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성직

박영선 목사 | 2009.06.26 22:35:2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3:50-52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75 / 1989.09.17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사도행전 13: 50-52

바울과 바나바의 첫 선교 여행에서 그들의 전도 사역을 방해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끝까지 바울과 바나바의 대적이 되고 결국 바울과 바나바를 잡아 넣는 장본인들이 됩니다. 특별히 그 유대인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했다는 50절 기록으로 보아, 아마 그 성내에서 종교적,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라 사려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우리나라 현실에서 당하고 있는 문제와 매우 일맥상통하는 문제를 다루게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이 같은 도를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간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낸 그 종교 지도자로서의 유대인들의 모습을 살펴봄으러써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서 겪고 있는 어떤 문제들을 파헤치고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왜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내느냐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로 미루고, 우선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적 지도자인 유대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보였겠느냐 하는 것을 첫 번째 문제로 다루고자 합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게끔 하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예수 믿는 당사자들이 아닐까요?  아예 불교를 믿느다든가 이슬람교를 믿는 다든가, 기타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사람에 의해 예수를 믿게끔 하는 일이 방해가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으려고 할 때 가장 장애 요인이 될수 있는 자는 일차적으로 목사입니다. “목사 노는 꼴 보기 싫어서 예수 믿기 싫다. ” 그러는 사람을 저는 만난적이 없습니다마는 그렇다는 얘기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차마 제 앞에서야 안그러겠지요. 그러나 아마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 믿는 데 결정적인 방해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교회 가면 목사니 장로니 권사니 하는 자들의 꼴 보기 싫어서 못 가겠다. ” 늘 있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우리가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행에서 겪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성직이라는 것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성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위하여 특별히 가려 뽑아 하나님의 일을 시키기 위해 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눈에서 보자면 그것도 하나의 직업입니다. 세상적인 눈에서 보자면 이것도 일종의 호구지책으로서 좋은 방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사분규가 있습니까?  갑근세를 뗍니까?  부가가치세를 뗍니까?  그래서 이제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키울 때도 “의사를 해라, 법을 해라, 상대를 가라” 그러다가 다 실패하면 “야! 할 수 없다 목사나 해라” 라고 할 때 ‘ 그 목사나’ 라는 표현 속에는 말하자면 벌어 먹을 항목 중에 분명하게 끼는 것이 됐다는 의미가 담긴 것 아닙니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분명히 선호도에 서열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십여 년 전에는 목사가 13위였나 14위였나 그랬습니다. 15개 직업항목 중에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발사 다음이 아니었던가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나온 유언비어에 의하면 지금 목사의 직업별 선호도가 2위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으로 인하여 2위가 됐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개기름이 흐르기 시작을 했다 이겁니다. 목사들이 다 살찌고 눈이 나오고 금테 안경을 끼고 이러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란 직업을 선호하게 된 이유가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기독교란 믿을 만한 종교가 아니라는 시험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원래 그 직분의 성격과 그 직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 직분을 수행하면서 보여 주는 개인적인 모습에 의해 일그러져 버린 그 직분에 대한 인상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돈 벌고 잘살 수 있기 때문에 목사를 했다’ 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건 신자들이 분별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성직을 자신의 호구지책으로 삼은 것과 일반 성도들이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 성직을 수행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은 각자가 져야 되는 책임이지 그것으로 인하여 기독교를 매도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요즈음 이런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쪽을 매도하기 위하여 간첩이 하나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쪽 편인 듯이 하면서 그쪽의 신뢰와 성실함에 먹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는 결과 때문에 당한 쪽을 욕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악랄한 마음을 가진 적이 그쪽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기 위하녀 자기 편 사람을 침투시키는 공작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만일 북쪽에서 우리나라의 모든 사회상이나 정치 질서를 파괴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정치인으로 혹은 군인으로 혹은 무슨 일선에 선 교육자로 가장시켜서 그를 남쪽에서 장기간 살도록 계획하여 그 일의 어떤 이미지를 손상하게끔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일을 보고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정치인이 다 썪었다든가, 군인이 다 썪었다든가, 교육가들이 다 썪었다는 마음을 갖는 다면 그건 저쪽 작적이 성공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모두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그 한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갖고 그 일을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나는 목사다’ 한다고 목사가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는 하나님 앞에 신실한 종 노릇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분별하는 눈은 여러분에게 있어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 믿고 싶지 않은데 핑계할 건수가 생긴 것에 불과합니다. 그건 절대 목사나 교회의 책임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지셔야 되는 책임입니다.

이 문제를 구약성경에서는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미가서 3:5,6말씀입니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

여기에 나오는 선지자는 먹을 것을 주면 축복하고 먹을 것을 안주면 저주하는, 말하자면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 종교적 직책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나 있으며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기독교에도 올 수 있습니다. 우린 이런 걸 혼동하지 않아야 됩니다. 사탄도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는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접근합니다. 인간은 못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신실한 신자를 가장하고 신실한 목자의 모습을 가장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런 상황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봅니다. 개인의 입신 양명을 종교계에서 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교회에 더 많은 사람을 모으고 더 많은 헌금이 나오게 하고 더 많은 사업을 함으로써, 사회에서 한 사람이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증명 하듯이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 종교계 내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행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왕왕 사람들 눈에는 성공한 것 같은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그 분별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진실된 마음으로 해서 그 같은 많은 성과를 얻은 것인지 아니면 그 성과를 위해서 그 일을 한 것인지 우리는 쉽게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꼭 가난한 것이 청렴한 것은 아니며 부자가 부당하게 부자가 된 것이 아니듯이, 또한 부자가 잘난 것이 아니며 가난한 자가 인생의 패배자가 아니듯이, 종교계의 한 지도자가 이름이 나며 능력이 있으며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느냐 안 내리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성직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수행했느냐 안 했느냐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평범한 한 신자 개인이 이 관계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혼동을 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특별히 기독교가 오랜 기간 동안 영향력을 발휘했던 서구 사회에서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기독교가 국교와 마찬가지가 됐고 그래서 정치와 결탁하고 있는 것을 역사속에서 목도하실 겁니다. 즉 왕권을 종교인들이 인정해 주므로 그들이 권위를 보장받고 또 왕권을 가진 자들은 종교계의 지도자들에게 부를 약속함으로써 서로 같이 공생하고 배부른 흥정을 나누는 일을 영국이나 독일 그 밖에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억압받는 민중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그들의 최고의 적은 자본가요 그 다음에는 권세를 잡고 독재를 하고 있는 정치 독재자요 다음에 또 하나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군인은 총을, 자본가는 돈을, 정치인은 권세를, 종교인은 신을 흥정물로 하여 서로가 서로를 위안하고 부추기고 보호하고 자기네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 왔던 역사적인 현실이 서구 사회의 어느 나라에나 있었고 지금도 있는 사례입니다.

그것 때문에 기독교는 많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제로 과격한 학생 단체들의 공격 목표 중에 재판소, 경찰서, 미문화원과 더불어 그 리스트에 이름을 대면 알 만한 큰 교회들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지요?  앞에서 설명한 일들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식으로 저들을 탓하지 말라는 것이 바울과 바나바의 태도입니다. 자기가 개같이 벌어서 개같이 쓰는 걸 누가 말리겠습니까?  말리러 갔다가 괜히 미친 개하테 물리기나 하지요. 그건 우리가 관심할 바가 아닙니다. 전혀 관심할 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전혀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이 이 문제로 해서 흔들림 받아서는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쉽게 예를 들어 학원가에 나가 보시면 학원이라는 데는 학교같이 일단 들어가면 싫든 좋든 국어는 어느 선생님한테 배우고 영어는 어느 선생님한테 배우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을 해서 배울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광고가 요란합니다. ‘적중율 100%를 장담하는 00 영어 선생님께서 이번 달부터 본 학원의 영어 강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광고가 여러분을 강제로 그 학원에 끌고 가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보고 갑니까?  실력 보고 가지 않습니까?  ‘말만 그렇지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더라. 괜히 고함만 지른다더라. 거긴 가지 말자. ’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열왕기상 22장에는 이 문제가 역사상 어떤 식으로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때는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갈려져 북 왕조는 이스라엘, 남 왕조는 유다라는 이름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입니다. 북 왕조는 그 악하기로 유명한 아합이 왕일 때이고, 남 왕조는 여호사밧이 왕일 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아합은 아람과 싸우면서 아무래도 불리함을 느끼자 유다 왕과 동맹을 맺습니다. 그리고 길르앗 라못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두 동맹군이 아람과 싸우러 나갑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 앞서서 승리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를 하나님께 묻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부릅니다.

“여호와께서 이 일에 우리 편을 들어주실 것인가, 아닌가 알게 해달라. ” 그러자 모든 선지자들이 “올라 가십시오. 승리할 겁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이 묻습니다. 이 사람들이 전부입니까?  그러니까 아합이 대답하기를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하나 더 있는데 이 사람은 늘 나한테 불길한 얘기만 해서 내가 듣고 싶지가 않습니다. ” “그래도 한 번 불러 오시죠? ” 그러자 부르러 간 사신이 미가야에게 얘기를 합니다. “조금 전에 선지자들이 다 모여서 왕한테 좋은 얘기를했습니다. 당신도 가서 좋게 얘기해 주십시오. ” 미가야가 얘기하기를 “어떻게 내가 사람에게 좋게 이야기합니까?  하나님이 나한테 시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그런데 막상 와서 하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아합이 깝짝 놀라서 “네가 항상 나한테 불길한 얘기만 하더니 어떻게 오늘은 좋은 말을 하느냐?  솔직하게 얘기를 해봐라” 그러니까 “좋습니다”하며 솔직하게 얘기를 하는데 “이상 중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합이 싸움을 하러 가는데 누가 저를 꾀어서 죽에 할꼬. ’ 그러자 한 영이 나와서  얘기하기를 ‘제가 꼬여서 그를 죽게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겠느냐?’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서 이 거짓 선지자 입에 있어서 저로 하여금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사기를 치게 해서 싸우러 올라가게 만들어 죽게 하겠습니다. ’ ‘그래라 그렇게 하면 네 말대로 할 것이다.’ 그렇게 보여 주셨우니 빨리 가서 싸우고 죽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합이 화가 나서 “이 놈을 잡아 가두어라” 하고 명령한 뒤 싸우러 나갑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일보다도 자신의 이익에 더 중요성을 두는 문제들이 전부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 요구하는 건 이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내 돈으로 먹고 사는 놈들이니까 나 좋게 해달라” 이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맞장구나 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르러 갔던 사환이 뭐라고 합니까?  모두 좋게 얘기 했으니 당신도 좋게 얘기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을 우리가 나무랄 것도 없고 그 일로 인하여 신앙 생활이 흔들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좀도 심각한 문제가 되는 두 번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바울과 바나바 쪽에서 볼 때 그들을 쫓아낸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향해 ‘자기들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서 우리를 쫓아내는구나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로 그 문제를 풀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전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과연 그들이 그것만으로 쫓아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조금 더 깊은 문제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여기서 전도 할동을 하다 쫓겨나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유래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가장 이해가 안가는 것은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피에 굶주린 사람같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했내냐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마치 부덤에서 일어난 해골들 같았다고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그렇게 저주하고 분노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일주일 전만 해도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환대했던 자들이 말입니다. 옷을 벗어서 그 앞에 깔며 예수님으로 하여금 땅 위를 걷지 못하게 했던 예루살렘 거민들이 왜 일주일 만에 이렇게 돌변하게 됐느냐 이겁니다. 거기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의 권세와 그행하시는 능력들을 목도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보았으며 눈먼 자를 고치고 문둥병자를 낫게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힘으로 이제 자기네 모든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들을 압제하는 로마를 몰아내고 모든 사회의 부패를 척결하고 이땅에 공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외면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에 대하여 가졌던 기대가 배신감으로 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살인 강간자인 바라바보다도 더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힘과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왜 외면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그대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교회를 향하여 요구하는 것들이 아닙니까?  여기에 기독교의 큰 위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또한 많은 신자들의 오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 언제나 언급을 회피하셨습니다. 그 문제를 자신이 하여야 할 일로서 한 번도 주제 삼으신 적이 없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입니다. ‘저들이 너희에게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도 가라’입니다. 정의 사회를 구현하는 문제, 불평 부당한 문제, 착취, 부정, 폭력, 공포 이런 문제에 대해서 주님은 한 번도 언급히시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그 뒤를 잇는 모든 사도들이 유대인들의 저주와 증오의 대상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6:3으로 가 보십시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자, 여기 바로 신자가 모든 사람에게 혼동되고 오해받는 문제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 속이는자” 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지금 사도 바울이 하는 얘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를 전하고 내세를 준비하는 것을 전하는 문제를 위해서라면 남은 문제에서 혹 내가 손해를 보고 오해를 받아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몇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미국과 소련이 한창 사이가 나빠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서방 세계가 참여하지 않았고 1984년 LA 올림픽에 동구권이 참여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때 소련이, 일종의 정치적인 제스쳐였겠습니다마는, 빌리 그레함 선교사의 소련 내에서의 전도 집회를 허락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가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빌리 그레함은 갔습니다. 소련에서 초청했는데도 빌리 그레함이 안 가면 미국 정권을 잡은 정치가들의 입장에서는 유리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뿐 아니라 종교인까지 그쪽의 초대를 거부함으러써 저놈들이 얼마나 악당인가를 자명하게 증거해 주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빌리 그레함이 일종의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간 이유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성경적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내가 무슨 욕을 먹어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은 그래서 갔습니다. 그것이 물론 소련 정부 내에서는 정치적인 선전용으로 쓰일지라도 어쨌든 가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건 사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날 종교인들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가 하면, 사회 정의를 구현해 주고 인권 회복과 자유, 민주, 평등 이런것들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요즈음 시중에서 상영되고 있는 ‘로메로’ 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 번 꼭 보시기를 권합니다. 보시고 아멘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엘살바도르라는 중미 국가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의 영화로서 거의 국교가 되다시피 할 만큼 천주교 신자들이 많은 나라의 대주교 이름입니다. 그 사람이 그 나라의 독재 정권에 항거해서 투쟁을 하다 순교당하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보시면 여러분도 이런 것을 느끼실 겁니다. ‘나도 악을 없애기 위하여 총을 들어야겠다. ’ 그것이 나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독재와 악한 일을 하는 사람마저도 처단의 대상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영혼으로 보여야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다 불쌍한 영혼일 뿐 누구를 제거함으로써 세계의 평화가 온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평화가 오려면 악한 자를 쳐부수기 위하여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악한 자를 주님 앞에 굴복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가 바로 그 영화에서 가장 잘못된 부분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볼 때마다 결론은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정당한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저 불쌍한 영혼이 죄와 사망과 악한 영의 지배 아래 있나이다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 영혼을 깨우기 위하여 주께서 저에게 피흘리기를 원하신다면 마땅히 제가 죽겠나이다 기쁨으로 종 노릇하겠나이다. ” 이 자리로 우리를 몰아 가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 신자가 한 시대를 책임지는 유일한 원리요 방법이요 내용입니다. 그 외의 것은 다 시험받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됐겠습니까?  교회가 가져야 할 생명과 영적인 내용들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대의 명분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저 정치 일선에 뛰어들어서 윤리와 도덕, 정의, 이런 문제를 갖고 싸움을 하게 되어 버린 겁니다. 교회가 주를 아는 문제, 주 앞에 우리가 회개해야 되는 문제, 십자가 밖에 방법이 없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는 문제에 대하여 내용을 다 놓쳐 버렸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방법, 이것밖에 해줄 것이 없는 비참한 무당들이 되고만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는 바로 그 문제를 집약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신자로서 살아야 할 책임을 지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가 또 예수를 의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5,6)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신 것을 전하기 위하여 기꺼이 모든 사람의 돌팔매를 맞을 것이며, 창에 찔릴 것이며, 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데 빛으로 임하지 그 어두움을 걷어내는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도 어두움을 걷어내지 못합니다.‘로메로’ 라고 하는 영화에서 그 로메로 대주교 휘하의 신부들이 게릴라가 되는 장면은 어두움을 걷어내기 위하여 또 하나의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얘기한 것과 반대로 가는 걸 아시겠습니까?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싸움에 교회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되는 싸움입니다. 여러분 손에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여야 됩니다. 여러분 손에 돈을 잡거나 총, 칼을 잡지 말기 바랍니다.

바로 이 싸움이 오늘날 우리나라 교계가 가장 심각하게 직면하고 있는 싸움일 것입니다. 교계의 지도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모든 사람의 숙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으십시오. 여러분은 누구에게 더 불평이 많으십니까?  사회에 불평이 많으십니까?  우리가 먹고 살 만해지자 우리는 하나님에게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만 뺏기지 말게 해 주십시오. ” 이것만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내 인생을 통하여 주의 주 되신 모습과 생명과 진리 된 것들이 남김없이 전해지기 위한 증인으로 사는 모습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한 손에는 돈이요 또 다른 한 손에는 이 돈을 지켜줄 모든 세상적인 술수를 잡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두 손을 절대 놓지 않고 그 위에 금상첨화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 사람 중에서 제일 나쁜 사람들입니다. 저 세상 사람들이야 아예 그 길로 가기로 선언하고 정직하게 악당의 길로 갔습니다만 여러분은 세상에서는 세상의 쾌락을 누리고 천국에 가서는 또 천국의 상급을 누리고 싶어하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나무라겠습니까?  누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싸잡아서 누구의 문제입니까?   우리 모든 예수를 믿는 각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을 보는 사람이 그 어두움을 비추는 빛으로서 여러분을 대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주를 위하여 그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살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오면 목사는 축복해 주고 여러분은 헌금 내주면서 서로 타협하고 웃고 개기름 흐르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지 맙시다 돌이키기로 하십시다. 저도 더욱 제 책임에 충성되기로 하고 여러분도 더욱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에 충실하기로 사십시다. 그것은 우리의 자랑이요, 복이요, 책임이요, 영광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많은 사람들이 흘러가는 편한 걸을 부러워하지 말기로 하십시다. 이 교회와 여러분과 제가 조그만 일에 충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어두움을 비추는 빛으로 서 있기를 주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권합니다.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