제했지요. 그러나 안드레는 광야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바라보고 그는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꿈을 가지고 기대했기 때문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구해서 예수님께 가져오시니 예수님이 기쁘게 축복하사 이를 나누어 주니 그 모든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12바구니를 남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실지를 미리 알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을 모든 문제에 부딪혔을 때 주님은 어떻게 하실 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여러분 사정을 다 알고 어떻게 하실 줄 알고 계시지만 여러분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믿어주기를 고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꿈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기적을 기대하고 나오기를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문제를 당했을 때 이미 해결방책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 연못물에 이스라엘 백성이 갔었을 때 연못물만 쓴 것이 아니라 주님은 이미 물을 달게 한 나무도 그 옆에 놓아서 기다리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눈에 안보였지요. 그러나 기도하니까 모세의 눈을 열어서 그 나무가지를 보여 주시고 나무가지를 꺽어 물에 던졌지 않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면 쓴물밖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그 좌절과 절망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보고 꿈을 가지고 믿고 기도하면 해답도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답없이 문제를 우리에게 보내지 않습니다. 문제가 오면 해답도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맡기고 문제가 생길 때는 우리가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고난은 영광으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 고난을 통할 때는 영광이 오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가 영광이 오는 파이프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5절로 6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이 오면 피할 길도 하나님이 예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험만 오면 우리가 시험에 빠져 절망하고 말지요. 그러나 기도하면 피할 길도 주님이 눈에 보여주게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허디슨 테일러라는 영국의 유명한 선교사가 중국 내륙에 들어가서 양주에서 선교사역을 할 때의 일입니다. 양주에서 선교사역을 할 때의 일입니다. 선교사들이 일요선교를 열심히 하자 예수님을 반대하는 양주의 학자들과 일부 군인들이 선교사에 대한 나쁜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에는 선교사들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알을 도려내고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으며 아이밴 여자의 배를 갈라서 그것으로 약을 만든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분노해서 폭도로 변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돌에 맞고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소식은 영국에까지 전해져 급기야 국가간의 문제로 발전했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영국에서는 허드슨 테일러가 이끄는 중국내륙선교회가 군함을 앞세우는 선교회로 알려져 선교후원금 마저 대폭 줄었습니다. 이제 200여명이 넘는 선교사를 가진 선교회는 재정적인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서 영국이 선교사를 파송한 이래로 최대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사람들에게 구차한 변명을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가서 문을 닫고 엎드려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중대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사람으로 해결 할 수 없지만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는 줄 압니다. 주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옵소서’절대절명의 위기에서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아들의 아버지인 죠지뮬러 목사님으로부터 2천 파운드의 수표와 함께 격려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은 죠지뮬러 목사를 통해서 2천 파운드의 어마어마한 금액을 보내고 그리고 격려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영국에서는 얼마 있지 않자 오해가 풀려 이전보다 더 크게 허드슨 테일러를 후원하는 모임이 생겨서 문제가 오히려 변하여 큰 영광이 되고만 것입니다. 옛날에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내지에서 선교하는 것조차 몰랐는데 이것이 신문에 나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온 영국이 다 알고 그 다음 영국교회가 기도하기 시작하고 더 많은 후원금을 보내어서 내지 선교가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을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다리면 문제해결은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힘과 능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문제 해결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홍콩에서도 늘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기도할 뿐입니다. 천기는 하나님이 주장하시지 나는 구름한점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기를 주장하시니 나는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앉아서 기도만 합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으면 절망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절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굳세게 끝까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감각에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기 때문에 믿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과거에 경험을 통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적 이성으로 믿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에 서는 것입니다.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어도 말씀에 서는 것입니다. 갈릴리 풍랑을 지나갈 때 배가 물이 가득해서 가라앉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잠에서 깨워 일으키니 예수님이 일어나서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매 잠잠해졌습니다. 그때 주님이 제자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네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 예수님이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했으면 바람이 불고 배에 물이 가득하고 배가 가라앉아도 건너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한 제자들보고 꾸짖은 것입니다. “네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 여러분과 나의 믿음을 감각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환경에 두어서도 안 됩니다. 내 생각에 두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의 말씀에 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로마서 4장 17절에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상인의 아들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텔 주인이 된 힐튼에게 어린시절 어머니가 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장성하면 나도 네 아버지도 네 형제들도 모두 네 곁을 떠나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혼자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늘 너와 동행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지.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란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네 모든 걱정을 맡아 주신다. 걱정을 예수님께 맡기고 살아라. 그분이 네게 힘을 주실 것이다.” 당시 힐튼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늘 종교적인 말을 하는가보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힐튼이 장성하여 사업가가 된 후 그는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마다 어머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후에 힐튼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호텔이 파산하게 되었을 때 내 머리 속에는 지난날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어려운 문제에 항복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달려가 내 문제를 아뢰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지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내게 힘을 주셨다. 그 후로 나는 예수님을 의지해서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이겨내고 결과로 세계적인 호텔 체인인 힐튼호텔 체인을 만들 수가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알고 계시고 또 우리가 기도하면 고난을 이겨낼 힘과 용기도 주시고 하나님이 해답도 주실 것을 우리가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가 뭡니까? 예수 안 믿는 자는 고난을 당할 때 인간의 힘을 믿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으면 낭패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감각이나 체험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주님께 끝까지 부르짖어 기도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난당할 때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는 것은 참 쉽습니다. 괴로우면 원망이 나와요. ‘아~ 나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에 원망 안한다.’ 믿음이 강해도 원망해요. 나는 47년 동안 목회했지만 이번에 홍콩에서 나중에는 원망이 나오려고 하더라구요. ‘하나님 내가 내일 하려고 왔습니까? 하나님 일하러 왔는데 왜 자꾸 비를 줍니까? 무슨 내가 내일을 하려고 왔으면 모르겠지만 하나님 일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속상하게 만듭니까?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그런 생각이 마음에 들어오고 입술에서 나오려고 하더라구요 기도하는데 ‘사탄아 물러가라! 어디에 감히 원망하느냐?’ 그래서 당장 바꾸어서 ‘주여 비를 주시는 것도 고맙습니다.’ 나는 모르지만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비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또 주님께서 비를 주셔서 나로 고민하게 만들어 준 것도 고맙습니다. 고민하기 때문에 내가 기도를 좀더 많이 하게 되니 감사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바꿨습니다. 감사와 찬송하며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고난당할 때 여러분 원망, 불평, 탄식하면 마음이 부정적이 되고 부정적이 되면 의심이 생기고 의심이 생기면 마귀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당할 때 우리가 감사하고 기다리면 감사는 긍정적이 되고 긍정적이면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믿음이 있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이 있어야 인내심도 나오고 연단도 되고 연단을 받고 나면 더 소망이 커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14절로 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6절 한번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하나님 앞에 고난당할 때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잠잠하게 기다려라.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항상 부르짖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 나중에 할말이 없거든 가만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임금님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임금님 계신 곳에 가마니 깔고 석고대죄하지 않습니까? 그때 부르짖습니까? 밤낮으로 임금앞에 머리를 숙이고 꿇어 앉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도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찬송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지치거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도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잠잠하게 차마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이 바라봐 주시는 것입니다. 영국 사이스 웰스의 한 작은 탄광촌에서 갱이 무너져 14명의 광부가 갱속에 갇히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인명구조대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땅을 파내려 갔지만 사흘이 지나도 그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시체로 변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나흘째 되는 날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들으니까 찬송가 소리가 들립니다.
“예로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 이 세상 풍파 중에도 늘 보호하시리 예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 일평생 지나갈 동안 늘 보호하소서”
찬송가 438장을 합창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광부들이 캄캄한 갱도에 갇혀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구원의 손길을 바라고 기도하고 난 다음에 그들은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함께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 이 세상 풍파 중에도 늘 보호하시리 예부터 도움 되시고 내 소망 되신 주 일평생 지나갈 동안 늘 보호하소서”
그런데 이 찬송소리가 땅 빈틈을 타고 구조하는 사람들의 귀에 들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찬송소리를 향하여 땅을 파고 들어가니까 고스란히 갱도에 갇혀있는 14명의 광부들이 살아있어서 그들을 구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며 찬송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기 때문에 살았지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조바심을 가지고 발버둥을 쳤더라면 지풀에 죽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여러분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감사하고 찬송하며 기다리십시오.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고 열흘도 좋고 기다리십시오. 내가 찬송하고 기도했으면 하나님이 다 들으셨습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기다리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우리 집이 산장에 있었습니다. 경상남도 울주군 산남면 교동리 31번지 산장에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서 논두렁을 지나가지고서 개천을 지나야 학교로 갑니다. 그런데 그러자니까 혼자 다니면서 메뚜기도 잡아보고 돌도 차보고 풀도 뽑아보고 그러면서 학교를 가는데 초여름이 되면 벌레가 벼이삭에 기어 올라와서 거기에 껍질이 벗겨지면서 잠자리가 되어 나와요. 고치가 기어 올라오는데. 그런데 잠자리가 그 고치에서 나오려고 애를 쓰고 애를 씁니다. 학교 갈 때 거기에서 애를 쓰는 것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서 보면 아직도 못나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그래서 “야~ 임마 그렇게 고생하지 말라. 내가 쉽게 도와주마”하고 앉아서 벼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잠자리 고치를 제가 쪽 찢어서 내주고 쪽 짖어서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너는 나보고 고맙게 여겨라 고생안하고 나왔다.” 그런데 학교 갔다가 오는 길에 보니까 전부 개미가 와글와글 달라 들어서 그걸 다 뜯어먹고 있어요. 날지도 못하고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상하게 여겨서 학교가서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잠자리가 되는 고치가 못 나와서 몸부림을 치는데 제가 쪽 찢어서 나오게 해줬더니만 날개가 펴지지 않고 개미들이 달라들어서 다 파먹어 버렸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야 이놈아! 네가 잘못했다. 이놈들이 그 고치 좁은 곳에서 나온다고 몸부림을 칠 때 몸에서 기름이 나와서 날개를 적시므로 나오면 날개가 쫙 햇빛에서 뻗쳐져서 날수가 있는데 몸을 좁은 구멍에서 나온다고 몸부침 치면서 몸에서 기름이 나와서 날개를 적셔 주어야 날개가 펼쳐지는데, 네가 쪽 찢어 버리니까 기름이 안나와 날개가 쪼글쪼글 해버려서 땅에 기고 날지 못하므로 개미밥이 되지 않았느냐?” 맞았습니다. 잠자리가 활짝 날개를 펼 수 있는 것도 조그만한 고치속에 나온다고 몸부림쳐서 몸에서 기름이 나와서 날개를 적셔야 햇빛에서 그 날개가 펴지는 것처럼 우리 기도가 활짝 피어지고 신앙이 활짝 피어져서 믿음, 소망, 사랑의 날개를 펴고 날으려면 고난의 고치를 통해서 기름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없는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날개를 활짝피고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서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읽을거리가 그렇게 많고 우리가 마음에 감동을 느끼고 믿음을 얻는 것은 많은 고난을 당한때에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응답한 기적의 기록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기적도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성경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은 바로 여러분과 나에게 하나님이 기적을 보내겠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모든 고난의 길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고 낙심치 않으면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문제가 없으면 해답도 없고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고난당하므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자복하고 부르짖고 기도해서 우리 영혼이 성장하면 그가 장차 그를 말미암아 받을 영광과는 도저히 그 고난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고난 안받는 것이 좋지요. 고난을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지 아니하면 영광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는 것은 고난의 밥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당할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고난당할 때 여러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고난은 다 영광으로 변하는데 적은 고난은 적은 영광으로 큰 고난은 많은 영광을 가지고서 여러분께 다가올 것입니다. 이번 홍콩성회에 사람들은 다 입을 모아 말하기를 “조목사 설교를 통해서 은혜 받은 것 보다도 비가 안 오는 것으로 은혜를 더 받았다.”고 그랬습니다. 비가 원래부터 안 왔으면 영광도 안 나타났을 것인데 집회 직전까지 비가 쏟아지다가 집회만 시작하면 비가 그치고 또 집회를 마치고 나면 또 비가 쏟아졌으니까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한다는 영광을 보여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고난당한 것이 큰 유익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고난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적고 큰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고 찬미하고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고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곁에 계시므로 하나님은 모든 고난의 합동하여 유익이 되게 만들어 주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담대 할수 있사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성도들 중에 고난을 당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크고 작은 고난당할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도와주시옵소서.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다리게 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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