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조용기 목사 | 2009.07.11 17:33:0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15:1~8
설교자
조용기 목사
참고
2005년 7월 3일 주일2부 설교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포도밭에 가보신적 있죠? 농부가 포도나무 줄기에 붙은 가지를 길게 나무나 철사로 만든 줄 받침대에 묶어 놓은 것을 봅니다. 포도열매는 포도나무가 맺는 것이 아니고 줄기에 붙은 가지가 포도열매를 맺습니다. 그 때문에 농부는 가지를 잘 손질하여 받침나무에 묶어 놓아 열매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주렁주렁 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포도나무의 농부시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시고 우리는 그 나무줄기에 붙은 가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포도나무가 가지에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지만 잎 피고 꽃 피고 열매 맺는 곳은 바로 가지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이 그 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 포도의 열매를 맺는 곳은 바로 성도들의 삶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때문에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는 잎도 꽃도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영존하시만 우리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본론]

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려면

첫째, 우리가 포도나무에 꽉 붙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몸으로 포도나무 가지에 붙어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포도나무인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증거로써는 몸인 교회에 등록을 하고 교회에 들어와서 성도가 되고 물로 세례받고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십일조 드리고, 성수주일하고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므로 몸된 교회내에 교통이 있을 때 나는 포도나무 몸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가지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몸이 교회인데 몸에 붙어 있기 위해서는 몸에 들어와야지요. 많은 사람들이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혼자서 예배드리고 혼자 천당 간다고 그러는데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몸이 바로 교회인데 교회 들어와야 포도나무의 본체인 몸에 붙어 있게 되고 또 교회에서 세례받고 그리고 성찬에 참여하게 되고 봉사하고 십일조 드리고 성수 주일하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육신적으로 포도나무인 가지에 우리가 붙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 한 사람이 교회 다니다가 시험에 들어서 그는 교회를 떠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교회를 그만두고 나는 주일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않고 집에서 혼자 예배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며칠 후에 목사님이 저녁에 그 집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바로 화덕 옆에 앉아서 가만히 불이 타는 석탄불 화로를 바라보고 계시다가 불집게로 석탄 하나를 집어서 밖에 내놓았습니다. 청년은 왜 그런지 의아하게 목사님을 쳐다보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으니까 꺼내놓은 석탄은 하얗게 되더니만 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화로 안에 있는 석탄은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청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청년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알았습니다. 목사님! 나 혼자 교회밖에 나오면 신앙이 꺼져 버리지만 교회에 들어가 있으면 같이 함께 성령의 불꽃 가운데 신앙이 활활 타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이 함께 계신 곳입니다. 이곳에 와야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가 들어와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몸만 교회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어야 가지가 포도나무에 있는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불순종하면 예수님 안에 들어오지 못하잖아요. 자식이 부모에게 불순종하면 가정에 함께 거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들어와 있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도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종과 순종을 통해서 주님의 몸 안에 들어와 있고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에 동부에 있는 사람들이 서부에는 황금이 많이 나온다고 하니까 황금을 캐기 위해서 마차를 타고 밤낮없이 서부로 뛰어갑니다. 한사람보다도 더 앞서가야 황금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지도 아니하고 쉬지도 아니하고 밤낮으로 달렸습니다. 동부에서 서부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뭡니까? 오다가 말이 쓰러져 죽고 사람들도 지쳐서 병들어 죽고 간혹 서부에 도착한 사람도 너무나 과로했기 때문에 병이 들어 죽곤 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서부에 도착해서 하나님도 잃어버리지 않고 황금도 얻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철저한 청교도 신자들이었습니다. 동부에서 출발해서 열심히 밤낮으로 뛰다가도 주일이 되면 여행을 그치고 말도 쉬게 하고 가족들이 다 모여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고 쉬었습니다. 성경말씀에 성수 주일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토요일까지 열심히 말을 달리다가 주일날은 휴식하고 안식했기 때문에 몸도 쉬고 영도 살찐 꼴을 먹고 심신이 건강해서 서부에 도착해서 신앙도 잃지 않고 그들은 황금도 발견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면 그 순종을 통해서 은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믿고 의지해야 예수님 안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순종할 뿐 아니라 믿어야 돼요. 믿지 않고 자꾸 의심을 하고 불신앙을 가지면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자신만만하여 지위도 명예도 돈도 권세도 있고 청춘이 있으면 자기를 믿고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인 예수에게 붙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때에 우리를 약하게 만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혹은 사업에 실패하게 하기도 하고 낙심하게도 하고 병들게도 합니다. 사도바울 선생은 그 몸에 육체의 가시가 있어서 늘 괴로웠습니다. 주님께 세 번이나 가시를 옮겨 달라고 기도하니까 주님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바울선생은 연약했으나 주님께서 그 연약을 옮겨 주지 아니하시고 연약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늘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왜요? 바울선생은 말하기를 내가 약할 때에 주님을 더 찾고 간절히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강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고 의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연약함을 주시고 낭패와 실망도 체험하게 하셔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길러 보십시오. 건강하고 잘난 자식들은 부모를 다 떠나서 독립해서 잘 살지만은 병든 자식은 항상 부모슬하에 있고 부모 곁에 있고 아버지에게 늘 도움을 청하고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병든 자식은 늘 부모 주위에 빙글빙글 돌고 있고 부모가 불쌍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병든 자식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병들고 약하니까 부모를 떠날 수가 없어요.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병들고 약하고 부족하게 될 때 더 간절히 주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찌하든지 마음으로 믿고 의지해서 예수님 안에 있게 되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기 위해서는 섬기는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섬김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나를 섬겨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앞뒤가 바뀌지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요,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인이 종을 섬기지 아니하고 종이 주인을 섬기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셔서 우리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런 좋은 주님을 모시고 있는데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 않고 주님 앞에서 내 맘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하면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시편 103편 17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영적으로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하고 성령이 충만해야 됩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 주님 안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기도는 영적인 호흡과 같습니다. 우리가 4분만 숨쉬지 않으면 우리의 육체가 죽습니다. 영적으로도 기도하지 않으면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는 교회 나온 다음 한주일 내내 한번도 기도하지 않고 있다가 다음 주일날 교회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되니까 신앙이 형식적이 되고 의식화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도하므로 우리 영이 살아서 몸 된 교회에 소속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어서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자는 기도하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1517년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 조항의 개혁선언문을 붙이고 카톨릭에 대해서 종교개혁을 선포했습니다. 당시 일개 수도사에 불과했던 그가 기독교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위대한 혁명을 시작한 것입니다. 후에 그는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기도에 있었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새벽에 2시간 이상을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 날의 승리는 마귀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날마다 2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 기도가 모든 일을 지탱해 나가는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매일아침 주님께 2시간 기도하여 주님에 딱 붙어 있으면 주님의 은혜의 능력이 와서 그다음 다음 시간에는 주님의 은혜로 모든 일을 성공으로 이끌어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로써 포도나무 대신 주님께 붙어 있으려면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기도해야 성령이 오시지요. 성령의 파이프는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성령 충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하게 되어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꺾이는 이유

둘째로,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꺾여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꺾어진 포도나무 가지처럼 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말라가고 있고 개인의 신앙생활이 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라비틀어진 성도가 된 이유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가지가 포도나무에 꺾어지는 이유는 탐욕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마음에 탐욕이 들어와서 주님 중심에 서지 않고 자기 욕심 중심에 서면 포도나무 원줄기에서 꺾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했으며
골로새서 3장 5절로 6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면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개화초기 중국 교회들의 잘못 중에 하나는 아편장사로 돈을 모은 사람들이 교회의 중요한 자리를 대부분 차지했던 것입니다. 당시 중국에서 돈을 모은 것은 대게 아편에 관련된 사업을 해서 돈을 번 것입니다. 중국 부자 태반이 아편사업으로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교회 장로였습니다. 뒤로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아편을 팔아 돈을 벌면서 겉으로는 거룩한 척 교회의 직분을 맡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교회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공산주의라는 파도에 휩쓸려 질식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국시대에 러시아 교회는 국가 재산의 3분의 2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적으로 탐욕에 빠져서 타락하는 것이 그 당시에 성직자들의 생활인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 교회도 공산주의라는 회오리에 말려 무려 70년 동안이나 교회의 문이 닫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중국과 러시아 교회가 탐욕에 빠지자 하나님께서 그 가지를 꺾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로써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탐욕을 멀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탐욕에 물들어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 우리 가지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꺾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가지로써 존재하지 못하고 꺾어진 이유는 교만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13장 11절에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라고 말했습니다.
잠언서 16장 5절과 18절에 보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를 섬기고 자기를 찬양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이 앞서면 패망하고 맙니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교만하고서 영존한 존재는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교만해져서 자기의 지위를 가지고서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면 결국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하고 말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물은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넘쳐나는 것이지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높아지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서 흘러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낮아져서 하나님께 엎드리면 은혜가 자꾸 채워지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불신앙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꺾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20절로 21절에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히브리서 4장 2절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돼요.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주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요, 내가 동의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요, 내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따라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치 않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믿어야지 불신앙 하면 주님께로부터 떨어지고 꺾어진 가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 때문에 우리는 주님에게서 꺾어질 때가 많습니다.
천사장 루시퍼나 아담과 하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이와같은 죄 때문에 쫓겨나고 망했습니다.
히브리서 3장 18절로 19절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지 않거나 불순종하면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꺾어진 가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할 때에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수준에서 하나님의 수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겠다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하고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꺾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중앙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빌립이라는 아이가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소리를 쳤습니다. “빌립아! 빌립아! 아빠가 시키는대로 배를 땅바닥에 데고 바짝 엎드려라! 어서!” 빌립은 영문도 모르고 그냥 땅에 갑자기 탁 엎드렸습니다. 이유를 알 수없었지만 아버지의 다급한 말에 순종하여 그대로 땅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제 아빠가 있는 곳으로 빨리 배로 기어와라! 기어라!” 좋은 옷을 입고 있는데 흙에 기면 옷이 다 더러워지는데 왜 아버지가 기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진흙 속에 그냥 기어서 아버지께로 오니까 아버지가 이번에는 “일어나 뛰어라! 일어나 뛰어라!” 그래서 아버지 말대로 일어나서 손살같이 뛰어서 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아버지가 빌립을 끌어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아 정말 잘했다. 이제 뒤로 돌아 나무를 한번 쳐다보아라.” 나무를 쳐다보니까 아프리카에서 사람 잡아먹는 거대한 뱀이 꼬리를 나무에 감고 바로 빌립이 있는 자리까지 머리를 내려뜨리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는데 빌립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명령에 순종 안했으면 그는 뱀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가 엎드려라. 기어라. 뛰어라 하니까 그대로 순종을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 그의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일을 하라고 명령하시는가. 처음에는 알지 못해도 무조건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하고 믿고 보면 나중에 지나고 난 다음에야 “아~ 이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고 믿겠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으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고 순종하면 나중에 알게 되지 알고 믿고 순종하겠다면 벌써 때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모르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하고 믿고 순종하면 뒤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였다함과 같음이라.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나중에 보여 주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은 “나는 모르겠는데~ 나는 이해가 안돼. 그러므로 내가 왜 꼭 순종해야 되는가! 왜 반드시 성수주일 해야 되는지 이해가 안돼. 왜 십일조를 드려야 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왜 기도하라 하시는지. 왜 하나님이 전도하라고 하시는지··· 왜 봉사하라고 하는지··· 나는 모르겠어. 이해할 수 없어” 이해는 할 수 없습니다. 이해를 하려고 하면은 하나님의 역사는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무조건하고 믿고 순종하면 나중에 ‘아~ 이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보고 명령하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믿으려고 하지 말고 믿고 알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셋째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어떠한 일이 생깁니까?
우리가 교회에 와서 등록하고 세례 받고 성찬을 떼고 십일조 드리고 성수주일하고 몸된 교회에 들어와 있으면 마음으로 믿고 순종하고 충성하고 영적으로 기도하고 성령충만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에 붙어 있으면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생깁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꽉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에 들어와 있으면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일단 주님 손에 들어오면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주의 손에서 빼앗아 내갈 힘이 없는 것입니다.
시편 55편 22절에도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내가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붙잡아 주시면 그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능력으로 붙잡는데 우리가 요동하겠습니까?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스펄젼 목사님에게 젊은 신학생 한명이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낙망하신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글쎄~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적이 없네. 나는 그 기간 동안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해 왔거든.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거야~ 나는 하루에 15분도 주님을 생각지 않고 지난일이 없네. 그래서 그때 이래로 나는 낙망을 모르고 살아왔네.” 왜 낙망하지 않습니까? 항상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절망에서 절대희망을 가져오신 분인 것입니다. 인간에서 가장 큰 절망은 죽음 아닙니까? 질병보다도 세상의 마귀의 역사보다도 죄보다도 저주보다도 죽음보다도 더 강하신 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3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우리가 붙어 있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절대절망에서 절대소망을 가져오신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희망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좋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워도 좋아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종국에 가서 좋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주시니 좋을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리라. 주님의 손에는 비밀한 것이 잡혀 있는 것입니다. 비밀은 우리가 모릅니다.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우리는 자꾸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비밀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내 할 일을 할테니 걱정말고 내게 붙어 있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포도나무에 꽉 붙어 있으면 포도나무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끊임없이 은혜가 쏟아져 내려와서 우리는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은혜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 주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주님의 은혜는 오직 포도나무를 통해서 가지인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밖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은혜를 주신다고 해도 포도나무인 예수님을 통해서 가지인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를 통해서 부어 주시는 것이지 교회밖에서 절대 부어지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예수께 붙어있고 내 영이 예수께 붙어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주님 밖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일은 결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으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예비한 은혜가 용서와 의와 영광 아닙니까?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용서를 주시고 의로움을 주시고 영광을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주님께서는 마귀와 세상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은혜를 늘 부어 주십니다. 항상 주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으면 주님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시고 치료하는 은혜를 부어 주셔서 치료와 건강을 심신에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을 주시는 은혜가 늘 위에서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은혜가 우리 속에 늘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은혜를 제조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은혜의 공장입니다. 주님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은혜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만들어낸 은혜를 우리에게 가진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우리가 은혜 속에서 잎이 피고 꽃피고 열매 맺을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열매 맺을 수밖에 없지요. 자연히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열매가 억지로 맺어지나요? 은혜 받아야 열매 맺는 것입니다. 은혜 받지 않았는데 의식과 형식적으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요사이 플라스틱으로 가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만 가짜 열매는 보기에는 열매 같지만 실제는 향기도 없고 그리고 영양분도 없고 먹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맛있는 실과를 맺으려면 살아있는 나무에서 실과를 따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서 우리 영혼이 살아서 있으면 주님은 은혜를 우리에게 퍼부어 주어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열매 맺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주에서 가장 좋은 포도나무요, 그 가장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된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열매 맺지 못하게 할 리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농부가 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장 좋은 농부에, 가장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인 우리가 서툴고 시원찮더라도 우리를 통해서 잎 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지 않고는 열매 맺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나무는 열매 맺지 않습니다. 나무에 붙은 가지가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이 열매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여러분에게 은혜를 붓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은혜가 부어지면 열매를 맺으므로 하나님은 주일날도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고 수요일날도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고 구역예배에도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고 개인적으로 성경읽고 기도할 때도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여러분이 주님을 향해서 심신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있으면 은혜를 부어 주셔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해 버렸습니다. 주님은 열매없는 여러분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믿는 사람은 왜 열매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운명적으로 열매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으면 주님에게 붙어있는 가지가 아닙니다. 플라스틱 교인들입니다. 실질적으로 성령과 교통하는 교인들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편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임스 무어가 쓴 ‘다 실패했을때’라는 책에 사업가로써 로버트씨의 이야기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보스턴의 주택단지 개발업자로써 한때는 3천 2백만 달러, 당시 한국 돈으로 416억원에 해당하는 자본금을 운영하던 큰 사업가였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일에 손을 댔다가 그만 자금 사정이 악화되어 파산하고 만 것입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눈에 보이는 아무 교회나 들어갔습니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주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주님 나는 살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다니면서 눈물을 흘리기는 오십 평생에 처음이었습니다. 조금 후 목사님이 나와서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 내용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의지했더니 죽은딸이 살아났다는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 말씀이 몽둥이로써 자기 머리를 때린 것 같았습니다. ‘왜 내 사업체가 죽었느냐? 예수님과 같이 안했기 때문에 죽었구나!’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과 같이 있으니까 죽은 딸도 살아났는데 왜 내 사업체가 죽었느냐? 예수님을 떠나서 형식적으로 교회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내 사업이 죽었구나! 로버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들으며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의 문제는 자금도 아니고 은행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가지로써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포도나무이신 주님만 의지하고 살 것을 결단하고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순종하고 기도하고 성령충만하기로 각오를 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한 이후로 신기하게도 그의 사업이 잘 풀려 직원을 50명이나 고용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그러한 글을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인데 그가 사업에 낭패하고 절망에 처했을 때 교회에서 목사님의 메시지를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깨달아야 돌이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돌이키지 못하지요. 사람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에 왜 나옵니까?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인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은 깨달았기 때문에 포도나무에서 꺾어진 가지인 자기를 발견하고 다시 포도나무에 붙어지므로 진액을 받아서 열매맺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가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가지면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주님을 의지하고 잘 붙어 있어야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셔서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 포도나무는 누구의 도우심도 필요치 않으시며 언제나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포도나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포도나무에 항상 붙어 있어야지 한시라도 떨어지면 말라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지면 우리는 한시도 살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주시는 그 은혜에 항상 붙어 있어야 우리는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늘 주님께 복종하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붙잡아 주시고 은혜를 퍼부어 주시고 풍성히 열매 맺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열매를 맺고 더 맺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열매 없는 성도가 되지 말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충실한 가지로써 많은 열매를 맺고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아버지의 은혜로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가지가 되었으니 충실하게 순종하고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열매 맺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고 아버지가 기쁨을 가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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