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

임영수 목사 | 2009.07.13 23:18:1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막2:1∼12
설교자
임영수 목사
참고
1998. 9. 13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

본문에서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는 예수께서 현존하시는 곳에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예수님과 함께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정죄가 아닌 죄의 용서와 새로운 삶의 실현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임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다가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집에 머무시게 되었습니다. 추측하건대 베드로의 집으로 짐작됩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 초대받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수께 접근할 수 없게까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초대받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어떤 특정한 인물이 그 집에 머무를 때에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누구나 올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상황도 그러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네 사람이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와서 그를 예수께 데리고 가기를 희망했으나 무리들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그 중풍병자를 달아서 예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집들의 지붕은 평평하게 되어 있었고, 그 지붕에 쉽게 이를 수 있도록 지붕과 연결되는 바깥 층계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가르침을 방해한 그들의 행동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의외로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이 돌발적 행동과 의외의 예수님의 반응을 본 무리들 가운데 특별히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에 대한 모독으로, 돌에 맞아 죽는 벌에 해당하는 심각한 죄로 간주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한 생각을 곧 마음으로 아시고 날카로운 반대의 질문으로 그들과 직접 대면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중풍병자의 육체적 치료를 기대했으나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치료는 눈으로 볼 수 있고 직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는 용서의 선포가 더 쉽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중풍병 그 자체보다도 그 이면의 어두운 삶이 더 중요시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깨우치면서 그러한 어두운 삶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권세가 예수님 자신에게 있음을 알렸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그러한 뜻을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노라"는 말씀으로 대신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상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 사실을 본 사람들은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이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지난날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 내용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 중풍병자가 십계명 중 어느 계명을 어겼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무서운 벌을 받았는가라고 단정해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사고의 근거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이 걸머지고 있는 고통은 모두 하나님의 형벌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제가 이해한 하나님은 등에 큰 재앙의 자루를 걸머지고 다니면서 자신의 뜻을 어기는 사람에게 각종 재앙의 벌을 내리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실제로 교회 생활에서 질병이나 실패 재난 같은 고통을 당하는 신도들은 그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단정하고 그것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성서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율법을 어긴데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풀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때까지 살아온 중풍병자의 잘못된 삶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삶과 중풍병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에게 있어서 외적으로 드러난 중풍병이란 왜곡된 현상 뒤에는 왜곡된 삶, 즉 하나님의 생명의 질서를 거스리며 살아온 잘못 형성된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중풍병은 잘못된 삶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비밀이 율법으로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의학적으로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의학이 밝혀 낼 수 있는 것은 질병의 성질과 성장에 관한 것, 병인, 병의 발생 등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드러난 것은 중풍병이라는 병 뒤에 숨겨진 잘못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것에서 그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죄의 용서에는 지난날의 잘못된 삶에서 해방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새로운 삶이 포함됩니다. 복음서에 계속 일관성 있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오고 있다는 선포와 함께 거기에는 새로운 삶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중풍병의 발생 원인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과 관련된 잘못된 삶, 즉 책임지지 않은 문제들,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서 형성된 것들, 생명의 질서를 어기고 살아간 것, 하나님의 인도를 등한시 한 것들이 드러나게 되며, 그것으로 고통 당하는 인간을 문제시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십자가 사건은 중풍병의 원인이 되는 하나님께 받아 드려질 수 없는 잘못된 삶과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몇 개월 간 여수 애양원에 머무르면서 한 청년이 그의 발가락이 썩어 들어가서 점점 그 균이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결국 발목을 자르는 수술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청년의 발이 그렇게 썩은 이유를 알아보니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 것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몇 갑을 피울 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의 경우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몇 차례 그 청년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서 그에게는 많은 양의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사연들, 뒤엉켜 있는 내적인 문제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문제들로부터 탈출해 보려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는 담배가 인체에 해롭다는 경고적이고 위협적인 많은 충고보다는 치유와 새 삶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필요했습니다.

그 청년의 경우 발이 썩는 질병과 죄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죄와 질병은 인과응보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죄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잘못된 삶이며 질병은 그 잘못된 삶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질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지시하는 방향지시표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의 문제들 가운데는 의학적 처방이나, 돈·보약·권세보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문제들이 더 많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의 용서 가운데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개인의 질병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도 고통스러운 많은 문제들 가운데는 인간의 불의·거짓·허영·태만·안일·책임전가·이기심·욕심 등과 같은 것들 때문에 뒤엉켜 있는 사회적 문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러한 사회적인 문제들과도 관련됩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삶의 무의미·좌절·비극을 경험하게 합니다.

1912년 세계 최대 해난 사고가 일어나 513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했습니다. 사고 배는 영국의 최대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입니다. 이 배는 빙산과 충돌했는데, 침몰하기 전 경고 전문을 육지로부터 다섯 번이나 받았습니다. "빙산을 조심하시오."라고 마지막 여섯 번 째 경고 전문이 왔을 때 무전사는 귀찮은 듯이 이렇게 타전했습니다. "조용히 해! 나는 바쁘단 말이야." 그리고 정확히 35분 뒤 "하나님께서도 이 배를 가라앉게 할 수 없다"라고 선장이 큰 소리쳤던 이 배는 빙산과 충돌, 물 속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으로부터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용서의 선언이 내려졌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새 삶으로 첫발을 내 딛었습니다.

그러한 장면이 본문에 그가 일어나 그의 상을 들고 걸어 나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러한 장면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권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도상에서 우리의 뜻과는 전연 맞지 않는 질병·재난·고통·실패를 당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당할 때 환경의 탓으로 돌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켜 원망하거나 적대시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울 때에는 종교적인 의식이나, 기도·헌물을 바쳐서 그 고통을 면해 볼려고 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은 우리의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생의 문제들 이면에도 반드시 우리가 책임져야 했던 문제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아니했던 우리의 교만, 우리의 욕심, 우리의 허영심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잘못된 삶과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불행이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종합 검사를 마치고 나서 의사의 지시에 따라 20여일 간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치료를 받아 가면서, 한편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매우 귀중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는 과정에서 자기가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게끔 잘못 살아온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다시 한 번 새로운 삶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20여일 보다 훨씬 빨리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퇴원 후에 그를 만났을 때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에게 병원에 입원해 있던 그 기간은 자기의 잘못된 생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볼 때 그 분의 삶은 병원에 입원하기 전과 그 이후가 많이 달랐습니다. 퇴원 후에 그에게는 삶의 여유와 관용·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의식으로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도덕적인 완전으로도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직 진정한 돌이킴과 하나님의 용서만이 요구되어 집니다. 거기에 진정 우리가 갈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는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생의 어떤 비밀이나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보좌로 나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 분과 대화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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