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은혜로운 율법

박영선 목사 | 2009.06.29 20:57:5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5:1-5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82 / 1989.11.1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니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행전 15 : 1-5

 

초대 교회에 일어났던 율법주의에 관한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 첫 공의회가 소집됩니다. 율법주의와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은혜와의 차이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구원의 방법도 아니며 구원의 조건으로 등장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며 그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방법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율법은 왜 준 것이냐 하는 문제가 이제 적극적으로 검토되야 합니다. ‘율법은 어떤 의미와 내용을 가지며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깊으신 의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살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의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서 정리해 보는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우선 시기적으로 이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 : 17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문제를 확인하는 데 있어서, 그의 생애 속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 장면이 창세기 15장 사건을 예로 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이를 저의 의로 여기셨다.’ 여기가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어 모든 구원을 얻는 자들의 반열 맨 선두에 서게 되는 지점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사도 바울의 증거를 예로 들자면 그 사건으로부터 430년 후에야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구원이 만일 율법의 행위를 준행하는 것이 그 조건으로 되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은 구원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율법이 주어지지도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 바울의 논리는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도 될 것이며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믿음의 가문도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집니다. 만일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면 아브라함은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고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성경이 신자들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차원에서 우리가 드디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그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고 방법이 되지고 않는다면, 그리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면, 구태여 무엇 때문에 율법을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종 이 문제에 대한 오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무법주의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 일변도로 가버리는 겁니다. 보통 이것을 반 율법주의라고 합니다마는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오해하고 있는 파 중에 하나가 워치만 리 계통입니다. 워치만 리 파에 대해서 자꾸 입에 올리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많은 성도들이 워치만 리 일파의 모임에 미혹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구원의 도리는 분명하며 이단은 아닙니다만 율법에 대한 해석은 전혀 잘못하고 있는 동네입니다. 워치만 리와 위트니스 리, 그 다음에 우리나라에는 왕중생이라는 분이 이 일에 처음으로 많이 활동하셨는데 지금도 그러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할례를 예로 들어 율법의 적극적인 필요성에 대해 성경의 답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15장에 가장 중요한 문제인 율법을 대표해서 할례가 등장하고 있는데 할례가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17장입니다. 왜 창세기 17장에 할례가 등장을 하게 되느냐 하면,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제 그의 몸으로부터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약속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이 그걸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서 노하십니다.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런 말씀을 하시고 아브라함은 두려워서 떱니다. 그때까지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이 실패 때문에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치라고 명하시는데 그 이름으로 고쳐야되는 이유는 그가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열 나라의 아비가 아니고 나열할 때의 열(列)자입니다. 여러 나라의 아비란 뜻입니다. 모든 조상의 아비입니다. 이런 이름을 주는 이유는 ‘너를 내가 모든 조상의 아비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그의 자녀 삼은 효시이고 그후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이런 식으로 백성 만들겠다는 약속으로 아브라함의 이름을 개명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즉 이 사건을 육체를 따라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는 걸 확신히 하기 위해서 할례를 명령하는 것입니다. 15장에서는 할례의 요구가 없다가 17장에 와서 할례를 요구합니다. 할례라는 건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오늘날식으로 얘기하자면 포경 수술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의 생식기의 일부를 잘라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생리학적인 차원에서 후손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신령한 후손이기 때문에 이 후손은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조건으로 만들어내는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후손이라는 뜻을 분명케 하기 위해서 그 명령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율법의 본질을 밝혀 주는 가장 중요한 힌트가 숨겨져 있습니다. 할례는 영적인 후손을 만들어내는 ‘조건’으로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손으로 영적인 후손을 만들어낼 테니까 너는 할례를 행하여 그 뜻을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떤 영적인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영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조건과 문제를 하나님 쪽에서 해결하겠다는 내용을 감추고 있는 요구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다른 데에 나타난 것으로 다시 확인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는 대목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조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 : 8-11)

 

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완결했기 때문에 쉬라는 의미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분명히 모든 일을 마치고 난 후에야 하는 것이지 일을 이루기 전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이 허락되는 것은 우리가 안식해도 좋을 모든 환경과 조건들이 완성됐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안식일을 쉬라’고 명령한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쉰다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다 되었으니까 그 결과로 쉬라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바로 이런 내용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잘 푼 곳으로 갑시다. 신명기 5 : 12 입니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 : 12-15)

 

자, 이 안식일을 명하면서 무엇을 예로 드냐 하면 출애굽 사건입니다. 안식하라는 것은 애굽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굽애서 노예였거든요. 노예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쉴 때도 옆에서 수발을 들어야 됩니다. 쉬려면 일단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라 그러면 너희를 꺼내 주겠다’가 아니라 ‘내가 꺼내 줘서 자유인이 되게 했으니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자유, 조건, 모든 환경이 조성되었음으로 ‘지켜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켜라’는 말 속에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노예 되었던 것, 아직도 남은 풀어야 할 선결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풀어 줄 것이라는 뜻이 내포된 명령이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은혜의 반열에 동차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결국 율법 받기 전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었다면 율법이 왜 필여하냐고 할 때 율법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살펴본 안식일 문제와 결부시켜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 : 11입니다. 때는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 나와 있는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서 구출하라고 보내는 장면입니다. 모세가 가기를 거부하고 이렇게 반문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을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 : 11, 12)

 

자, 이 뜻을 잘 보세요. 모세는 지금 이 문제가 확인이 안되는 겁니다. 지금 이 사건부터 40년 전에 모세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하나님이 편을 안들어 주셔서 괜히 애굽 관원 하나만 때려 죽이고 광야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야 하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러 애굽으로 가라’ 하시니까 하나님이 정말 이 일에 편을 들어 주실지 안 들어 주실지에 대한 의심도 생기고 여태까지 진행된 과정과 지금 형편으로 봐서 이것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저와 함께 하셔서 이 일을 이루실 겁니까?” 이것이 모세에게는 아주 큰 의심 거리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해서 이 일을 분명코 이루리라’ 하고 그 증거를 주시기로 합니다. 하지만 내일 확실히 일어날 일에 대한 증거는 일어날 일보다 앞서 주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으로 증거를 주시느냐 하면 일어나야 될 일이 완성되야만 알 수 있는 그 뒤에 일어날 일로 증거를 제시합니다. 모세는 “내가 애굽으로 갈 때에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행하실 겁니까?”를 물었는데 하나님의 답은 “내가 그렇게 할거다” 그걸 뭘로 아느냐 하면 “네가 가서 백성을 인도해 내어 이 산에 와서 나를 경배할 것이다” 이겁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건 증거로서는 적당치 못하다는 기분이 듭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하나 있는데 저 여인과 결혼할 것을 확신시켜 주십시오” 하고 묻는데 “그래, 저 여자를 내가 너한테 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내년 이맘때 네가 와서 너의 애를 유아 세례받게 할 것이다.” 이렇게 증거를 준 셈입니다. 그러면 그건 그 여자와 결혼이 된 다음에 일어날 사건입니다. 지금 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의심이 나서 묻는데, 하고 나면 이렇게 될 것이다란 답변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답을 주시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그 너머까지이기 때문입니다. 꺼내오나 못 꺼내오나 보고 그 다음 문제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즉 한 문제가 해결되야 다음 문제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저 궁국적인 목표를 이미 세우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오는 것이 궁국적인 목표가 아니라 꺼내서 이 산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는 것까지가 목표지점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답은 “모세야 걱정마라 내가 내 백성을 불러내서 이 산에서 나를 경배하게 하려는 데까지 뜻을 갖고 있는데, 꺼내오는 것을 왜 실패하겠느냐?”는 의미입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도 이것과 똑같습니다. 성경이 왜 자꾸 천당, 천당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된 기업을 받게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중간에 학교에 떨어지거나 교통사고 난다고 해서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 학교에 붙여 주시겠습니까?’ 식으로 눈앞에 있는 것 하나 하나를 격파해 나가는 싸움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방법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율법을 다시 생각한다면 ‘안식일을 지켜라’하는 데는 안식을 지킬 수 있는 조건까지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안에 포함시켜서 하는 얘기가 되는 것이니까 율법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꺼내 줘야 안식을 지키지요. 천지 창조를 완결하셔야 그 다음에 우리가 쉬지요. 이것이 율법이 갖는 그 중요한 핵심 된 내용으로서 율법이 은혜되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도 율법 전체에 대한 설명이 이런 부분과 일치되는 것을 이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22 : 34입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을 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 : 34-40)

 

자, 율법의 전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으로 가보십시다. 사도 바울이 은혜를 알지 못하고 살때와 이제 이 은혜를 깨닫고 살 때의 차이를 설명하는 부분에 가면 이 율법적 요구의 성격을 밝혀 주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 : 19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 : 19, 20)

 

자, 보세요 여기서 율법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율법 자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오해된 율법관인 율법주의를 얘기하는 겁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는 이유는 하나님을 항하여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당한 요구와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율법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고 자랑하는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행위라고 보통 우리가 얘기하는 율법주의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난 거짓말 안했다 넌 했다. 난 간음 안했다 넌 했다. 난 살인하지 않았다 넌 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원래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율법주의와 행위주의로 끌고 가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원래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자기 자랑을 하며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여태껏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요구 속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쪽에서 선결하시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걸 빼놓고 율법만 보면 그것은 전부 자기를 증명하는 것이요 남과 나를 구별하는 것이요 남을 심판하는 것으로밖에 쓰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6장으로 가 보십시다. “할례받은 저희라고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 : 13, 14)

 

여기 13절, 14절에 쓰여진 사도 바울이 쓰는 단어들을 보십시오. 여기는 할례하고 등장합니다만 율법 전체를 대표하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저들은 그 할례를 자랑거리로 쓰려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하여 내가 못박히고 세상이 나에 대하여 못박히며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 하는 것으로 자신을 구별해 냅니다. 말하자면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자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랑하는 데로, 그리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데로 바꿔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건 아무도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속에는 바로 이 일,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세상에 대하여 살아있던 우리를 하나님앞에 세우는 이 작업이 가능케 되게끔 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약속한 요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원리와 방법들을 조성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사형 선고를 합니다. 언제나 율법이 우리에게 하는 일이 무엇이냐? 그럴 때는 로마서 3장으로 가 보십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 : 19, 20)

 

율법적 기준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문제를 우리 앞에 제시하자 우리가 아무도 합격점에 들지 못하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성경이 얘기하는 대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동의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난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느냐 하면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 : 23, 24)

 

율법을 우리에게 들이대자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명약관화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아무도 그 율법을 지킨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죄인인 것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십자가밖에 붙들 것이 없다’입니다. 구원의 방법이 행위가 아니고 율법이 아니고 은혜요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복음입니까? 그게 다 십자가로 갑니다. 율법이 결국 구원의 조건이 아니요 우리를 죽게 하고 심판하는 것에 불과한 것 같지만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아래로 도망을 가게 되는 것이고 십자가로 갔기 때문에 율법의 원래 요구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가치입니다. 율법이 십자가와 손을 떼지 않는 이유입니다.

 

다시 로마서 3장으로 가보십시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 : 27-31)

 

자, 여기서 믿음이 율법과 손을 잡는다는 결론이 떨어집니다. 무슨 뜻일까요? 율법은 결단코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구원의 방법은 은혜뿐이요, 믿음뿐이요, 십자가뿐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그리로 보냅니다. 모든 구원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개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회개와 절망없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겠습닌까? 바로 이 일을 율법이 합니다. 율법이 우리 모두를 정죄하고 심판해서 십자가로 보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해 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자기의 주인으로서 살았던 모든 데서부터 하나님앞에 엎드리게 하며 죄를 벗어 던지고 의와 거룩으로 옷 입은 신자의 자리에 서게끔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이제 자신의 증명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이며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자세로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십자가만이 자랑이요 나를 내세우기보다 이웃을 위하여 내가 죽는 자리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것이야말로 무엇의 요구입니까? 율법의 요구입니다.

 

결국 이 일을 율법이 해냅니다. 율법 안에 이 요구가 있으면서 동시에 이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는 선결 문제를 하나님께서 그 안에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되 정죄가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십자가 아래 몰고 가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는 자리에 서게 하기 때문입니다. 모마서 8장으로 가 보십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 : 1-4)

 

율버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율법을 이루어야 됩니다. 여기서 분명히 하십시오.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율법을 행하려면 율법으로 시작하지 않고 십자가로 시작해야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시킨 이유가 무엇이지요? 육신으로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거듭나게 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린 자로서 이룰 수 있는 일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다시 우리에게 요구된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여러분이 자녀에게 공부 잘해라 하는 것은 당연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자녀가 공부를 잘하면 부모가 생기고 공부를 못하면 부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아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없었던 부모가 생기지고 않고 부모가 있는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부모가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부모가 생기고 안생기는 조건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부모가 생기느냐 안생기느냐의 조건이 아니라고 해서 나는 공부 안한다는 통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난 부모님 계시니까 공부 안해도 돼.’ 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계시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요. 왜요? 부모가 내팽겨쳐 놓은 자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라면 스스로 분발을 해야 되겠지만 부모가 있는 자식이라면 그건 놔둘 수가 없습니다. 말로 해서 안되면 때려서라고 시키고야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것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은혜를 허락하셨닥구요? 율법을 지키게 하려고 베푸신 것입니다. 거룩해지라는 말입니다.

 

거룩해지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율법의 요구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에게 자녀답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 요구하십니다. 연약한 자리에 그냥 눌러 앉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율법과 저촉되는 생활을 하는가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보십니오. 자랑이 아닙니다. 심판하고 경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전부 무엇으로만 존재하느냐 하면 ‘죄로 말미암아 내가 십자가 아래 파묻혔는가’라는 기초를 분명히 통과해야만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통과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기쁨과 자랑으로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커다란 책임이어야 됩니다. 구원을 얻은 모든 사람은 이 책임 아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내가 거룩해지는 싸움과 모든 이웃을 향하여 이 복음이 차별없이 허락된 것을 인하여 사람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남에게 관대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십시오. 보통, 우리는 거꾸로 신안 생활을 합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합니다. 자신에게는 늘 십자가의 용서만 있고 남한테는 늘 율법과 계명만 있습니다. 이건 안됩니다. 오히려 자기에 대해서 엄격해야 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구원을 헛되이 하지 말자. 빛의 자녀같이 행하라.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라. 늘 그렇게 자신을 분발시키고 스스로를 근신하는 자리에서 나오지 않아야 됩니다.

 

남에 대해서는 관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울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왔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꺼내었으므로 안식일을 지키라 명하는도다’라고 한 것같이 오늘 모든 율법을 ‘내가 너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꺼내 자녀를 삼았으므로 이 일들을 행하라고 명하는도다’라고 받으셔야 됩니다.

 

감사요, 특권이요, 남은 할 수 없고 신자만 할 수 있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 영광들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거나 손해라고 생각하시지 말고 자랑과 영광과 보람으로 삼으시고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훨씬 분발되기를 원합니다.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