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시편 › 하나님이 보시는 나

조용기 목사 | 2009.07.11 17:38:0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시103:8~17
설교자
조용기 목사
참고
2005년 7월 17일 주일 2부 설교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이 보시는 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자식들은 부모슬하에서 자라는 동안 내내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고 생각하시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나 신경을 늘 곤두세웁니다. 직장에서는 직장 상사가 나를 어떻게 보나 하고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항상 사회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이 나를 무엇이라고 보며 말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고 계실까? 그것이 우리 최상의 관심사가 되어야 될 것입니다.

<본론>

1. 자신에게 낙심될 때

첫째로, 우리 모두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볼 때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한 경험이 한두 번 이상은 다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어느 날 저 자신에 대하여 대단히 낙심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갑자기 마귀의 무시무시한 참소가 내 마음속에 덮쳐 왔습니다. 갑자기 마귀가 와서 저에게 참소를 했습니다. “야~ 너는 정말 별 볼일 없는 놈이다. 너는 학식도 많지 아니하고 학력도 별 볼일 없고 사회적인 배경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인격적으로도 고상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도 부족한 너 같은 인생이 무슨 자격으로 주의 종이라고··· 말이 되느냐?” 계속해서 마귀의 참소가 내 마음속에 들려오는데 그 다음에는 “너는 인생의 실패자다. 너 같은 놈은 정말 주의 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이 마음속을 꽉 눌렀습니다. 좌절하고 참담한 심정이 되어 하나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 저는 버림받아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나는 살아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넋두리를 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하나님의 계시가 한줄기 빛과 같이 마음속에 임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너의 그 많은 약점을 보고 평가하지 않고 네 안에 있는 작은 장점을 보고 평가한다. 네가 많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깜짝 놀랐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비참하게 참소를 해서 내 스스로가 나를 볼 때도 완전히 비참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듯이 영혼 속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내 많은 결점을 하나님이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점을 보지 아니하시고 내속에 장점을 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무슨 장점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내가 보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말씀을 듣고 제가 용기백배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탄을 물리치고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은 경험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런 간증을 읽어 본적이 있습니다. 의술이 뛰어나고 착한 마음을 가진 한 의사가 있었는데 한번은 실수로 오진을 해서 환자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깊은 상처를 입은 그는 날마다 탄식하며 “나는 의사로써 실패자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그렇게 스스로 좌절하고 낙심해 버렸습니다. 그는 병원 문을 닫아 버리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끝내 병이 들어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사들뿐 아니라 가족들과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병원을 돌며 심방하는 목사님이 그를 찾아가 전도하다가 그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셨죠? 그러면 수많은 사람 중에 한사람 오진한 것은 한 부분에서 실패한 것이지 당신 자신 전체가 실패한 사람은 아닙니다. 당신은 훌륭한 의사입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와 용서받고 다시 의사로써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일어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훌륭한 의사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다음 그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실패자가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저는 실패자가 아니란 말이죠?” 목사님은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한 환자에게만 실패했지 당신의 전 인생이 실패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실패를 보지 아니하시고 훌륭한 의사로써의 인품을 보십니다.” 라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하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회복하여 다시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때로 좌절하여 비참한 심정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좌절케 하는 일만을 생각하여 낙심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장점들을 보고 우리를 평가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의 잘못한 점을 꼬치꼬치 캐내어 비평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많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속에 장점이 있는 것을 택하시고 그를 보고 평가해 주시는 것입니다. 태산만한 돌멩이와 흙더미가 있습니다. 광산에 가면 이러한 것을 흔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광물을 캐는 사람은 그 흙더미나 돌멩이를 보고 평가하지 않고 그 많은 흙덩이와 돌멩이를 캐낸 가운데 있는 광석을 캐내어서 그곳에 있는 은이나 금이나 보석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흙더미가 많고 돌멩이가 많은 인생 같지만 우리 속에서 하나님은 보화를 발견하시는 것입니다. 그 좋은 보화를 보고 평가하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장점을 짓밟아 버리고 우리의 약점을 과대 포장하여 공격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라고 말했습니다.
마귀는 하루도 쉬지 않고 밤이나 낮이나 우리의 결점을 들춰냅니다. 우리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우리를 참소하고 우리를 낙심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에게 마귀가 와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마귀를 보고 이 세상에서 이렇게 순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를 보았느냐”라고 욥을 칭찬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장점을 보았습니다. 욥에게 많은 약점이 있었습니다만 그것들은 하나님은 제켜 놓고 욥을 보시고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없다고 말할 때 사탄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가진 모든 소유물에 북주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까? 다 이해 타산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겁니다. 욥의 재산을 빼앗아 보세요. 당장 돌아서서 욥이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욥의 결점을 지적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장점을 보시려고 하고 마귀는 우리의 결점을 보아서 우리를 낙심시키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많이 시달리고 있는 질병중 하나가 우울증인데 인류의 약 20%가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자신에 대해 낙심하고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력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앓게 되는 병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매사에 의욕이 떨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집니다. 그러다보면 육체적으로도 쉽게 피곤함을 느끼게 되고 수면장애를 가져올 뿐 아니라 심한 짜증과 슬픔에 빠지는데 증상이 심해지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52%가 우울증 환자였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우울증에 걸리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과소평가하고 죄악을 과대평가해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자신감을 상실하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낙심하여 우울증에 빠지게 되면 그때부터 절망적인 존재가 되어버려 자신의 삶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잘못 바라보고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항상 자기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살리려고 하고 마귀는 여러분을 죽이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귀는 나쁜 마귀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 나쁜 점을 들추어내어서 우리를 짓밟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우리를 격려하고 높여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웨는 야곱의 허물을 보시지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얼룩진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모압왕 발락 앞에서 이방선지자 발람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오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까? 불순종, 불신앙, 반역으로 여러 번 하나님을 노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변경에 와서 모압을 침략하려고 할 때 모압왕 발락이 너무나 겁이 났습니다. 이방인 선지자 발람을 청해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했었습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발락이 만든 제단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이방 선지자 발람에게 임하여서 뭐라고 말한 줄 압니까? 그렇게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얼룩진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모압왕 발락 앞에서 긍정적으로 말씀했습니다.
민수기 23장 18절로 24절에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찌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나를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찐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허물이 많고 패역이 많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원수 모압왕 발락 앞에서 선지자 발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허물을 보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패역을 보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속에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려는 그 장점의 불씨를 보시고 그를 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여러분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패역을 들추어내어서 파멸시키고 좌절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오늘 시편 말씀을 통해서 읽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번 들어 보십시오.
시편 103편 8절로 17절입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이 영광을 볼 때 우리는 감동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비와 긍휼의 눈으로 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저주와 심판으로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과 자비로 보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될 것입니다.

2. 야웨 이레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보시기 때문에 사랑은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보잘 것 없어도 나의 삶을 항상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돌보십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며 돌보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예비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예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아담을 위해서 천지와 만물을 예비하시고 상함도 해함도 없는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예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을 지어놓고 “네 인생은 네가 살아라. 이마에 땀을 흘리고 고생하며 살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을 지으시기 전에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아름다운 에덴을 예비하셔서 아담이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돌보심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패역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사탄의 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아와 그 여덟 식구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방주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홍수가 와서 땅을 엄습할 때 거기에서 피할 수 있도록 방주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큰 심판, 홍수의 심판이 지구를 몰아쳤을 때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역하고 마귀를 따라가는 사람이 홍수심판으로 멸망 받았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따르는 노아와 그 여덟 식구를 위해서는 그를 피할 수 있는 방주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극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새하늘과 새땅과 새 예루살렘으로 예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환난을 통할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환난을 통하지 않을 것은 노아가 홍수 속에 침몰되지 아니하시고 방주를 예비해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실 때 주의 백성들이 피할 곳을 예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자들이 다 변화되어 공중에서 피난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야곱과 그 자손들을 위해서 애굽의 고센 땅을 예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45장 10절로 11절에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요셉을 먼저 애굽땅에 보내어서 하나님은 그 아버지와 형제들을 봉양하도록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46장 3절로 4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큰 기근이 온 세계를 엄습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 자손들을 위해서 고센 땅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다시 가나안 땅을 예비해 놓으시고 이스라엘을 모세를 통해서 인도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돌보시고 돌보시기 때문에 예비해 놓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8절에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애굽기 23장 20절에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사랑은 돌보고 예비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돌보아 주지도 아니하고 예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입에 발린 사랑이요, 실제적인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고 했었습니다. 어떻게요. 세상 사람을 돌보시고 세상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구주 예수님을 예비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돌보시고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다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고생하고 살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천국을 예비해 놓고 계신 것입니다.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곳을 이미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로 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에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돌보시고 우리의 삶을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 같은 사람도 생각할까요?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예비할까요? 제가 이 강단에서 오늘 가만히 앉아서 찬송 부를 때 여러분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여의도순복음교회 75만 성도 중에 숫자적으로 한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 가만히 보아라. 얼굴이 다 다르지?” 내가 속으로 “다 다릅니다.” “보아라. 얼굴이 다 다르지? 다 특별한 개개인 나는 그 한사람 한사람을 특별히 개인적으로 사랑한다. 한꺼번에 사랑하지 않는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나는 다 한사람 한사람 다른 사람으로서 내가 일대일로 내 자식으로 사랑한다. 그러므로 한사람 한사람을 귀하게 여겨라.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 75만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한사람 한사람이 다 내게는 일대일로 귀하고 사랑하는 내 자식들이기 때문에 한사람 한사람을 귀하게 여겨라” 굉장히 감동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마음속에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다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사람 한사람 개인적으로 사랑하고 돌보시고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눈으로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감히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놀라운 일을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예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평생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고아원을 운영했던 분입니다. 한번은 기업가들이 뮬러 목사님께 찾아와서 “3천명의 고아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기에 얼마나 힘이 드십니까? 우리 기업가들이 매달 일정한 금액을 모아 드릴 테니 그것으로 고아원을 운영하십시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복을 받으세요. 그 돈을 보내 주시면 너무나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죠지 뮬러 목사님은 “성의는 고맙습니다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제게는 저를 돌봐 주시는 크신 어른이 계십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놀래서 “어떤 어른이시기에 그 많은 돈을 매달 주십니까?”하고 물으니까 물러 목사님은 “내가 모시는 그 어른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부탁하고 기도하는 것마다 다 응답해 주십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의 기도실에는 “야웨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라는 글이 늘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오직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기도하여 5만번의 기도응답을 받고 3천명의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켰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한 것들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마다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한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 그분을 우리 어른으로 모셨으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비와 긍휼로 보시고 크게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3. 우리 이렇게 살자

셋째로, 이런 자비와 긍휼의 눈으로 보시고 사랑의 눈으로 보시는 하나님을 모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의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항상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십자가 통하지 않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어느 여성 선지자가 있다고 해서 미국 상사 한사람과 함께 남산 밑에 찾아가니까 그 여선지자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는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 통하기 때문에 예수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그 독생하신 예수님이 나타내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통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려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늘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를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야훼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란 무엇입니까? 죄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짐승이 심판을 받아 목을 따서 피를 흘려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는 죄에 대한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말하기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나는 심판보다는 용서와 사랑을 원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심판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정부발표에 보니까 8.15 기념일에 650만 명의 범죄자들을 대통령께서 무죄 방면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비난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나는 굉장히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왜냐, 하나님의 심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긍휼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국민대단합을 위해서 용서와 사랑으로 품는 것이 채찍으로 때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채찍도 필요하지만 채찍보다도 사랑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교육할 때 항상 채찍으로 종아리만 때리면 자식의 마음속에 부모에 대한 반발과 원한만 쌓여지는 것입니다. 채찍은 할 수만 있으면 적게 때리고 사랑은 많이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채찍이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채찍을 때려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능력이 없고 권세와 위엄이 없어서 사람들을 심판하지 못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명령 한마디 하시면 모든 생명이 초계같이 될 것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율법과 심판과 채찍이 아닌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구원하고 변화시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늘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 저는 어릴 때 우리 형제가 많았기 때문에 항상 싸웠습니다. 하루도 집안에서 아홉 형제간에 한 두 사람 안 싸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저녁에 부모님이 장사하고 돌아오시면 서로 자기가 잘했다고 고발을 합니다. 우리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잘했으니까 고발을 하면 부모가 우리 편 들어주고 형이나 동생을 꾸짖을 줄 알았는데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우리의 고발을 원치 않았습니다. 제가 고발하면 “어떻게 오빠가 되어서 여동생을 구박하느냐?” “분명히 쟤가 잘못했잖아요.” “그래도 네가 구박하는 것 듣고 싶지 않다.” 부모는 긍휼을 원하지 심판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우리 동생이 나를 고발해도 부모님은 그것을 언짢게 여기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서로 겨루면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지 서로 고발하고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욥기 14장 17절에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내 죄를 주님께서는 주머니에 봉해 버리고 안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죄악을 싸매어 버립니다. 어찌하든지 덮어 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최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서 씻어 버리면 죄가 다시는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 긍휼을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대할 때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긍휼을 베풀고 제사를 요구하지 말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긍휼을 베푸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 앞에 의심치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꾸 하나님을 반은 믿고 반은 안 믿고 의심하고 불안에 떠는 사람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벌주시는 이심을 믿으라는 말은 안합니다.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어떠한 명분으로 하든지 상을 주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벌을 주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조그마한 잘한 것이라도 하나님은 상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주셨는데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믿음을 가져옵니다. 미워할 때는 미워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사랑하면 믿어야 되지 않습니까?
사랑이 이처럼 나타나셨으니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려도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 환경이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사랑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믿지 않고 환경만 바라보면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마귀가 자신의 작전용 도구를 경매에 붙인다고 광고를 냈습니다. 이 광고를 보고 마귀의 무기들을 보기 위해 구매자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경매품은 죄짓게 하는데 사용될 무기인데 탐욕을 품게 하는데 사용될 무기 등으로 분류되어 잘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비매품이라고 표시된 도구가 있어 구매자의 눈을 끌었습니다. 마귀는 이 비매품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다른 도구는 다 팔 수 있지만 이것만은 팔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강력하고 비밀스러운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무기의 이름은 낙담인데 이 낙담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기만 하면 인격과 생활을 마음대로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앙이 가져오는 낙심은 마귀가 가장 즐겨 쓰는 도구인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과대 포장하여 비난하고 공격하므로 우리는 낙심케 합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약점이 아닌 장점을 보고 우리를 세워주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깨어져 주님께 순종하십시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루는 제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마음속에 ‘야~ 너 나 속상하게 하지마라. 나는 많은 일에 너 때문에 속이 많이 상한다.’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속상한줄 몰랐어요. 우리 부모들은 자식을 기를 때 속상할 때 많잖아요. 자식이 반드시 미운 것은 아닌데 부모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 부모가 속상하잖아요. 우리 어머님은 아홉 자녀를 길렀기 때문에 항상 입에 달린 말씀을 하는 것을 제가 어릴 때 들어서 늘 기억납니다. ‘아이고 속상해 죽겠다. 내가 속상해 죽겠다.’ 그래서 난 늘 속으로 생각하기를 ‘속이 뭐가 상하냐?’ 어머니가 속이 상한다고 그러는데 나는 상한 것 보지도 못했는데 뭐 속이 상하냐?‘ 그러나 제가 자식을 길러 보니까 나는 아홉을 기르지 않고 셋만 길러도 속이 얼마나 상하는지 말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꼬집어서 내가 징계를 내릴 정도가 아니지만은 좀더 잘해 줬으면 좋겠다. 좀더 낫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속상합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야~ 나 너 때문에 속상한다.’ ‘하나님도 속이 상해요?’ 그러니까 ‘나라고 속 안상할줄 아느냐?’ 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살면 우리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대해 주었는데 이런 하나님을 속상하게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비롭게 생각하시고 사랑으로 안 보아 주시면 속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길을 걸어가는데 남의 집 자식이 흙에 뒹구르고 흙더미에 온몸을 더럽히더라도 그것을 보고 속상합니까? 남의 자식을 보고 속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 자식이 흙탕물에 뒹굴고 온 몸에 흙이 묻어 있으면 속상합니까? 속 안상합니까? 속상하지요. 그것은 왜냐, 내가 내 자식을 사랑하고 긍휼히 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잘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속상해 하십니다. 반드시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좀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데 기대에 못 미치면 하나님이 속상한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세상을 따라 나가면 세상 종이 되고 돈을 따라가면 돈의 종이 되고 마약을 따라가면 마약의 종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세상 종의 멍에는 다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멍에 밑에 들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을 잘 듣는 것은 주님이 정말 좋아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을 잘 들어야 해요. 우리 자녀들도 부모 말을 잘 들으면 부모가 얼마나 이뻐하십니까? 불순종하면 부모의 마음에 고통을 가져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을 잘해야 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 중에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뭡니까? 개입니다. 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나쁜 사람 보면 개 같은 놈이라고 말합니다. 잘못하면 개 같은 짓 한다고. 실제는 개가 그렇게 나쁘지 않는데 자꾸 왜 사람들이 개를 그렇게 악평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개만큼 주인을 좋아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하루 열두 번 들어와도 열두 번 다 좋아 합니다. 주인이 훌륭한 사람이어도 좋아하고 주인이 도둑놈이라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개만큼 사람을 좋아하는 동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내 사람들은 개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차고 냉정해서 야옹~ 하고서 못 본 척 합니다. 조금만 자기 귀에 거슬리면 싹 할퀴지요. 돼지가 주인을 좋아합니까? 닭이 주인을 좋아합니까? 개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람은 개를 예뻐하고 개를 애완동물로 키우지 않습니까? 개에 비유해서 안 되겠지만 우리도 누구든지 상대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많이 길러도 그중에 특별히 부모를 기뻐하고 부모에게 감사하면 그 자식에게 더 애정이 가지 않습니까? 제자를 길러도 제자가 선생님을 더 기뻐하고 감사하면 그 제자에게 더 애정이 가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면 하나님이 그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2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송축하고 기뻐하면 하나님이 은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 8장 10절에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고 말한 것입니다.
시편 91편 14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하셨는데 여러분 우리 한국에 희망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북한의 공격의 위험에 떨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과 소련과 일본 등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는 북한의 위협과 공격에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알 것은 우리 대한민국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1천 2백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 1천 2백만이 있으니 성경에 하나님이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건지시면 사람이 막지 못합니다. 6자회담이 우리를 건져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북한을 달래기 위해서 전기를 보내주고 쌀을 보내주고 비료를 보내주고 그런 것이 우리 한국을 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북한이 우리 동포이기 때문에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를 건져줄자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고 했으므로 우리 국민이 더 많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면 이것이 우리에게 안전보장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 하나님이 높여 주신다 하셨는데 여러분 우리가 이 극동 아시아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중국보다도 일본보다도 소련보다도 기타 여러 나라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높이는 것이 동이나 서나 남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국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직결된 것입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여 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것이 사실로 증명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노르웨이 속담에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를 뿌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속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사탄이 지구에 내려와서 노르웨이에 창고를 하나 지었습니다. 그 창고에는 사탄이 즐겨 뿌리는 각종 씨앗들이 가득했습니다. 사탄은 이 창고에서 미움의 씨, 슬픔의 씨, 불평의 씨, 원망의 씨 등을 꺼내 이 마을 저 마을에 가서 뿌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마을이든지 마귀가 씨앗을 뿌리면 싹이 잘나고 번성하여 온 마을이 지옥처럼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마을에서만은 아무리 씨앗을 뿌려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어쩌다 싹이 나도 곧 썩어 버리고 죽어 버렸습니다. 이 마을은 바로 기쁨의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쁨 가운데 감사했기 때문에 사탄의 씨앗들이 싹틀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르웨이에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를 뿌릴 수 없다는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할 때 우리는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아무리 미움, 분노, 시기, 질투, 슬픔, 좌절의 씨앗을 뿌리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씨가 다 말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
삶은 빨리지나갑니다. 삶 속에 귀중한 것도 다 꿈같고 지나가고 나면 헛된 것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우리 구주와 하나님 아버지 이외에는 다 나를 떠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히 나를 자비와 긍휼로 보시고 대하여 주시고 영원히 나를 큰 사랑으로 바라보시고 품에 안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것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부모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선생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상사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이웃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보시고 계신 것을 항상 마음에 올바르게 알아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을 자비와 긍휼로 보시며 여러분을 사랑으로 보시며 돌보시고 예비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늘 마음에 익히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우리의 영화는 들의 꽃과 같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면 다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 의는 자자손손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의 잘못을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장점을 들춰내어서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상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사탄의 참소를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우리는 쑥쑥 신앙이 자라게 도와 주시옵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순종하고 믿고 의지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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