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근거

박영선 목사 | 2009.07.02 15:31:5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20:6-12
설교자
박영선 목사
참고
남포교회
6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하나님은 ‘어떻게 하면 인간을 구원하나?’ 하고 전전긍긍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이 점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차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데에서 입증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부족하니까 더 수양한 후에 믿어야지’ 하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교만의 극치이지 겸손이 아니다.

시각교정을 위한 화두

완전히 넘어지고 쓰러질 것 같은 오뚝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많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거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며, 또 어떻게 그 사랑하는 자들을 죄의 권세에서, 그리고 모든 악하고 더러운 것에서 구원해내시는가, 또한 그 상징으로 어떻게 복음서에 병을 고치시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등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0:6-12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을 죽음 가운데서 살려낸 사건 속에는 그런 식의 연결이 없습니다. 그 사건이 어떻게 신앙과 연결되는지, 예수를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었는데 바울이 살려냈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과 생명을 얻고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고 얘기하는 것은 언제나 옳습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성경이 약속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오해하고 틀리는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그럴 만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생각하는 것과 끊임없이 자기 자신 안에서 어떤 조건이나 자격, 그럴 만한 자기 의를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만하고 구원받을 만하고 우리 안에 깨달을 만한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속에는 분명 이 복음의 내용을 분명히 하는 차원에서의 병 고침과 귀신 쫓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건져내는 복음을 전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는 것과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병행해서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이유로 행하신 병 고침과 귀신 쫓음도 있습니다. 마태 복음 9:36을 보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좀더 포괄적인 이유는 불쌍해서입니다. 그 사람을 구원케 하는 조건으로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불쌍해서라고 하십니다. 그 병을 고쳐주면 하나님을 믿을 것 같다는 계산 아래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거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 그 근거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교 최고의 기초이며 시작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믿을 만하든지 구원을 받을 만하다는 어떤 자격이나 조건 없이 오직 하나, 불쌍해서라는 조건만을 기독교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성경적 요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가 신자로서 불신자들에게 진리를 증거하는 삶을 사는 데 적용해야 할 아주 중요한 원리원칙들을 놓치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복음을 전해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불쌍히 여김과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복음을 전했는데도 안 받아들이는 자들 앞에 남은 것은 뜨뜻한 구들장뿐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마음이 아니라 단지 불쌍해서 복음을 제시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불쌍히 여기사 주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무엇을 가르치시고 은혜를 베풀려고 하실 그때 우리가 귀를 기울이면, 그 순간부터 비로소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랑해서 오신 겁니다. 오신 것 자체가 사랑과 긍휼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반응과 지금의 우리의 수준이나 조건에 관계없이 일차적으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과 긍휼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자를 여러분이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에게도 ‘원수나 적은 절대로 회개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부터의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원수나 적이라고 생각하는 대상 속에 자신도 포함시키십시오. 이것이 성격이 하고 싶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격이 없고 쓸 만한 무슨 조건을 가지고 있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근거로 해서만 서로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은혜의 무시험(無試驗)제도

율법이라는 것은 일종의 시험제도와도 같습니다. 율법에는 통곡과 눈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합격과 불합격이라는 냉정한 기준이 있을 뿐입니다. 이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은혜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조건도 요구하시지 않고, 다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사 하나님 쪽에서 조건을 제시하시며 우리를 불러내시는 방법,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구원의 방법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제가 거듭 강조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시험관으로 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법을 제시하시되 그 법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거나 그 법으로 우리를 판별하시려는 분이 아닙니다. 합격, 불합격 도장을 찍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어떤 실수가 있고 실패가 있다 해도, 이제 다른 데 가서 씻고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발상, 곧. “술을 끊고 나서 교회 가겠다. 담배를 끊고 오겠다. 돈 벌어서 오겠다. 내 마음에 있는 이 죄를 모두 씻고 오겠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없고, 하나님을 떠난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거룩한 결심과 거룩한 시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곳에서 최소한의 기준을 만들려고 하는 것만큼 기독교를 크게 오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에서 아직 분명치 않은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아직도 내게는 분명치 않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게는 분명치 않다. 난 이것이 분명해지면 시작하겠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어디 가서 분명히 한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마치 ‘난 공부 못하니까 공부 좀 잘하게 되면 학교에 가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공부를 못하면 못할수록 학교에 더 열심히 가야 합니다. 선생님이 안 와도 가고 와도 가도, 가르칠 때도 잘하고 안 가르칠 때도 잘해야 합니다. 공부를 못하면 훨씬 더 자주 교과서를 펴야 합니다. "나는 공부를 못하니까 교과서를 펼 자격도 없다. 교과서 덮어놓고 명상에 잠겼다가 디스코텍에 가서 몸을 좀 푼 후에 공부할 마음이 생기면 그때 돌아와서 책을 읽어야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디스코텍에 가서 몸을 흔들고 나면 공부할 생각이 납니까? 공부 때려치우고 그저 죽을 생각 밖에 안 나는 법입니다.

우리는 거룩의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을 떠난 어느 곳에서도 은혜를 입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이 연약합니까? 의심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시험을 봐서 합격점이 된 다음에 무언가 요구하려고 하지 말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호소하십시오. 이것이 신자의 신앙관입니다.

이 길 외에는 여러분이 거룩한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해 힘을 얻거나 깨우침을 얻을 방법과 통로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 앞에 나와야만 합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을 죽음에서 다시 소생케 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안다는 것이야말로, 신자의 신자 된 최고의 특권이요 깨우침입니다.

하나님의 부모된 심정을 알라

하나님은 내 편이요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적 신앙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의’라는 이 두 가지 기둥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복인가를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만 섬기라고 요구하는 것은 조건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까 하는 데 대한 조건이나 자격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믿어야 하는 것은 거기로 가야만 복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면 사랑하겠다”가 아닙니다. 이 순서를 뒤집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악 속에 파묻혀 있고 더러운 생활을 하는 거기까지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우리를 위해 대신 지신 십자가와 피 흘리신 그 모습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더 이상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증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모두 “네 복을 위해, 네 생명을 위해 나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너를 위하여”라는 말은 바로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널 위해서 공부 좀 해라”고 합니다. 날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도무지 자기의 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는 “야! 엄마를 위해서라도 공부 좀 해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도 아니고 더더구나 목사를 위해서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30:15-16 말씀이 이 사실을 정확히 증거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사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시고서 ‘이것을 따르면 상주고 안 따르면 미워해야지’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제시하시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안 믿어도 정말 사랑하실까요? 사랑하십니다. 단, 후려 패실 겁니다. 사랑하기에 망하는 대로 놔둘 수가 없어서 때리실 겁니다.

“그게 뭐가 사랑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말하는 사랑은 망하게 내버려두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죽게 놔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데 어떻게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식이 농약을 먹는데 내버려두는 부모가 있습니까? “부모님,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버려두십시오”라도 한다고 해서 그걸 어떻게 내버려둡니까? 귀싸대기를 때려서라도 그 농약을 빼앗습니다. 약 먹고 죽겠다고 버둥거리는 아들을 내버려두겠습니까? “이 원수야! 너 죽고 나 죽자. 누가 너보고 약 먹고 죽으라더냐?” 하고 끝까지 막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더라도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위해 우리에게 간절히 권고하십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그 애타는 심정을, 하나님을 떠났을 때 우리에게 주어질 심각한 형벌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 안타까운 마음이 성경 모든 곳에서, 주님의 언행에서, 사도의 언행에서 나타납니다. 아버지의 그 부성애를, 사랑하는 마음을,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에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법대로가 아닙니다.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이 성경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되짚어보기

1.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유 가운데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은 율법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셨습니까?

3. 성경이 하나님을 섬기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깨달음에 깊이 더하기

술 담배를 끊거나 지금 짓고 있는 죄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면 교회에 나오겠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권면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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