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출발과 끝

박영선 목사 | 2009.07.02 15:20:1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8:9-11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98 / 1990.03.04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서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사도행전 18 : 9-11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을 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어느 것보다도 그의 전도사역에 있어서 가장 나빴던 장소일 수 있습니다마는 주께서 ‘내 백성이 이 성 중에 많다’ 하는 말씀을 주시므로 그의 절망과 개인적인 원한을 무릅쓰고 일년 육개월을 거기 거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가져오게 합니다. 제가 갖는 관심은 이렇게 해서 설립된 고린도 교회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여러 가지 환경으로나 조건으로나 가장 좋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 곳이었을텐데 이곳에서 주께서 함께 하시고 내 백성이 많으니 그들을 다 구원해 내도록 있어야 된다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그가 계속 머물렀을 때 과연 어떤 결과를 얻어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사뭇 궁금한 것입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는 많은 은사가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에서의 다른 전체적인 상황과 비교해 볼 때 무관할 수 없는 사건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환경과 조건이 나빴던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초월적인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 교회에는 성령의 은사와 또 다른 지식, 구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증거들, 이런 것들이 굉장히 풍성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으로 가 보십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 : 4-7)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서신서들 중에서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쓴 편지는 다른 곳의 편지와는 분명히 이 면에서 두드러지게 다릅니다. 구변과 지식이 풍족해서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한 곳, 여러 가지로 확증을 주신 중에 성령의 나타남, 초월적인 어떤 체험, 확인 이런 것들도 이 교회는 많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금방 야기됩니다. 오늘 여기에 참석하신 여러분 중에서나 또는 저도 자주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나도 더 확실히 예수를 믿고 싶고 굳은 신앙을 갖고 싶은데 확인이 되지않는다. 어떻게 하면 확인이 되는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바둑 두는 사람 중 제일 유명한 사람이 조남철씨였습니다. 그가 이런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답니다. 어떻게 하면 바둑이 많이 느는가? 조남철 9단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나부터 알려주게.” 물론 우리가 그 답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조남철씨쯤 되는 사람이 바둑을 못 두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겠죠? 여기에는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될 것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는 질문이면서도 우리가 그 뜻을 다 모르는 아주 중요한 어떤 것들이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 고린도 교회에는 이런 식으로 확신을 주고 그리스도의 증거를 견고케 해서 저들을 신자로 만들었는데, 나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면 이렇게 소원하고 간절해 하는데 왜 확인시켜 주시지 않는가? 그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금 시선을 달리해서 보지 않는 한 이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이것은 신앙을 빨리 확인하고 열심있게 빨리 시작하는 것이 꼭 좋으냐 할 때 꼭 그렇다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 역이 성립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쪽이 꼭 좋다고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신앙을 믿는 것, 확신하는 것, 이것을 전부로 생각합니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이 문제에 조급하고 성급합니다. 말하자면 신앙이라는 것은 시작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그 목표에 도달하는가라는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시작만으로 생각하지말고 그 완성적 차원에서 본다면 물론 시작은 언제나 일찍 해야 됩니다마는 그 시작이 꼭 공식화되고 여러분들이 요구하시는 것과 같이 마음에 확인되는 것이 빠를수록 좋으냐 하는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과 같습니다. 축구선수는 연습하는 기간을 가지고 진짜 시합에 등장해야 됩니다.많은 연습을 하고 첫 등장을 늦게 하는 것과 처음부터 시합에 나와서 쌓아 가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실전이라는 것은 분명히 연습하고 다릅니다마는 처음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먼저 공식경기를 해서 망친 선수가 많습니다. 특히 권투선수들은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준비되지 않았는데 한번 한창 상승세를 탈 때에 일격을 당해서 패배를 하면 더 이상 크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넣어주기 위하여 준비된 것보다 언제나 만만한 상대를 골라서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늘 준비만 하고, 늘 칼만 갈고 있다가 어느날 싸우려고 꺼내보니 손잡이만 남았다면 이것도 물론 곤란합니다.

말하자면 신앙이라는 것을 시작, 확인 이런 것을 전부로 생각하면 서두르게 됩니다. 저희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운동회를 하면 단축마라톤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 천 명이 뛰었다 그러면 돌아올 때는 백 명 정도 들어옵니다. 그런데 처음에 맨 앞장 서서 뛰는 선수가 있습니다. 보통 그런 선수가 선두대열로 들어오는 적이 없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고하고 왜 앞장을 서느냐 하면 그때 사진을 찍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발할 때 맨 앞에 있으려고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결국 상은 돌아올 때 맨 처음 들어오는 사람에게 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예를 들면 좀 분명해지실 것입니다. 우리가 제2외국어를 배울 때 독일어를 선택하느냐 불어를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가 저희 클 때는 아주 큰 문제였습니다. 독일어와 불어에 대해 이런 우스개 말이 있습니다. 독일어는 울고 들어가서 웃고 나온다. 그러고 불어는 웃고 들어가서 울고 나온다 그랬습니다. 불어는 갈수록 불규칙 변화가 많아서 시작은 쉬어 보이는데 갈수록 어렵고 독일어는 처음에 변화가 하도 많아서 아주 울고 들어가지만 규칙적이라서 나중에 고비를 넘기면 웃고 끝내게 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웃고 들어간 것이 꼭 웃는 것으로 끝난다는 뜻도 아니고 울고 시작한다고 해서 꼭 울고 끝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신앙이라는 문제를 확인, 시작 이런 데로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고린도 교회야말로 고린도 1 : 4-7에 본 바와 같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고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고 지식에도 풍성한 신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평가에서는 낙제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3 : 1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 : 1-3)

전체적으로 너희는 유치하고 어리석은 아이 같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고 구변과 지식이 있으며 성령의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확신과 확고한 어떤 믿음의 시작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가리켜 유치하고 어리다고 합니다. 예전에도 어렸고 지금도 어리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치명적인 꾸중입니다.

실제로 이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분쟁이었습니다. 시기와 분쟁이 아주 많아서 이 교회내에 여러 파벌이 있고 서로간의 싸움이 극렬했습니다. 게다가 아주 부도덕한 죄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실수들을 자주 자행하는 교회였습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은사와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한 확신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이 서신을 보면 신앙의 핵심이 뭐냐? 더 중요한 것이 뭐냐 그럴 때 지금까지 우리가 부러워했던 것들은 별대접을 받지 못하고 그것은 옆으로 치워놓고 다른 면들을 지적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고린도전서 8장으로 가 보십시다. 지식과 구변이 넘친 이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꾸중을 합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 : 9-13)

여기서 자유라는 것은 지식을 근거로 해서 나온 그의 분별을 얘기합니다. 이것은 죄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이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 하나가 옳으냐 그르냐를 증명하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옳을 뿐만 아니라 옳은 것을 나누어 주어 상대방도 진리로 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내가 나를 죽이고 절제하는 겁니다. 남을 위하여 내가 양보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훨씬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현대 교인들은 욕을 많이 먹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향하여 꾸짖는 말 중에 제일 큰 것이 ‘상식도 없고 무식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 부처님, 손오공 누구라도 부를 수 있는 순악질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옳다는 것을 앞세워서 자기 주장과 자기의 이익을 절대 양보하지 않는 부류들’ 이렇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본인의 옳고 그른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옳은 길을 가며 우리가 옳은 길에 들어선 것으로 인하여 우리 주변에 그 옳은 것이 확대되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옳고 진리되고 생명되는 것이 확대되기 위하여 우리가 훨씬 양보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10장으로 가 보십겠습니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 : 23, 24). 이것이 신앙의 훨씬 멋있는 것입니다. 이리 가야 됩니다. 이리 가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 준비를 공식경기를 하기 전에 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런 어려움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확인되지 않는다? 도대체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 것일까? 신앙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라고 회의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 확인할 것은 그런 것을 의심하고 그런 데 대해서 여러분이 갈등한다고 해서 신자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불신자는 그 갈등 자체가 없습니다. 불신자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틈이 있으면 고스톱을 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이 안되면 아무것도 안될 것 같습니다. 그 확인과 그 시작이 안되면... 그러나 아닙니다. 그 전에도 무언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됩니다.

9 : 19에 이 남을 위한 절제, 남의 유익을 구하는 이 일에 관한 자기의 양보가 바울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 : 19-23)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위하여 그는 자기를 증명하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에서는 완전히 죽었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식으로 얘기해서 아첨꾼이 된 겁니다. 내 이익을 위하여 아첨을 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가장 중요하게 내용으로 삼아야 하는 것, 가장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럴 때 절제와 덕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신앙은 뜻밖에 아는 것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과 같습니다. 저희 교회의 지역상 찾아오시는 분들도 보통 좀 잘 배우시고 잘 사는 분들이 평균적으로 많이 나오십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을 묘사할 때 똑똑한 사람들의 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디를 가든지 똑똑하다는 것을 먼저 확인 받아야 그 다음에 무엇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 피곤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이 똑똑하다는 것을 증명받으려고 그러는 사람은 더 이상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은 일을 이루어 내는 사람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물건을 상담하는 데 있어서 성공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내 물건은 어떻게 좋고 시중에 있는 것보다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많이 들어주고 덤덤하게 있는 사람이 훨씬 많이 팔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내가 얼마나 좋은 물건을 갖고 왔느냐를 떠드는 사람은 보통 성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똑똑하다는 것은 분별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이 지금 누구며 나랑 지금 무슨 말을 하러 만났으며 내가 거기서 무엇을 해야 되며 무엇을 얻어내고 상대방에게 어떻게 만족을 줄 것인가를 아는 것이 똑똑한 것이지 누구를 만나든지 나는 외국어를 열두 개나 하고 우리는 어떤 데 살고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를 만나도 “이놈아 내가 이래 봬도” 원숭이를 만나도 “이놈아” 이러는 것은 곤란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결국 그가 얼마나 많이 자기를 죽이고 남의 유익을 위한 존재로 있느냐로 평가받아야 되고 목표를 세워야 됩니다. 우리는 자꾸 자기 확인으로 가고 있습니다.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상당히 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실존주의의 영향일 것입니다. 모든 사실과 확인이라는 것이, 즉 다시 말해서 권위라는 것이 나에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기 확인이 어디서나 제일 처음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절제여야 되고 양보여야 되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정작 깊이 들어가면 순종과 만납니다. 맹종과 다릅니다. 여기서 순종이란 단어를 도입하는 이유는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것을 나누어 주어야 되는데 이 받은 것을 나누어 줄 때에 그것이 내가 만든 것같이 재면 아무도 항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합니다. 그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순종으로 갑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에게 혹시 신앙적인 확인과 분명함이 없어서 초조해 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런 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순간에 나에게 그 확인을 주시리라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굉장히 센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의 확인을 받아내서 펄펄 뛰는 것보다 어쩌면 더 좋은 신앙일 수 있습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사를 할 사람보다 저에게 인사를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제가 사람을 써야 되고 사람을 추천을 해야 되고 사람을 분별해야 되는 나이로 가면서 옛날에 젊고 패기에 찼을 때 저의 가장 큰 취약점은 조급함이라는 것을 발견케 되었습니다. 어느곳에서나 단번에 자신을 부각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잘 났는지 못 났는지가 척 눈에 안 들어 오는 사람, 있는지 없는지 그냥 같이 있을 때는 안 보이는 사람, 없는 사람, 긴 시간이 지나서야 익숙한 사람 이런 사람이 센 것입니다. 사람은 일회용 반창고이거나 한 번 먹고 버릴 껌 정도의 가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란 훨씬 신비롭고 훨씬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불에 올려놓자마자 뜨거워지고 내려 놓자마자 식는 이런 존재면 안됩니다.

훨씬 오래 달궈야 되고 훨씬 오래 조작해야 되는 깊고 대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확신시킬 때도 많은 부분에 걸쳐서 어쩌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우리를 하나하나 뜯어 고쳐가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는 표부터 붙여놓고 나중에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붙여논 표가 여러분의 생각에는 확신이고 기쁨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십년 있다가 손보기로 할 것’ 이렇게 붙여논 표일지도 모릅니다. 그 표 붙여놓은 것 하나 갖고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어떤 것은 지금 직접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표가 안 붙고 모두 분해되어 있는 것 같을지도 모릅니다. 이쪽이 앞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쪽이 앞섰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순종이요 기다림이요 우리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믿는 겁니다. 확인이 안되십니까? 여러분이 확인 안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시킬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겁니다. “나는 오늘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언제 필요한 때 확인시키실 것이요 그날이 올 것을 믿는다” 그러면 “나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펄펄 뛰어서 이 지붕을 뚫고 나가는 것보다도 그 신앙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보통 이 구원의 확신이 있다, 믿음이 충만하다 그러는 사람 치고 쓸 만한 열매를 맺는 사람을 별로 못 보았습니다. 얼마전에도 그런 전화가 왔습니다마는 멀쩡히 예수 믿는 사람에게 “당신 구원의 확신이 있소?” 그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글쎄요.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요” “구원의 확신의 표가 있느냐 말이요?” “표가 뭐요?” 그랬더니 “가슴이 갑자기 뜨겁고 눈물이 눈알과 함께 쏟아져 나오고...” “없는데요.” “그럼, 당신은 가짜요” 그래서 사흘을 못 잤대요, 그래서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가 어떻게 돼요? 껌이나 씹고 주무셔요 뭘 어떻게 돼요? 그런 것은 저도 없어요.

그러나 이 신앙의 핵심을 우리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보완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자체가 이 요구를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으로 갑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느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었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 12-20)

이상의 신앙의 핵심들을 몸으로 하십시오. 관념론으로 흐르지 마십시오. 말재주로 가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믿고 아는 것으로 여러분을 치장하십시오. 표정을 바꾸시고 행실을 바꾸시고 자세와 모습과 모든 것을 몸으로 하셔야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명히 은사도 있고 지식도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을 가지고 저들 자신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갖고 있습니다. 믿음의 내용으로 신앙의 고백으로 갖고 있으나 그것이 저들 자신에게 아름다움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교인들이 겪는 커다란 잘못과 일맥상통합니다.

요즈음 신앙인들은 와서 좋은 얘기만 듣고 갑니다. 아무도 신앙적으로 변화하지를 않습니다. 경건의 모습들이 너무 없습니다. 경건한 내용을 항복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경건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답게 바꾸셔야 됩니다. 이것은 어디서나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제일 큰 신앙의 핵심올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 1, 2). 신앙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나를 복종시키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드러나고 그가 베푸시는 은혜와 진리와 생명이 전달되기 위하여 제가 방해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이며 내 자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 앞에 있는 것과 같이 우리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말로만 하지 않아야 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가장 깊은 경지와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오늘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배웁니다. 여러분들이 소원한 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뭡니까? 내 만족, 내 기쁨으로 가지려고 하고 내 확인으로 가지려 하지 그것을 가장 고급스럽고 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자리까지 나를 바꿔가기 위해서 요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물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받고 싶은 여러분의 확신은 여러분이 변화되기 위해서입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에 회의를 몰아내고 기쁘기 위해서입니까?

변하기 위해서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모든 것이 여러분 몸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안됩니다. 신앙이란 말장난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께서 저들을 항복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쓰셨습니다. 똑같이 그가 그의 자녀로 부른 자들을 그가 기뻐하시는 자리로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고 그런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얼마나 거기에 호응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매 맞고 가느냐 칭찬받고 가느냐의 문제인 줄 아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내버려 두시는 예가 없습니다.

열매를 거두시고 칭찬을 받으면서 신자의 길을 걸으시고 그리고 여러분의 존재가, 여러분의 이웃들 앞에서 저 사람은 다르다, 저 사람은 신자답다라는 고백을 받아내시는 자리까지 가기로 결심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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