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의지적 예정

박영선 목사 | 2009.07.02 15:17:5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8:5-11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97 / 1990.02.2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격하는 디도 유스도라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사도행전 18 : 5 - 11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도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가 원래 계획아지 않았던 이 마게도냐 지방에 들어오고 그리스 남단쪽으로까지 내려와서 지금 아가야 지방이라는 데까지 왔습니다. 그중에 아테네를 거쳐서 고린도에 이르렀는데 굉장한 어려움과 그리고 사실은 실망스러운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많은 반대에 부딪히고 어려운 상황 속에 있는데 고린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9절을 보시면 이런 바울에게 주께서 호나상 가운데서 말씀하시되 두려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 : 9, 10) 하는 말씀과 위로와 격려를 주심으로 인해서 바울이 여태껏 그의 선교여행 중에 제일 오랜 기간동안을 고린도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그럽니다. 자그만치 일년 반을 여기서 체류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어려움과 나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주님께서 주신 이 말씀 때문이고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가 종종 들어오는 예정론이라 하는 그 내용입니다.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 구원해 내고 내 자녀를 삼아야 할 내가 택한 백성이 많다`하는 이 말씀이 바울로 하여금 이 어려운 조건과 환경 속에서 일년 반을 버티고 주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보통 이예정론을 애기하기만 하면 숙명론으로 이해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 결과를 하나님이 정하셨으니 우리가 할 일은 없다. 우리가 그 결과를 번복시킬 수도 없다 하는 것으로 종종 그 책임을 회피하고 열심과 성실하게 해야 하는 우리 쪽의 맡은 바 일들을 외면하는 쪽의 핑계를 예정론에다 많이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에 보면 쉽게 보아도 이 예정론이 바울로 하여금 그의 일을 회피케 하기보다 그가 낙담했던 일을 오히려 분발시키고 더 열심있게 하게 하는 것으로 작용한 것을 보게 됩니다.

언젠가도 한 번 이 예정론에 관해서 말씀드리면서 예정론이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때 계획을 세우시는 분이다, 지성이 있으신 분이다 하는 인격적 차원에서 이해할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이 예정론이 갖는 이차적인 뜻, 하나님께서 지성과 계획과 이런식으로만 인격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가 계획하신 것을 이루시고야마는 의지도 갖고 계시다 하는 쪽에서 이해함으로 많은 유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계획하시고 그 결과를 정하셨다는 얘기를 들을 때 가장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 쪽에서 혼자 결정하셨고 혼자 다 이루실 것이니까 우리 쪽의 할 일이 없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결구절 중에 가장 유명한 구절을 한 번 예로 들어 봅시다. 요한복음 3 : 16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니라.”(요3 : 16)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그의 자녀 삼으시겠다는 계획을 가지시고 그 계획을 어떻게 이루셨는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의 자녀로 삼으셨다 하는 것을 이루시는 방법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일을 계획하시고 정하셨다는 것으로 그냥 결과가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실제로 수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를 그의 백성 삼으셨기 때문에 그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 죄를 없이 하는 작업을 하셔야 됐고 그리고 실제적으로 구정물에 손 담가서 그릇을 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해야 될 대상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돌아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거기다 우리에게 그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에 대한 많은이해가 교리적인 논쟁을 일으키고 교파간에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을 장로교라 합니다. 장로교는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 드는 쪽 교리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감리교에서는 하나님의 일하신 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인간의 책임에 훨씬 큰 비중을 둡니다. 보통 전문적인 용어로는 알미니우스파, 알미니안주의라고 하고 우리 장로교쪽을 칼빈주의라고 합니다. 양쪽 다 각각 교리를 체계화하고 확정한 대표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학자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붙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조금 깊이 이해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는 것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는 것은 어느 한쪽에만 초점을 둘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둘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고 충돌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그의 자녀 삼으시기로 작정한 이상 그렇게 되고야 만다는 것은 인간이 보통 얘기하는 식의 숙명론이나 운명론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일을 해내시고야 만다는 하나님 쪽 의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느냐 그럴 때 우리가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부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서 혹자들은 칼빈주의냐 알미냐주의냐 이렇게 나누고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나누어서는 안됩니다마는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해 봅시다. 즉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 손에 있느냐 내 책임에 있느냐 이겁니다. 여러분이 구원 얻은 것이 여러분의 결정입니까? 이런 얘기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결정이기도 하고 인간의 결정이기도 합니다.

저는 늘 양다리 작전을 쓰는데 좀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인가를 우리가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대하거나 내가 싫어한다고 해도 관계없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고 그의 자녀 삼기로 했으면 도장을 찍어주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속죄사역을 해 주신 사람에 한해서 구원을 얻습니다마는 우리 쪽에서 얘기를 하자면 우리가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부분은 100% 내 책임으로 맡겨진 것만은 아닌 믿음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데 그 누구든지가 믿지 않으면 하나님이 가만 놔두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물론 내가 믿어야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안 믿으면 끝이냐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예정론을 다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녀는 하나님이 안 믿고 가만있게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훌륭해지느냐 훌륭해지지 않느냐 하는 것은 부모 책임입니까? 자식 책임입니까? 잘되면 부모 책임이고 못 되면 자식 책임입니다. 자식쪽에서는 뭐라 그럴 것입니까? 잘되면 자기 책임이고 못 되면 부모 책임입니까?

자식이 부모말을 잘 듣는 예가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얼마만큼 자식을 부모가 원하는는 대로 끈기있게 성실하게 포기하지 않고 간섭하느냐에 따라서 잘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부모가 100% 다 했다라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과 싸우다가 포기합니다. “에이 이제는 모르겠다. 네가 고생해서 알아라. 네 자식 키울 때 너도 부모 속이 얼마나 썩는지 알거다.” 이렇게 우리는 포기합니다마는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그 의지에 관한 부분이 예정론 속에도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웠던 계획을 변경해야 되고 취소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능력이 없고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별명 중의 하나가 ‘영원’입니다. 그는 변개치 아니하시며 식언치 않으십니다. 그의 입 밖으로 내신 말씀을 취소하거나 변경하시는 적이 없고 방해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예정론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고린도 도시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삼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을 백성 삼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보십시오. 바울을 보냈고 그 바울이 지치고 좌절해서 그만 두고 가려는 것을 못 가게 붙잡는데 그의 뜻을 다 이루기까지입니다. 이것이 예정론을 쓴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럼 바로 이것과 연결해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이 사건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고 거기서 유익함을 얻어야 되느냐 하면, 결국 신앙싸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을 우리에게 맡기고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데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기독교 신앙마저도 모든 종교에 대한 인간들의 일반적인 요구같이 자기가 하고 싶은 욕심,유익을 얻기 위하여 선택한다는 사실에서 신앙 생활을 실패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유익과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계획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도와 주었으면 좋겠고,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과 우리의 복을 위하여 준비하고 요구하는 것을 우리보고 순종하라고 그러는 싸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지의 싸움이고 지혜의 싸움이고 진리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에게 옳게 보이지만 진리가 아니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종종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며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 방법이 신앙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방해하시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그 입을 막는가? 이것이 말하자면 헌금, 기도, 성가대원 하는 것 등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얘기하는 모든 사건들과 내용들은 가만히 보면 두 국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 국면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요구가 내 계획과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옳으며 더 복되다는 것을 항복시키는 국면이 있습니다. 이 국면을 지나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나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그 영광된 자리로 초청하고 있으며 복된 것을 은혜로 널리 나누어 주고 계시는데 동참하는 동역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영광된 봉사의 자리로까지 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일차적인 항복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28장으로 가보십시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 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 : 10-15). 유명한 벧엘 사건입니다. 야곱은 지금 아버지도 속이고 형도 속이고 미움을 사서 목숨이 위태롭게 되어서 외삼촌 집으로 피난을 가고 있습니다.

이때 상황은 야곱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고 칭찬을 들을 입장이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굉장한 복을 약속하는데, 너와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동서남북에 편만하고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입니다. 야곱과 야곱의 후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그들을 통해서 복을 얻을 것입니다.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을 지나쳐서 가고 있는데 갔다 돌아올 것이면 지금 시작하지 무엇 때문에 떠나고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할까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가지신 이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야곱의 항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홀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계획을 우리를 통하여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일차적으로 하고 그 다음에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복을 나눌 때 우리와 함께 일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가면 이 약속은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복음20 : 21입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 : 21-23)

예정론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오묘하고 깊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합니다. 우리 개인으로는 자기 자신이요, 전체적으로는 인류 전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획을 이루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나님이 정하시고 기뻐하신 계획대로 이루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이루는 방법에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두 국면이 필요합니다.

첫째로 내가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내가 그분 앞에 복종하여 쓰이는 일이 이차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뉘 죄든지 사하지 않으면 사하지 않고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겠다고 합니다.

그럼, 다시 맨 처음 질문으로 가서 우리가 예정론이란 것을 했을 때 이런 오해 속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면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겠다구요? 저기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저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저 사람을 구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획하신 것을 이루시고야마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집을 꺾지 않으십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를 때는 누가 이기는 겁니까? 고집 센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를 보내시기로 작정했는데 내가 그것을 거부하면 나를 항복시키는 일을 먼저 하시는 법입니다. 그것이 오늘 야곱 사건에서 드러난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이 야곱이 피난 가서 20년 이상을 외삼촌 집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그 20년 이상의 세월을 통하여 야곱을 항복시킵니다. 그 항복된 야곱을 가지고 그 다음 일을 하십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이름은 야곱의 이름입니다. 나중에 야곱의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고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의 12아들로 형성되어 국가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십니다. 우리를 항복시키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결국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 일, 이것이 예정론의 골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금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내 계획과 내 기호에 따라서 내가 갖고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이것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이 마음과 이 자세가 깨지는 일이 일차적으로 여러분 생애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고달픕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선호하는 사상 중에 하나가 큰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왜 그렇죠? 큰 교회를 가면 누가 누군지 모르잖습니까? 이것이 제일 좋은 겁니다. 내가 김씨인지 이씨인지 밥을 먹고 왔는지 라면 먹고 왔는지 다 모르는 겁니다. 그럼 왜 나옵니까? 최소한의 신앙양심이 켕겨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예배 안 보고 골프 치러 가면 샷을 할 때마다 뒤통수가 근질근질 합니다. 그래서 여기를 나오시는 겁니다. 그렇게 시작하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낼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절대 그렇게 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기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밝혀 주시는 날이 옵니다. 그리고 와야 됩니다. 무엇이 진정한 복인가? 무엇이 진정 영광된 것인가? 무엇을 준비해야 되는가를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에게 그 항복을 받아 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항복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이 이 전세계를 복음화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일들을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아직 교회가 형성이 된 것은 아닙니다마는 1년 6개월을 즐겨 체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됩니다.

여호수아 1장으로 가시면 야곱에게 하셨던 이 말씀과 같은 말씀이지만 이 국면이 바뀐 말씀을 하나 접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족 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 : 1-9)

조금 전과 얼마나 스케일이 다릅니까? 그러나 같은 맥락입니다. 야곱에게는 어떻게 했습니까? 결국 야곱도 약속의 궁극적인 목적은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하여 일차 무엇을 해야 됐습니까?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머슴으로 살도록 내버려 둬야 했습니다. 왜요? 야곱은 지금 자기의 복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계획한 것과 다른 것으로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를 항복시켜야 했습니다. 그의 복은 장자의 명분을 뺏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내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다 포기하게 하기까지는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외삼촌 집에 가서도 그가 열심히 해서 재산을 증식하고 부인도 넷이나 얻어서 옵니다만, 얍복강 나루터에서 다 빼앗기게 합니다. 거기서 혈혈단신 혼자 남습니다. 그래서 그가 거기서 무엇이 복인가를, 무엇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가를 배웁니다.


그것을 여소수아의 경우까지 연장시켜 보십시다. 여호수아는 그렇게 이미 항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에게 무엇을 요구하나 보십시오.“약손한 땅을 가서 얻어라” 자자손손이 누릴 그의 기업을 뺏는 싸움을 시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니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여러분, 이 두 번째 국면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현대 신앙인들의 최고의 병은 이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승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냥 먹고 사는 것이 재미 있어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안 불러도 되게 “하나님 필요한 것 있으면 온라인 번호만 알려 주십시오. 뭐 찾아오시고 부르시고 그러십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건드리지 않을까 이것이 최고의 기도의 제목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저를 가만 놔두시겠습니까?” 이것은 참 나쁜 겁니다. 그리고 손해입니다. 가난한 겁니다.


우리는 지금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함께 추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그가 1년 6개월 있게 됐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대단한 유익입니까? 그렇게 따지면 아테네에도 바울이 몇 년동안 있었으면 아테네도 얼마나 멋있는 교회가 됐을 것인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피려는 것은 이것입니다.이것이 바울의 싸움입니까? 바울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이 뛰어나서 이 일이 된게 아니라 이 일을 누가 하기를 원해서 지금 이행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그래서 아닙니까? 바울이 뛰어나서 하나님이 바울 없으면 일 못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려고 결정을 했기 때문에 그 일은 이루어져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항복시켜서 그 일을 시킬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바울이 여럿 있어서 빌립보에도 하나 있고 데살로니가에도 하나 있고 베뢰아에도 하나 있고 아테네에도 하나 있고 여기 고린도에도 하나 있어서 평생 거기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입니다. 그것이 나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땅에서 내가 다른 사람 아닌 그 바울인 것입니다. 내가 바울입니다.

바울보다 우리가 더 나으면 낫지 못하지 않습니다. 물론 더 나아질 수도 있는데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우리가 처한 곳이야말로 1년 6월이 아니라 평생토록 하나님이 그의 일을 하기 위하여 약속대로 네가 뉘 죄든지 사하면 내가 그 죄를 사할 것이요 네가 뉘 죄든지 그대로 놔두면 나도 그대로 두겠다는 약속 속에 있는 자요,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을 복주겠다 한 약속을 받고 있는 자요, 담대하라 강하라 내가 너에게 명한 것이 아니냐 하는 명령을 받고 있는 자도 나입니다.

나는 바울이고 야곱이고 여호수아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다 싸서 금고 속에 넣어 놓고 아무도 사용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복과 하나님이 약속한 영광된 삶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기대를 갖는 것부터 시작하셔야 됩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의 비밀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재미있어 하고 가장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보람 되게 여기는 것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좋은 것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을 날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회피하거나 딴소리 할 틈이 없습니다. 매 맞지 마시고 좋은 말로 할 때 시작을 하십시오. 하나씩 물어 보십시오. 한꺼번에 위대한 일을, 놀라운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된 것과 하나님을 믿는 자의 행복을 가르쳐주사 나로 하여금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해 주십시오.” 이것도 못합니까?

하십시오. 증권투자 해서 돈 버는 것보다, 부동산 투자해서 돈 버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복을, 기쁨을, 자랑을, 환희와 즐거움을, 보람을 하나님이 여러분 생애에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두가 하셔야 됩니다. 이것을 안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신앙인이 아닙니다. 진짜 와야 될 자리를 빼앗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심리적인 위로를 얻기 위하여 여기 모여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에 막연한 불안감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치료하고 마취 당하기 위하여 여기 모여 있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속일 마음도 있지 않고 여러분에게 약장수 할 마음이 쥐뿔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먹고 살려고 여기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진리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애가 이렇게 값없이 헛되이 흘러가는 것은 참으로 손해보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고 진심으로 한 번 매달려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든지 이 기도를 하시면 응답받으실 것이요, 확신이 서실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제가 보증하며 힘있게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이 질문과 이 격려에 아무도 외면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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