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생명을 살리는 의와 사랑

박영선 목사 | 2009.07.02 15:28:5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20:6-12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사도행전 103 / 1990.04.22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느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사도행전 20 : 6-12

성경에는 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고 그 기적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 것으로서 연결되는 기록인 것을 많이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며 또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들을 죄의 권세에서 그리고 모든 악하고 더러운 것에서 구원해 내시는가? 하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병을 고치시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특별히 복음서에서 많이 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6-12절에 이르는 유두고라는 청년을 죽은 가운데서 살려낸 사건 속에는 그런 식의 연결이 없습니다. 그게 어떻게 신앙과 연결되는가? 예수를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은 전혀 언급이 없고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었는데 바울이 살려냈다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우리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생명을 얻고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언제나 옳습나다. 그건 사실이고 성경이 약속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오해하고 늘 틀리는 것중의 하나는 우리가 그럴 만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끊임없이 자기 자신 안에서의 어떤 조건들, 자격들, 그럴 만한 자신에 대한 자기 의를 찾으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사 구원을 베푸신 것이지 우리가 믿을 만하고 구원 받을 만하고 그 안에 깨달을 만한 능력이 있었다라고 얘기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혜와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놓칩니다. 그 놓치는 것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신앙생활 하다가 신앙적으로 실패했을 때 잠시 어떤 죄를 범했을 때 여러분이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뵐 낯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한 예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민망해 하고 스스로의 신앙적인 실패에 대해서 자책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고쳐야 하나님을 만나러 오겟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조건과 의를 다시 한 번 견고히 하려는 차원으로 돌아가는 생각이며 이같은 생각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와,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는 데서 비롯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하신 수 여러분이 권하는 전도를 듣고 회개하고 복음 안에 들어오는 사람을 만나면 기쁘죠? 그러나 혹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전한 복음과 여러분이 증거한 내용들에 대해서 이를 드러내고 인상을 쓰고 화를 내고 여러분을 경멸하면 여러분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넌 지옥가도 싸다.’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 자세도 우리가 갖고 있는 이 기독교에 대한 오해된 선입관, 오해된 근거들 때문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9 : 35 말씀부터 봅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베뢰아 파 같은 데서는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병이 들거나 약하게 되거나 귀신 들리는 일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특별히 베뢰아 파 같은 데서는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병이 들거나 약하게 되거나 귀신 들리는 일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기적 속에는 분명 이 복음이 갖는 내용을 우리에게 분명히 하기 위해서 병고침과 귀신 쫓음이 있습니다.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꺼내시는 복음을 전하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는 것과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병행해서 나타나는 데가 많습니다만 그 이외의 병고침과 귀신 쫓음도 있습니다.

그 이후에 36절을 보시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히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 : 36)

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좀더 포괄적인 이유는 불쌍해서랍니다. 그 병을 고쳐줌으로써 그 사람을 구원케 하는 조건으로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병을 고쳐줄테니 너 나를 믿을 테냐?”라는 조건에서가 아니라 불쌍해서라는 것입니다. 그가 이 병을 고쳐주면 하나님을 믿을 것 같다라는 계산하에서 그에게 선을 베푸시거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거싱 근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분명한 기독교의 최고 기초여야 되고 시작이어야 됩니다.

거기에는 믿을 만하다든가 구원을 받을 만하다는 어떤 자격이나 조건 없이 오직 불쌍해서라는 하나의 조건으로 시작되는 것으로만 기독교의 근거를 삼아야 된다는 성경의 요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의 신앙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면서 불신자들 앞에서 신자로서의 증인 노릇을 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원리 원칙들을 놓치게 됩니다.

마가복으 6장으로 가십시다. 같은 식의 기록이 마가복음에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 : 34)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불쌍함을 받을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고, 복음을 전했는데 안받아들이는 자는 이제 너희 앞에 남은 것은 뜨뜻한 구들장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성경은 불쌍해서 복음을 제시한다는 겁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칩니다. 저들의 불쌍함을 인하여 주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가르치시고 은혜를 베풀려고 하는데 귀를 기울이면 그 순간부터 비로소 그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랑해서 오신 겁니다. 오신 것 자체가 사랑과 긍휼을 전제로 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반응과 우리의 지금 수준이나 조건에 관계 없이 일차적으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과 긍휼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는 자를 여러분이 괄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마음 속에 어느 누구도 원수나 적이나 너는 절대 회개하면 안된다라는 마음으로의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그 속에 자신도 포함시키십시오. 이것이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때는 나사로가 죽고 나흘이나 지난 후에 주님께서 오셔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 : 32-35)

주께서 왜 우십니까? 이제 곧 살려 내실 것인데 왜 우십니까?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리고는 이제 나올 겁니다. 그런데 홰 우시죠? 주님의 우심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 죄악 된존재라서 그 끝이 멸망일 수밖에 없다는 데 대하여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그 슬픈 처지에 동참하십니다. 그래서 함께 슬퍼하여 주십니다. 우리 편이십니다. 주님 오신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오신겁니다.

히브리서 5장을 봅시다. 지금까지 드린 이 말씀들을 이렇게 묶어 봅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서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이론과 같이 하나님의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 : 1-7)

주님의 제사장직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대제사장 직분을 맡으신 것은 제사장직 자체가 그렇듯이 하나님 편만 아니라 우리 편도 들기 위하여 제사장 직분을 맏으셨다 그럽니다.. 그때 우리 편을 들기 위하여,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이 처참한 인간의 위치에까지 동참하셨다 그럽니다. 처음에 나오는 바와 같이 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취하는 겁니다. 대제사장을 사람 가운데서 취하느데 2절의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옹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히 5 : 2)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개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는 중개자, 이 역할을 위해서 제사장 직분이 있는데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역할도 해서 양쪽을 화목케 하는 중보자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잘못하면 중개인이 어느 한 편을 들 수 있지 않습니까?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사이를 중개하면서 어느 한편에 치우칠 수 있는데 제사장은 인간 중에서 택함을 받기 때문에, 인간 편을 드는 것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에 대해서 그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편을 들기보다는 사람 편을 더 많이 들게 되어 있는 것이 그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중보자로 우리에게 허락하셨을 때 하나님이 하나님 편만 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도 충분히 들게하시기 위하여 그 중보자로 세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요구하고 중보자로서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실 때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정한 기준과 자격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요구할 때 눈물과 통공이란 것이 동원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보시고 60점 이상은 합격, 60점 아래에서 40점까지는 재시, 40점 이하는 재수강 그렇게 얘기를 하면 거시에 눈물과 통곡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시험 봐서 60점 넘었으면 통과(pass)고 아니면 재시험 보고 아니면 재수강하고 안되면 퇴학입니다. 지옥 가는 겁니다. 눈물과 통곡이라는 것은 시험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어떠너 기준에 그것만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에 동원되는 것입니다. 눈물과 통곡이라는 것은 0점인데도 어떻게 합격되게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런 방법을 쓰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모두 자격이 없고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비자와은혜와 사랑을 근거로 해서만 즉 눈물로 호소한는 것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지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원했다는 겁니다.

로마서를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느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 19-24)

율법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 일종의 시험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율법에는 통곡과 눈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냉정한 기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율볍으로는 구원을 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23절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 23, 2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조건도 요구하시지 않고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사 하나님께서 조건을 제시하셔서 우리를 불러내시는 방법,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구원의 방법을 우리에게 허락했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거듭 강조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관으로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법을 제시하되 그 법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거나 그 법으로 우리를 판별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합격, 불합격 도장을 찍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 속에서 어떤 실수가 있고 실패가 있다면 다른 데 가서 씻고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발상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술을 끊으면 오겠다.” 안됩니다. 하나님 이외에 어느 곳에 가서도 여러분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곳이 없고 하나님을 떠나서 어는 곳에서도 여러분이 거룩한 결심한 시작을 할 수 있는 데가 없습니다. 그것을 모두 하나님께 구해야 됩니다. 최소한의 기준을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난 곳에서 만들려고 하는 것만큼 기독교를 오해하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상에서 분명치 않은 데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아직도 나늠 분명치 않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는 분명치 않다. 난 이것이 분명해져야 시작을 하겠다.’ 어디가서 분명히 한다는 것입니까?

마치, ‘난 공부를 못한다. 그래서 난 공부 좀 질하게 되면 학교에 가겠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공부를 못하면 못할수록 학교에 더 열심히 가야 합니다. 선생님이 안 와도 가고 와도 가고 가르칠 때도 잘하고 안 가르칠 대도 해야 합니다. 공부를 못하면 훨씰 더 많이 교과서르 ㄹ열어야 됩니다. ‘나는 공부를 못한다 그러므로 교과서를 열 자격이 없으니 교과서를 덮어 놓고 명상에 잠겨 디스코텍에 가서 몸을 푼 후에 공부할 마음이 생기면 돌아와서 책을 열겠다’하면서 디스코텍에 가서 몸 흔들면 공부할 생각이 납니까? 공부를 때려 치우고 그저 죽을 생각밖에 안 나는 법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을 떠난 어느 곳에서도 은혜 입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연약하십니까? 의심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께 매어 다리십시오. 시험을 봐서 합격점이 되면 그 다음에 요구하려고 하지 마시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호소하십시오. 이것이 신자의 신앙관입니다. 이것 외에 여러분이 거룩한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하여 힘을 얻거나 깨우침을 얻을 방법과 통로가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주님 앞에만 오셔야 됩니다. 바로 오늘 드린 말씀이야말로, 유두고의 죽음을 다시 소생케 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고 긍휼하심을 안다는 것이야말로 신자의 신자 된 최고의 생명 있는 특권이요 깨우침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 편이요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좋다라고 애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기독교적 신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가지 기둥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하여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복인가를 우리에게 알릭 위하여 있습니다. 신명기 30당으로 가십시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레와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서머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아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 : 15-20)

성경이 하나님만 섬기라고 요구하는 것은 조건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자격도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조건과 자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을 믿어야 되는 것은 거기로 가야만 복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따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따르면 사랑하겠다’가 아닙니다. 이 순서를 뒤집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지 안하아도 사랑하십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까지 보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악 속에 파묻혀 있고 더러운 생활을 하는 거기까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우리를 위하여 대신 지신 십자가와 피흘리시니 모습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더 이상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증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모두 무엇을 향하여 있느냐 하면 “너, 네 복을 위하여 네 생명을 위하여 나를 섬겨라”입니다. ‘너를 위하여’ 바로 우리가 저녀들에게 하는 얘기입니다. “널 위해서 공부 좀 해라” 이겁니다. 날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정 나중에 자기의 복이 뭔지를 모르니까 “야! 엄마를 위해서라도 공부 좀 해줘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성경 말씀을 듣고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교회를 위해서도 아니고 물론 목사를 위해서도 아닌 것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오늘 이 신명기 30 : 15 말씀은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내 앞에 두었나니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사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말씀을 주고, 이것을 따르면 상 주고 안 따르면 미워해야지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사 이 말씀을 제시하는 겁니다. 제발 믿으십시오. 그럼 안 믿어도 정말 사랑하실까요? 사랑하십니다. 단, 후려패실 겁니다. 사랑하므로 망하는 대로 놔둘 수가 없으니까 때릴 겁니다. “그게 뭐 사랑이예요?”라고 여러분이 말하는 사랑은 망하게 내버려둬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 죽게 말이죠. 그러나 사랑하는데 내버려둘 수가 있는가요? 애가 놀다가 농약 먹는데 내버려둬요? “부모님 내버려두십시오.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걸 어떻게 내버려둬요?

귀싸대기를 때려서라도 그 농약을 뺏죠. 약 먹고 죽겠다고 버둥거리는 아들을 내버려둬요? 돈을 꾸어서라도 병원가서 치료하죠. “이 원수야! 너 죽고 나 죽자. 누가 너 보고 약 먹고 죽으라든.” 이것이 부모의 사랑인 것을 아십니까?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바로 그 얘기입니다.

이사야 1장으로 가 보십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으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을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 : 2-6)

이 표현이 어떻게 보입니까? 자식을 사랑하되 말을 듣지 않는 자시을 둔 부모님의 안타까운 심정과 얼마나 정확히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법대로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냉정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국한 사랑과 지극히 자비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합니다. 우리를 참된 자녀로 대접하십니다. 그 마음을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ㅌㅇ하여 분명히 접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를 불쌍히여기시며 우리를 복주시기 위하여 애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 여러분은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18절 말씀으로 갑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 : 18-20). 하나님이 우리의 복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간절히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그 애타는 심정을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일어날 심각한 우리의 형벌을 윌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서어경 전체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안타까운 마음이 성경 모든 곳에서, 주님의 언행에서, 사도들의 언행에서 나타납니다. 아버지의 그 부성애를, 사랑하는 마음을,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에게 호소합니다. 법대로가 아닙니다.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호소하는 것을 여러분은 성경에서 읽을 줄 알아야 됩니다.

빌립보서 3장의 사도 바울의 호소를 보십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릴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 : 17-20). 이 호소를 어떻게 한다구요? 눈물로, 눈물로 합니다. “애들아 제발 너희는 그러지 말아라, 제발 너희는 그러지 마라” 부모님의 심정르로 자녀에게 말하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긍휼을 얘기합니다.

우리가 모든 인생을, 다른 모든 인간들을, 인류 모두를 만날 때 하나님의 이 자비하심을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복과 생명과 진리로 인도하는 것에 대하여 모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 때문에 그것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디다. 또한 그분만이 권위요, 진리라는 것으로 인하여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과소평가되어서도 안됩니다.

마태복음 12장으로 갑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말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소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 하였느냐.”(마 12 : 1-4)

진설병이라는 것은 성전 안 상 위에 진열해 놓는 떡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떡을 새로 갈아서 진열해 놓습니다. 그 떡은 생명의 떡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구약의 하나의 예식입니다. 그래서 그 떡은 거룩한 떡이기 때문에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가다가 너무 시장해서 성전으로 뛰어들어가 그 진설병을 먹고 자기 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떡을 먹입니다.

하나님이 법을 세우고 하나님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를 피해입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 제시된 모든 진리와 권위들은 우리를 복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쓰여집니다. 그것이 무너져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린 것을 인정하신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법을 다 지킬 만하지 못할 때에는 그 법으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먹이고 키워서 그 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지 법을 먼저 제시해서 자라나기도 전에, 깨우치기도 전에 그 법으로 먼저 심판하지 않습니다.

9절로 이어집니다.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라혀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을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흐 주어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마 12 : 9-12). 사람이 양보다 더 귀합니다. 마가복음 2장을 봅시다. 지금 우릴가 읽은 그 가건을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 결론을 냅니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을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 : 27, 28)

사람이 안식을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면 그의 영광을 윈간의 시체 위에 쌓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회개와 돌이킴과 주의 사랑을 받고 영광스러워지는 것 위에 있는 겁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용서하고 살려내는 데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살려내는 것의 끝인 영광된 자리에 딸하는 것에 있는 겁니다. 사랑은 방종이 아닙니다. 용서는 아무래도 좋다는 무법주의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과 용서가 진정한 진리와 생명과 행복으로 우리를 밀고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신앙은 뭡니까? 법입니까? 사랑입니까? 법니래도 좋고 사랑이래도 좋습니다. 그것이 생명이 살아나며 자라며 영광된 목적지를 향하여 힘 있게 가고 있습니까? 가고 있지 않다면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는 자라는 법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뭡니까? 자라지 않는 신앙입니다. 묶어둔 신앙입니다. 금고 속에 감추어 둔 물거너이 되어버린 신앙입니다. 그 신앙을 주님 오실 때 묻었던 돌 꺼내듯이 꺼내려고 감추어 둔 것, 이것이 오늘날 현대 교인들의 최고의 약점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을 하나님으 사랑을 입은 자답게 그래서 그 사랑과 은혜로 자라나는 생명이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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