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육지에 올라 보니

이재철 | 2009.04.22 16:50:3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21:1∼14
설교자
이재철 목사
참고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3월 8일 사순절 둘째 주일(주님의교회)

전문 바둑 기사에 대하여 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단 한 수의 착오도 없이 어떻게 정 확한 복기(復碁)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복기란 바둑이 끝난 뒤 양 대국자가 서로의 잘 잘못을 되짚어 보기 위하여 방금 두었던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되풀이 해 보는 것을 의미합 니다. 일반적으로 프로 기사가 한 대국을 치루기 위하여는 하루 종일이 소요되고, 마주 않은 두 기사가 바둑판 위에 번갈아 가며 두는 돌의 수는 적게는 250여개에서부터 많게는 300여개에 이릅 니다. 그 긴 시간 동안 바둑판 위에 둔 그 많은 돌들의 순서를 전문 기사들은 정확하게 기억하면 서 복기를 행합니다. 그것은, 40여수만 넘어가면 도저히 더 이상 복기를 할 수 없는 저에게는 믿 기 어려운 경이였습니다. 오래 전 한 바둑 전문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드디어 저는 저의 궁 금증을 털어놓았습니다. 전문 기사가 아닌 저같은 사람도 복기가 가능한지, 만약 가능하다면 어 떤 훈련이 필요한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의 대답은, 의미있는 돌들을 놓으면 누구든 복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둑판 위에 돌을 놓을 때 왜 그 돌을 그곳에 두는지 그 의 미를 생각하면서 두면 복기는 가능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좀더 깊이 설명하면, 평균 300여수에 달하는 바둑의 복기는 단순히 돌의 순서에 대한 기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돌이 갖는 의미의 연결로 구성된다는 말이었습니다. 즉 의미 있는 것만 살아남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때까지 제가 돌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바둑을 둬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손가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욕심나는 대로 마구 두었을 뿐이었습니다. 그처럼 의미 없이 둔 바둑이 설령 2∼30분만에 끝났다 할지라도 복기가 될 리 만 무했습니다. 의미 없는 돌이 한 두 개도 아닌 수백 개가 뒤엉켜 있는데, 어찌 그 돌들의 순서를 제대로 기억해 낼 도리가 있겠습니까?

의미 있는 것들만 살아남는다는것―이것은 바둑판에만 국한된 법칙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인생이란 거대한 바둑판이요, 우리가 사는 매일 매일은 그 바 둑판 위에 두어지는 돌과 같기에, 얼마나 살았느냐에 상관없이 결국엔 의미를 지닌 날들만 살아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인식한다면 장수의 참된 개념이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 게 됩니다. 100년이란 긴 세월을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일생이 아무른 의미 없는 날들의 누 적에 불과하다면 그는 결코 장수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둔 신생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30대의 젊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할지라도 30여년에 걸 친 그의 생애가 의미 있는 날들의 집합이라면 그는 절대로 요절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참된 의미의 장수는 자연날수의 많고 적음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날의 길이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60세가 넘어 주님을 영접한 성도님이 있습니다. 여태까지 나름대로는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그분은 아직도 정년이 2년이나 더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년말부로 현직에서 은퇴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신 주님을 만나고서 자신이 살아온 60평생을 되돌아보니 아무른 의미가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님― 나는 60년동안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하고 주님 앞에서 복기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말부로 은퇴한 뒤 의미 있는 여생을 살기 위해 지금 그분 은 준비중에 있습니다. 비록 60이 넘었을 망정 지금부터라도 진리안에서 의미 있는 날들을 자신 의 인생판에 매일 매일 두기로 한 것은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한 이제껏 진 리밖에서 살아온 60년도 그냥 헛산 것 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살아갈 의미 있는 날들의 의미 속에서 의미 없었던 지난날들의 의미가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경 우도 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30여년동안 자기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집밖 을 나선 것은 오래 전 여동생이 결혼하던 날, 그리고 몇 해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거의 유 일하였습니다. 밥도 자기 방에서 혼자만 먹었습니다. 물론 결혼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 다. 그같은 아들을 둔 아버지는 아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그 놈이 방안에 틀어 박혀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 동안 수천권의 책을 독파하여 동서고금의 철학과 문학에서 부터 천문 지리에 이르기까지 입신의 경지에 다다렀다'며 자위하곤 했습니다. 30여년동안 수천권에 이르는 책을 읽 었다면 얼마나 박학다식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지식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 할지라도 그 방에서 나오지 않는 한, 방안에서라도 그 지식을 타인과 나누기 위하여 논문이나 수필 한편이 라도 남기지 않는 한, 그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삶이란 바둑판과 무관한 바 둑돌이 아무른 의미가 없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런대 그가 작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인은 운동 부족으로 인한 장기 손상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방에서 남을 위 한 것이라곤 종이 한장 없었습니다. 그는 그와 같은 자신의 삶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지만, 설령 깨달았다 해도 그는 의미 있는 인생을 추구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의미 있는 날들을 둘 수 있는 인생판이 더 이상 존재치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언제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복기할 수 있는 삶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내 삶을 복기하려해 도 복기할 거리가 하나도 없다면 그보다 더 황당한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우리 인 생을 되돌아보십시다. 지나온 우리 인생판에서 무슨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지난 일주간만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인생판에 일곱 수를 더하였습니다. 그 한 수 한 수에는 참된 의미가 있었 습니까? 그 중에 먼 훗날까지 그 의미가 소멸치 않을 참된 수는 과연 몇수나 됩니까? 이제껏 살 아온 여러분의 전 인생을 놓고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과연 몇 수까지 스스럼없이 복기할 수 있 습니까?

바둑이든 인생이든 의미 있는 것만 살아남습니다. 복기할 수 없는 인생이라면 이미 의미를 상실한 인생이기에 그보다 더 허망한 인생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기분 내키는 대 로 욕구를 좇아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참된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의미 있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이겠습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건만 제자들은 철저하게 빈손, 빈 그물이었습니다. 밤새 아무 의미없이 헛수고만 한 셈이었습니다. 마침내 새벽이 밝아 올 즈음 바닷가에 서 계시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제자들은 그 말씀을 좇아 배 오른 편에 한 번 더 그물을 던지면서도 그 음성의 주인공이 주 님이시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정도로 그들은 물고기에만 집착하고 있었습 니다. 그런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밤새 물고기라고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공허하기만 하던 갈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 배 오른편에 던진 그물에 그물을 들 어올릴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은 고기가 걸려든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요한이 베 드로를 향해 '주시라'고 외쳤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갈릴리'를 그물이 넘치는 '유(有) 의 세계'로 바꿀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심을 뒤늦게나마 요한이 가장 먼저 깨달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시라'는 요한의 외침을 듣자마자 벗어 두었던 겉옷을 황급히 걸치고는 바다 속으로 뛰어내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들은 이상 고기잡는 배위에 더 이상 머물러 있 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을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는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50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와 서 육지에 몰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8~9)

물속에 먼저 뛰어든 베드로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이 바닷가에 당도하여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 위에 생선이 떡과 함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준비해 두신 것이었습니다. 그 러나 이제 막 육지에 오른 제자들은 그 음식의 용도에 대해 알길이 없었습니다. 밤새 까맣게 잊 고 있었던 주님을 다시 뵙는 송구스러움으로 몸둘 바를 모를 따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 이 방금 잡아온 고기를 좀 가져오게 하신 뒤,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주님께서 숯불을 친히 피우시고 그 숯불 위에 생선을 구우시며 손수 떡을 준비하셨던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물로 쓰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당신 홀로 드시기 위함도 아 니었습니다. 밤새 헛 그물질만 하느라 허기졌을 제자들을 먹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밤새 주님을 망각한 채 밤새도록 고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제자중 누가 감히 주님께서 친히 만들어 주신 그 음식에 감히 손을 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 13절이 이렇게 밝혀 주고 있습니 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같이 하시니라"

음식에 손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떡과 생선을 손수 가져다주 시고 나누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제자들에게 봉사와 헌신의 본을 친히 보 여주시므로 써, 밤새 자신들의 욕구에만 사로잡혀 헛 그물질만 하느라 의미 없이 하룻밤을 버려 버린 제자들에게 타인을 위한 헌신과 봉사로 이어지지 않는 삶이란 아무른 의미가 있을 수 없음 을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밤새 자신들의 욕망에 사로잡혀 의미없이 빈 그물질만 하던 제자들에게 마지막 순간 그물을 올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허락하셨던 것은, 앞 으로는 무엇이 주어지든 오직 타인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도구로 승화시키라는 주님의 사랑의 메 시지 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나면, 왜 갈릴리 바다에서 똑같은 사건이 두 번씩이나 똑같이 발 생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본문의 갈릴리 사건이 있던 날로부터 만 3년전의 일이 누 가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막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날도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등은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고기잡이를 포기한 채 바닷가로 되돌아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 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한 번 더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어 도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에게 있어서 그 말은 몰상식한 말이었습니다. 갈릴리에 사 는 물고기는 한밤중엔 깊은 데로 몰렸다가 새벽이 되면 얕은 데로 거처를 옮기기 때문이었습니 다. 그때는 이미 새벽이었습니다. 굳이 한 번 더 그물을 던지려면 얕은데에 던지는 것이 타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한 번 더 깊은 데로가 그물을 던져 보았 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응당 빈 그물로 올라와야 할 그 그물 속에 그물을 올릴 수 없을 정 도로 고기가 가득 걸려있는 것이었습니다. 3년이란 시차를 두고 일어난 이 두 사건은 장소도, 등 장 인물도, 사건의 전개 과정도 모두 일치합니다. 똑같은 사건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람들 에게 두 번씩이나 반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이 두 사건의 의미는 판이하게 달랐습 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마지막 순간에 건져 올린 물고기의 의미는 그들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이 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좇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욕망을 성 취하는데에 그보다 더 좋은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다니는 동안 내내 주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이룰 기회와 방법만을 궁리하다가,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예수님이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되자 그들은 미련 없이 예수님을 배신한 채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3년동안이나 줄기차게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 고 그 3년에 관한한 주님 앞에서 마땅히 복기할 거리가 없었습니다. 몸은 주님을 좇았을 망정 마 음은 온통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의 삶이 참된 의미를 지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두 번째 사건에서 마지막 순간 건져 올린 고기의 의미는 더 이상 욕망일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욕망이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제자들로 하여금 뼈저리게 깨닫도록 해주 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똑같은 갈릴리 바다에서 똑같은 사건을 통해, 그리고 친히 조 반을 지어 주시는 본을 보이시므로 주님께서 그물 넘치도록 허락하신 것들의 의미는 헌신이요 봉 사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이 이후로 제자들의 삶은 그 의미가 새로와졌습니다. 더 이상 자기 욕망의 화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의 도구가 되어 타인을 위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사는 '사도행전'의 막이 오르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주님의 진정한 제 자일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 사건 이전의 삶이 아니라, 두 번째 사건 이후부터의 삶으로 인함이 었습니다. 우리가 제자들을 주님의 제자들로 존경하는 까닭도 이 직후부터 전개되는 '사도행전' 의 삶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소임을 다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자신들의 삶을 복기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기꺼이 복기할 수 있었던 부분은 두 번째 사건 이 후의 삶이었을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만약 두 번째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이 참 삶의 의미 를 깨닫지 못했더라면, 아니 주님께서 바른 의미를 깨닫도록 그 귀한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았 던들 똑같은 사건이 날마다 거듭되었다 한들 그것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무의미한 반복이었을 뿐 이고, 그들의 그 무의미한 삶의 기보를 놓고 우리가 제자들의 행적이라며 복기 해볼 까닭도 없을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똑같이 반복되었던 갈릴리사건―그것이 실은 우리의 인생임을 알고 있습니까? 인생이 무엇입니까?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되풀이되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거듭되는 것이 인 생 아니던가요? 아침에 눈비비고 일어나 밥먹고 일하러 나갔다가 밤에 들어와 또 밥먹고 잠자는 것의 연속이 인생아니던가요? 그러므로 참된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인생보다 더 덧없는 인생이 없으니, 한 평생을 살고서도 복기할 거리가 있을 리 만무함입니다.

모두(冒頭)에 두 분에 관해 말했습니다. 60이 넘어 주님을 영접한 한 분은 지나온 자신의 삶 이 아무른 의미 없었음을 통감하면서 아직 정년이 남아 있음에도 금년말부로 현직에서 은퇴하기 로 했습니다. 이유는 한가지― 내년부터는 타인을 위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기 위함이라 했습 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삶의 참된 의미를 헌신과 봉사에서 찾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난 60년 에 걸친 자신의 인생이 의미 없었다 여기는 것은 60년동안 남을 생각함이 없이 오직 자신만을 위 해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나이 들었을 망정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며 살 아갈 자신의 미래의 삶이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의미로 영글어질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나 큰 지혜입니까? 아니 얼마나 크신 주님의 은총입니까?

반면에 또 한 명의 사람은 50평생 동안 자기 방에서 자기만을 위하여 살다가 결국은 자기 건 강을 망친 채 자기 스스로 자신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억만 금을 소유했다 한들, 인간의 모 든 학문에 통달했다 한들, 자기 이외의 누구 한사람도 생각함이 없이 자기 세계에 자신을 가둔 채 자기만을 위하여 살다가 죽어 버리는 인생이란 이 땅에 오물만 보태 주고 가는 것 외에 도대 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양자중 도대체 어느 쪽에 속해 있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아침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런 의미 없이 헛 그물질만 하던 공허한 갈릴리로부터 우리를, 주님께서 우리위해 친히 조반을 마련해 두신 육지 위로, 즉 주님께서 예비해두신 새로운 인생판으로 불러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위에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시기까지 헌신과 봉사를 다하셨던 주님을 본받아 살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같은 삶속에 만 참되고 영원한 의미가 있음을 당신의 삶으로 증명해 보이시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선택할 차례입니다. 그 선택은 철저하게 우리의 자유입니다. 공허한 갈릴리로 되돌아갈수 도있고 주님과 더불어 헌신과 봉사의 인생판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이 자유라고 해서 함부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앞에서 우리 삶을 복기해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것만 살아남습니다. 의미있는것만 복기할 수 있습니다. 참된 의미는 헌신과 봉사속에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누구보다도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그러나 그분이 남긴 생의 기보를 보며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삶으로 복기해보 려 함은, 완전한 헌신과 봉사로 일관하셨던 그분의 삶속에만 참되고 영원한 의미가 있음을 익히 알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침 우리가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는지는 이미 자명해지지 않았습니까?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 가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 아침 이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짧디짧은 생애밖에 살지 못하셨던 주님의 삶이 어찌 그토록 영원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 주님보다 긴 인생을 살아온 우리의 삶이 어찌 이다지도 의미 없이 공허하기만 한지, 그 근본 이유를 확연하게 일깨워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이 시간 공허한 갈릴리 바다로부터 주님 계신 새로운 인생판으 로 우리를 불러 주심을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이제부터 온전히 주님을 본받게 하옵소서. 주님처 럼 남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는 의미 있는 날들이 우리 인생판에 매일 두어지게 하옵소서. 그리 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날 하나님 앞에서 기꺼이 우리 삶을 복기할 수 있게 하시고, 그와 같은 우리 삶의 기보가 이 세상에 남길 가장 값진 유산이게 하옵소서 ―아멘―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