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

조용기 목사 | 2009.07.15 22:34:2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9:12~13
설교자
조용기 목사
참고
2005년 8월 21일 주일3부설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아침에 성전 뜰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기울인 귀를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성경에 보니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증거 할 때 하나님의 치료하는 능력이 함께 임하셨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임재하신 곳에는 치료하는 광선이 발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치료를 받고 육체에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을 증거 하실 때 사람들은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저는 어떤 천막 부흥회에서 은혜 받은 사람이 간증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가 하는 말이 “나는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마음이 부드러워졌습니다.” 그 다음 하는 말이 “마음만 부드러워진 줄 알았는데 얼굴도 만져보니 부드러워졌고 손도 말랑말랑하게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참 무식한 소리한다” 그런 소리를 했는데 저도 은혜 받고 성령이 충만하니까 얼굴도 보들보들하고 손도 말랑말랑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심취해서 있는데 갑자기 새벽공기를 가르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건장한 남자들이 한 여자를 끌고 들어왔습니다. 옷매무새가 다 흐트러지고 머리가 산발이 되고 울어서 눈은 퉁퉁 부었고 신발도 벗긴 채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예수님은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뭘 적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적은 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주님께서 다시 허리를 펴서 사람들을 큰 자부터 적은 자까지 눈을 맞춰 보시고 난 다음 장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써 이 여자를 쳐라” 그리고는 엎드려서 손가락으로 글을 적기 시작하는데 사람들마다 그 손가락을 따라 글을 읽더니만 큰 자로부터 적은 자까지 모두다 슬그머니 돌을 그 자리에 놓아두고 그 자리를 떠나가 버렸습니다.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허리를 펴서 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를 보고 말했습니다. “여자여 고개를 들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여자가 퉁퉁 부은 충혈된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니 돌만 양사방에 흩어져 있고 아무 사람도 없다 말입니다. “주님 아무도 없나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집에 돌아가서 다시 범죄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율법주의와 위선

첫째로, 우리가 이 말씀 속에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율법주의자는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 즉, 모세의 제자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잡혔으니 모세의 율법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고 했는데 이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들은 어마어마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왜냐? 간음할때 혼자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간음을 하는 것입니다. “어제 간음한 여자를 잡았습니다” “한 달 전에 간음한 여자를 잡았습니다” 하면 말이 됩니다. 그러나 간음하는 현장에서 여자를 잡았다면서 왜 여자하고 남자하고 같이 끌고 오지 여자만 끌고 왔습니까? 위선자들 아닙니까? 이것은 아예 계획적으로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정직한 사람이면 여자와 남자를 현장에서 붙잡았으니 둘 다 현장에서 끌고 와야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보면 처녀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간통할 때나 남의 아내와 간음할 때는 어느 경우든 남자와 여자 두사람 다 돌로 쳐 죽이거나 죽이라고 율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선자들은 두 사람을 다 끌고 오지 않고 약한 여자만 끌고서 예수님께 와서 그를 정죄하고 심판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자인 바리새, 사두개, 교법사들의 위선에 대해서 예수님은 엄하게 심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허리를 굽혀서 글을 적은 것은 내 생각으로는 율법을 적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 그 율법을 적으니까 이 사람들이 기세등등해서 그러면 그렇지 모세의 율법대로 이 여자는 간음하다가 잡혔으니 돌로 쳐 죽여야 된다고 그들은 주장, 주장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허리를 펴서 그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난 다음 “당신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난 다음 다시 글을 적을 때는 그들의 감추인 죄악을 주님이 적어 내려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감추어 놓은 죄를 예수님이 일일이 적어 내는 것을 보고는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몸부림쳤습니다. 너무나 겁이 났습니다. 사람들 앞에는 위선을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을 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손가락이 적어 내려가는 그 글을 볼 때 자기들의 죄가 천하에 드러나자 큰 사람부터 적은 사람까지 돌을 버려두고 다 슬그머니 도망을 치고 만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설교자요, 신학자였던 아이언 싸이더 박사가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의견이 옳으냐? 저 의견이 옳으냐 참석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럴 때 한 청년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목사님! 법대로 합시다. 법대로 합시다.” 그러자 아이언 싸이더 박사가 그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법대로 하기를 좋아하지 마시오. 하나님께서 법대로 자네를 판단하셨다면 이미 자네는 지옥에 가있어야 할 사람일세.” 맞습니다. 세상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요구합니다. 이것은 자신들은 얼마든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하지만은 실상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부정하고 부패한 사람들로 위선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의롭다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앞에서는 자기 죄를 감출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는 감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내가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내 자신이 헤아림을 당한다고 말씀했습니다.

2.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므로 오늘 두 번째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싶은 것은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율법을 주님이 다 적어놓으시고 난 다음에 율법대로 심판하겠다고 고함고함치는 사람에게 너희들 스스로를 율법에 비추어 보고 양심에 가책이 없고 죄 없는 사람이 돌로써 먼저 여자를 쳐라.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이 위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돌로 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은 그들의 생애를 열린 책처럼 환히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그들의 죄를 적어 내려갈 때 그들은 하늘이 아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여자를 돌로 치고 난 다음에는 그들 스스로가 그 돌에 맞아서 죽어야 될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들이 자신만만하게 선 것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그들이 흠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교인들과 사두개교인들, 교법사들은 말할 필요 없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우상에 절하지 않고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설 수 있다. 그러나 그다음 계명이 문제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여기에는 그들이 흔들렸습니다. 돌로 쳐 죽이는 죄는 7계명까지입니다.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 죄를 범하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다음 죄는 돌로 쳐 죽이는 법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돌로쳐 죽이는 죄에 해당하는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이 5계명에서 7계명 앞에 그들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적어 내려가는데 그 죄에 모두 다 해당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남을 벗기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가 벗김을 당할 때는 안절부절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를 간음했다고 쉽게 정죄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들추어 낼 때는 그들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 아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그들을 벗기니까 그들은 심판 앞에 몸서리쳤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아무도 이 세상에는 자신만만한 의인은 없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도 똑같은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1절로 3절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사람들은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하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이 결국에는 자기에게 잣대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존 맥스웰 목사님이 지은 ‘관계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시간을 끌면 느린 것이고 내가 시간을 끌면 철저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으른 탓이고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바쁜 탓이다. 다른 사람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 주제넘은 짓이고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 주도권이 있는 자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무례한 짓이고 내가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창의적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윗사람을 즐겁게 하면 아첨이고 내가 윗사람을 즐겁게 하면 협조하는 자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앞서면 규칙을 어긴 것이고 내가 앞서면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도덕적으로 불륜을 하면 스캔들이고 내가 불륜을 행하면 로맨스고. 이렇게 사람들은 잣대를 바꿔서 남을 재고 자기를 잽니다. 사람들은 남에 대한 잣대와 자신에 대한 잣대를 달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도 똑같은 판단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남을 비정하게 판단하고도 자기는 판단 안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인 것입니다.
이런 우화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무죄를 주장했으나 관에서는 그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사형날을 정해서 그날이 다가왔습니다. 형장에 끌려 나간 그는 베푸는 사람에게 청원을 했습니다. “내가 임금님에게 꼭 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드릴 수 없고 임금님에게만 드리겠으니 임금님이 와서 내가 드리는 것을 받도록 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임금님이 오니까 신하들이 다 따라왔습니다. 이 사람이 포켓에서 금덩어리 하나를 끄집어내서 “임금님 이 금덩어리는 내가 부조전래로 이어받은 귀한 금덩어리입니다. 이 금덩어리를 심으면 나무가 되어서 금 열매가 열립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사람이 심으면 금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죄인으로 사형당하기 때문에 심어봤자 열매가 맺지 아니할 것입니다. 또 죽으니까 열매를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임금님같이 죄가 없는 의로우신 지도자에게 이 금덩어리를 드리니 제발 임금님 정원에 심으셔서 금이 주렁주렁 열려서 크게 부귀를 누리십시오.” 임금님이 그 금을 받아서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심었다가는 금이 안 열리겠거든 자기도 죄가 많으니까. 옆에 있는 신하를 보고 “자네 나는 이미 금이 많으니까 자네가 심어서 금 열매를 따게.” 신하 얼굴이 새하얗게 되면서 “아니올시다. 나도 금이 많은데...” 옆에 동료를 보고 “자네가 갖다 심게” 그분도 받아서 다른 동료보고 “아니야~ 자네가 심게.” 금이 자꾸 돌아가서 나중에는 도로 임금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죄수가 하는 말이 “임금님 보십시오. 한사람도 죄 없는 사람이 없잖아요. 아무도 죄 없는 사람이 심으면 금 열매가 열리는 이 금덩어리를 못 심잖아요. 그러므로 나는 억울한 사람입니다.”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큰일 났습니다. 이 사람을 사형에 처하면 자기도 사형을 당해야 되겠거든.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으니 공평하게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너는 참 지혜로운 사람이다. 네 지혜 때문에 네 죄를 방면한다.” 그래서 이 사람이 사형을 당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우화에 나와 있는 것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우화가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 환경에 처하면 똑같이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절에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에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잘못은 어찌하든지 타당화하고 감춥니다. 그러나 남은 사정없이 비평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비평하는 그 비평으로 내가 비평받게 되고 내가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내가 심판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시는가?

셋째로, 오늘 생각하고 싶은 것은 주님은 율법을 무시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자를 주님께서 돌로 치지 아니하시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 이 여자를 무죄방면 하였느냐. 예수님은 그러면 율법을 무시하느냐?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제사라는 것은 뭡니까? 죄지은 사람이 심판을 받고 정죄를 받고 사형에 처하게 되면 살아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아담의 자손치고 죄를 안 지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죠.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짐승을 가지고 와서 짐승의 머리위에 안수하고 죄를 고백하고 짐승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재물이 되어서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리고 그 몸은 불태웠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이 곧 사람을 대신해서 정죄를 받고 심판 당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 주님은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정죄하고 심판해서 죽이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용서와 치료와 사랑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사랑과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죄인을 모두 다 심판하시면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제사를 원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네가 죄지은 죄로 재물이 되라. 심판하고 정죄해서 죽인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작은 죄도 죄인이고 큰 죄도 죄인입니다. 호수에 돌을 던져 보십시오. 작은 돌도 가라앉고 큰 돌도 가라앉습니다. 다른 점은 퐁당하는 말과 풍덩하는 소리인 것입니다. 소리만 달랐지 다 가라앉습니다. 적은 죄도 사형에 처하게 되고 큰 죄도 사형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 앞에 의롭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온 것은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긍휼을 베풀어서 용서하고 구원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아야 돼요. 주님께서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자를 정죄하고 심판하고 돌로쳐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한 것은 그 여자를 돌로 치면 거기에 있는 사람 한사람도 돌로 안 맞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율법의 심판의 잣대로 재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여자를 돌로 친 사람들도 다 돌에 맞아 죽어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시체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남의 죄를 심판하고 정죄하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똑같이 다 죄인들로 하나님 눈앞에서 볼 때는 다 정죄 받고 심판당하고 죽임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선 모세의 제자들,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들이 모두다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있다가 돌을 다 놓아 버렸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돌을 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 다 심판받을 대상이기 때문에 아무도 돌을 들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돌을 들어서 여러분 이웃을 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 앞에 서보면 돌에 맞을 자인 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향하여 돌을 들지 말아야 돼요. 아내도 남편을 향하여 돌을 들지 말아야 돼요.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향해서 돌을 들지 말아야 돼요. 우리도 이웃을 향해서 돌을 들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가 던지면 그 돌은 나에게 돌아와서 나를 때려 죽일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웨슬레가 길을 가다가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과 사이가 나빠져서 서로 욕하고 저주하며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웨슬레가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이제 자네 친구를 용서할 때가 왔네. 용서해 주게나.” 그러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나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사람 용서할 수 없네. 나는 그 사람이 기어코 심판받기를 원하네.” 그러자 요한 웨슬레가 “그래? 그러면 더 이상 내가 어찌할 수 없겠다마는 자네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게나. 죄지으면 자네는 천당에 못 들어간다. 왜? 사람이 한평생에 죄를 한번도 안 짓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성경에 이 사람아 뭐라고 말했느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했는데 네가 네 이웃을 사하여 주지 못하면 네 죄도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못 받기 때문에 죄인인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설수 없잖아. 용서 못 받잖아. 그러므로 자네도 천당 못 들어가네.” 그 말에 깊은 충격을 느끼고 자기 이웃을 용서하고 이 사람이 새사람이 되었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이시여 내 이웃이 죄를 범했을 때 하루에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용서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은 이유는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여자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해서 정죄 받고 심판받고 죽으러 오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가지고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의 죄도 여러분과 나의 죄도 주님이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대신 정죄 받고 심판 당하고 죽어서 죄가를 청산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주님은 아무도 정죄나 심판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주님이 성찬 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다 청산했습니다. 주님이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보신다면 이 여자도 돌에 맞아야 되고 여러분과 나도 다 돌에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십계명 앞에서 가슴 펴고 “나는 죄 없습니다.” 할 사람 있습니까? 여러분 평생에 다른 신을 섬긴 적이 없습니까? 우상에 절한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른 적이 없습니까? 안식일을 거룩히 안 지킨 일이 없습니까? 여러분 부모에게 철저히 하나님이 요구한대로 효도했습니까? 마음으로도 살인한 죄 많지요? 마음으로도 실제로도 간음한 사람 허다히 많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손에 돌을 들고 남을 치겠습니까? 그 돌이 내게 날아올 줄을 뻔히 우리는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정죄와 심판과 사형선고를 대신 짊어졌습니다. 너희 죄, 나의 죄, 우리의 죄를 주님이 다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해서 주님은 정죄 받으시고 심판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받았습니다. 몸부림치고 고통을 당하면서 피를 다 흘리고 몸을 찢고 죽음을 맛보시고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모든 것을 다 청산하시고 승리하고 부활하여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제 정죄도 심판도 죽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정죄 받아 버리시고 심판 받으시고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에 율법이 아무리 정죄하려고 해도 주님이 말합니다. “내가 정죄 받았다.” 율법이 심판하면 “내가 대신 심판 받았다.” 율법이 죽이려고 하면 “내가 대신 죽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정죄도 심판도 죽음도 다 무력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밖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 때문에 정죄 받고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아무리 율법이 쏟아지는 정죄와 심판과 사형을 언도해도 우리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제 모세의 율법이 용도가 달라졌습니다. 원래 모세의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율법이었지만 예수님이 우리 대신해서 정죄당하고, 심판당하고, 죽었기 때문에 예수의 보혈이 우리를 덮고 있으므로 아무리 율법이 우리를 정죄해도 보혈이 말합니다. “내가 다 대신 갚았네”. 율법이 아무리 심판해도 보혈이 말합니다. “내가 대신 심판 받았네.” 율법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내가 대신 죽었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의 보혈이 우리를 정하게 하고 의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고 만 것입니다.
♬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
예수님의 피아래 들어오면 어떠한 율법도 우리를 정죄하거나 심판하거나 죽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로 15절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에서 행한 두 가지 거대한 일이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율법의 권세를 다 완성하고 철폐해 버린 것 하고 죄 때문에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권세를 무장 해제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보혈 앞에 율법도 마귀도 무력하게 되고 우리는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24시간 예수님의 보혈 아래 있어야 되고 보혈을 믿고 의지하고 찬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율법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율법은 용도가 변경되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율법이 아니라 우리를 이제는 씻어주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보여주는 거울이 되고 또 율법은 우리가 올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가드라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를 정죄하거나 심판하거나 죽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때문에 율법은 우리에게 거울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지 안 사는지 보여주는 거울이요, 우리가 하나님 뜻으로 살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어린아이의 선생역할을 율법이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율법의 삼중직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율법은 우리의 죄악을 폭로하는 거울과 같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비춰주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범법자임을 깨닫게 한다. 율법이 없으면 내가 죄를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여 내가 죄지은 것을 알면 곧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우리의 도우미가 되는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사악한 자들을 견제하고 억제하므로써 사회를 보호하고 평화로운 삶을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죄인을 보고 하나님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불의한 자를 불의한 길에서 떠나라고 명령해서 사회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막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은 신자들의 신앙을 돕는 율법입니다. 율법을 통해 신자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안에서 신앙을 강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을 보고서 아~ 이 길이 하나님의 길이구나. 그래서 율법을 따라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러므로 우리를 도와주는 도우미가 되는 것이지 이제는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이는 역할은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율법은 회개와 신앙의 몽학선생 역할을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난달 13일에 서해와 남해에서 우리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2대가 야간훈련을 하다가 추락을 했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비행기 엔진이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전투 조종사들의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탁월한 조종기술을 가지고 있는 그들인데도 왜 바다에 곤두박질치고 떨어지고 순직했습니까? 그것은 비행기를 밤중에 타고 훈련하면서 회전운동을 훈련할 때 ‘vertigo'라는 비행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행기가 휘~하고 공중제비를 할 때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니까 하늘인지 바다인지 몰라서 하늘인줄 알고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한 비행착오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속도를 내어 운전을 하는데 옆으로 빙 돌때는 속도를 내면 공중으로 올라가는지 떨어가는지 모른답니다. 비행기를 조종할 때는 언제나 사람의 시각과 판단력은 믿으면 안 됩니다. 언제나 계기판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바다가 꼭 하늘같아도 계기판에 아니야~ 바다라고 하면 빨리 돌아서 하늘로 향해야 되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바른 길로 가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계기판을 보면 잘못 간다고 하면 계기판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비행기 조종사는 자기의 시각이나 감각이나 판단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착각이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계기판은 진실을 말합니다. 높다. 낮다. 거꾸로 간다. 잘못간다는 것을 계기판이 보여주기 때문에 조종사는 계기판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 감정이나 기호를 따라서 하면 안 됩니다. 내 감정으로 느낌으로 이것은 죄가 아닌 것 같다. 느낌이 죄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내가 좋아하면 죄가 아니고 내가 싫어하면 죄다. 그것 절대로 아닙니다.
내 생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법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그것을 보고 따라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마음에 평안해도 법이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을 가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하나님 법이 이것은 위험하다 하면 그길로 따라가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주는 좋은 가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이후로는 우리의 율법은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율법은 정죄하는 율법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우리를 보여주는 가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 않는다. 예수님께서 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보고 말했는데 정죄하기 위해서 이제는 율법이 있지 않습니다. 정죄해서 우리를 심판해서 죽이려고 하는 율법이 아니고 거울과 같이 우리의 잘못한 행동을 보여주므로 이를 씻으라. 이를 빨리 보혈로 씻으라고 가르쳐 주는 선생역할을 하는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주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율법의 권세를 다 철폐해 버린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고 심판받고 멸망받기를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심판과 정죄와 멸망을 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십자가 이후로 예수님은 용서와 구원과 은혜를 베푸는 시대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하기를 ‘아이고 저 사람 하나님이 그냥 콱 쥐어박아 버리면 좋겠다. 저 사람 교통사고 나서 죽어 버리면 좋겠다. 온 가족이 멸망하면 좋겠다’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이웃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멸망을 하려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노라.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해서 죽이는 제사는 내가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대신 재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긍휼을 원한다. 용서받고 변화 받고 의롭게 되고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시대가 달라진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국교회가 뉴질랜드에 헌신적인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몇 년 동안 그 선교사는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했습니다. 한번은 성찬주일날 성찬을 베푸는데 야만부족 소속으로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성찬 받으려고 무릎을 꿇어서 성찬의 떡과 잔을 받으려고 하다가 뒤를 힐끗 보더니만 그만 일어나서 얼굴이 확 홍당무같이 되어서 뛰어 나갑니다. 성찬이 다 끝날때까지 안 들어오더니만 끝날때쯤되어서 들어와 버들버들 떨면서 꿇어 앉아 성찬의 떡과 잔을 받고 나갔습니다. 예배가 필하고 난 다음 목사님이 그분을 불렀습니다. “왜 성찬을 받으려고 하다가 밖으로 뛰어 나갔다가 나중에 부들부들 떨면서 들어와서 성찬을 받았느냐?” 그러니까 그가 하는 말이 “내가 성찬을 받으려고 하다가 뒤를 돌아보니 뒤에 있는 사람이 우리 부족과 원수된 추장이다. 그는 우리 아버지를 죽여서 심장의 피를 뽑아 먹은 사람이다. 나는 원한에 사무쳐서 내가 살아있는 이상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그 사람도 교회에 나와서 내 뒤에서 성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 난 밖에 나가서 무기를 가지고 들어와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밖에 뛰어 나가서 무기를 손에 잡는데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데 예수님을 향해서 침을 밷고 고개를 흔들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향해서 주님이 ‘주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저러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정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자 자기 가슴속에서 칼이 툭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도저히 예수를 믿고는 이 사람을 죽일 수가 없어서 제가 회개하고 돌아와서 다시 성찬을 받았다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예수님 앞에서는 손에 돌을 들고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교인, 사두개교인, 교법사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돌을 들고 왔지만 결국 예수님 앞에서는 돌을 다 놓고 떠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 앞에서는 돌을 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원수들도 예수님 앞에서는 자기들의 죄가 백일천하에 들어날 것이기 때문에 돌로 칠 수가 없기 때문에 돌을 놓아 버렸는데 하물며 예수믿는 사람들이 돌을 들고 예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가 어떻습니까? 여러분 TV를 보십시오. 신문을 보십시오. 방송을 들어 보십시오. 돌이 동서남북해서 나르고 있습니다. 온 천지에 돌멩이 천지입니다. 청와대도 돌이 꽉, 국회에도 돌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온 기업체도 돌이요, 온 개인도 돌이요, 서로 돌을 던져서 우리 한국은 지금 돌무더기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심판하고 서로 정죄하고 서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조차도 서로 심판하고 정죄하고 서로 죽이려고 합니다. 교회 앞에도 돌무더기가 쌓입니다. 우리 강단 앞에도 돌무더기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집에는 돌무더기가 없습니까? 남편은 아내를 향해서 돌을 들지 않아요?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 돌을 들지 않아요?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돌을 들지 않아요? 오늘날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이라는 이름으로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고 심판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아무도 돌을 들자가 없는 것은 주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남을 심판하면 나도 그로써 심판 받아야 되고 내가 남을 정죄하면 그 정죄함으로 나도 정죄 받아야 되고 내가 남을 돌로 치면 나도 돌로 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서는 손에서 돌을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라도 여러분께서 주님과 같이 동행하려면 손에서 돌을 놓아야 됩니다. 돌을 들고 목사가 될 수없고 돌을 들고 장로 못됩니다. 돌을 든 안수집사, 권사, 집사가 될 수 없고 지역장, 구역장, 평신도가 될 수 없습니다. 돌을 들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찬양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는 원수들도 돌을 놓습니다. 하물며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이 돌을 들고 어떻게 주님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거나 비평하고 그를 정죄하기 위해 돌을 들었으면 오늘 그 돌을 다 놓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자를 보고 말씀하기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보니 돌만 전부 너저분하게 놓여있고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돌아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말아라.” 주님의 율법은 정죄하는 율법이 아닙니다. 주님의 율법은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율법인 것입니다. 이제는 정죄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제사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재물이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 이루어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는 용서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이제는 다시 죄를 짓지 말라. 용서받고 회개하고 변화시키는 역사의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잘못을 비춰 주시므로 회개하고 바르게 되게 하는데 어린아이의 선생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번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는 주님인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으로 주님이 정죄하고 심판하고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신 정죄받고 심판받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 보혈로 말미암아 주님은 우리에게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고 의롭게 만들어 주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꺼번에 여러분 의로운 사람이 됩니까? 여러분 자식기를 때 하루 아침에 똥, 오줌 다 가려내고 자기 손으로 밥먹고 옷입고 올바르게 됩니까? 오랜 세월동안 부모가 참고 견디면서 돌보아 주고 용서하고 돌보아주고 용서하고 돌봐주므로 똥, 오줌을 다 가리게 되고 자기 스스로 옷 입고 밥 먹게 되고 성인이 되지 않습니까? 많은 용서와 돌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영적으로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한꺼번에 당장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쓰러지면 또 용서하고 넘어지면 또 용서하고 또 일으키고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에게 너 잘못했다. 거울로 비춰주고 이것 고쳐라. 저것 고쳐라. 가르켜 주고 그 다음에는 다시 정죄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이래서 오랜 세월이 지나서 우리들은 주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용서와 의와 영광을 받았으면 남도 하나님 앞에 용서하고 하나님께 의를 받고 영광을 받도록 오래참고 우리가 기도하고 도와 줘야만 되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중국에서 선교를 한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행을 떠나는데 돌아오니까 집에서 일하던 중국 사람이 있는 것을 몽땅 다 훔쳐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찰에 고발을 하고 경찰이 그 사람을 잡았습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을 놓아주라고 경찰에 부탁을 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당신을 잡은 이유는 당신을 감옥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죄에서 용서받고 영혼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내가 당신을 돌보려고 한 것입니다. 나는 물건이 아까워 당신을 잡아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영혼이 아까워서 편지를 씁니다. 나는 이미 당신을 용서했으니 당신도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바르게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율법이란 용서하고 바르게살기 위해서 도와주는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그 중국인은 편지를 받고 허드슨 테일러의 용서와 사랑에 감복해서 훔쳐갔던 물건 도로 다 가져오고 변화 받아 그는 나중에 주의 종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 율법은 정죄하기보다 용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바른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율법주의자들의 정죄와 심판으로 돌무더기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회가 교회 정문에서부터 강단까지 정죄와 심판의 돌로 꽉 들어찼습니다. 서로 돌을 던집니다.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옷깃을 여미고 경청할 때입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나는 도를 원하지 않는다. 서로 던지고 서로 상처 입히는 것 원하지 않는다. 나는 제사를 원치 않는다. 심판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것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긍휼을 원한다. 나는 용서하고 의롭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고 구원을 받게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쟁의 폭격으로 황폐해진 산천에도 세월이 지나면 아름다운 꽃들과 숲이 생겨납니다. 산불이 스쳐간 곳, 홍수가 쓰러간 곳, 지진이 허물어뜨려 놓은 곳이라도 자연은 세월을 통해 인간의 횡포를 용서하고 사랑의 손길로 상처 난 곳을 치료하여 아름다운 풀이 나고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치유가 없이는 인간과 자연역시 함께 생존할 수 없습니다. 용서와 사랑과 치유는 자연의 질서요, 인생의 질서인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치유가 없이 가혹한 정죄와 심판과 형벌만 있는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세계는 황폐해지고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용서와 사랑과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우리의 정죄와 심판과 죽음을 청산해 버리시고 이제는 주님 앞에서 끝없는 용서와 사랑과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영생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려고 오늘도 노력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손에 돌을 들고 주님을 섬길 수가 없사옵니다. 예수님이 원수들조차도 예수님 앞에는 돌을 다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물며 예수믿는 우리들이 이웃을 칠려고 손에 돌을 들고 주님을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이시여 주님은 용서를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의 가슴속에 용서와 사랑과 치유를 가지고 신앙생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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