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교회의 직분

최용우 | 2009.06.26 22:59:5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4:23-28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80 / 1989.10.22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디시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사도행전 14 : 23 - 28

이렇게 사도 바울은 그의 일차 전도여행을 마칩니다. 돌아가는 길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되짚어 오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안심시키고 권고합니다. 그러면서 실제적으로는 교회마다 장로들을 세웠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지난 주에 안수집사님과 장로님들을 투표했습니다. 장로님이 아홉 분이고 안수 집사님이 열하홉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직분을 세우는 성경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 직분이 교회에 어떤 몫을 하며 어떤 식으로 그 직책을 수행해야 되는가? 하는 데 대하여 성경적인 이해가 필요한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행정부의 제일 큰 문제는 기구가 자꾸 늘어난다는 겁니다. 미국에서도 닉슨이 대통령으로 있던 시대에 하도 행정부의 기구가 방대하니까 이걸 어떻게 좀 줄여 보자고 해서 연구를 해보라 했더니 행정부 축소 연구 위원회라는 위원회가 하나 더 생기고야 말았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도 파가 여럿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속해 있는 장로교를 비롯하여 침례교, 감리교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무엇에 의해서 교파를 달리하느냐 하면 믿는 교리의 차이 때문이기보다는 교회 정치 행정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이름을 붙인 겁니다.

장로교라는 것은 오늘 여기도 나오는 것같이 교회를 치리하는 사람을 성직자만으로 하지 않고 교인들 중에서도 대표를 뽑는 으회 정치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회라는 것은 세상적으로 얘기하면 의회 격입니다. 그래서 평신도들 속에서 치리하는 대표자를 뽑는 것 입니다. 그 대표가 바로 장로입니다. 

치리하는 일은 맡지 않고 봉사만을 책임지는 대표로는 안수 집사와 필요에 따라서 세우는 서리집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사직은 분명히 봉사직이고 장로는 감독직입니다. 거기 비해서 감리교, 천주교, 성공회같은 데는 성직자들만의 감독직을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평신도들 쪽에서 나오는 대표자는 없고 성직자들에 의해서만 교회 정치 행정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반해서 침례교는 전체 참여 정치입니다. 대표의원을 뽑지 않고 교인 전체를 놓고 전체 참여 정치를 합니다. 그래서 침례교에서는 종종 그것 갖고 많이 자랑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이지 어느 기구가 더 좋으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런 질문과 같습니다. “내각책임제가 낫냐? 대통령 책임제가 낫냐?” 그거 뭐 어떻게 운영하느냐지 어느게 더 낫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장로가 되는 것이나 세상 관공서에서 책임을 맡는 것을 다같이 굉장한 벼슬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풍토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부작용이 특별히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와 가까운 침례교 목사님이 한 번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봐 박 목사, 골치 안 썩으려면 침례교를 하라구” “그래요? 침례교를 하면 뭐가 골치를 안 썩습니까?” 라고 제가 묻자 “전체를 모아 놓고 하면 결국 목사 마음대로 되는 법이야” 라고 답변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우습지만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어중이 떠중이 다 모인 중구 난방인데 어떻게 결정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목사 마음대로 되어 버리는 거지요. 그런데 장로교는 장로님들이 브레이크를 자꾸 걸기 때문에 어려워진다는 말이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그것 때문에 장로교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뛰어나도 한 사람이 2인분을 하느 것을 아직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이 민주적인 방법이 좋다는 겁니다. 한 가지 면에서 잘할 수는 있지만 잘하는 것이 거꾸로 그 사람의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표제가 있는 이 장로교 정치를 훨씬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장로를 성경에서는 어떤 의미로 뽑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을 봅시다. “미쁘다 이 말이며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딤전 3 : 1-4)

여기 나오는 기준을 보자면 여러분 중에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 구타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떻게 할 것 같은데, 돈을 사랑치 않는다‘ 이건 어렵습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된다‘ 이건 할 만한데 절제한다, 나그네를 대접한다. 이것은 참 어렵습니다. 나그네는 고사하고 자기 부모도 잘 못 모시는데 당연히 어렵지요. 게다가 가장 어려운 조건이 뭐냐 하면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한다는 조항입니다. 이건 부모님만의 실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낳기야 내가 낳았지만 속은 내가 안 만들었다” 이게 자식에 대한 부모의 공통된 핑계입니다. 자식 속도 부모가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모양만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8절부터는 집사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와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 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 3 : 8, 9).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12절)

그럼, 여기 있는 조건을 놓고 볼 때 장로의 직, 감독직을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이 문제는 조금 새겨 들어야 할 부분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이렇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궁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은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 : 12-16)

디모데전서 3장에서 본 것 같은 감독이 되려면 이러저러해야 된다는 아주 완벽한 조건을 제시한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에서는 자긴는 완벽하지 못하다고 해버립니다.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이고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고 또 맨 나중에 사도 된 자고 누구보다도 부족한 자라고 자신을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기의 사도직을 통해서 하나님이 바울 개인의 완벽함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같은 자도 구원하시고 그같은 자에게도 사도직을 맡겼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펼쳐지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 있었던 디모데전서 3장에서 우리가 먼저 보았던 그 내용에 있는 이 완벽한 조건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문제 때문에 우리는 마태복음 5장 사건이 생각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런 지도자직의 조건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나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 : 21, 22)

여기서 주님께서 무엇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느냐 하면 십계명에 나타난 모든 율법적 금령들을 범하지 않은 것이 괜찮다고 얘기할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인을 안한 것만으로는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 마음에 미운 사람이 없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누군가를 경멸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저 사람만 없다면 온 세계에 평화가 올 것 같고 저 사람만 없다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내 마음 편할 거라고 찍고 있는 대상이 있으신지요?

누구라고 이름을 대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생각하면 어제 먹은 밥알이 곤두서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그 마음이 있는 한 너는 살인한 자와 방불하다고 합니다. 27절을 계속 보십시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조금 전에 장로와 집사의 조건 주에 한 아내의 남편이 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첩을 데리고 살지 말라, 따로 다른 여자를 소유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것 안했으면 다입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그런 일들에 호기심을 갖거나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면 그렇게 한 사람과 방불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TV 연속극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일본에서 주로 많이 하는 연속극의 내용이 부정한 남녀 관계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십 년 동안 그것만 하다가 드라마를 건전한 걸로 바꿨더니 시청자들로부터 빗발치는 항의 전화가 왔답니다. 그래서 그 담당 PD가 고백한 말이 뭐냐 하면 ‘어쩌면 이렇게 부녀자들이 부정한 것을 좋아하는가? 하는 한탄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안하고 있지만 그것이 제일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지금 ’잘났어 정말‘이라는 말이 최고로 인기라고 합니다. 그 말이 인기가 있다는 것은 건전한 책임과 성실함으로 사는 데 대한 어떤 파괴 본능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호기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일을 저지른 것과 그런 소지를 갖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산상 설교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러지 마라’가 아니라 ‘여기에 안 걸릴 사람이 있느냐’는 우리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뭐와 같으냐 하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주님 앞에 데려왔을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쳐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지금 디모데전서 3장에 나열한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는 일이 우리에게 그것을 맡은 만한 능력과 조건이 있어서 맡기는 것이겠는가? ’ 라는 역설을 포함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능력이 있어서 주의 일을 맡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주로부터 받지 않고서 누리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실력과 힘으로 어떻게 주와 동역을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것은 이런 조건을 나열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주께서 요구하는 것에 미흡한 자인가를 확인해야 되겠다는 것이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나를 들어 쓰시는 주의 은혜로우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이 더러운 곳에서부터 거룩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일,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은혜, 긍휼이 나라는 존재를 통하여 확인되는 것으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신자도 그렇습니다. 세례식 때 세례 문답을 하면서 여러 분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내가 아직도 신앙상 미흡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며 내가 세례를 받으면 주변에서 야! 저런 사람도 세례를 받는구나 하고 비웃을 텐데 그래도 받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병원에는 누가 가느냐 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병원에는 아픈 사람만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 아픈면 아플수록 병원에 줄서지 않고 응급실로 직접 들어 가기도 합니다. 많이 아프면 아플수록 최고 대접 받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많이 아픈 환자가 ‘나 같은 것이 병원을 가면 남들이 저 병원을 얼마나 욕할까? ’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갖는 생각과 성경이 요구하는 것 사이에 어떤 미묘한 차이가 있느냐 하면, 우리는 주 앞에 쓰임을 받을 만한 어떤 조건과 은역을 구비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는 습관이 있는 반면에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이 요구하고 주님이 쓰시료고 하고 주님이 맡기려고 하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자인가를 확인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장로, 집사와 같은 직분이 얼마나 주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결과인가를 드러내는 도구로 쓰여질 것을 먼저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감독, 그 장로, 그 집사가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주님은 우리를 한없이 용서하신다, 은혜 베풀기를 비뻐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으로 쓰여지기를 요구한다 이겁니다. 여기가 다른 겁니다. 이 문제가 한국 교회에서 오해되어 있기 때문에 점점 어떤 교회들에서는 장로가 되려면 돈도 있고 명예와 지위가 있어야 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봉사직을 맡으려면 우선 돈부터 챙깁니다. ‘아, 이거 뭐 봉사직을 맡겨 주시는 건 좋은데 제가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으니 뭘로 봉사를 합니까? ’ 이런 생각을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신자가 되어서도 세상을 살면서 내가 신자 된 것을 감추는 가장 큰 이유가 ‘내가 신자라는 것을 알면 지난가던 강아지도 우겠다’ 이 생각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참 나쁜 생각입니다. 열왕기상 8장으로 가 보십시다. 아주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운 사건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8 : 46입니다. 이때는 솔로몬이 성전을 다 건축하고 그 준공식을 하는 때입니다. 백성들을 다 모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장면입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따으로 끌어간 후에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한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시옵시며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왕상 8 : 46-50)

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기도에 의하면 이 성전을 지은 것은 저들의 신앙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저들이 이제는 주님 앞에 성전을 짓고 저들은 온전히 바치게 되고 더이상 죄를 짓지 않는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 합격선에 들었다는 표가 아니라 이 성전을 지은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수준이 높아졌냐 하면 ‘우리는 범죄하는 자요 하나님은 용서하는 분이다’ 하는 것을 알았다는 뜻에서 수준이 높아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께로 와 회개를 해야 되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걸 용서하시고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를 것을 알았다는 표로 성전을 지은 겁니다. 그것이 세례를 받는 것이요, 그것이 교회 안에서 각종 봉사직을 받아내는 이유입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된 표입니다. 나 같은 것을 용납하시고 나 같은 것을 들어 쓰시는 분, 이것을 아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장로직이요 집사직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지킵니다.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 같은 어떤 의인이 있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모세와 엘리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영웅적 모세와 엘리야는 아닙니다. 모세도 성경에 의하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온유하며 지면에서 가장 승한 자라” 온유했다는 것은 모세가 이제는 한 번도 큰 소리를 치지 않는 자로 변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의 실력으로 자기의 백성을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엎드리며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뭐 그런 식으로 보자면 인간적으로는 하나도 뛰어나거나 분별력이 있거나 지혜롭거나 능력이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봉사직에 관해 살펴보기 위하여 창세기49장으로 가 보십시다. 야곱이 말년에 자기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축복하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 49 : 22-26)

자, 이 요셉을 축복하는 야곱을 보시면 어투에서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케 될 것입니다. 24절을 보시면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누구의 전능자라 하지요? 야곱의 전능자라 합니다. 자기의 이름을 붙입니다. 25절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라고 합니다. 너는 누구입니까? 요셉이지요 그럼 네 아비는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축복하면서 이렇게 잘난 척하는 사람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이게 이 본문에서는 핵심입니다. 26절에 가면 이것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너는 누구입니까? 야곱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야곱입니다. 그럼 내 부여조는 누구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입니다. 즉 야곱이 뭐라고 하냐 하면 내 축복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축복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중에 누가 제일 못합니까? 야곱이 제일 못합니다. 셋 중에서 누가 제일 나아요? 아브라함이 제일 낫죠? 그런데 지금 뭐라고 그런다구요?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낫다는 거예요. 바로 여기가 핵심입니다. 축복이라는 건 비는 겁니다. 자기가 복을 주는 게 아니라 복을 비는 겁니다. 누구에게 비는 겁니까? 하나님께 비는 겁니다. ‘하나님, 이 사람한테 복을 주십시오’라고 복을 비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복을 누가 주는 겁니까? 하나님이 주실 겁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복을 비는 자는 그가 하나님한테 어느 만큼 복을 빈 것이 효과가 있느냐로밖에 평가되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가졌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누가 더 발언권이 있느냐 하면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보다 발언권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하나님 속을 더 많이 썪였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압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훨씬 공부는 잘했지만 야곱이 하나님 속을 더 많이 썪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더 많이 알아요. 그래서 복을 빌 때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하나님이 어떤 것을 더 기뻐하시는가를 어떤 의미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보다 더 많이 압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선생님들이 하는 말이 공부 잘하던 학생은 선생님을 찾아 오는 예가 없답니다. 선생님께 공부만 배웠지 인간적인 교분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못되게 놀던 녀석들 중에서 찾아 오는 학생이 많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많은 꾸중과 안타까움 속에서 선생님과 인격적인 교류가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야곱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든가 교회 안에서 어떤 봉사직을 맡는다든가 감독직을 맡는 것은 어떻게 그가 더 많이 주를 알고 주를 앞세우는 사람이 됐는가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본인의 나약함과 실패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신자 된 것, 봉사직을 맡는 문제에 대하여 사도행전 6장에서는 이런 다른 단어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같은 뜻입니다. 사도들이 처음으로 집사들을 뽑는 장면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행6 : 3-5)일곱을 뽑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단어 3개를 보세요.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령이 충만하다, 지혜가 충만하다,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 하지 못하는 어떤 능력을 소유했고 빛나는 모습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생각으로 근본을 삼지 않고 주를 의지하며 주님께 매달리며 주님이 그를 용납한 것과 주님의 요구에 자기를 부인하고 엎드리는 것이 나타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자신을 근거로 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간섭하심과 주님의 주장하심에 매달리는 것으로 신자의 존재론을 바꿔가는 것, 그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교회의 신앙의 구심점이고 가장 아름다운 본보기라고 오늘 본문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만 신자들은 성장하며 그것만으로만 교회는 지켜지며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핵심적 내용이 되어야 된다고 사도 바울은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이 시점에서 점검하십시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당장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끄러움과 모자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막지 않습니다. 그의 복주심과 은혜스러움과 영광됨과 능력으로 간섭함이 여러분의 모자람 속에서 훨씬 더 크게 나타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오늘날 교회가 힘을 잃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주님의 필요성을 내 능력으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권세로, 인간적인 지혜와 생각으로 주님의 주님 되시는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능력과 영광을 가리우는 교회로 변한 것,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몰락되어 가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이 자리로 들어오시는데 여러분 누구도 뒤에 서실 필요가 없습니다. 즉시 들어올 수 있으면 즉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최고의 신다 된 표본이요 정답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이 일에 굴복시키시고 주를 앞세우는 것으로 여러분의 지혜와 믿음을 삼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영광과 영원한 약속들이 이 교회를 주장하고 분위기를 장악하여 영적으로 유익한 교회가 되도록 여러분 모두가 순종할 마음을 가지며 열심을 내시길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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