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시편 › 네 입을 넓게 열라

조용기 목사 | 2009.07.15 22:32:2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시81:8~10
설교자
조용기 목사
참고
2005년 8월 14일 주일 2부 설교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찌어다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네 입을 넓게 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어떤 정신지체 장애인의 아버지가 말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장애인은 이미 어른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또 신체가 부자유하여 스스로 전혀 생활할 수가 없었습니다. 늘 나이 잡수신 아버지가 대소변을 받아내 주셔야 하고 그리고 목욕을 시켜 주었습니다. 밥도 아버지가 입에 넣어서 대신 씹어서 그 아들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씹어서 넣어 주지 아니하면 이가 하나도 없어서 먹지도 못합니다. 아버지는 한편 생활 꾸려나가랴 또 다른 편으로는 장애아들을 돌보랴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은 생각이 여러 번 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만 보면 이 장애아들이 함박웃음으로 웃고 온몸을 틀면서 좋아서 버둥대는 것을 보고는 그만 마음에 한없이 불쌍한 생각이 솟아오르고 사랑이 가슴을 메워 도저히 그 자식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자가 그 아버지에게 어떻게 이 삶을 감당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다 이것이 운명이지요. 내 아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운명이고 나는 아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운명이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운명대로 살아야지요.” 그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기 위해 계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 운명입니다. 오늘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자기 중심에 서서 자력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첫째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성품은 항상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내게 달라고 하는 것 있습니까? 사랑은 항상 주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식에게 다 줍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사랑하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 늘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서 헌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만물을 지으시고 에덴을 예비하셔서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빛을 지어서 주시고 궁창을 만드셔서 주시고 땅, 바다, 식물, 일월성신, 물고기, 새, 육축, 기는 것 짐승 모든 것 다 만들어서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했는데 아름다운 에덴동산도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스스로 살겠다고 독립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은 외아들을 또 예비해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타락하고 반역하고 배반한 자식까지라도 그대로 버려두지 못하시고 건지려고 그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 어찌할 수 없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삶의 모든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시편 34편 9절에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먹이시고, 입히시고, 신을 신기시고, 보호하시고, 젖과 꿀이 흘러 가나안 땅을 예비하셔서 그를 이끄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천국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지상의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이 땅의 생명이 끝난 이후에라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처소를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요한계시록 21장 2절에도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유명한 신앙인이요,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에 이르는 비참한 존재라고 말한 그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인 관점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과거의 어느 한 시점부터 사랑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되 한 순간도 쉼 없이 일생에 걸쳐 매순간 우리보다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곳에 먼저와 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내 영혼이 기도 가운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나보다 먼저 그곳에 와서 계셔서 나를 기다리고 사랑해 주십니다. 복잡한 일상에 물러나와 내 영혼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거기서 조차 먼저와 계시고 또한 영원히 계십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와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성경에 말씀한 것입니다. 하늘에 태양이 365일 항상 이 땅에 비춰 주십니다. 그 태양의 따뜻한 온기가 아니면 아무 동식물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365일 동안 항상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도록 하려고 노력하는 분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향하여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넓게 열면 하나님은 쉬지 않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은혜

둘째,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란 값없이 복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사랑을 주시면 예수님을 통해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값없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타락의 굴레를 벗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이 타락의 굴레에 노예가 되어서 몸부림칠 때 이를 벗기기 위해서 주님이 타락한 인생의 모양으로 그 타락의 굴레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것을 벗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죄가를 대신지시고 죽음으로 청산 하시고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구원을 값을 주고 살수도 없고 노력해서 얻을 수도 없고 고행으로 취할 수도 없습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의 굴레를 덮어 쓰시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고난당하여 그를 꺾으시고 주님께서 해방과 자유를 주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선물입니까? 크리스마스 선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새해 선물과 어떻게 비교합니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실 때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서 새롭게 삶을 단장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무엇이 새로워졌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옛사람은 청산되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의와 영광의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거룩함과 성령 충만의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치료와 건강의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의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썩어지고 냄새나고 부패한 옛날 옷을 벗어서 던져 버리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셔서 새로운 영광스러운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날 옷을 입고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새롭게 옷 입은 것입니다. 이제 의로운 사람,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치료받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주에서 해방을 얻고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을 얻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부활과 영생과 천국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거기에 보태어서 주님은 3대 재앙에서 삼중축복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주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오고 저주를 가져오고 질병과 파멸을 가져왔지만 예수님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저주를 제하시고 사망을 철폐하시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새로운 우리의 모습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지위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족속이라는 지위를 주셨습니다. 만민 중에 주님이 택하여 세운 사람,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생명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제사장의 위치를 주었고 거룩한 나라를 만들어서 하나님이 친히 와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고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하나님이 품에 품고 보호하고 지키고 돌보는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놀라운 삶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끝없는 은총으로 채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입을 넓게 열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기를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시골에서 자랄 때 보면 항상 봄에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와서 집 처마에 제비집을 짓습니다. 열심히 흙을 물어다가 집을 짓고 난 다음 알을 낳고 새끼를 까면 엄마, 아빠가 열심히 다니면서 벌레를 갖다 물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비 새끼들 중에 어떤 것은 토실토실 하고 어떤 것은 비실비실합니다. 그것은 왜냐, 어미가 먹이를 물고 올 때 힘껏 입을 여는 놈은 제일 많이 얻어먹습니다. 제비는 새끼의 이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어느 놈에게 먼저 먹였고 그 다음에는 다음 놈 먹이고 다음 놈 먹여야 될 숫자개념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먹이를 물고 와서 입을 넓게 여는 놈부터 먼저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을 넓게 안 여는 놈은 잘 못 얻어먹어서 비실비실하고 입을 넓게 여는 놈은 토실토실 합니다. 우리도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우리가 입을 넓게 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풍성히 주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넓게 열지 않고 의심을 가지고 기도 열심히 하지 아니하면 비실비실한 신자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베풀어 줍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 고찬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안도 안주 출신의 갖바치로 전형적인 노름꾼에 사기꾼에 술꾼이었습니다. 관아에 수없이 잡혀가서 매를 하도 맞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때렸기에 벙어리가 되었겠습니까? 옛날에 인권이 있습니까? 잡혀가면 안 죽을 만큼 때리잖아요. 그러던 하루 그는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죽으려고 독약을 먹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사람이 반병신이 되어 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 와있던 미국 출신의 게일 선교사가 전도를 했습니다. 게일 선교사는 그에게 야곱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에 와서 그 전도지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날 밤에 꿈에 흰 옷 입은 누가 나타나더니 “야 이놈아! 네 이름이 뭐냐?” 그러시거든요. 깜짝 놀라서 그는 “고고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냐 그 당시에 천민, 신발 만드는 갖바치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성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고고고” 그랬지요. 그 다음 음성이 또 물었습니다. “야 이놈아! 똑똑히 말해라. 네 이름이 뭐냐?” 그래서 두려워서 벌벌 떨면서 “내 이름은 고가이구요. 싸움꾼이요, 술꾼이요, 망나니올시다. 당신이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크신 어르신 같은데 나를 좀 용서하고 살려 주십시오!” 그러니까 흰 옷 입은 그 사람이 탁 몸을 때리면서 “야 이놈아! 오늘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 이렇게 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후 하도 꿈이 이상해서 전날 받은 전도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지를 자꾸 읽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혀가 열려서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도 신기해서 그 전도지를 준 게일 선교사를 찾아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원래 이 고찬익이라는 사람은 짐승가죽으로 신을 만드는 갖바치로 조선사회에서 멸시받던 천민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라는 성만 있었지 이름이 없었는데 게일 선교사가 그분에게 찬익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많은 이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 그래서 선교사가 찬익이라는 이름을 주셔서 그 이름이 고찬익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새사람이 된 고찬익은 자신이 과거에 해를 입혔거나 신세를 졌던 사람을 찾아다니며 “나는 도둑놈에 싸움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신발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신발을 만들어 드리며 일일이 복음을 전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그 난봉꾼에 망나니가 저렇게 변화될 수 있느냐고 감탄을 했습니다. 결국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왔고 그는 1904년에 연동교회 장로가 되어 평생을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주안에 있으면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이요, 주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그 죄 값을 청산하셨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라도 예수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변화되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온 세상이 다 버린 사람이라도 아들로 만들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넘치는 사랑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의 교통

셋째로,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지고 교통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와 교통해 주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들이게 되고 우리는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종교를 얻어 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철학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윤리와 도덕교훈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쫓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회개하고 보혈로 씻고 성령이 와서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한 기독교 잡지에서 불신자 남편과 살던 자매님의 간증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자매님의 남편은 교회에 다니지 않고 오직 사업과 돈버는 데만 몰두해서 전혀 하늘나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매님은 그 남편의 구원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갑자기 부인을 따라 오늘 나도 교회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너무 기뻐서 기도응답이라고 마음속에 감사하면서도 너무 기뻐하면 또 도로 안나온다고 할까 싶어가지고서 태연하게 “웬일이요. 교회를 다 가자고 하고?” 그러면서 앞장섰습니다. 남편이 따라오는데 그는 계속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성령님, 성령께서 제 남편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말씀을 들을 때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 받게 해주옵소서’ 그는 교회 가는 발걸음이 어떻게 옮겨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설교말씀에 너무 부인은 낙심했습니다. 목사님이 창세기 5장 말씀을 했는데 누가 누구를 낳고 죽었더라. 누가 누구를 낳고 죽었더라. 누가 누구를 낳고 죽었더라. 아담이 셋을 낳고 죽었더라. 셋이 에노스를 낳고 죽었더라. 에녹이 게난을 낳고 죽었더라. 낳고 죽은 이야기만 자꾸 합니다. 부인이 앉아서 ‘아이고 답답해라. 아이고 모처럼 남편을 모시고 왔는데 늘 낳고 죽는 이야기만 하느뇨. 이 좋은 말씀 놔두고 그 말을 하느뇨’ 그래서 마음이 말로 다 할 수없이 답답했습니다. 자매님은 낙심하고 우리 남편이 다시는 교회를 안나올 것이다. 이런 설교를 듣고 누가 교회를 나오겠는가. 그런데 다음 주일날 남편보고 교회 나가자는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면서 준비하니까 “나도 간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남편을 모시고 나왔는데 그 다음 주간에는 예수 믿겠다고 일어나서 마음에 회개하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 부인은 너무 놀라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생각이 났습니까? 첫날에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난 이야기만 들었는데...” 그러니까 “여보, 나는 장사한다고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태어나는 것도 모르고 죽는 것도 몰랐소. 그런데 그날 보니까 목사님이 늘 하는 말이 누가 태어나서 죽었고 누가 태어나서 죽었고 누가 태어나서 죽었고. 내가 느낀 것은 아~ 인생은 태어났다가 죽는거구나. 나도 태어났으니까 죽을 날이 오는 것이니까 장사만 하지 말고 죽을 준비도 해야 되겠구나” 깊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태어나고 죽었단 말만해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되지도 않는 소리 같지만 성령은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 영혼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진리를 깨닫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변화시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보면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우리가 다 어떻게 압니까? 옛날에 불광동에 있을 때 점치는 아주머니에게 제가 성경을 주었더니 얼마 있다가 성경을 도로 가지고 와서 못 읽겠다고 합니다. 공짜로 드리는데 왜 못 읽느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잔소리가 너무 많아서 도저히 모르겠다. 그 거룩하신 분이 거룩하게 몇 마디만 말씀하지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냐고. 왜 무당 노릇하던 아주머니가 하나님 성경을 깨달을 턱이 있어요? 성령이 오셔야지요. 그런데 그분이 나중에 회개하고는 성경을 많이 읽고 깨닫고 그 아들을 목사까지 만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진리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은 은혜로 주신 것을 우리가 알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험한 세상에 태어나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성령께서 우리 도우미로 오셔서 모든 삶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승리의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게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알게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굉장히 달음질을 잘했습니다. 100미터 경기는 1학년 때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1등하는 것을 따 놓은 당상이었습니다. 운동회 할 때 언제나 제가 나서면 조용기가 1등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잘 뛰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운동회 때 제가 꼴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자신만만해서 이번에도 내가 상을 탄다고 생각하고 빨리 뛰어가서 종이를 주워서 펴면 누구하고 함께 뛰어라는 글이 나옵니다. 그러면 뛰어와서 그분하고 함께 뛰는데 탕 하기에 제가 제일먼저 뛰어 나가서 종이를 딱 주어드니까 할머니하고 같이 뛰어라. 그렇게 써 놓았습니다. 뛰어가서 할머니 손을 잡고서 좀 뛰자니까 할머니들이 뛰려고 해야 말이죠. 안 뛰겠다고 다 뒤로 발버둥을 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다가 나이 잡수신 할머니 한분을 모셔 놓으니까 할머니가 뒤뚱거리며 뛰어야 말을 하지요. 내가 끌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반에서 제일 못 뛰는 애가 일등을 했습니다. 걔는 글을 펴보니까 체육선생하고 같이 뛰어라... 체육선생이 걔를 안고서 뛰었는데 일등을 해버렸습니다. 그 기억이 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생을 누구하고 함께 뛰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할머니와 함께 뛰는 사람과 체육선생하고 함께 뛰는 사람이 누가 잘 뛰겠습니까? 인생을 여러분이 세상에 혼자 뛰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성령과 함께 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보혜사라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인생을 뛰어야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말할 줄 모르잖아요. 더듬거리고 그래도 성령께 의지하면 그렇게 조리정연하고 말을 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우리 반에 있던 여학생 한사람이 방직공장에 노동자로 일하다가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초등학교밖에 못나왔습니다. 별과생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냥 공부할 때는 아무 말도 못해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잘 못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저 바보가 왜 신학교에 들어왔나? 쟤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겠나?’ 그랬다가 하루에 제가 크게 회개했습니다. 늘 토요일에는 파고다 공원에 전도를 나갔는데 저는 전도부장이었습니다. 북을 매고서 둥둥 북을 치면서 사람들을 모았는데 제가 그 여학생을 “오늘 네가 설교해라.” 그랬습니다. 내 속으로는 죽을 쑤어도 완전히 팥죽을 쑬 것이라고 생각하고 “네가 설교해라.” 딱 서서 설교하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보입니다. 얼굴이 새빨갛게 되더니만 그냥 입을 여는데 폭포수같이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데 사람들이 다 듣고 박수를 치고 그러더라구요. 와~ 제가 도저히 눈을 믿을 수 없고 귀를 믿을 수가 없어요. ‘저 바보가 어떻게 저렇게 설교를 잘하느냐?’ 강단에서 내려오고 난 다음에는 여전히 바보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 걔는 성령이 충만한 애라. 기도할 때 성령이 충만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애였습니다. 나중에 목사 사모가 되었지만 놀라운 은혜가 역사해서 성령이 오시면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준다는 것을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능력을 주시고 우리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와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새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어떻게 새사람이 되어요. 그러나 성령이 우리를 꾸짖고 달래고 위로하시고 가르치고 격려해 주셔서 우리를 새사람이 되도록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누에가 고치 안에 들어가 있다가 나비가 되어 나오는 것처럼 우리 속에 점점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나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인간의 운명

넷째로,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살 운명이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가다듬어 살아야 되겠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운명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제가 이야기 해드린 것처럼 불구자인 아들이 별도리 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살아야 될 운명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을 받아서 살 운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인간은 자기 주체로 스스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중심으로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존재 형식을 잘 알아야 돼요. 여러분 성경에는 사람을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성전, 우리가 이 성전이라면 성전은 자체적으로 의미가 없어요. 성전은 성령이 와서 거하셔야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텅 빈 공간만 있으면 그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전같이 내용을 가져야 될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야 될 운명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또 인간은 하나님을 모시는 질그릇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릇은 내용물을 담아야 그릇이지 내용이 없는 그릇은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릇입니다. 우리 내용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담겨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포도나무와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인데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습기와 양분을 받아서 살 수 있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우리 스스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예수님을 성령님을 모신 성전이요, 하나님과 아들과 성령을 모신 그릇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가지이므로 어찌할 도리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했으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전같이 텅 빈 공간으로 입을 넓게 열고 아버지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을 받아 들여야 되고 그릇같이 오므라진 그릇이 아니라 활짝 펼쳐진 그릇이 되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그릇 속에 담고 살아야 돼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포도나무에 꽉 붙어 있어가지고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물기와 양분을 받아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살 때 생각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왜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 내 힘으로 인생을 산다는 생각을 없애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6장 33절처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섬기고 살면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생각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쓴 간절히 원하면 이루리라는 책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한사람이 바다낚시를 갔는데 옆에 사람이 부지런히 낚시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30cm되는 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기를 낚아서 고기가 팔딱팔딱 뛰어오면 그 낚시바늘에 꿰어서 30cm되는 자로써 재어보고 25cm가 되면 바구니에 넣고 25cm가 넘으면 도로 물에 던져 넣습니다. 가만히 보면 또 생선을 낚으면 25cm 이하는 바구니에 넣고 25cm가 넘으면 물에 놓아줍니다. 하도 이상해서 곁에 가서 “선생님은 철학자군요” “왜요?” “생선을 잡아 가지고서 25cm이하는 바구니에 넣고 25cm이상은 놓아주니까 특별한 철학적인 무슨 철학적인 뜻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허허허~ 아니에요. 우리 집 프라이팬이 25cm밖에 안됩니다.”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굳어져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프라이팬이 25cm이면 30cm 되는 생선을 잡으면 반을 자르면 거기에서 요리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그는 마음을 변화시킬 줄 모르고 꼭 전통적인 25cm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인본주의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살지 않으면 못산다고 생각하는 굳은 마음을 변화시켜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을 도와주신다고 생각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생각이 바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태양빛처럼 비춰서 우리를 채워 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은혜로 채워 주시고 성령이 교통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바라보고 입을 넓게 열고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요.
창세기 13장 14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바라보면 채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5절에도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늘에 별들을 헤아리고 바라보면 그 별들의 수와같이 자손들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채우시는 하나님을 늘 바라보면 하나님이 채우시는데 없는 것만 바라보고 절망만 바라보고 땅만 바라보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한없는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그 끝없는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성령님의 놀라운 교통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예비하고 찬미하십시오. 네 영혼아 야웨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웨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내 모든 죄를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하사 내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와 같은 큰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채워 주시기를 구하십시오.‘하나님 나는 성전이니 성전을 채우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는 그릇이니 그릇을 채우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는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니 가지에 습기와 양분으로 채우소서.’ 하나님께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 종근당 제약회사라는 약 만드는 회사가 있지요. 그 로고가 종입니다. 그 약회사의 로고가 종이에요. 왜 종근당 제약회사의 로고가 종입니까? 옛날 서대문 영천시장에는 콩나물 장수 아줌마가 많기로 유명했는데 그중에 신앙심이 매우 깊은 아줌마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콩나물을 이고 시장에 나오기 전에 반드시 교회에 나가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나왔는데 그 새벽기도의 제목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콩나물 장사를 하고 살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자식들을 원만히 공부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자식들이 다 예수 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세상에 유익된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매일매일 콩나물을 이고 시장에 나오기 전에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콩나물 장수 아주머니의 기도를 들어서 자손들이 다 잘되었어요. 다 훌륭한 대학을 나오고 출세했는데 그 자녀 중에 한 사람이 종근당 제약회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어머니의 간절한 새벽기도를 통해서 그가 성공을 했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은혜를 내 제약회사에 반영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아~ 교회 종이 생각났습니다. 항상 새벽에 교회종소리만 들리면 어머니가 교회 나갔으니까 내 약회사 로고를 종으로써 교회 종으로써 표시해서 어머니가 매일 종소리만 들리면 교회가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래서 종근당 회사를 세울 때 회사로고를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 많은 축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머니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새끼 새가 입을 딱 벌려야 주지 입을 벌리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못 얻어먹습니다. 하나님도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두드리지도 아니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는 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감화, 감동 속에 끝없이 감사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건강하다는 표시는 감사와 찬송과 기쁨입니다. 내 영혼이 병들었다는 증거는 원망과 불평과 탄식과 좌절입니다. 아주 쉬워요. 내가 영적으로 병들었느냐. 내 영적으로 건강하냐. 내 스스로가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뻐하고 긍정적이면 내 영혼이 건강하다. 원망과 불평과 탄식 그리고 좌절하면 내 영혼이 깊이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시편 22편 3절에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찬송하면 그 가운데 하나님이 와 계십니다. 원망, 불평, 탄식하면 그 가운데 사탄이 와서 있는 것입니다. 다른데 하나님이 계시고 다른데 사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고통스러울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며 믿음의 입을 넓게 열면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썼던 조지 프레드릭 헨델은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 편이 실패하고 그의 라이벌이었던 보논치니의 쉴 새 없는 공격으로 그는 거의 파산지경에 봉착했습니다. 런던에는 헨델은 이미 끝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습니다. 절박해진 헨델은 하나님께 나가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헨델이 이렇게 기도를 시작한 뒤 23일 만에 완곡한 곡이 저 유명한 메시아입니다. 그는 잠도 자지 아니하고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문을 닫아 걸어놓고 23일 동안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작곡을 한 것입니다. 23일 동안 기도하다가 작곡하고 작곡하다가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그는 대곡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합창곡 제44번 할렐루야를 작곡한 후에는 눈에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앞에 천국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았다. 오~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셨구나~”라고 외치고 나왔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모두 가망이 없다고 하는 때에 하나님이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알고 23일 동안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울부짖은 결과로 하늘의 계시가 나타나서 헨델은 저명한 곡을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채우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다 포기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입을 넓게 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지체 장애인은 사랑과 은혜와 도우심을 받아 살 운명이고, 그 아버지는 사랑과 은혜와 도움을 베풀 운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운명치고는 기구한 운명 아닙니까? 그래도 아버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의 아들과 아들에게 도움을 베풀지 않고는 죽을 수도 없는 아버지의 운명을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바로 도움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도울 수밖에 없는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도우심을 받아야 삽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교통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교통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 없고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깨어진 마음과 항복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믿고 성령과 교통하며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도록 성장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사랑받을 운명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할 운명이고 성령님의 변화시키고 교통을 해주시는 은혜를 받아야할 운명입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없이는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운명입니다. 또 하나님은 어찌할 수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 예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성령은 교통해 주실 처지에 계십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은혜받기 위해서 태어난 인생인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성령님과 교통해야 살 수 있다는 인생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 성령님의 은혜 속에 더 깊이깊이 입을 넓게 열고 들어가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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