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점치는 여인

박영선 목사 | 2009.07.01 23:58:4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6:16-23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88 / 1989.12.24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 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사도행전 16:16-23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과 실라와 그 일행이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서 빌립보 성에 복음을 전하고 거기서 아마 여러 날 유했던 듯 싶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빌립보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16절 이하의 오늘 우리가 본 본문에서는 거기서 뜻하지 않은 하나의 사건을 만나 결국 투옥되고 그 지경에서 쫓겨나게 되는 사건이 기록됩니다. 그 사건의 배경은 어떤 여자 종이 귀신 들려서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갖게 되자 용한 점장이가 되어 이 여종으로 말미암아 그 주인이 크게 돈벌이를 하였는데 이 귀신 들린 여종이 바울과 그 일행을 보고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일반인들이 볼 때는 ‘아직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 마을에서 이 점장이가 귀신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의 장래 될 일을 용하게 맞추는 걸 보고 여러 사람이 많은 일에 도움을 받고 있는 터에 이 사람이 바울과 그 일행을 이렇게 높였으니 전도에 굉장히 도움이 됐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도 실상 바울은 이 일로 인하여 굉장히 괴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귀신을 쫓아내고 덕분에 그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서 매 맞고 투옥되고 급기야는 이 성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살펴 보려고 하는 것은 이 일을 당한 주인의 행위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이 세상을 살 때 당하는 일들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하나 확인하고 들어갈 것은 바울이 왜 이 귀신을 쫓아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귀신을 쫓아낸 것은 이 귀신과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과 하나님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가 사람들에게 ‘우리는 예수 믿는 것 결사반대다’ 이렇게 써 붙이고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시험과 그 반대는 얼른 보아서는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롭게 해준다는 이름으로 와서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는 말은 분명히 맞는 이야기이지만 이 맞는 얘기를 근거로 해서 귀신도 발언권을 얻어낼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었냐? 이것은 사실이 아니냐?”라는 것으로 바울이 지금부터 하는 얘기와 이 귀신 들린 여종이 하는 얘기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는 것을 바울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바울이 하는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그에게 동조하고 그의 편인 것같이 얘기하다가, 지위를 획득하게 되면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런 것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여러분 주변을 잘 보십시오. 어느 때 예수를 잘 안 믿게 되고 신앙 생활이 떨어지지요? 돈 벌고 지위 높아지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축복이라고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애들의 경우에도, 좋은 대학교 들어가고 신앙 생활 잘하는 애들은 별로 못 봤습니다. 재수 삼수 해야 신앙이 좋아집니다. 두고 보셔야 됩니다. 무엇이 복이라고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부모된 마음으로 ‘뭐 내 영혼을 팔아 먹는 한이 있어도, 내가 지옥 가도 좋으니까 우리 자식만은 서울대학에 들어 갔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이 있는지 모르지만 여러분도 망하고 자식도 망하는 길인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복이냐 하는 것은 긴 안목으로 봐야 되고 세상이 주는 가치로 덥썩 물어서는 안되는 것들입니다.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서 괴로워 했던 것은 사탄이 묘하게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증거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괴로워합니다. 바울의 목적은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증거하는 이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인데 사탄은 묘하게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조명을 받고 있듯이 이 점장이가 미래를 맞추고 그러니 얼마나 조명을 받고 있겠습니까? 그것과 똑같이 바울을 옭아매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를 쫓아냅니다. 그랬더니 이제 주인이 시비를 걸고 아주 격렬하게 분노합니다. 이제 이 싸움을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19절에 있는 것 같이 종의 주인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그랬습니다마는 이 싸움 속에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익을 빼앗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싸움은 한 쪽과 다른 한 쪽이 떡 하나를 사이에 놓고 서로 자기가 먹겠다는 싸움입니다. 칼 들고 나오고 총 들고 나오고 하지 못할 얘기를 하고 별의별 악랄한 짓을 다 하면서 싸웁니다마는 신자와 불신자가 싸울 때 보면 신자가 양보하고 양보해도 불신자가 더욱 극렬하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신자의 신앙적인 정당한 태도에 대해 악랄하게 나오는 불신자에게 보다 양보하면 할 수록 오히려 훨씬 화를 낸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까?

경험이 없는 게 자랑이 아닙니다. 당해 보셔야 됩니다. 오늘 이 싸움에서 이 문제로 인해 어느 만큼 주인들이 화를 내느냐 하면 그를 데려다가 옷을 벗기고 때리는 정도입니다. 그 당시에 이렇게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은 굉장히 심각한 형벌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중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이었습니다. 24절을 보면 옥에 가두고 족쇄까지 채웁니다.

이렇게 완전히 흉악범처럼 대접한 것을 보면 이 일로 인하여 주인들이 그만큼 화가 났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 관계 정도의 손해를 본 것 이상으로 화를 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금 이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과 싸우는 데 있어서 차라리 그 여종을 뺏어갔다면 이렇게는 안 싸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귀신 들린 여종으로 하여금 점장이 노릇을 하게 해서 주인이 굉장한 이익을 보지 않습니까? 이것을 몰래 가서 뺏어왔다든가 스카웃 제의를 해서 돈을 더 주고 이쪽으로 데려왔다든가 했어도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화를 낸 가장 크고 본질적인 이유는 바울이 자기의 이익이나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을 사양하면서도 이 싸움을 거는 데 있습니다. 상대방은 자기의 정당함을 지키기 위해서 이쪽을 쳤는데도, 바울은 저쪽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싸움을 건 것이 아니며 또한 이들이 보고 있는 이해와 그 이해를 얻는 방법이 얼마나 죄악된 것인가를 폭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토록 화를 내는 것입니다.

여기 아주 신비로운 신자의 위치가 있습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과 생존경쟁을 하거나 이해 관계에 얽힌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훨씬 많이 양보하며 선하며 착합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조롱을 받으며 훨씬 더 많은 공격을 당합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불신자들을 무언 중에 정죄하는 그 무엇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삶의 모습과 삶의 원리에 대하여 우리들이 굳이 가서 싸우지 않아도 저들의 삶의 모습을 정죄하는 어떤 것들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저도 예전에 많이 당해 보아서 경험하고 있습니다마는 학생 시절에 -지금은 상당히 만연이 되어서 중 고등학생들 중에서도 술, 담배하는 학생들이 굉장히 늘어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제가 학교 다닐때만 해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담배를 피는 학생들이 화장실에 가서 몰래 피우곤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담배를 피거나 술을 하는 친구들이 꼭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공범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걸 아십니까?

지난 번에 저희 교회에서 장립식을 할 때 어느 집사님이라고 제가 이름은 대지 않겠습니다마는 그 친구분들이 와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늘 소주 한 잔 사야 돼” 그 말은 물론 세상 식으로 축하해 주는 표현입니다마는 그 속에는 상대가 자꾸만 더 진리와 생명의 차원으로 가는 것에 대한 불안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범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공범으로 만들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몰아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신자들에 대하여 신자가 훨씬 더 많이 양보하고 있는데도 그토록 화를 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싸움에서 지시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일상 생활 속에서,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싸워야 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조금만 어리숙해 보이면 가차없이 사람을 바보로 만듭니다. 그대 여러분이 “아, 예수 믿는다고 누구를 바보로 알아?”하는 순간 상대방은 더 이상 여러분을 못살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마는 여러분은 여러분이 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책임을 놓치게 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란 세상에서 미움의 대상으로 대접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미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3장으로 갑니다. 신자의 신자 된 증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 보십시오. 복받고 형통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 : 12-14)

자, 여러분이 해야 될 일이 뭔가 보십시오. 속이거나 속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싸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고 정직하게 살고 선하고 성실하게 살고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으로 싸우며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뺨을 대는 사람으로 싸울 것입니다. 속옷을 달라면 겉옷을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대접받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천사야.”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하나 있음으로 인해서 나머지가 전부 정죄를 당하기 때문에 그를 몰아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 : 10 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분명해졌지요? 그리고 무엇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13절 이하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입니다.

빛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입니다. 우리가 있음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악하고 무지하며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저들이 죄악을 먹고 마시고 있는가를 사실로 보여주어야 됩니다. 더러움 속에 있고 악함 속에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빛을 몰아내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서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정죄감을 느껴야 됩니다. 저들의 삶이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느꼈을 때 와서 항복하고 회개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럴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여러분을 몰아내는 일부터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껏 예수 믿으라는 얘기를 해 가지고 대접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범신론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도를 깨우쳐 인간이 인간의 자리에서 신의 자리로 나아가자는 싸움입니다. 인간을 대접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휴머니즘입니다. 인본주의라고 그러지요. 인간의 가치와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떠나서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떠나 있는 것이 죄악이라고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는 것은 죄 짓는 가능성에 대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인간이 선하다고 믿지 않으며 인간이 착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것을 자랑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어느 곳에 가서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 차원에서 기독교를 떠나서 잘한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박수를 칩니다. 히말라야를 단독 등정했다. 혼자서 헤엄을 쳐서 태평양을 건넜다. 이런 데에는 모두 박수를 보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지위를 높이고 늘려 놓는 작업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이름으로 인간 존재의 가치를 상승시켜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시오’ 그럴 때만은 인간들은 아주 질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절대 박수를 보내거나 잘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눅 6 : 22 - 26)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구약을 읽어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그것이 하나님 뜻과 맞지 않을 때는 선지자가 와서 꾸중을 합니다. 반드시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그건 안된다 그런다니까 왕들은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누구를 부르느냐 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예 하나님도 그렇게 하는 걸 허락합니다”라고 말해 줄 거짓 선지자를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그에게 상 주고 “하나님도 허락했다”하며 자기 욕심대로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란 하나님 모르는 자들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칭찬한 것을 가지고 마음을 놓는다면 여러분들이야말로 거짓 선지자요, 거짓 어린 양이요 엉덩이에 뿔난 양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힘을 잃은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를 인하여 욕 먹는 신자들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인하여 욕 먹는 자,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주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남에게 정죄감을 주어서 남들이 미워하는 존재가 되는 그런 신자는 거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와서 복만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억울하다고 얘기를 합니다. “착하게 살았더니 세상이 나를 병신 취급합디다. 내가 교회 와서 입 다물고 있었더니 나를 아주 쪼다인 줄 알아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신경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보시는 것만으로는 안됩니까? 그게 무슨 예수 믿는 겁니까? 그럼 다른 종교로 가십시오. 세상이 우리를 칭찬하지 않는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여러분이 잘되고 여러분 자녀가 잘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이익을 거부하고 자기가 유명해지는 것을 거부하고 주를 앞세우는 일념 때문에 채찍에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고 족쇄까지 차게 되고 결국은 그 성에서 쫓겨나야 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존재는 세상과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주께서 이렇게 얘기하셨겠습니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생각지 말라.” 기억하십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생애가 평온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온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같이 괴롭고 힘든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양보하셔야 되고 지셔야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되고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여러분 친척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렇게 오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누가 그를 반겼습니까? 그에게서 떡 얻어 먹고 그에게서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 중에 누가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며 그를 위하여 편을 들었습니까? 아무도 편을 들지 않습니다. 이익만 얻었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그들이 받았던 충격, 저들을 정죄하는 것, 거기에 대해서는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길을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를 물고 찌르고 채찍질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그는 기꺼이 그들 속에 오시며 그 조롱과 어려움을 당하십니다.

같은 방법으로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냅니다. 우리가 저들을 정죄하고 저들이 우리를 만나서 그 양심에 찔림을 당했을 때 처음부터 무릎 꿇고 “나를 구해 주시오”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란 어느 짐승보다도 자존심이 셉니다. 반항하며 거부하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할 것입니다. 그때 저가 항복하기까지 우리가 저를 향하여 비춘 빛을 차단하지 않아야 됩니다. 저가 우리 빛을 끄고 저들을 향하여 지적하는 우리의 음성을 막기 위하여 자기 귀를 막을 뿐 아니라 우리 입을 봉하기 위하여 돌도 던질 것이요 총도 쏠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우리의 신분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결국 이 앞에 당해낼 장사가 없다고 성경이 약속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은 자들이 승리하지 않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같이 우리를 향하여 이를 갈며 조롱하는 자들이 승리하지 않고 우리가 승리합니다. 신자의 생애는 분명해야 됩니다.

빛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의 빛을 마태복음 5장에서 얘기하는 것같이 말 아래 감추지 마십시오. 됫박 속에 됫박으로 덮어 놓지 마십시오. 그러면 불을 켠 효과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의 등불을 높이 드십시오. 여러분의 전 생애를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를 위하여 사는 줄을 모두가 알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영원한 상급이 있는 줄 아시고 그 약속을 하신 우리 주님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하여 길게 인내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러 오십니다. 죽으려고 태어나십니다. 우리는 죽으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 한 목숨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이 전파되는 것을 믿고 죽기로 합시다. 그것이 성탄절이고 그것이 신앙이고 사도들이 걸었던 길이고 성경이 우리에게 권하는 신자의 참 모습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마시고 주 앞에 인정받으시고 주 앞에서 복된 자신의 직분을 획득하시는 이번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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