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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목사 | 2009.06.26 22:38:1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4:1-7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77 / 1989.10.0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 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풍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잇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허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푸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14:1-7

초대교회 사도들의 사역을 되집어 볼 때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저들이 가졌던 담대함과 하는 일에 대한 권위적 자세입니다. 오늘 14:1에는 사도가 이고니온에서 만남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행 14:1)

이 구절의 해석을 위해 학자들 간에 문법적인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칼빈이라는 신학자는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라는 말에서 함께라는 부분을 두 사도가 함께가 아니고, 두 사도가 유대인과 함께 회당에 들어갔다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도는 계속해서 함께 상역을 해왔던 터이기에, 유독 여기서만 그들이 함께 무엇을 했다고 쓸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함께 회당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 담긴 뜻은 앞의 13장에서 본 바와 같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거기 있는 유력자들과 귀부인들을 선동해서 저들을 몰아내고 핍박했던 것과 연결된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을 자신들이 하는 일에 악감을 품고 반대하려고 쫓아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한 장소에서 일을하지 않고 공개된 장소에서 자기네들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러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더 놀라운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13:46을 보시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하고 선언했으며 51절을 보시면 “ 두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자기들에게 먼저 허락된 복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너희들한테는 전하지 않고 주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내가 이방인에게로 간다고 하면서도 이고니온에 이르러서 회당에 들어갈 때는 유대인들이 쫓아오는 걸 보면서도, 저들이 결국 자신들을 방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글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장에 기록된 그 복음을 전하는 태도가 환경과 조건과 분위기와 무관하게 자기가 갖고 있는 어떤 힘과 어떤 목적의식에 의해 일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이런 걸 무한궤도하고 합니다. 탱크나 포크레인, 불도저 같은 것의 바퀴 위를 감싸고 있는 캐터필러(caterpillar)를 갖고서 자기가 자기 길을 깔면서 가는 차들을 무한궤도라 그럽니다. 보통 모든 차량들은 길이 닦여 있는 데로 밖에는 못 가는 겁니다. 특히 기차는 레일이 있는 데로 밖에 못 갑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도들도 이 세상이 자기네에게 호의를 갖고 초청하든 무관심하든 아니면 반대하든 상관 없이 자기네가 가야 하고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는 자기네가 직접 길을 깔아가면서 가는 사람들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도들이 가진 힘, 담대함, 혹은 지혜 이런 것들은 어떻게 연유되며 어떤 시각과 각오에서 시행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은 믿고 우리가 소망하고 있는 것과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간의 갈등입니다. 우리는 현실 생활에서 반대와 어려움을 겪으면 종종 타협하기도 하고 아예 손에서 놓아버리기도 하는데 어떻게 이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런 환경과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고 방해받지고 않고 영향받지도 않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은 우리 모든 신자에게 관심 거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4:2로 돌아와서 보시면 여기서도 분명히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 이라고 되어 있는데도 3절을 보면 두 사도가 오래 저희들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감을 품고 반대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거기서 특별히 기억할 것은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도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일하는데 있어서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은 얼핏 보기에는 ‘주께서 저들과 함께 해서 기적과 이적를 일으킨 것’ 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데 잘 보시면 이 기적이 저들이 만나고 있는 나쁜 환경, 나쁜 분위기를 호전 시키거나 저들이 당하고 있는 어떤 상처나 실망감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도입되지 않고 있다는 걸 아실것입니다. 이 기적과 기사는 무엇을 위해서만 도입되느냐 하면 주께서 자기 말씀을 증거하는 것으로만 도입됩니다. ‘그게 그거다’ 하고 싶으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고 있는 이 말씀은 좋은 말씀, 필요한 말씀, 당연한 말씀 정도가 아니라 이런 기적과 기사를 일으키시는 분이 맡긴 말씀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오늘날 기독교는 의미화하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났다 안 살아났다가 뭐 중요하냐?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가 시행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지.’ 이것이 많은 신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도덕성, 윤리성, 종교적 가치로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며, 일차적으로 그것이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믿으라 하시므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천국 가고 그 말씀을 거부하면 지옥가는 줄 알며, 그 말씀이 정당하냐 정당하지 않느냐 때문에 어떤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순종하느냐 반역하느냐의 문제가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믿고 삽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주가 되신 것을 인정하는 것에 근거가 있고 시작이 있습니다. 그것을 떠나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사신 것이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것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은 윤리와 도덕, 철학, 고매한 상상에 불과하지 권위라는 것은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살인하는 것이 나쁜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더 큰 기준입니다.

우리가 이와 비슷한 일을 자녀를 키우는데서 제일 많이 겪게 됩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밥 먹을 때는 좀 조신하게 행동을 해라 ”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부모로서 맨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 “아니 이 녀석이 왜 부모 말을 안 들을까” 하는 순종의 문제입니다.

신앙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지금 사도들이 이 일을 그런 나쁜 환경과, 적대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전하고 있는 이 말씀을 부탁한 분의 권위와 능력과 위치를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도들과 신자들의 모든 신앙의 근거요 신앙을 유지하는 방법이요 힘이요 담대함의 이유입니다.

이것이 의미화되면, 옳은일을 하고 나면 옳은 것이니까 그것에 상응하는 어떤 결과가 있어야 된다는 식의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나는 착하게 살았다. 나는 옳는 일을 했다. 그런데 왜 보답이 없느냐? ’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행한 신앙의 행위가 어떤 가치 있는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신앙 생활이 자꾸 약화 됩니다.

정직하게 살고 의미 있게 살고 호의를 베풀면서 살면 거기에 대한 어떤 보답이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는 그런 입장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주장하시고 심판하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긴 것입니다.

그 일을 어디에 가서 하라고 하느냐면 우리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하라고 합니다. 주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기뻐하라,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부탁한 말씀을 갖고 가야 되는 곳은 흑암의 권세가 주장하는 곳이고 주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과 그 정신이 주도권이 되어 있는 곳입니다. ‘너희를 보냄이 마치 양떼를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 라고까지 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전하는 이 말씀, 내가 증인으로 서야 되고, 내가 품고 있는 신앙의 내용들이 주께서 부탁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힘을 삼지 않으면 우리를 반대하는 무리와 환경 앞에서 늘 지게 됩니다. 부탁받고 있다는 것을 절대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일을 맡긴 이가 지금 살아있으며 지금 온 천하 만물을 주장하시는 분이라는 것에 대한 확인으로 힘을 얻으라는 것이지, 당하는 난관을 없애 주고 억울한 일을 면케 하는 것으로 힘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힘이어야 됩니다. 이걸 놓치시면 신자의 힘도 담대 함도 사라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 사도들이 자기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는 자세입니다. 그 설명의 내용이 간단하다는 점입니다. 간단하다는 것은 자기네가 전하는 말을 상대방이 납득하도록 인간적인 잔재주를 동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전한 것을 받지 않는 자에 대해서 감정적인 증오심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저들은 자기네가 할 일만 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13:50을 보시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행13:50). 그래서 사실은 어렵고 억울하고 마음이 폐한 상태에서 이고니온으로 왔는데, 그동안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편한 자리로 온 것이 아니라 이고니온에도 말씀을 전하러 오는 겁니다. 어려움을 당했기 때문에 쉬러 오는 것이 아니라 부탁받은 말씀을 전하러 오는 것입니다.

이고니온에 오자마자 유대인들과 함께 회당에 들어가서 또 주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14:5에서 보듯이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듭니다. 그래서 또 도망갑니다. 어디고 갑니까?  그렇지 않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루스드라와 더베로 가는데 거기도 역시 부탁 받은 말씀을 전하러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길이 없으면 못 가고 길이 있는 데로만 가거나, 막히면 돌아 가고 편한 데로만 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야 할 길을, 호강을 받되 거기 안주하지 않고 반대를 당하되 그것으로 좌절하거나 감정적인 싸움이나 원한을 맺지 않고 가고 있는 사도들을 보십니까?  이것이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가 분명히 확인해야 할 신장의 모습이란, 그가 살아가는 인생 항로에서 부딪히는 모든 일로 인하여 절대 흔들릴 수 없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들을 목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맡기신 일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 있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론입니다.

그가 부탁받은 말씀과 그 말씀을 전할 인생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책임 맡은 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우리를 청지기라 부릅니다.

주인으로부터 일을 맡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그 일을 맡긴 분이 누군가를 아는 것으로 우리의 사명과 지혜와 힘과 방법론을 삼으셔야 됩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느냐로 우리가 타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할 일을 지혜롭게 해야 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더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으로서는 지혜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충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충성스러워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잘아시는 디모데후서 4:1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말씀을 모든 신자의 힘의 근원이며 그가 하는 일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말씀을 전파하는 문제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 나라의 확실성, 내세, 지금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이 근거입니다. 그 영원한 세상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권세, 그의 권위, 사실적 위치, 이것이 근거가 되어서 우리의 삶이 선택되어야 된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넓게 생각 하자면 “예수 믿으시오” 라고 얘기하는 전도 행위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증인으로, 그의 말씀을 부탁 받은 인생으로, 청지기로 사는 모든 삶의 방향, 모습, 원리, 목표를 제한하는 것으로서 등장합니다.

남들이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을 포기할 것도 아니며 세상이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못살게 군다고 우리가 우리 인생 속에서 그것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말씀을 받아야 하는 심령들이 말씀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느냐 하는 것에 우리가 민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맡은 바 일을 다하면 됩니다. 그 다음 문제는 주께서 친히 하실 겁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겁니다. 우리가 맡은 바 구할 것은 충성밖에 없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립니다. 여러분 자신의 생활을 바로 이 각도에서 점검해 보십시오. 충성스러운 신자인가, 살아남기 바쁘고 세상이 요구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을 거의 다 놓고 세상이 정해준 길로 흘러가고 있지는 않는가, 극복하고 살아가야 할 맡은 바 사명있는 인생으로서의 우리의 길이 있고 그 길을 달려가는 싸움이 있는가 하고.....

거기에 담대함이 있습니까?  세상이 여러분이 사는 길, 여러분이 가는 길을 도무지 방해할 수 없는 담대함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아는 힘과 원리와 목표가 있으십니까?  이것이 신자의 책임이며 권리이며 자랑입니다. 이것을 놓고 산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불행한 일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은 것이요, 게으른 종이요, 종이 시간에 맞추어 기르는 가축이나 농작물을 돌아보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세상이 우리에게 명령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만이 세상을 향하여 은혜의 말씀, 구원의 진리, 영원한 복들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필요한 존재로 있는가?  아니면 세상 속에 안주하고 세상 사람과 다름없이 살고 있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점을 분명히 한 번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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