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고린도후 › 가시와 영광

조용기 목사 | 2009.07.15 22:38:3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고후12:1~10
설교자
조용기 목사
참고
2005년 9월 4일 주일 3부 설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해서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가시와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은 그 몸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로 말미암아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왜 바울선생같은 분에게 가시가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택한 위대한 그릇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와 환상과 묵시를 많이 받은 분입니다. 또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셋째 하늘까지 올라가서 도저히 사람의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목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탄의 사자, 육신의 가시를 보내어서 괴롭혔습니다. 그가 이 가시가 몸에서 떠나가기 위해서 세 번 간절히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 말씀하기를 ‘네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네가 약할 때 네가 강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선생은 오히려 그가 환난과 곤고와 궁핍과 고난을 기뻐하고 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임하는 것을 알고 오히려 약함을 자랑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의 인생살이에도 가시와 엉겅퀴가 항상 따릅니다. 오늘 크고 작은 가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가는데 나는 아무런 가시, 엉겅퀴도 체험하지 않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가시가 있고 가시에 찔리고 피를 흘린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삶에 가시가 필요한가요?

<본론>

1. 자기 우상을 깨뜨리는 가시
첫째로, 가시는 자기 우상을 깨뜨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숭배가 원죄의 이유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타락했습니까? 자기 숭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고 의지하고 살아야 될 그가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를 믿고 의지해서 자기도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자기 우상화 때문에 범죄한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되겠으며 자기를 어떻게 그렇게 높일 수가 있습니까? 그 결과로 자기 우상화 때문에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마귀의 속임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창세기 3장 5절에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마귀의 꾀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자기 우상화에 심취해서 하나님을 반역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동시에 그 속에 자기 우상화라는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우상화의 원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 후손들도 똑같았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로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이 창대하게 되어서 그들이 시날광야를 중심으로 살고 있을 때 그들은 함께 모여서 거대한 탑을 쌓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탑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지면에서 흩어짐을 면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한 행위를 보십시오. 그들이 탑을 쌓되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꼭 사탄이 한말과 똑같습니다.
이사야 14장 14절에 루시퍼가 말하기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라고 했던 그와 똑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우리와 동등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노아의 후손들은 시날 평지에서 벽돌과 역청으로 만든 탑 모양의 신전을 세워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 이름을 내자. 인간우상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자고 말 안했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 우리 영광을 나타내자.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내자. 그리고 하나님께 정면으로 반역해서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나님은 온 지면에 흩어져서 살라고 했는데 우리 지면에 흩어지지 말자.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온 지면에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잠언서 15장 25절에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의식 혹은 무의식중에 자기 우상화를 합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우상화하고 자기를 경배하는 원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난의 가시가 자기를 깨뜨리고 자기 우상화를 막는데 크게 기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내가 약해지니까 자기 우상화, 자기 존경, 자기 섬김을 버리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나타나서 그를 강하게 만들어 주셨다고 바울선생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서 18장 12절에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교만하면 멸망하고 겸손하면 존귀하게 됩니다. 교만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가시의 역할인 것입니다. 가시가 와서 괴롭히니까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항복하고 회개하고 엎드리고 낮아지므로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은혜로써 존귀하게 만들어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찰스 콜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40년 동안 이 세상을 얻기 위해 전 생애를 투자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은 인생의 성공과 세상의 것을 다 잃고 차가운 감옥 바닥에 앉아 있을 때 비로소 나는 감옥이 하나님 사랑의 울타리임을 알게 되었다.” 찰스 콜슨은 교도소 선교 운동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으로 부귀와 영화와 공명을 누렸으나 정치적 스캔들에 걸려서 모든 지위를 다 박탈당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차디찬 감옥 바닥에 앉아 있을 때 비로소 그는 그 감옥 바닥이 하나님의 은혜의 울타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변화되어 감옥에서 나온 이후로 그는 남은 여생을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도하는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는 고통이 그에게 가시가 되어서 비로소 인간 교만이 깨어지고 자기 우상화가 깨어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항복하게 되는 은혜를 체험했다고 그가 말한 것입니다. 인간은 의식 혹은 무의식중에 자기 우상화에 온 힘을 쏟게 됩니다. 그럴 때 고난의 가시는 자아를 깨뜨리고 자기 우상화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큰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내게 다가온 크고 작은 가시가 내게 원수가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혹은 남편이 가시가 되는 사람도 있고 아내가 가시노릇하고 자식이 가시가 되고 친척과 이웃이 가시가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가시를 보고 늘 우리는 원망합니다. 그러나 그 가시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무함을 깨닫고 무력함을 깨닫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는 은혜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가시는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아를 의지하는 것을 깨뜨려 주는 수단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찾게 하는 가시

둘째로, 하나님의 가시가 오면 찔리고 괴롭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하나님을 찾게 하는 고난의 가시인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극복하기 위하여 세 번 특별 기도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8절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선생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기도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세 번 기도했다는 것은 보통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는 마음을 작심하고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혹은 금식하며 철야하며 ‘하나님이여 내 육체의 가시를 떠나게 해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번 기도하고 응답이 안되니까 두 번째 또 주님께 작심하고 바울은 전력을 기울여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습니다. 세 번째 바울은 또 다시 끈질기게 하나님께 나가서 이 가시가 내 몸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뭐라고 하셨느냐.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시가 오니까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평안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까? 편안하면 하나님도 천당도 다 2선으로 물러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왜 주일이 이렇게 빨리 다가오느냐? 무슨 기도회는 그렇게 많으냐? 구역예배 웃기는 소리 하네. 할 일없는 사람인가 보다 거기가게··· 왜? 편안하면 하늘나라와 은혜가 제2선으로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시가 와서 찌르고 고통을 주면 그때는 왜 주일이 이렇게 빨리 안다가 오느냐, 수요일날 와서도 말씀 듣고 기도해야지, 새벽에도 일찍 일어나서 교회 찾아와서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고 혹은 기도원에 와서 금식하고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는 것이니 손해보다도 이익이 많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했는데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약할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셔서 성령 충만히 채워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중에 지나고 보면 약하고 시련 당하고 고통당했던 것이 오히려 영적으로 큰 이익이 되고 은혜가 되고 복이 된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선생은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하므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가 편안하고 모든 것이 다 잘되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지 않잖아요.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함께 일할 턱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선생은 자기가 약하기 때문에 더 약함을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이 도움을 간구하고 간구하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약했던 것이 감사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저는 항상 저의 일생에서 가장 기념할만하고 감사할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제가 17살 때 폐병으로 쓰러질 때인 것입니다. 그때는 나에게 가장 큰 비극이요, 좌절이요, 절망이었지만 이제 돌아보면 제가 17살에 폐병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졌기 때문에 약해지고 깨어지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한참 꿈에 부풀어 있고 성공하고 출세할 야망으로 꽉 들어찬 시점에 하나님도 예수님도 내게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약할 때 깨어지고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보니 오늘날에 내가 나 된 것은 폐병 덕택인 것입니다. 폐병에 걸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가시가 돌이켜 볼 때 얼마나 큰 유익과 축복이 되었는지 말로다 할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 천국을 바꾸겠으며 무엇으로 주의 종의 사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이 큰 축복이 그 고난 때문에 다가온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국에 유명한 주의 종이 있었습니다. 중국말로는 그 이름은 리또슝이었고 그는 워치만리로써 유명합니다.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고 많은 저술을 하고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인데 하도 몸이 약해서 병원에서는 30대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0대 이내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늘 찾고 하나님이 몸을 건강하게 해주시고 병을 옮겨 달라고 늘 기도를 했습니다. 한번은 잠을 잤는데 꿈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만 강안에 바위가 크게 생겨서 배를 가로막아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이 배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큰 음성이 꿈에 ‘리또슝아 이 돌을 옮겨주랴? 물 수위를 높여서 돌 위로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해주랴?’ 한번 생각하니까 돌을 옮기는 것 보다도 강물이 불어서 돌 위로 배타고 지나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하나님이여 강물이 불어나서 배를 타고 바위위로 지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자 순식간에 물이 높아져서 돌이 물에 감추어 버리고 배를 타고 그 돌 위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야~ 하나님의 메시지이구나. 내가 네 병을 고쳐주랴? 병을 그대로 두고 병을 이길 수 있는 큰 은혜의 강물을 부어 주어서 오히려 전보다 더 큰 은혜를 가지고 살게 해주랴?’ 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인줄 알고 그는 엎드려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히려 은혜 없이 병이 낫는 것보다는 병을 가지고 기도하므로 더 큰 은혜가 임하여서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되는 것이 좋겠으니 은혜의 강물을 높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리또슝에게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한평생 몸이 약했으나 은혜를 받아서 그를 극복해서 그는 70세까지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가시가 옮겨지는 것도 좋지만 오히려 가시를 이길 수 있는 은혜를 받아서 그 은혜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바울선생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할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넘치는 은혜를 주셔서 그 약함을 능히 극복하고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오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저주, 고통도 하나님의 은혜가 오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 그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없을 때 짓눌리지 은혜가 오면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와야 기도를 하게 되고 기도를 해야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릅니다. 우리가 고통을 통해서 깨어지고 낮아지면 은혜가 고이는 것입니다. 높아져서 바위처럼 우뚝 서있으면 아무리 은혜의 단비가 흘러도 다 흘러내려 버리고 말지요. 깨어져서 납작해지고 평평해지고 푹 파지면 거기에 은혜의 단비가 고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질 때 은혜가 임하시고 낮아질 때 은혜가 우리에게 채워지고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존 번연은 말하기를 ‘시험과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하기를 ‘시련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가 가장 위험한 시련이다. 왜냐하면 그때 인간은 하나님을 망각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시련을 주시지 않을 때는 열 가지 시련을 받을 때보다 더 위험한 때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련이 없는 삶이 위험합니다. 왜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시련이 있을 때가 안전합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말하기를 ‘왜 고난이 있는가,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고난은 이런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확성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에 무관심하지만 고난이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바라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간구하기 때문에 고난은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어주는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면을 보게 될 때 고난의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머물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공의 열매를 자랑하지 않게 하는 가시

셋째로, 고난의 가시가 성공의 열매를 자랑치 않게 합니다.
고난은 가시 없이 자기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과 능력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면 목을 길게 뻗고 옆구리에 손을 얹고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내가 성공했소. 내가 위대하게 되었소. 나의 능력으로 나의 수단과 방법으로 내가 내가 자랑해서 마귀의 노예가 되고 수단에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가 와서 늘 고통스럽고 괴롭고 허덕이면서 성공한 사람은 내 힘으로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못하고 연약하고 허약하고 부족하고 모자랐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일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통하여 부자도 되게 하고 유명하게 되기도 하고 성공도 하고 승리도 하고 축복도 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라고 합니다. 고난의 가시가 겸손하게 만들어서 승리와 축복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람은 자기 자랑에 빠져서 마귀의 유혹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가 자기의 무력함을 항상 깨닫게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인간의 허무함을 늘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이 허무하고 무력함을 늘 깨닫기 때문에 자기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붙들어주고 세워주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금세기초 세계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토스카니니라는 위대한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는데 심한 근시 때문에 연주 중에는 악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연주 중에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연주용 악보를 통째로 외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연주자들은 다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데 자기는 미리 악보를 통째 외워 가지고서 연주를 했습니다. 왜, 시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데 하루는 연주회를 앞두고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다른 사람 중에 지위를 해야 되겠는데 그 악보를 통째로 외워서 아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토스카니니가 지휘봉을 잡고 지휘를 했는데 그 속에 감추었던 위대한 지휘의 천재적인 능력이 그를 통하여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토스카니니는 세계적인 대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심한 근시라는 가시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후에 토스카니니는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어려울 때 힘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하지 말자.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않았는가, 눈물에 대해서도 감사드리자. 눈물 있는 눈으로 하나님이 바라볼 때 더 똑똑히 하나님이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신다.” 여기에서 토스카니니는 자기의 위대한 천재적인 지위 능력으로 내가 잘나서 내가 음악적인 천재성이 있어서 그랬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근시라는 이러한 가시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휘자가 되었다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된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무력함을 깨닫게 하셔서 성공의 열매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가시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방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가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고 우리를 바라보지 않게 합니다. 내가 약할 때 나를 의지할 수 없잖아요. 내가 돈이 없을 때 나를 의지할 수 없잖아요. 내가 육신이 약할 때 육신을 의지하지 못하잖아요. 내가 무식할 때 내 지식을 의지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나를 붙잡아 줄 자를 바라보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붙잡아 줍니까?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니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겠으니 고난의 가시가 나를 찔러서 내가 고통스럽고 허약할 때 나를 붙잡아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들 길러 보십시오. 잘나고 훌륭한 자식들은 다 장성하여 짝을 지어서 훨훨 집을 떠나가지만 못난 자식, 병신자식은 늘 집에 있어 아버지를 바라보고 엄마 치맛자락 잡고 매달립니다. 떠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약하니까 부모를 떠나면 살 수가 없지요. 그러니 항상 부모를 바라보게 되고 부모도 잘난 자식보다는 못난 자식이 불쌍해서 항상 못난 자식하고 같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시에 찔리고 고통스러울 때 항상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늘 찾고 부르짖고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러한 사람에게 같이 계셔서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23편 2절에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종은 항상 상전의 손을 바라보고 여종은 주모의 손을 바라보지 않습니까? 우리도 약할 때 늘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 1절로 2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가 천지를 지으신 야웨께 눈을 들지, 태산 같은 자기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인간의 힘을 바라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가 항상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는 자기는 단지 포도나무에 붙은 가시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써 습기와 양분을 올려 주어서 내가 지금 맺은 열매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의해서 맺어진 것입니다. 나는 가지로써 그냥 붙어 있었어요. 물기와 양분을 끌어 올리는 것은 나무인 예수님이 해주셨고 나를 붙잡아 주신이도 나무인 예수님이 붙잡아 주셨습니다. 자랑할 것이 내게 없습니다. 나의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나 성공은 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뤄졌습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은 가시가 와서 우리의 진상을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짓되고 헛된 것에 묶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이란 것은 실제로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요. 사람이 살면 70이요, 강건하면 80이 되어서 안개구름같이 사라지잖아요. 인간은 죄책과 절망의 노예가 되었으며 무와 무의미의 종이 되고 죽음과 무의 절망에 처한 존재 아닙니까? 인간의 실상을 인간은 좋을 때는 깨닫지 못합니다. 모든 만사가 좋아지면 천년만년 살 것같이 영원한 존재같이 착각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많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가 와서 찌를 때 인간은 자기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허무하고 무의미한 존재, 죄책과 정죄에 눌린 존재, 죽음과 절망적인 존재인 것을 깨닫고 자기를 도와주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찾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시에 찔리지 아니하면 자기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마음이 둔하여지고 마는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약점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심각한 약점 가운데서 자기의 실상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고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시성이라고 불리는 호모와 밀턴은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었으나 위대한 시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악성이라 불린 베토벤은 청각장애인으로 음성을 못 들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놀라운 많은 작곡을 하신 분인 것입니다. 바다의 왕, 넬슨, 문호 셰익스피어는 절뚝발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불릴 만큼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심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는 종교개혁을 완성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중 한분으로 꼽히는 루즈벨트는 어릴 때 소아마비 병을 앓아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휠체어에 앉아서 미국을 다스리는 휠체어 장애인으로써의 대통령이었던 것입니다. 세계를 변화시킨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연약을 가지고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운명을 극복하고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시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며 가시만 제거해주면 정말 좋겠다고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더욱 하나님의 능력 안에 머물게 해주시기 위해서는 가시가 있는 것이 좋다고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가시는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오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세상 영광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가시

넷째로, 고난의 가시는 세상 영광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세상 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집착하고 권력에 집착해서 천년만년 권력을 잡으려는 쾌락에 집착하는 사람, 청춘에 집착하는 사람, 세상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 이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요사이 더구나 오늘날 형편을 볼 때 주님 오실 날이 너무나 가까웠다는 것을 느낍니다. 천재지변이 안 일어난 곳이 어디 있습니까? 홍수로 쓰나미로 수만 수십만명의 생명이 순식간에 죽어가고 한도시가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병들이 이 땅에 있고 어느 곳에 가나 민족의 분쟁, 종족간의 분쟁, 종교 간에 문화적 분쟁과 전쟁이 이 땅을 흔들고 있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고 깨어지고 깨어지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땅을 떠날 시간이 가까웠으니 준비하라. 이 땅에 집착하지 말라. 일어나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는 세상 영광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는 인간의 연약함을 늘 기억하게 하므로 어느 순간에도 빈손 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와서 괴로우니까 어느 순간에도 죽을 수가 있고 어느 순간에도 손 털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우리에게 경고해 주어서 세상과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세상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은 가시가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잘될 때는 와~ 이세상이 다 내 것이고 천년만년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빈손들고 왔다가 빈손들고 떠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내게 다가온 가시가 나를 잠에서 깨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는 인간의 삶의 토대가 언제든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므로 세상을 의지하지 않게 합니다. 여러분 미국이 얼마나 강한 나라입니까? 세계 최강의 나라요, 최고 부자의 나라인 미국이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성도 한사람이 제게 와서 “목사님! 놀란 것 있습니다.” “뭐가 놀랐습니까?” “어떻게 미국의 큰 도시 하나가 허리케인 태풍으로 말미암아 사라집니까? 미국 같은 부자 나라가 그럴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부귀, 영화, 공명 인간의 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 앞에는 아무것도 아닌 초로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뉴올리언스는 정말로 큰 도시입니다. 재즈의 본고장이고 저는 그곳에 가서 부흥회를 수차례 열고 슈퍼 돔이라는 큰 야구장에서도 제가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거대한 도시 80만의 인구가 사는 도시가 순식간에 허리케인 카타리나로 말미암아 물에 수장되고 만여명이 생명을 잃고 온 시민이 다 도시를 떠나야 하는 비극을 보면서 너 인생이 무엇이냐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니라. 내일일을 자랑치 말라. 오늘 네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것이 무엇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까? 이러한 것이 인간자랑은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것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인간의 바벨탑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가시가 우리에게 경고해 주는 것입니다.
시편 90편 5절에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인간중심의 모든 지위, 명예, 권세, 부귀, 영화 이것은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가 있다는 것을 가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는 온전한 것이 있는 천국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세상에 의지할 곳 없이 행인과 나그네길을 우리는 걸어가고 우리의 영원한 본고장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고난의 장차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고난이 오니 우리는 밤에나 낮에나 눈물을 흘리며 내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리까. 편안할 때는 오지 마세요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장막집 짓고 살겠습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기를 때 그 둥지를 가시로써 짓지 않습니까? 숭글숭글 가시가 난 가시채를 가지고 둥지를 짓고 거기에 짐승을 잡아 가죽으로 위에 입히고 새들을 잡아서 털을 뽑아서 푹신푹신하겠지만은 가시둥지입니다. 자라서 날 때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둥지를 떠나지 않고 자꾸 부모에게 의지하면 독수리가 와서 그 둥지를 어지럽게 합니다. 그 털을 다 뜯어내고 가죽을 벗겨 내고 가시둥지에 몰아넣습니다. 찔리고 아프잖아요. 여태까지 그렇게 푹신 거리던 것이 가시둥지인 것을 몰랐습니다. 괴로우니까 훨훨 날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 지구상에 가시둥지로 만듭니다. 처처에 지진이 있고 기근이 있고 온역이 있고 전쟁이 있고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이곳에 너희 영원히 살 곳이 아니다. 이곳이 가시둥지다. 자 내 날개 위에 올라타라. 훨훨 날아 천국으로 가자!” 가시 둥지가 되는 이유는 가시둥지에서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바람타고 영원한 천국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고난의 가시는 구원이 있는 천국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가시는 참으로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의 가시가 있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괴롭습니까? 그러므로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가시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바울선생처럼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할렐루야~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위대한 사도 바울선생에게도 가시가 있었습니다. 가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깨어지고 약해지고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셔서 위대한 주의 종으로써 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시가 있는 것을 탄식하지 말게 도와주시옵소서. 혹은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친척이 이웃이 가시가 되어 우리를 찌를 때 우리는 괴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깨어지고 회개하고 자기 우상이 없어지고 하나님을 찾게 되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고 축복을 받아서 주의 은혜로 가시를 이기고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을 가지고 살수 있게 됨을 감사드리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주님을 바라보고 주의 은혜로 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 세상을 이기려고 하지 말게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을 찾으면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극복하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해준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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