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율법주의

최용우 | 2009.06.26 23:04:0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5:1-5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81 / 1989.11.05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며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행전 15 : 1-5

사도행전 15장에는 초대 교회에 불어 닥친 내적인 문제 중에서 그 대표적인 것인 율법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교회가 겪게 되는 어려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를 공격하는 것에는 3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박해, 하나는 이단, 그리고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3가지가 교회 역사상 는 계속되는 교회의 시험거리들입니다. 당시 사회 상태나 정치 형태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분위기일 수도 있고 박해가 없으면 이단이 창궐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도저도 아닐 때는 분열이 일어나곤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박해가 있는 동안에는 이단과 분열이라는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단과 분열이 평화기에만 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종교적으로는 평화기이기 때문에 이단과 분열이 교회를 공격하는 주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분열이 교리적일 때, 특히 율법주의가 가장 큰 문제가 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15장 식으로 이야기하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율법주의적 요구를 믿으면 요구를 보면 예수를 믿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데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주의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는 구원이 불충분하다는 주장이며 그걸 충분히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언가를 첨가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것으로서 그런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율법주의가 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그것과 대조되는 믿음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 8, 9)

구원의 얘기를 할 때는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하며 은혜이고 선물이라고 하면서 이 믿음이 갖고 있는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반대쪽 개념인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랑할 수 없다’라는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 쓰는 단어인 ‘누구를 믿는다’ ‘누구를 신뢰한다’는 뜻이 아님을 밝혀 줍니다. 구원에 관해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라는 차원에서 쓰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선물이다’라고 합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거기에 나오는 것같이 ‘우리가 일해서 얻은 것이 아닌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3장으로 가시면 이 부분을 좀더 잘 설명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이젠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으니 차별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시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 : 19-25)

25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할 때 그 앞에 있는 서론들은 모두 ‘율법적 방법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구원의 다른 방법, 예수를 믿어서 얻는 구원이라고 믿음을 설명하는 겁니다. 이해를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어떻게 하면 빨리 달릴 수 있느냐?” 이것이 우리나라 육상계에 큰 숙제거리입니다. 누가 이런 답을 냈습니다. “달리기를 빨리 하자.”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순환 논리라고 합니다. “철수네 집은 어디 있느냐?” “중국집 옆에 있다.” “중국집은 어디 있느냐?” “철수네 집 옆에 있다.” 이게 순환 논리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관해서 얘기할 때도 동일한 논리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믿음이 좋다 그러면 그 사람이 뭘 하는 걸 보고 믿음이 좋다 그럽니까? ‘저 사람은 기도를 열심히 한다’ ‘저 사람은 꼭꼭 성수 주일을 한다’ ‘삶의 태도가 좋다’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는 것은 믿음의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어떻게 해서 그것을 잘하게 됐는지는 설명을 안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는데 ‘어떻게 해서 이삭을 바쳤을까요?’ 라고 물으면 ‘믿음이 좋아서 바쳤다’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믿음이 좋았는가? ’에 대한 추적이 없이 ‘그저 좋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가 답이란 말입니다. ‘어떻게’가 설명이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기를 잘 하려면 심폐 기능이 좋아야 되고 다리가 튼튼해야 됩니다. 이렇게 달리기의 주체가 되는 것이 다리라면 믿음의 주체가 되는 건 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때 성경이 얘기하는 것이 ‘율법이 아닌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행위가 아니다’ ‘인과율이 아니다’란 말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아닌 방법으로 너희를 구원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의 뜻입니다.

내가 100원 어치 일하고 100원 어치 대가를 받는 것은 행위의 법칙입니다. 내가 한 것만큼 결과를 받는 겁니다.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해서 자랑이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지 않았는데도 결과를 받으면 그것은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건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믿음을 설명할 때 너희가 행한 것이 아니니 자랑할 수 없다고 자꾸 이 부분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주체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얘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믿음이라는 방법을 썼다는 말입니다. 그전에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요구한 모든 조건을 지켜서 합격점을 따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행위의 법칙입니다.

거기에 반해서 이 십자가의 법칙, 믿음의 법칙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실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화목 제물을 삼으사 원인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구원이라는 결과는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새로운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 전체를 총괄해서 부르는 명칭이 ‘믿음’이란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믿음이라는 말은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주체자로 삼고, 우리에게 원인이 없는데도 우리에게 결과가 떨어지는 방법론’이란 의미입니다. 잘 안 믿어지시죠?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그렇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구원에 관한 얘기를 할 때는 ‘자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는 두 단어가 늘 뒤에 붙어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3 : 26-30을 봅니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렇지요 차별이 없다는 얘기를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이 구원을 얻는데 누가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동일합니다. 구원은 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삼아 우리를 받아 주신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장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럼 믿음이라는 것은 도무지 나 자신은 관계되는 것이 아닌가요? ” 그런데 사실상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론으로서 이렇게 믿음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는 이 방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부분’에서도 요구받게 되는 믿음이란 것이 또 있습니다.

그때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꾸중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으로 가시면 바로 이 부분을 위해서 처음부터 이런 다른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 : 16, 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앞에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의 자녀 삼으시는,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얻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되고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후에야 믿음, 중생하는 믿음, 구원을 얻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자신의 방법으로 사용하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자는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야 되는 믿음 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2차적인 믿음에서는 우리가 주체자입니다. 우리의 책임이 요구됩니다. 앞에 있는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도입하신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으로서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이 앞의 믿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삼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 불충분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언가 우리 쪽에서 내놓아야 할 것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했느냐, 아니면 여기에 율법주의를 섞었느냐 하는 것은 ‘자랑이 있느냐’ 하는 것으로 압니다. 차별이 있느냐로 아는 겁니다. 그래서 이 구원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만 충분하다고 납득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 보면 꼭 ‘저 사람보다 내가 낫다’ 라는 생각이 있다는 겁니다. ‘저렇게 믿어가지고는 천당 못 가지’ 그럽니다. ‘저렇게 믿어가지고는’ 이란 말은 굉장히 나쁜 표현입니다. 그렇게 믿어도 천국은 갑니다. 다만 가서 상급이 적을 뿐이지요.

이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았을 때 머리가 좋은 얘도 있고 머리가 나쁜 애도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나쁜 애보고 ‘저 애는 아직 덜 태어났다’ 그러지는 않습니다. 태어나긴 똑같이 태어났는데 좀 모자랄 뿐입니다. 신앙인 중에 구원을 얻은 이후 그의 신앙의 깊이가 깊어진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태어나다 만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중인 사람도 역시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난다는 건 언제나 순간적이고 아주 즉각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여러분이 흔들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구원 문제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방법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 갈라디아서 5 : 1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 : 1-4)

즉 구원 문제에 대해 나를 근거로 하려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은혜는 필요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필요가 없다면 그는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이건 아주 근본적인 싸움이 됩니다. 그런 말은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되고 십자가 외에는 구원을 얻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준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걸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반대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걸 아십니까?

기독교 교리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천지 창조주시오 주권자시며 우리도 그의 피조물인데 우리가 그 앞에 범죄하여 쫓겨났다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 죄를 씻고 돌아갈 방법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 죄를 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삼아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처음과 끝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내가 피조물인 것과 내가 무슨 혜택을 받고 긍휼과 자비를 빌어야 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애당초 인간이 죄를 진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대등해지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사탄이 와서 그렇게 꼬였습니다. ‘너희가 저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다.’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갖는 본성 중에 대표적인 본성이 뭐냐 하면 자족하려는 마음, 절제하는 차원에서의 자족이 아니라 내 안에서 모든 것을 확보하려는 정신, 이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휴머니즘이라 합니다. 멋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려는 고집,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없다는 독립 선언서가 휴머니즘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우리를 부추켜서 자랑케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마저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처음에 예수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면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경험하셨죠? “다 망했는데 지금 교회 나가는 건 낯 간지러우니 조금 회복이 되면 나가겠습니다.” 무슨 큰 병에 걸려서 입원을 했거나 사업이 쫄딱 망했을 때 가서 “이런 때야말로 더 열심히 돌아와야 할 때이고 하나님을 찿을 때입니다.” 그러면 “지금 가는 것은 너무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아서 사업이 좀 회복되면, 건강이 좀 나으면 가겠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보고 하나님한테 뭐 내놓으라 그랬나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뭔가 출자를 해야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빌어야 됩니다. 구걸을 하셔야 됩니다. 그걸 인정하는 걸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걸 믿음이 좋다 그럽니다. 그걸 안 하려는 것이 결국 율법주의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사람들을 가르는 차별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들이야말로 율법주의자입니다. 물론 누군가가 싫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란 그렇게 속이 넓은 존재가 아닙니다.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허나 그 싫어하는 이유는 내 책임이라고, 내 잘못이라고 인정을 하셔야 됩니다. ‘난 속이 좁아’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지 거기다가 이렇게 선을 잇지는 마십시오 ‘저 사람은 아직도 구원 못 받은 사람이야. 저렇게 믿어서는 안돼’ 이렇게 명분을 갖다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를 싫어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을 때 늘 “나는 대접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대접하러 왔고,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의인과 건강한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과 병자를 구하러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건강한 것으로써 그렇쟤 않은 자를 심판하는 자리에 서면 안되고 누구의 못난 것을 봤을 때 ‘넌 못났으니까 나만 못하다’ 라고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구원이란 못나고 무능하고 방법이 없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으로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일어나거든 우리 마음속에 율법주의적 편견이 스며든 것을 깨달으시고 스스로의 마음을 말씀 앞으로 변경시켜야 됩니다.

이것이 있어야 교회 안에 화평과 화목과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에베소서 4장으로 가서 결론은 지어 봅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 : 1-6)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데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저 죄인을 구한 분도 너를 구원한 그 하나님이요 저 못나 보이는 자가 갖고 있는 영원한 약속도 너에게 약속을 인친 그 성령님이 인친 것이요 너를 교회 안에 불러 그의 몸으로 삼은 주님이 저 자도 그의 몸의 일부로 부른 것이다’란 말입니다. 나는 별 넷 단 천사가 와서 구원하고 너는 작대기 둘이 와서 구원해 낸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잘나고 똑똑하고 모든 것이 남보다 앞섰다고 생각하는 너도 그 주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서 구원했고 네가 볼 때 제일 못났다고 생각되는 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진 피로 직접 씻어서 불러 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라’라고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그리고 우리가 받은 약속에는 성도 간의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마음을 분명히 붙잡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사람을 정죄하게 됩니다.

혀를 쯧쯧 차면서 ‘저런 것도 교회를 오다니’라는 생각이 금방 들어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는 말을 절대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싸움은 언제나 이 부분입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이단이 들어와서 결국은 무엇에 끈을 연결해서 우리 마음과 교회에 침투하느냐 하면 율법적 심리상태를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뭔가 근거를 확보하고 싶은, 우리를 자랑하고 싶은 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에 무엇인가가 따라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래. 이걸 해야 된대” 바로 그 해야 되는 것이 산 기도일 수도 있고 무슨 성령의 은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 얻은 자에게 베풀어지는 또 다른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지 하나님의 자녀되는 근거로서 자리잡게 되면 구원의 등급이 매겨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차이가 생겨지고 금방 인간은 인간끼리 계급을 조성하고 교회는 찢어지고 맙니다.

여러분 자신의 신앙의 이익을 위해서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동일하고 무한하신 사랑을 우리가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말씀이 지적하고 가르쳐 주심 앞에 우리의 영혼은 늘 항복시킴으로 미혹됨이 없는 굳은 신앙 속에 여러분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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