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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린도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553 추천 수 0 2019.03.14 23: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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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5: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92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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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주현절 후 5주, 2019년 2월10일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기독교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 부활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3일 만에 부활하셨기에 예수를 믿는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문제는 부활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서로 대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모이신 분들도 생각이 다를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 나온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 성 과부의 아들처럼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사람은 본래 죽었다가 소생할 수 없지만,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경이 가리키는 부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소생한 사람은 다시 죽지만 부활의 예수님에게는 다시 죽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활하신 것이라면 자신을 재판하고 죽음에 넘겨준 산헤드린 종교 권력자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나타나셨어야만 합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제자집단에 속한 일부 사람들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에 계속 남아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전하셨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더 이상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복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근거가 무엇인가? 부활의 실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요?

 

게바부터 바울까지


예수 부활 문제를 가장 진지하고 확실하게 접근한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는 고전 15장 전체를 부활에 대한 설명으로 채웠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는 남에게 전해들은 간접 진술이지만 고전 15장은 바울의 직접 진술입니다.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대목에는 특별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 목록입니다.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바울이 그들입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상황에서 경험된 것이기에 예수 부활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바울은 여기서 강조합니다.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경험되었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관해서 바울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데서도 이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 경험 이야기는 대개 소수 사람과 관계됩니다. 사도행전에 거론되는 120명도 숫자에서 크게 차이가 납니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무엇을 본 것일까요?


당시에도 부활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논증하는 고전 15:50절에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부활을 실제 육체의 소생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에서 부활 때에는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일이 없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0). 부활이 혈과 육이 아니라고 해서 혼령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의 설명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질적으로 변화된 생명으로 보았습니다. 고전 15:52,5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썩을 것은 현재의 삶입니다. 지금의 이 삶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썩지 않는 것으로 옷 입듯이 입혀지는 겁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우리가 모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덧입혀진다거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라는 말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쉬운 설명은 어렵습니다. 그런 설명은 약장수에게서나 들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도가도비상도’라는 말이 어렵게 들기는 하지만 의미 없거나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는 말을 실제로 느끼기에는 어렵지만 어느 누구도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다는 말도 이와 비슷한 겁니다. 바울의 이런 설명은 어떤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사건에 대한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많은 이야기를 썼습니다. 요즘 대구샘터교회 수요공부에서 고린도서를 공부하면서 당시에 실제로 어떤 문제가 고린도교회에서 이슈가 되었는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분파, 은사, 영지주의, 먹을거리, 기독교인의 윤리 등등에 대한 많은 것들을 거론한 다음에 바울은 편지 말미에 가장 중요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게 바로 15장의 부활입니다. 예수 부활이야말로 바울이 생각하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3,4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 구절에 복음의 진수를 가리키는 세 문장이 나옵니다. 1)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2) 그는 묻히셨습니다. 3)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 두 문장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역사성입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역사 안에서 일상을 살아내셨습니다. 반면에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문장은 우리의 일상을 벗어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너무 그리워서 환영을 보았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전했다는 뜻일까요? 이런 것만으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자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제자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됩니다. 이쪽 경험이 저쪽에 영향을 끼치고, 거꾸로도 영향을 끼칩니다. 예수님의 운명을 통해서 제자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지금 ‘살아있는 자’로 인식하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경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예수를 통한 절대 생명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살아있다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살아있는 것을 뛰어넘는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다시 부활했다는 말과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결국 같은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죽었던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린 사건을 전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바울이 제시한 부활 증인 목록을 다시 보십시오. 게바(베드로)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바울까지 나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여러 층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바울은 예수 추종자들을 박해하다가 나중에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의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나타나셨다는 말은 은유입니다. 경험되었다고 보는 게 정확한 겁니다. 노래를 작곡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소리가 자기를 찾아왔다거나 그림이 자기를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찾아왔다거나 나타났다는 말은 예술가들이 그것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시간대에 나타났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를 절대 생명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예수님이 실제로 다시 살아나신 게 아니라는 말인가, 하고 생각하면 제가 설명을 잘못했던지 제 설명을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진술의 실체적 진실을 알고 경험하는 게 중요합니다. 부활을 무슨 주술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은 신앙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울도 분명히 혈과 육으로 다시 사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술사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처럼 기독교의 예수 부활 문제를 접근하는 것은 복음 전파라는 관점에서도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의 세계관과 실재론에 근거해서 예수 부활을 변증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부활의 증인이라는 교회의 전통에 바르게 서려면 예수가 왜 우리에게 절대생명인지를 알아야하고, 더 나아가서 다른 이들에게 해명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건 기독교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 개개인의 구원과도 직결됩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생각할 줄 모르면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문제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서 결국 삶 자체가 기독교 영성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평소에도 부활과 영생과 구원을 깊이 생각했으면 합니다. 세상살이에 쫓겨서 그걸 생각한 여유가 없는 분들도 있겠지만, 더 많은 경우는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 이미 알만한 것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한 공부를 차일피일 미룹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서 우리 영혼은 건조해지고 위축되고, 다른 한편으로 과민해지면서 삶 자체가 초라해집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초라해집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영혼의 건강도 아직 생기가 있을 때 챙겨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가 죽고, 무덤에 묻히고, 다시 살아났다는 복음의 중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절대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더 생생하게 느끼는 삶을 가리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죽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수명이 늘어서 1천년을 산다고 해도 그것에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닙니다. 영생을 확인하려면 우선 우리를 죽이는 힘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절망하고, 그 절망으로 인해서 죽음에 이릅니다. 우리의 삶은 부단히 인정 투쟁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고 출세하는 것도 다 인정 투쟁이자 욕구입니다. 간혹 자식을 그런 대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욕구는 달성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인정 투쟁에 매몰됩니다.

 

버림받은 예수


예수님은 당시 모든 세력으로부터 부정당한 대표 인물입니다. 그는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정당했다고 토로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인정받은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땅에 묻힌 예수를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로 경험하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힘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세상과 삶을 전혀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진리이고 생명이었습니다. 그 생명이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그들은 영생이라고 과감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경험에 공명하려면 생명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세상의 요구에 길들여져서 생활 조건을 확대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게 아닙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유복하게 장수하는 게 생명을 얻는 것이라면 예수야말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특별한 운명을 살았습니다. 그의 운명은 불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그의 제자들은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고전 15:3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는 죄를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요구에 더 이상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저는 바울이 제시한 증인들의 목록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이 심심풀이로 이런 목록을 제시한 게 아닙니다. 그 목록에 나온 사람들은 우리와 똑같이 실제로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오늘 우리도 역시 예수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초기 기독교에 속한 사람들은 증인이라는 느낌이 유달리 강했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소설가 김훈은 가톨릭교회의 박해를 다룬 소설 『黑山』의 후기 마지막 단락에서 순교자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나는, 겨우, 조금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나는 여기에서 산다.” 오늘 우리는 순교시대와는 다른 세상을 삽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여전히 순교 영성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증인이나 순교자를 똑같은 단어인 마르투스라고 합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산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역사적 예수가 여러분에게 왜 절대 생명인지를 말과 삶으로 변증하는 것입니다. 직접 전도자나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삶의 현장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만들어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투쟁이나 인내나 관용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매 순간 예수와 생명을 영혼의 중심에 두는 삶입니다. 그렇게 사는 건 골치 아프고, 다른 일이 바빠서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잠시 안락하고 느긋하게 인생을 살지 몰라도 신약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중심에 붙들고 있는 부활 증인으로서의 영광스런 삶에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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