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세상의 대접

박영선 목사 | 2009.06.26 22:41:39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4:8-18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78 / 1989.10.0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 지라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을 그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행 14:8-18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에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것과 가장 밀접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이 우리 현대를 사는 모든 신자들에게 힘이 되고 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루스드라에 이르러서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이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신이라는 오해를 받습니다. 바나바를 쓰스라 하고 바울을 허메라 그러는데 쓰스라는 건 제우스의 우리말 음역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 허메는 헤르메스라는 말입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으뜸 되는 신이 제우스이고, 헤르메스라는 신은 신들의 심부름꾼 입니다. 영어 표기로는 제우스를 쥬피터라 하고 헤르메스는 머큐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나바와 바울이 그걸 듣고 깜짝 놀라서 그들이 그런 헛된 신화에 빠져 있는 것과 자신들을 오해하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그들을 말렸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서 신자들도 신앙에 대한 환상이 좀 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과 진리성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같은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현실을 너무 깔보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조금만 도와 주시면 우리가 지금 부딪히고 있는 모든 난관과 어려움을 능히 잘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관심을 덜 가지셔서 우리가 이렇게 실패하고 있다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얘기하는 바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아 그 마음이 굳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아무리 잘 설명하고 초월적인 기적이 수반된다 하더라도 복음의 핵심이 전달 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기록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있습니다. 우선 사도행전 8:14에 가보시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후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저들 구원얻은 것을 확신시키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행8:14-19)

이 시몬은 사마리아에 있던 마술사인데, 자기보다 더 큰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고 항복했으나 사도들에게서 성령받게 하는 능력을 사서 평생 동안 그걸로 밥벌이를 할 적정을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라는 것은 얼마든지 오해될 수 있습니다. 아예 종교자체를 속여서 자신들의 일평생을 살아나가는 방법으로 바꿔 쓸 수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인간이 갖는 종교심에 야합해서 그들을 교묘히 속일 뿐만 아니라 그걸로 위협을 하기도 해서 본인의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어느 종교 안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파를 우리는 사교의(邪敎義) 집단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은 그 사교의 집단들이 갖는 어떤 원리들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이상한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종교를 믿는다면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일에 어떤 이익을 갖다 줄 거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익이 현실적으로 지금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에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기독교와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들이 행복이라는 것 혹은 승리라는 것 혹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이 세속적인 용어와 혼용하고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굉장히 경졔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신앙생활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지금 현실을 사는 데 별로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어느 만큼은 하나님에 대해서 토라져 있는 것입니다. 토라져서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을 안 가지시니 나도 관심을 안 갖는다는 나쁜 배짱을 갖습니다.

이것이 지금 기독교에서 가장 크게 경계해야 될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행전 16장, 바울이 빌립보에 이르러서 당한 일에 대한 기록은 이 문제를 좀더 진전시켜 줍니다. 16:16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는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16:-23)

여러분 이 모습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 깨우침을 주시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해 관계 이외에 아무 것으로도 기독교와 복음을 평가하거나 습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는가? ’를 깨우쳐 회개하여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되는 게 아니라 싸우고 증오할 문제거리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이 신자 된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싶어하는 세상에 대한 안목입니다. 곧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신자로서 살 때에 우리가 갖고 있는 영원한 소망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이 능력들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 한테 절하고 우리가 얘기하면 귀를 열어서 듣고 우리에게 마땅한 좋은 대접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저들의 이해 관계를 거스르는 자이며 흑암에 빛을 비추고 도적질하고 강도질하는 데 불을 밝힌 사람이니까 먼저 우리를 해치려고 덤빈다는 걸 잊지 않아야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물론 예수님 자신이 그걸 목적으로 하고 오셨습니다만 세상적인 상황으로 보면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기적을 행하시고 죄인과 병자들의 친구가 되시자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환대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나중에 돌아가시기 위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러면서 겉옷을 벗어 깔아 예수님으로 하여금 발에 흙을 묻히지 않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저들의 요구,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에서 독립시키고 저들을 압제하는 자들을 다 물리쳐 복수해 주는 일에 응하지 않는 다는 걸 알게 되자 더 큰 증오를 나타내고 살인 강도 바라바보다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라바는 어차피 기대를 안했던 나쁜 놈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은 능력도 있고 못할 것이 없는 분인데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니까 이를 갈고 “그를 죽이소서”라고 전부 합창을 했던 것입니다.

똑같은 일이 지금 바울과 바나바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14장 사건을 보시면 바울과 바나바의 그 기적을 보고 ‘제우스다, 헤르메스다’라며 경배를 하겠다고 아우성치던 이들이 ‘아니라’라고 하자 나중에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쳐 죽일 때 냉정히도 방관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루스드라라는 성 사람이 아닌 밖에서 온 사람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곳 토박이들이 이 일에 대하여 방관하고 방조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가졌던 기대에 상반됐기 때문에 경멸하고 조소하고 미워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가 이세상을 살아나가는 동안 세상으로부터 받는 당연하고도 일상적인 우리의 우리 됨이라는 것을 인식하십니까?

그렇게 되기 싫으시지요?  오히려 예수를 믿어 기도하면 마른 땅에서도 석유가 나오고, 월급 받아온 것을 세면 셀수록 끝없이 세어지곤 하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효과라고 기대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십일조 내고 돌아섰을 때 십만원 냈으면 백만원이 생기고, 매일내면 매일 열 배씩 생기는 축복 같은 것을 기대하십니까?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서 행세할 때 받게 되는 대접은 돌 맞고 조롱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바보 병신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이란 충성과 인내입니다. 희열과 흥분과 광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내입니다.

누가 더 끊임없이 믿음을 진행시키느냐의 싸움입니다. 오늘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지 않습니다. 내일 오신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믿고 아직 안 오신 그날들을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신자가 걸어야 되는 신앙의 가장 기초이며 전부인 내용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항상 우리에게 어떤 기적과 형통을 주는 방법으로서 신앙을 요구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다 신앙을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으니 나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며 이중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성경이 한 번도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2장에 가시면 신자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느 데 대한 성경의 아주 대표적인 구절이 나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지어다 너의 파수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사52:7-9)

우리가 맡은 임무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구원의 문을 여셨다. 모든 죄인들아 돌이켜 하나님의 초청하심에 응하라!  너희들의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받으라! ” 이 아름다운 소식을, 이 은혜를 선포하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이 책임지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면 어떤 대접을 받는다는 데 대한 약속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 우리가 이미 참여한 영원한 약속을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혼에게 넘겨 주시고 나눠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은혜와 긍휼과 사랑에 동참한 기쁨으로만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전하는 내용의 복됨과 은혜 됨과 진리 됨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떤 대접을 받느냐 하는 데 대해서 성경은 언제나 부정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늘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만 ‘내가 갇혔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갇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사나 죽으나 내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기에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안위나 영달을 바라지 않고 평안과 안일을 구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되었을까?’ 라고 생각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살아 있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사도 바울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하나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솔직히 이거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들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와 있어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오늘날같이 한국교회가 썪어 문드러지고 신자가 신자 아닌 모습으로 그럴듯하게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때도 없습니다. 이런 적이 없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위기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믿는 예수, 여러분들이 갖는 신앙은 다 여러분들의 이세상에서의 만수무강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고 어느 사람에게서도 영적이고 거룩하고 진리 된 복음의 향기가 넘쳐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저에게는 최고의 위기라고 여겨집니다. 신사참배를 강요당할 때보다고 공산 괴뢰군이 내려와 예수 믿으면 쏴 죽인다고 할 때보다도 지금이 위기입니다. 그것을 미국과 구라파는 우리보다 한 발 먼저 겪어서 다 망했습니다. 그 큰 교회당들이 모두 관광명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진실되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꼴이 곧 올 겁니다.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놓아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기 배만을 위하고 자기 먹고 사는 데 바빠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했던 이 믿음과 충성을 갖고 숨겨지고 감춰지고 매 맞고 괴로움을 당하는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진실 된 신자의 자리를 다 놓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기 잘난 척하고 자기를 증명하는 일에 바빠졌습니다. 여자들은 다 가정을 떠났고 남자들은 아무도 영적인 지도자의 지위를 충성되이 지키고 있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부인이 돈 벌어오는 것을 좋아하고 여자들은 돈 벌어오는 것으로 남자의 말을 듣지 않는 이상한 가정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 버는 것이 최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도, 영적인 문제를 촉구하는 자도, 도전하는 자도 없이 동업자들만 모인 곳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재미있게 살 것이냐로 타협한 눈멀고 장님 된 사람들끼리 모였습니다. 그러고는 미안하니까 교회에 가끔 나오셔서 헌금도 하고 예배도 봐주고 기도회도 같이 가주며 어영부영 넘기는 신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돌이키셔야 됩니다. 돈 갖고 돈 쓰는 재미로 여러분의 영혼과 영원한 약속을 팔아먹고 있는 현실을 제발 직시해 주십시오 아내들은 가정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남편들은 자신들이 한 가정의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하나님 앞에서 한 가정의 영적인 지도자인 책임을 제발 복구 하십시오.

그 자리로 돌아 가십시오. 그리고 월급 삼십만 원, 사십만 원 받아 가지고 쪼개 쓰는 재미로 돌아가십시오. 오백만 원, 육백만 원 벌어 가지고 뭘 사 먹어도 재미없는 그런 생활에서 제발 눈을 돌이키십시오. 그 부업 갖고 있는 거, 건물에서 세 받고 있는 거, 이런 거 다 팔아 버리십시오. 빨리 없애셔야 됩니다. 그것을 빨리하는 만큼 이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진실 되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지고 망하고 당하는 것을 삼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가시면 모든 신자에게 신앙생활을 이렇게 할 것을 요구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당 큰 싸움은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실까? ’ 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왜 이럴 때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지 않으실까?  왜 이럴 때 내말이 옳다는 것을 천사를 보내어 증명해 주시지 않으실까?  내가 진실되게 살고 영적으로 사는 것을, 나로 하여금 대통령이 되게 하거나 애들이 잘 되거나 하는 식으로 증명해 주시지 않으실까? ’ 이것이 싸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밑겨라! ”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우리의 지혜로운 것보다도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우리의 최고로 강한 것보다도 강하다. ’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활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제발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사십시오. 언젠가 한 번 “정당하게 삽시다”고 했더니 “그러면 굶어요” 그러더라구요. “굶으면 굶죠” 그랬더니 “그러면 죽어요”라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 답변이 “죽지요, 어차피 죽을걸요. 뭐! ”였습니다. 오래 있다 죽느냐, 조금 있다 죽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일찍 죽으면 일찍 주님 만날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하긴 여러분이야 지금 주님 만나는 게 기쁘지 않으니까 이렇게 사는 것일 겁니다. 솔직히 가능한 한 나중에 만나고 싶을 겁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 현주소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앙을 말씀에 비추어서 정당하게 점검하셔야 되는 자리입니다. 사기치지 마십시오.

주일 날 예배 보러 오고 헌금 내고 집사 됐으니까 여러분이 신자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이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은 주께서 나에게 시키시는 대로 만족하는 것이고 기뻐하는 것이고 주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육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이 있으십니까?  경제적으로 불리하십니까?  무슨 자존심 상하시는 일이 있습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남보다 열들하게 취급당한다는 뜻도 아니고 여러분이 하늘 나라에서 상이 적어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이 절대 여러분의 약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사는 데는 약점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서로를 경쟁시키는 것이 가장 큰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우지 못합니다. 종의 형체를 감수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내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되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던 주님을 생각합시다. 이것이 유일하게 신자가 그의 신앙을 영위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항복하지 않으면 신앙의 내용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사사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여러분의 생각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실 때 누가 말렸습니까?  우리가 보통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얘기하는 베드로가 말립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말로 외우고 머리 속에 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속에 신앙을 소유하여 누렸던 기적의 체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일하신다는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고 기적으로 함께 하시느냐를 모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절대 약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뭐라고 그러지요? “지금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라고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 지금 식으로 얘기하면 12개 사단을 보낼 수 있다구요. 아니 12개 군단이라도 보낼 수 있지요. 예수님이 절대 약해서 그 길을 걸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방법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내신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요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어떤 능력이 있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그 결과 그들이 와서 나에게 머리를 숙여 경배했다면 우리는 기꺼이 신들이 되었을 겁니다. 주님의 종인 것을 증명하기보다 우리가 신이라고 기꺼이 그들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었을 것입니다. 여기가 정확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돌이켜야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충성을 약속하며 인내하기로 해야 됩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서 세상이 나에게 어떤 대접을 할 것이냐에 상관없이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나타나실 것을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를 싸워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위협하는 세상의 것들이 흔들 수 없는 비교될 수 없는 그 자리에, 여러분이 원래초대를 받은 분들이요 약속 받은 분들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어리석은 세월을 보내지 마시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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