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신앙의 구걸

박영선 목사 | 2009.07.02 00:06:4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6:26-34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90 / 1990.01.07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사도행전 16 : 26 - 34

우리는 지난 주에 사도행전 16장의 이 구원에 관한 초대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분위기 속에서 제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어서 구원에 대하여 좀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보통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든가 기독교 복음에 관한 핵심을 전할 때는 복을 받는다 기쁨을 얻는다, 형통케 된다는 적극적인 제안을 많이 합니다마는 성경이 구원을 제시할 때는 오히려 언제나 부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시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절망에 직면한 상태에서 구원이 제시되든가, 회개를 촉구하는 식의 일종의 막다른 골목에 몰아 넣고 제시하는 것으로서 그것 외에 선택할 것이 없이 제시되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를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기대를 이루는 방법으로 채택하는 것은 성경이 얘기하는 것과 사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으로 가보십시다. 거기 구원에 관한 전형적인 선언이 있습니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였느니라.”(마 3 : 1-3)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는 자로 예수님이 앞서서 등장을 합니다.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세우기 위하여 길을 예비하고 마음을 예비하는 자로 말라기 선지서에 기록된 대로 하자면 ‘그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그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기 위한 자’로 등장합니다.

그가 우리로 주를 만나게 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요구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지금 가고 있는 길을 180도 방향 바꾸어서 가는 것을 말합니다. 뉘우치고 돌이켜 지금까지 왔던 길의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회개’라는 말 속에는 지금까지 걷고 있던 방향과 목표와 가치 중 어느 것도 주를 만나고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제가 동쪽으로 가고 있는데 북쪽으로 가자고 하면 거기서 90도만 방향을 바꾸어서 가면 되지만 동쪽으로 가고 있는데 서쪽으로 가야 된다고 하면 여태껏 왔던 것 만큼이 손해인 것입니다. 회개란 그런 식의 요구입니다. 내가 여태껏 걸어 왔고 해왔던 것이 몽땅 헛된 정도가 아니라 꼭 정반대로 온 길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말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회개라는 말이 등장을 하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됩니다.

7절부터 또 계속해서 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 : 7-10)

그렇습니다. 회개해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어야 된다는 데 대해서는 여러분 모두 동의를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 놓고 보면 오해의 소지가 좀 있습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좋은 열매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구원에 관한 선포를 하고 있는 3:1-10에 이르는 내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얼마나 근본적으로 다른지 모릅니다. 보통 이런 구절을 오해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대해서 공통 된 어떤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갖는 종교에 관한 편견은 공통적으로 범신론입니다. 범신론이란 유일신과 정면으로 다릅니다. 신이 여럿 있다는 그런 정도의 뜻이 아니고 인간 자신을 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 그렇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인간이 신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같이 기적을 베풀 수 있고 앞날을 알 수 있다는 차원에서의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바로 범신론입니다.

인간이 어떤 높은 경지에라도 갈 수 있다고 믿는 대표적인 종교가 무엇이지요? 불교입니다. 도를 닦는 종교 모두 범신론입니다. 도를 왜 닦느냐 하면 인간이 깨우치지 못해서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믿고 깨우치기만 하면 어떤 경지든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해탈할 수 있다고 보고 초월의 경지에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갖는 사상이며 범신론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차원에서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회개하기를 촉구하면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 맺는 싸움이 아니라면 무엇인지 봅시다. 마태복음 7장으로 갑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5-19)

조금 전에 읽었던 것과 똑같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9). 그러나 지금 마태복음 7:15 이하에 있는 얘기는 누가 거짓 선지자이고 누가 참 선지자인가를 분별하는 법에 등장하는 얘기입니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알고 싶으면 열매를 보아라 이것입니다.

여러분, 배나무와 사과나무가 무엇이 다른지 아십니까? 배나무는 배가 달리고 사과나무는 사과가 달리는 것입니다. 봄에는 우리가 모르지만 가을이 되면 누구나 압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무가 아름다운 일을 하느냐 악한 일을 하느냐를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무냐 악한 나무냐를 열매를 보고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세례 요한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아름다운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하는 것은 이제부터 너희가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 즉 너희는 악한 나무들이니라 그러니까 회개하라 이런 얘기입니다. 이건 분명히 하고 지나가야 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착하게 사는 길 정도로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구원은 선하게 살기를 욕망하고 복받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에게 제시된 답안지가 아닙니다. 성경의 구원이 언제나 회개라는 차원에서 절망이라는 벽을 뚫고서만 제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너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다 이것입니다. 우리는 다 악한 나무라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착한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싸움이 아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나무로의 전환이 먼저 있어야 됩니다. 그 전환을 무엇으로 해야 되느냐 할 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얘기는 뒤로 하고 우리가 지금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을 열매로 맺으냐가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열매를 맺기 위한 나무로의 전환, 그것을 위하여 맨 처음 확인해야 하는 것, ‘회개’를 말합니다. 회개란 결국 내가 성경이 요구하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직시하고 돌이키는 것, 범신론에서 예수를 믿는 차원으로 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 내가 몰라서 그렇지 알면 할 수 있다고 믿는 가능성, 즉 휴머니즘에서 돌이켜서 ‘우리는 할 수 없구나 내가 죄인이구나’를 자인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제 회개하고 앞으로는 잘하겠습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을 안한 실수를 자인하고 앞으로는 최선을 다해서 잘하겠다는 것은 아직도 가능성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절대 절명의 절망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군요”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17 - 24)

이것이 무슨 얘기입니까? 로마서는 바로 이 얘기, 우리가 왜 회개해야 되는 가를 객관적으로 논증하는 책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예 몰라서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비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간섭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가를 분명히 보이는 법칙으로 준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가지고 어떻게 했습니까? 율법 가지고도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율법을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가진 그들이 지키지 않더라 이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구약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무엇을 증명하고 있느냐 하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의 가능성을 믿고 하나님을 배신하며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을 지키지 않는 후레자식인가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특별 취급을 했습니까?

저들은 홍해를 가르고 건너온 족속이요, 만나를 먹은 족속이요, 반석에서 물을 먹은 족속이요,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이 백성을 위해 지진을 내시기도 하고 지나가던 해도 붙잡아 두셨던 국가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저지른 죄는 이방인들이 저저른 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개인적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는니라 율법을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 7:7,8) 아주 재미있는 말이지요? 사람이 죄인이 되자, 하나님을 배반하고 회개해야만 되는 상태에 이르자, 다시 말해서 성경적으로 얘기하면 완전히 마이너스 인생이 되자 인간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좋은 것이 되지 않더랍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계명을 주었더니 계명이 그를 더욱 범죄하게 만들더랍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 그랬더니 오히려 도적질을 하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하지 말라면 더한다는 걸 아십니까?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인간에게 치명적인 것이 밝혀짐녀 밝혀지는 것만큼 사람들은 그것을 살상무기로 사용합니다. 의학의 발전은 동시적으로 생화학 무기의 발전을 병행시켰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아는 것으로 세상은 인간을 완전히 노예화 했습니다.

사람이 무얼 좋아하는가? 쾌락을 좋아한다는 것 때문에 세상은 쾌락만 약속하면 우리가 영혼이라도 팔아 먹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잘난 척하는 것과 사람 앞에 박수받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것을 미끼로 해서 여러분의 자녀와 여러분의 영혼을 지옥이 다 삼키게 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서울대학만 들어갈 수 있다면 지옥을 가도 좋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웃에 사는 사람들 앞에서 내 자존심만 만족시킬 수 있다면 죽은 다음에 지옥 맨 아래 구덩이에 들어가도 좋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기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필요한 옷보다 더 비싼 것을 입고 여러분이 필요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하고 삽니다. 왜 그렇지요?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을 깔아 뭉개야 속이 시우너한 마음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외없이 죄인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하는 얘기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하면 이런 것들입니다. 기독교 학자들은 성교육을 반대합니다. 성교육을 시키는 것은 그릇된 호기심을 막고 비정상적인 길로 나가는 아이들을 선도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가르치면 그들은 훨씬 더 많이 성적인 죄를 지을 가능성과 접할 기회를 갖게 될 뿐입니다. 가능하면 늦게 알수록 좋습니다. 사람이란 그다지 선하지도 않고 의지력이 강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잊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15-24)

이것은 무슨 얘기입니까? 사람이 선과 악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능력도 없더라 이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고 자기 멋대로 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 멋대로 한다는 생각 자체도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과 악한 일이 경쟁을 해서 선한 것이 이겨 본 예가 역사상 없습니다. 우리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애 속에 선과 악이 싸워서 갈등을 안 일으키는 예도 없지만 갈등해서 선이 이긴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한은 말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스님들도 선하게 삽디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얘기하는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자기 치장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놀라는 것은 신앙 생활을 정당히 하려고 하면 세상과 주변이 우리를 놓아 두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을 조금만 변형시켜서 하면 주변에서 굉장히 박수를 보냅니다. 즉 신앙 생활을 자기 치장으로 할 때 세상은 절대 그 사람을 욕하거나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자신은 보잘 것 없는 죄인임을 알고 주님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세상은 이를 갈고 와서 주이려고 듭니다.

여러분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신앙이 여러분이 잘난 것을 증명하는 신앙일 때에는 사탄이 여러분을 방해하지 않고 이웃 사람들도 여러분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왜요? 여러분 잘난 척하는 게 우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모든 인간은 주님 ???ㅍ에서는 죄인인 자기 모습을 직시하게 되고 절망의 벽 앞에 다 거꾸러지게 됩니다. 마치 못생긴 사람이 불을 끄라고 하며 거울을 깨듯이 여러분이 정당하게 신앙 생활을 하여 자신을 죽이고 십자가를 앞세우면 모든 사람이 사자같이 덤벼 들어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입니다. 그런 신앙 생활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말하자면 성경이 우리에게 구원을 얘기할 때 회개를 촉구하고 절망을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직시하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확인시키고 싶지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절망을 들이댑니다. 나를 확인하게 하고 주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성경은 언제나 회개라는 단어, 절망이라는 분위기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래서 신자의 절망은 환경과 조건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절망이어야 됩니다. “주여, 힘을 주소서. 형통케 하소서. 내가 주를 위하여 열심이 있나이다. 나를 들어 쓰소서.” 이것은 아닙니다. 일에 따라서 그렇게 쓰이는 일이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이대로 방치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면 저는 형벌 밖에 받을 것이 없고 저는 무가치할 뿐 아니라 저는 악한 것밖에 생산할 수 없습니다. 저를 제 생각과 손아귀에 놔두지 마옵소서”라는 구절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주님께 와서 이런 요구를 했습니다. “내 자식이 지금 병들어 있는데 와서 고쳐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주인이 먹을 밥상에 있는 것을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 그 여자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먹고 삽니다.” 그게 왜 칭찬을 받을 만했는지 아십니까? “주여, 저를 어떻게 괄세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생명과 진리와 구원과 모든 행복이 주로부터만 나오지 다른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제가 개가 되도 좋고 지렁이가 되는 것도 좋은데 개나 지렁이도 제 주인 밥상으로부터만 받는 것입니다. 주로부터만 나옵니다. 저는 주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녀가 칭찬을 받은 대목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게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큰 병은 내가 주장하고 내가 모든 것을 정하고 하나님은 완전히 내 비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형통케 하고 드러나게 하고 더 크게 하기 위한 것으로만 하나님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는 나에게 지혜도 없고 진리 될 것도 없고 복의 근원도 없으며 다른 무엇도 얻어낼 수 없습니다. 나에 대해서도 내가 주장을 하거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거나 내가 무슨 계획을 세우거나 내 힘으로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로만 내가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내 길에 표적이 되어 주시고 방법이 되시고 지혜가 되시고 힘이 되소서”라고 와서 부둥켜 안고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은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이 약속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추저하고 힘이라고 손에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보게 하고 그것을 꿰뚫고 나와서 주를 만나게 하기 위해 절망으로 우리를 인도해 줄 것으로 구원을 소개합니다. 이 절망과 회개라는 단어가 연결되지 않은 구원을 갖고 계시다면 그것을 휴머니즘이 됩니다. 여러분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잘난 척하는 외에 아무것도 아닌 자, 즉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으로 가보십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을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 : 3 - 10)

이것이 그 유명한 산상설교 중의 팔복입니다. 이중에 여러분 가장 얻고 싶은 복이 있으면 마음으로 짚어 보시겠습니까? 이 여덟 가지 복 중에서 이것만은 갖고 싶다 하는 것을 정하셨습니까? 솔직히 없지요? 돈과 명예와 건강이란 항목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지요?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걸친 산상설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자연인이 생각하는 인생관, 가치관과 주님께서 선언하신 신자의 신자된 모습이 얼마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를 비교해야 되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 구절들을 ‘주님이 하신 말씀이니까’라는 센치멘탈한 감정 속에서 좋아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심방을 다녀보면 이 구절을 벽에 써서 붙여 놓은 집을 여러집 보게 됩니다. 이것을 왜 좋아하시지요? 성경 말씀이니가 좋아하시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집에 가시면 다시 한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거기 있는 말씀들 중에 어느 하나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가’하는 것을 직면케 하지 않는 구절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만 거기 나열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옳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제일하기 싫은 것도 아닙니다. 왜 하기 싫은 것도 아니냐 하면 그런 건 하리라고 꿈도 꾼 적이 없기 때문에 싫은 것 목록에 올라오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휴머니즘과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의 자기 보호본능, 자기 합리화, 자기 주장 그리고 자기 확인과는 정반대되는 것인 자기 부인이 주된 원리로 요구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대로 산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이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죽기전에 우리로 하여금 직면케 합니다.

“이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나에게 남은 건 사망 밖에 없고 형벌밖에 없고 흑암밖에 없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자리에 꼭 우리를 초대합니다. 거기에서, 바로 거기에서 구원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라. 네 모든 것을 포기하라.”

주님께서 친히 신앙인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본질을 이렇게 선언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지니라.” 그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구원관이며 신앙관입니다. 우리가 왜 절망과 만나야 되며 회개라는 것으로만 이 자리에 들어서는가를 성경은 그렇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 아닌 신앙이라면 그것은 범신론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더 많은 능력과 재주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치는 것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모습을 만드는 것으로 더욱 갈급해져야 됩니다. 그래서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 마르며 더 많이 주앞에 나와 구걸하는 형태가 되는 것, 그 마음이 여러분을 부여잡는 것, 주께서 나에게 찾아오사 나에게 좋은 말씀을 하시며 영원한 약속을 주시며 나를 보장하시기 전에는 저는 쉴 수 없습니다라는 차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성경이 얘기하는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 우리가 믿는 바 우리가 약속 받은 바 구원들은 복된 것입니다. 모든 절망한 이들, 실패한 자들에게 이것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갖고 있는 자랑거리들보다 근심거리들과 낭패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오히려 여러분에게 좋은 것임을 아십시오. 그것을 고쳐서 자랑거리로 만들려 하지 말고 그 절망과 그 실패가 여러분을 주 앞에 인도하게 하여 주님을 앞세워 이제는 여러분으로 말미암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사는 생애, 다시 말해서 신앙인으로서의 생애, 구원을 받은 신자로서의 생애를 영위하시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승리와 기쁨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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