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여자, 루디아

박영선 목사 | 2009.06.29 21:22:5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6:11-15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87 / 1989.12.17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사도행전 16 : 11 - 15


오늘 우리는 16 : 11 이하에서 그 유명한 빌립보 교회의 출발이 되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루디아라는 자주 장사 여인을 만나서 유럽을 기독교화하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이 대목은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왜 재미있느냐하면 6 - 10절까지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열심히 전도 활동을 하고 있는데 성령이 막으셔서 마게도냐로 가라 하셨고 이를 위해 환상까지 뵈여 주시고 성령께서 친히 간섭을 하셔서 그를 그리로 몰고 가셨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보고 나면, 우리에게는 도대체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하셨길래 바울을 그리로 몰고 가셨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셔서 갔더니 너무 예상한 것과 다른 일이 벌어져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나십니까? 요즈음은 없어졌습니다만 옛날에 우리 헐벗고 굶주렸던 시절에는 길거리에 가면 뱀 장수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금을 그어 놓고 “애들하고 여자는 금 밖으로 나가시오.” 그랬던 것 기억나십니까? 바로 이 뱀 장수에게도 따돌림받는 대상인 여자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쪽으로 강권하시고 환상 속에서도 부르셨는데 가고 보니까 아무도 없고 남자도 없고 애들도 없고 여자만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분위기를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앙적 차원에서 특별히 간섭해서 어디로 인도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팡파레가 울리고 사열대가 나와 서 있고 모든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면서 ‘환영 아무아무개 성도여’ 이렇게 할 거라고 예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마는 이것은 신자들이 갖는 커다란 오해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걷는 속에서 좌절과 실패를 만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길을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길인데도 평균작 이하의 길인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건을 여기서만 보는 것이 아니고 대표적인 것으로 요셉 사건에서도 보게 됩니다. 창세기 39장으로 갑시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 39 : 1 - 3)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셔서 시위대장이 그를 가정총무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과정의 어느 순간만을 토막을 내서 보았을 때 생기는 어려움을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요셉은 총리대신이 되고 전세계의 흉년을 넘기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자면 자기 집안 식구를 다 살려 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결국 오늘날까지 있게 하는 구국의 영웅이 됩니다. 그러나 당시는 팔려와 있습니다마는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실 거라면 팔려 가게 하지를 마셨어야지요. 노예로 팔려갈 때는 가만히 놓아 두었다가 팔려 가니까 은혜를 입게 했다 이것은 큰 것은 뺏기고 작은 것은 얻었다는, 말이 안되는 얘기입니다.


19절에 가시면 또 하나의 사건을 보게 됩니다.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 39 : 19 - 23)


정말 그렇습니까? 범사에 형통한 게 지금 감옥에 간 겁니까? 감옥 간 지금이 편안합니까? 그런데 이거을 하나님이 범사에 그와 함께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그러나 실제로는 일부분만 잘라 놓고 보면 하나님이 편 안 들은 것이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이것이 형통한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현실과 그 사건에 대한 성경의 해석에 동감하십니까?


이것을 인정 못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ㅇ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신앙 생활하지 않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우리가 왜 세상살이에서 성공하지 못하느냐 하면, 우리는 아직 우리의 결과를 못 보고 지금 순간을 살고 있으므로 현재 이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형통한 방법인, 노예로 팔고 무고를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만족스럽지 않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쪽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과 같은 신앙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라고 그럴 것도 없겠지요. 지금 같은 이중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우리에게 어디까지 확대되느냐 하면 결국 ‘하나님이 과연 계시냐? 한 순간을 잘라 놓고 볼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가 팔려 오도록 놔 두시느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가 무고를 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놔 두시느냐? ’ 로까지 되어집니다.

 


우리 인생살이 속에서 바로 그 문제를 하나님께 질문하게 되고 그 답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에게 기대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들 대부분의 신앙 생활의 현주소입니다. 그래도 혹 모르니까 버리는 셈 치고 헌금을 해놓는 것이지요. 혹시 그 땅이 또 언제 오를지 모르니까 사 놓듯이, 속는 셈 치고 믿어 보는 그런 식의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은 신자들 대부분의 신앙의 현주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부분을 우리가 극복해야 되고 성경적인 가르침 안에서 분명히 정리해야 됩니다.


여기에서 오해된 신앙의 내용 중에 3가지를 짚어 봅시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 최고의 권위자시라는 것, 온 우주와 세계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믿으시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나와의 관계성을 믿으시지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으셨다는 걸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 두 가지만 알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내 모든 일에 지름길을 요구하고 급하게 결과를 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권능자시며 나를 사랑한다는데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왜 자식 하나 좋은 대학 안 붙여 주냐 이런 식이지요. 그것이 우리들 신앙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믿음의 핵심 중에 하나님이 권능자요 전능자요 유일한 주인이신 것과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것 그 외에도 또 알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 이것을 놓치면 우리들은 종종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그 사랑에 대해서까지도 의심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듭시다. 마태복음 13장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봅시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가 나오는 장으로서 제일 많은 비유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 하나만 들겠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 : 33)


여기서 천국이라는 것은 장소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의 확장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습니다. 그 전체 밀가루덩이에 누룩의 성분을 퍼지게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통치권을 확장하시는데 구름 타고 나팔 불며 권능과 심판권을 가지고 위엄 속에 나타나시는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으시고, 삼키우는 방법인 누룩을 갖다 넣는 방법을 쓰신다는 겁니다. 밀가루 속에 누룩이 들어가면 누룩이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중에 전부 부풀기 전까지는 그 속에 누룩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예를 봅니다. 요한복음 12 : 24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 잘 아는 구절입니다만 이것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열매를 맺는다는 말을 열매를 맺는다는 것에만 너무 연결시키지 말고 열매를 맺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취하는가 보십시오. 땅에 삼키움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은 그 방법을 삼으신다고 합니다.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은 누룩같이 누룩이 힘을 쓸 것이지만 처음의 모습은 삼키워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땅 속에 씨를 심었을 때는 그 땅 속에 씨가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땅이 씨를 삼켜버린 것 같습니다. 씨를 이긴 것 같고 없앤 것 같은데 거기에서 싹이 나와 열매를 맺는 방법을 하나님은 쓰십니다. 그래서 신자의 이 세상에서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삼키워진 것 같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이 이 전 세계를 기독교화하는 하나님의 크신 임무를 부여받고 들어선 첫 땅에서 그 일을, 약하고 숨기어진 자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여자들로 말미암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 이 본문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은 좀 걸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도회 같은 모임에 가면 괜히 여자들을 부추기느라고 여자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기 위해 이 루디아 얘기를 많이 하는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절대 여자를 괄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여성이 등장한 것과 그 내용을 가만히 연결해 보면 기독교 신앙은 참으로 여성적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남편의 권위 아래 복종하도록 요구를 받고 있고 성경적으로는 남편의 지도 아래 있게 되기에 묻히고 삼키워지고 감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 더 보십시다. 이사야55 : 8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 : 8 - 11)


비와 눈이 내리면 내렸다가 금방 가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적신 후에 다시 하늘로 올라 가는 것입니다. 물방울 모여 시냇물, 시냇물 모여 강물, 강물이 모여 바닷물, 바닷물 모여 수증기, 수증기가 모여 구름, 이런 식으로 한바퀴 도는 것입니다. 그냥 내려왔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와서 한바퀴 도는 동안에 종자를 내고 씨를 맺어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온 산천 초목을 푸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흙이 씨앗을 삼키운 것 같지만, 집어 먹은 놈을 양식 삼아 싹을 틔우고, 땅이 비를 삼킨 것 같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땅 자체가 부융해져서 풍성해지고 자양분이 생겨 싹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 신자를 살찌우며 신자를 키우시는 방법입니다. 세상이 신자를 삼키는 것 같지만 우리를 삼킨 자가 우리 때문에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비가 와야 죽은 땅이 아니라 산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의 삶의 방식은 삼키우며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게 되어 있는 것이며, 신앙인의 모습이 독특하거나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꼭 명심해 주십시오. 독특하거나 유일하지 않다는 것의 뜻은 우리가 맨 처음 본문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내가 주의 일을 한다는 결심 때문에 앞길이 직선으로 쭉 뻗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같은 수준의 신앙의 경지에 이르고 신앙적인 열심을 가지며 동일한 모습을 갖지 않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곳곳에 심습니다. 곳곳에 씨를 심을 때 다 모아서 한 구덩이에다 심는 거 보셨어요? 골고루 뿌립니다. 가로등을 켜서 전부 모아 놓은 거 보셨습니까? 이렇게 신자는 띄엄띄엄 심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군데를 다 다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를 삼킨 바 된 저들도 귀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습은 그가 참다운 신자이면 신자일수록 범상하며 각양 각색의 모습을 가집니다. 높은 사람이 있으면 낮은 사람이 있어야 되며 배운 사람이 있으면 안 배운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가는 자리까지 하나님께서 은혜와 생명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는 바람에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강도 중 한 사람이 구원을 얻습니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신자이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그러셨고 우리도 그러해야 하며 하나님이 일하시고 기뻐하시는 방법입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이것을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꺼내어 모르는 땅 이방 민족의 나그네로 보냅니다. 창세기 12장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 : 1 - 3)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많은 사람에게 복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 많은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돌아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야 그들에게 복을 주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 자신은 묘지 하나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절대 어떤 기업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내야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집, 자기 가문만을 지키던 데에서 빼내어야 자기 집, 자기 것이 없는 나그네 인생을 삼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우리도 구원 얻는 반열에 서게 됐으니까 고맙지만 아브라함 자신은 그의 평생을 밤낮 텐트 치고 산 것입니다. 텐트 쳤다 걷었다 하며 그의 평생을 그저 밤낮 돌아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왜입니까? 더 많은 사람과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복받게 하시기를 원하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기 위하여 그 일을 아브라함에게 맡겼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모든 곳, 모든 자리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굽까지도 내려갔었지요.


어떻게 해서 내려갔지요? 무슨 특별한 사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근을 만나는 바람에 내려갔습니다. 신자의 범상하고,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이 인생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사명인 줄 아십니까? 인생이라는 것은 멋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기도를 했더니 홍해가 갈라졌듯이 한강이 갈라지고 분당 아파트가 당첨이 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휴, 저 녀석을 내가 왜 낳았나?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하지.” 이런 푸념의 연속이라는 말입니다. 그래도 포기 안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말씀에 대해 무어라 증거하는지 한번 봅시다. 요한계시록 3장으로 갑시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칭찬받는 교회는 여기 하나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떻게 칭찬을 받는가 보십시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을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3 : 7, 8)


잘 보세요. 여기 적힌 적은 능력이라는 것은 양의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것이 외적인 형태로 볼 때 사소하고 자질구레하다 이겁니다. 바로 그것이 큰 일이란 것입니다. 여러분 물건이 클수록 비싼 게 뭐가 있습니까? 크고 비싼 거 많지요. 뭐든지 크면 비싸지요. 그런데 크고 비싼 것 하고 작고도 비싼 것 하고 어느 쪽이 비쌉니까? 작은 게 비쌉니다. 다이아몬드라든가 보석류는 다 작은 데도 비쌉니다. 그게 크면 비싸지 않았을 겁니다. 적은 일이라는 건 지금 그겁니다. 하나님이 맡긴 일이 외형적으로 볼 때 작아 보이지만 그것이 충성해야 되는 일입니다.


왜 이것을 제가 그렇게 설명할 수 있냐 하면 8절을 다시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하나님이 하시려는 어떤 일을 열린 문 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리 오시오, 이리 오시오 환상을 보이고 아시아에서 못하게 하고 저리 가라고 성령이 친히 와서 밀어내서 갔더니 거기 뭐가 있느냐 하면 적은 일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린 문입니다. 루디아를 만나는 것입니다.


나중에 결과적으로 거기에 빌립보 교회가 섰다는 것 때문에 루디아가 높여졌습니다마는 사실을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과 방불한 사람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2장으로 가셔서 서머나 교회을 봅시다. 칭찬을 받지는 않았습니다마는 꾸중도 받지 않는 미묘한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 : 8 - 10)


서머나 교회에 말하기를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본인들은 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할 재산이나 명성이나 지혜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조건으로도 곤궁한 자리에 있었던 모양인데 그들에게 ‘실상은 네가 부요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무슨 전도나 선교나 구제 같은 걸 크게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그런 걸 더 줄테니 네 마음에 있는 소원대로 다 일을 해라”가 아니라 “네가 장차 고난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또 게다가 어떻게 하라구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합니다. 고난을 당하면 고난을 견디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 된 것을 그냥 붙잡고 있는 것 자체가 사실은 가장 큰 일입니다. 성경이 이것보다 더 큰 일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내가 이 열심을 가진 적도 있고 진심을 바친 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거기에 응답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신 적은 혹시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앞에 열린 문을 두셨고 여러분을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쓰고 계시며 여러분은 왕같읕 제사장입니다.

안 그런 것 같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에 대한 오해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썪는 밀알로 삼으시고 세상이 우리를 삼키운 것같이 쓰십니다. ‘우리’ 라는 존재가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특별히 봐 주지 않고 나도 남다른 어떤 실력가 영광과 권능을 갖고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든지 아프리카라든가 동남 아시아라든가 어디 가서 화끈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든가, 아니면 돈이라도 좀 많이 하나님이 주셔서 큰 일을 해보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 오늘도 애와 싸워야 되고 연탄가는 것 때문에 싸워야 되고 남편과 좀 더 일찍 올 수 있느냐 없느냐 싸워야 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맡긴 중요한 신앙상의 책임입니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리시는 만나와 반석에서 내시는 생수를 주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씨를 뿌려 여름내내 김매고 땀 흘려 가을에 추수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남에게 삼킨 바 되고 흐르는 물이 되어 정처없이 나그네 된 인생을 살기를 원하사 많은 사람을 만나게 하시기를 원하고, 우리를 삼킨 자가 우리 때문에 생명과 은혜의 자리로 함께 부름받게 되기를 요구하사 우리를 표식 없이, 나타난 것 없이, 만드시는 겁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일일이 지명하여 우리의 인생을 부르시고 감독하시고 간섭하시고 지키시고 지금도 눈동자같이 보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만 여러분 인생에 대해 기대를 안하고 있지 하나님은 기대하고 계시며 지켜보고 계시며 지금 채점하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여러분도 그 결실을 얻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신앙상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믿으시고 인내하시며 충성하시며 믿음을 놓지 않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작은 이로 큰 일을 이루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며 사람들이 버린 돌로 머릿돌이 되게 하시는 줄 믿는 신앙을 함께 가지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처한 입장과 조건을 감사하게 되고 마음껏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일하시는 그 모습을 영안으로 볼 수 있는 기쁨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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