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그늘 속의 아볼로

박영선 목사 | 2009.07.02 15:23:0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8:24-28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099 / 1990.03.11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아볼라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사도행전 18 : 24-28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서 아볼로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에 관한 얘기가 성경에 두드러지게 부각이 되거나 많이 언급되지 않습니다마는 이 사람은 굉장히 대단한 사람입니다.

27절 이하에 보시면 “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행 18 : 27, 28).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고 반대파들을 지식과 논리적으로 압도하는 그런 일을 해낸 사람입니다.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며 이 믿는 도리에 관하여 열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아볼로라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알렉산드라에서 난 아볼로라는 유대인이라고 얘기를 함으로써 그 뒤에 있는 얘기와 연결되는 어떤 힌트를 우리에게 줍니다.

먼저 이 알렉산드리아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북쪽 지중해쪽을 향한 항구도시였습니다. B.C. 332년에 알렉산더가 세운 도시입니다. 알렉산더는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이것이 나중에 큰 도시가 되고 자기 이름을 따서 그 도시명이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이 로마 제국내에서 로마 다음 가는 굉장히 큰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 그리스, 소아시아, 팔레스타인, 북부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로마 대제국의 두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가 A.D.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이슬람의 지도자 오마르에 의해서 정복되고 철저히 파괴됩니다. 이슬람 지도자를 칼리프라고 합니다. 칼리프는 군사, 정치, 종교 삼권을 한 손에 장악한 지도자였습니다. 파괴될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는 굉장히 번창했고 학문적으로도 굉장히 뛰어난 곳이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그리스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 사상이 로마제국의 군사력과 행정력을 타고 온세계에 퍼져 있어서 당시의 세계 공용어는 그리스어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알렉산드리아에는 그리스 철학을 이어받은 네오플라토니즘이 꽃을 피웠고 여러분도 잘 아는 현대 과학과 수학의 중요한 뿌리들이 발생했습니다. 수학, 특히 기하학에서 유명한 유클리트도 여기서 활동을 했고 기독교적으로 얘기할 때도 오리겐이라든가 아다나시우스 같은 사도의 뒤를 이은 초대 기독교의 정지작업을 한 유명한 위인들도 바로 여기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칼리프 오마르가 A.D 7세기에 이 알렉산드리아를 파괴할 때에 거기 있었던 가장 큰 도서관과 모든 장서들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책들과 지식들 중에 코란에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불필요한 것이다. 만일 코란에 있는 내용이 있다면 그건 코란으로 족하니까 그것도 필요없다.” 엎어치나 매치나 몽땅 다 불태워서 알렉산드리아의 찬란했던 문화나 문명 같은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연결되지 않고 일찍이 함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당시에 세계문화와 문명과 사상과 철학과 정신에 있어서 가장 앞선 도시였기 때문에 아볼로가 여기서 출생했고 여기서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바로 아볼로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졌던 학문들과 배웠던 모든 것들을 활용하여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필요한 조력자가 됩니다.

그가 어느만큼 대한한 실력가였고 힘이 되었느냐 하면 사도 바울과 조금도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동등한 지위를 그가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분쟁 때문에 사도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거기에 4개은 당파가 있었는데 바울파, 베드로파, 예수파와 함께 아볼로팍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아볼로의 지위에 대한 증며의 하나입니다. 또 바울 자신이 아볼로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는 것을 만납니다. 고린도전서 3 :6을 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 : 6, 7). 자기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라고 바울이 말할 때 이것은 차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서 쓰임을 받았다는 대등한 아볼로의 지위를 바울이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아볼로의 이 뛰어남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우리가 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은 그가 그 뛰어난 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아볼로는 탁월한 재능과 지위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도 소인배같이 쓰지 않았습니다. 아볼로는 감추어진 사람이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혀 그를 알지 못하는 존재로 숨겨진 입장에서 사도 바울의 그늘 속에 숨겨져서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일한 것 때문에 바울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배울 필요학 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기는 합니다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서를 바울이 썼다고 하는 만큼이나 아보롤가 썼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이 썼다고 하는 사람은 ‘신약성경을 대부분 바울이 썼으며 특히 히브리서는 다른 서신서에 비하여 더욱 구약에 정통했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실력있는 글을 쓸 사람은 바울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울은 언제나 자기가 쓴 서신을 자기가 썼다고 밝히는데 거기서는 밝히지 않았고 그를 제외한 구약에 능통한 사람은 아볼로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누가 썼는지 저자를 밝히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러나 모든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아볼로가 그걸을 쓸 실력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기억해 볼 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을 바울과 대등하게 여긴 적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바울의 대등한 지위, 실력으로 인하여 혼선을 빚고 오해를 하고 실족케 되는 것을 생각해 스스로를 감추어 하나님의 일에 협력한 사람인 것을 우리가 이제 살펴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6장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 2차전도 여행을 마친 후에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로 갑니다. 그래서 바우링 설명한 바와 같이 바울은 심었고 아보롤는 정말 물을 주어 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바울파라든가 아볼로파라는 쓸데없는 싸움이 생겼습니다.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드로가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16 : 12). 여기서 우리는 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하는 아주 놀라운 일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볼로로 인하여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아볼로가 또 사도 바울로 인하여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쓸데없는 경쟁을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 바울은 아볼로로 하여금 고린도 교호에 다시 갈 것을 여러 번 권하고 또 아볼로는 자긱 자주 가서 일을 하는 것으로 인하여 교인들이 혼선을 빚거나 또는 바울의 이름에 어떤 누를 끼치는 것을 원치 안하아서 가지 않겠다고 사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가장 중요한 핵심되는 내용입니다.

아볼로가 얼마나 탁월했느냐 하는 것은 아볼로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많은 공격을 받은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후서 10장입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장니 줄 알라”(고후 10 : 10,11). ‘말이 시원치 않다’ 사도 바울이 이런 비방을 들은 이유는 아볼로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볼로는 훨씬 말에 능한 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렇게까지 얘기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 중에 꼭 들어보고 실은 설교는 구약에서는 이사야, 신약에서는 아볼로라고 합니다. 바울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을 잘 못했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왕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사야서를 쓴 것을 보면 그가 토했던 하나님을 향한 진심과 거룩한 분노들, 하나님의 안타까움에 참여한 그 표현들이 얼마나 놀랍고 장엄한지 모릅니다. 아마 구약에 서는 이사야만한 설교자가 없을 겁니다. 신약에서는 아볼로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볼로의 설교를 성경에서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마 아볼로가 잘했기 때문에 더욱 더 바울은 그 부분에서 사람들의 공격의 목료가 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특별히 이 부분을 변명을 해야 될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말은 잘 못하고 글은 잘 쓴다 그러는데 글을 잘 쓰면 그 사람이 글 잘 쓰는 것만 봐도 그 내용이 꽉 찬 사람이지 또 꼭 말도 잘해야 돼냐? 이런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될 만큼 이런 일에 타격을 입었을 듯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가시면 이런 것 때문에 이런 글을 쓰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 듭니다. 고린도전서 2 : 1의 내용상 이 말을 해야 되겠지만 해야 되는 배경 중에는 이 공격에 대한 변명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 : 1-5)

참 의미 심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재주가 있는데도 안 쓴 것이 아니라 없어서 못 썼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말 못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바와 같이 주를 위해서 어떤 능력을 달라고 하는 것은 꼭 성경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봅니다. 물론 아볼로는 말이 능해서 쓰임을 받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말이 능하지 못해서 쓰임을 받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말이 능하지 못해서 쓰임을 받습니다. 누구는 외모가 멋있어서 쓰임을 받습니다. 누구는 그 반대이기 때문에 쓰임을 받습니다. 저희 교회를 찾아오시면 서를 담임목사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모로 편리합니다. 저희 사무실에 들어와서 저를 찾는 사람이 있는데 저를 앞에 놓고 찾습니다. 그래서 가만 봐서 만날 필요가 없는 일이면 “글쎄요 안 계시는데요”하고 도망을 갑니다.

이 바울에게 아볼로로 인해서 일어난 일들은 물론 소인배들의 실수요 오해입니다만 우리식으로 생각을 하자면, 즉 우리가 바울이 되어 색각하자면 ‘아볼로만 없었던들’ 그런 생각이 들지않습니까? 아볼로 쪽에서도 바울만 없었다면 그런 생각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안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 가시면 둘이 어떻게 협력을 잘 했느냐 하는 얘기가 이렇게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햐여 이 일에 나와 아보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 : 6, 7)

여기 사도 바울이 하는 이 얘기는 아주 음미할 만합니다. 아볼로와 바울이 충돌하지 않은 것은 지금 저들은 저들이 만든 것을 갖고 와서 경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툼이 없다 그럽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은 한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아보롤가 서로 다른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싸우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각자가 자기를 증명하는 차원에서의 능력을 견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맡긴 것이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충돌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것은 어떤 것 하나입니다. 아보롤가 받은 것도 어떤 것 하나입니다. 둘은 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 안에 있는 것 중의 일부분입니다. 부분부분을 합쳐서 전부를 나타내야지 부분과 부분이 싸우면 그것마저도 깨지고 맙니다. 인간은 그가 가진 것과 상대방이 가진 것 어느것 하나를 소유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무너뜨려야만 되는 충돌적 사고방식밖에 못 가집니다. 어느것 하나를 소유라기 위해서는 나머지를 놓아야 됩니다. 한계가 있고 편협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난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줬고 바울에게도 줬고 아볼로엑게도 줬다면 이것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요, 저것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충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것이 각기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의 일부밖에 우라가 받아내지 못랄 유한한 내 연약함 때문이지 저 사람과 내가 누가 맞고 누가 틀리냐를 비교하는 차원에서의 싸움거리는 아니라는 것을 둘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십니까? 이것이 바울과 아볼로의 뛰어난 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될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잊어서는 안되는 자세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가만히 생각하면 그 생활 속에는 바울과 같이 이렇게 드러나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 있고, 똑같은 실력과 느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감추어져서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우리가 처으머에 기억해야 될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 그 싸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겍 허락하신 것을 우리가 지금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여 온전히 소유랄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우리의 한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 사람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모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으 우리리에게 알리고 싶어서 여러 사람을 일으킨 것이지 다르면 싸워야 된다는 발사은 죄악된 발사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합창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프라노가 있고 베이스가 있어야 됩니다. 파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누가 더 높은 음을 내는가로 싸운다든가 누가 더 낮은 음을 내는가의 싸음으로 몰고 간다면 이솝우화에 나오는 두루미와 여우의 싸음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존중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모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같은 사람끼리 있으면 서로 도움받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달라야 합니다. 내가 산수를 잘하면 상대방은 국어를 잘해야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외국어를 잘하고 누구는 과학을 잘하고 그래야 전체를 봅니다. 같은 것끼리 모여 있다는 것은 도무지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든가 우리의 신앙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을 가만히 보면 언제나 나와 다른 것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입니다. “둘 중에 누가 윗자리를 차지하느냐? 누가 더 대접을 받느냐”로 싸우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피곤한 싸움이 없습니다.

앞에 나온다고 해서 꼭 잘난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점쟁이 중에 한문파자 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문을 획으로 나누어서 파자를 만들어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 해자점쟁이가 있는데 쌍둥이 형제가 와서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인지 맞추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점쟁이가 각각 한일자를 써 보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한일 자를 썼습니다.

또 한 사람도 나중에 한일자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쓴 사람보고 “당신은 동생이요” 그러고 나중에 쓴 사람에게는 “당신은 형입니다”고 그랬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고 하자 “한일 자를 먼저 쓰면 밑에 아래 하자가 되고 당신은 나중에 한일 자를 썼으니 윗 상자 아니요? 라고 풀이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한일 자라는 것이 아래하 자나 윗상 자에서 먼저 나오느냐 나중 나오느냐가 뭐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 하나로는 글자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글자에서는 눈에 보이는 가장 중요한 획이 되는 글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그것이 그 글자를 형성하는 전체가 아닙니다. 여러 개의 글자가 모여서 그 글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日자를 주었는데 이 사람이 日자 중에 맨 처음 획만 가지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日자의 첫 획을 가지고 본인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1자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라비아 숮자의 일자. 이런 예는 종종 봅니다. 사람이 자기가 가지는 신앙적인 편견 때문에 그리고 무지함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한 것을 다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것이 日의 한쪽 다리인 줄 모르고 아라비아 숫자 1자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日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글자 속에도 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하나가 큰 글자 안의 한 획으로 존재하여 한 글자를 완성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뛰어난 것만을 좋아하지 마시고 그 속에서 쓰임받는 자신의 위치를 업수이 여기지 않아야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이렇게 됩니다. 본문의 아볼로를 생각하면서 자꾸 이런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앞선 일, 그것이 종교적으로 두드러진 일일 때는 열심히 기도합니다. 예를 들면 공중기도를 하게 되었다든가 무슨 무슨 일로 어떤 종교적인 행사를 하게 됐다 하면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 외의 일상사에 대해서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슨 꼴이 되느냐 하면 집 가(家)자를 쓴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위에 점 찍고 지붕 씌워 놓고 밑에는 대강 쓴 꼴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의 일상사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영원한 목적을 갖고 사는 사람의 한 걸음이요 한 시간입니다. 그 중요성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절대 업수이 여길 수 없는 한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새서는 기도를 안합니다. 범상한 일에 대하여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에만 기도를 합니다. 꼭 한국 사람들이 집 짓는 것 같스빈다. 대문 만드는 데 일억 들고 집 짓는 데 오십만원 드는 꼴이 됩니다. 그런 신앙관을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볼로가 즐겨 사도 바울이ㅢ 그늘 속에 들어간 것은 그의 인품이 고매하고 겸손하다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의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무엇이 중요하고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느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저니을 그의 업적이 두드러지게 기록되고 있기 때문에 종종 바울행전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의 이름이 나왔을 뿐이지 그 속에는 바나바도 있고 실라도 있고 그리고 이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있고 여러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들이 한 일을 결단코 작은 일이 아니며 그것이 없었던들 바울의 행적이 쓸모가 없었을 만큼 중요한 한 획들인 것입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해서 웃었습니다. 이름에 일곱 칠자가 들어가면 좋지 않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랬더니 칠자를 잘못 써서 그 칠자의 맨 꼭대기에 있는게 독립을 하면 망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망할 망자인지 일곱 칠자인지정말 조금 차이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리므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시간 만혹 배 부르니까 쓸데없는 생갈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일은 그렇습니다. 글자라는 것이 중요한 것만 중요한게 아니라 점을 찍느냐 안 찍느냐로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옛날 이조시댜가 사작을 하면서 왕씨를 다 죽였습니다. 그래서 왕씨는 살아 남으려고 점을 찍었습니다. 그 결과 주씨가 됐습니다. 그리고 밑에다 찍어서는 옥씨가 되었습니다. 점 하나 있고 없는 것으로 목숨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인생 속에서 여러분들이 업수이 여기는 것, 기도를 안하고도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글자를 만드는 하나의 점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이런 교회 속에 파묻혀 있다고 해서 소홀히 여겨서는 절대 안됩니다. 저는 예수를 믿게 하는 일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사람들은 목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놀라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아니 누구도 교회 간대.” 이것이 훨씬 큽니다. 그 누구는 보통 어떤 사람입니까? 가장 못한 사람 아닙니까? 평소에 일반 윤리 도덕에서도 좀 쳐졌던 사람들입니다. “글세 그 사람이 교회를 간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하나가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아십니까? 수류탄을 던지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총 쏘는 것과 달리 폭발력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화약이 더 많이 들어 있어서가 아닙니다. 화약이 폭발할 때 겉을 싸고 있는 쇠가 너무나 많은 조각으로 쪼개져서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총을 쏘면 한 번에 한 알이 나가지만 수류탄을 던지면 수십만 개의 철편이 날아가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죽입니다. 목사가 한 번 고함을 지르는 것은 큰 총 같습니다. 커 봤자 그냥 총알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하나가 거룩한 살인을 할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의 의의 병기라는 것을 아십니까? 지금은 호박같이 앉아계시지만 터지면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도 매일 여러분이 늘 익숙하게 사시는 것, 하나님께 굳이 묻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들에 대하여 새삼스러운 시선을 가지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이제 하잘 것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걸쳐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 나옵니다. 그 중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을 받습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성했다.” 그 적은 능력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적은 능력이라는 것은 두드러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사람들이 놀라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 그 적은 능력, 말하자면 신자에게서 제알 중요한 삶이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내 존재와 내 삶의 연속이 필요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가 가치를 가진 존재여야 됩니다. 그 가 서 있는 것이 필요해야 됩니다. 그가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움직임이어야 됩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도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이 지금 이 세상을 향하여 가지시는 긍휼과 자비와 분리된 시간과 존재가 있을 수 없은 자들이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에 얼마나 순종해야 됩니까? 우리는 범사에 감사랄 각오를 얼마나 만하이 해야 됩니까? 이것이 성겨잉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비니다. 그리고 그러허게 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볼로 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볼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애를 여러분의 존재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인식하고 산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감추어져 있고 여러분이 아무리 눈에 띄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러분이야말로 많은 유익을 주고 가장 필요한 동역자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많은 일을 여러분의 존재와 생애를 통하여 하실 수 있는 위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상급이 하늘나라에서 보장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을 다시 한 번 긴장해서 돌아보셔야 되고 쉽게 쉽게 살아가는 인생 태도를 바꾸시고 드러나는 위인이 아니라 충성되었기 때문에 위인인, 성경이 요구하는 신자의 자리로 복귀하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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