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 기도와 낙심

조용기 목사 | 2008.08.19 22:53:2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18:1-8
설교자
조용기 목사
참고
2002년 4월 21일 주일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기도와 낙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기도를 해 본 사람이면 응답 받는 기도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닌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보면 큰 통곡과 기도로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얼마나 애를 쓰고 힘을 쓰며 기도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전쟁이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요. 싱겁게 시작해서 싱겁게 끝나는 전쟁은 없습니다. 생사를 걸어놓은 투쟁이 바로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는 마귀와 악령들과 한판 싸움을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힘들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가 너무 힘에 부딪혀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기도가 힘든 이유를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로 3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한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요,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요, 우주의 위대한 재판관인데 그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면 아무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자연적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경건하게 살고 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을 신중하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러하나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마음에 경건함이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합니다. 사람을 존경하거나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의와 긍휼이 없이 무정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정의입니다. 마음에 조금도 불쌍히 여김을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그는 권력과 돈과 힘있는 사람에게만 잘해주지 그 이외에는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교만하고 인간차별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재판관 앞에 평범한 사람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여기에 너무나 강한 대조를 했습니다. 이런 재판관 앞에 과부가 나아갔다니 도저히 비유가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과부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외로운 사람 아닙니까?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이 세상에 외롭게 되었으니 보호가 없는 불쌍한 사람이요 힘이 없는 사람이지요. 남편이 있을 때 힘이 있지 남편이 없으면 힘이 없지요. 사람들이 무시하고 달라드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나 주위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기세 당당하고 어마어마한 권세와 위협을 가진 이 재판관에 비해서 과부는 너무나 초라하고 불쌍하고 도저히 대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과부가 재판관 앞에 나가서 어떤 영향력을 미칠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과부는 재판을 하며 나가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그런 간청을 했습니다”. 과부라서 힘이 없고 도울 자 없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니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겠지요. 그는 대단한 상처를 입고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호소할 때가 없어 이 무지막지한 재판관에게 나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달라고 부르짖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호소에 대한 재판관의 태도는 아예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뭐 이런 것이 와서 내게 부르짖냐? 귀찮게...” 완전히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해 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너무나 막막하여 주먹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답답함을 갖게 될 때가 많지요. 마치 과부가 재판관에게 나오는 그런 심정이 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나와서 무릎을 꿇긴 꿇었지만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할려고 할 때 가슴이 너무나 답답하고 너무나 짐이 무겁고 하나님이 과연 나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실까? 기가 막힐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정리해 주기 위해서 비유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능력하고 좌절되고 절망이 될지라도 이 어마어마한 불의한 재판관 앞에 선 과부에 비교할수 있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한 그런 상황에서도 과부는 과감하게 재판관에게 나와서 자기의 간절한 마음이 호소를 한것처럼 우리도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 다가와도 도저히 우리 상상으로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처지에 있을지라도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둘째로 우리 성경말씀을 보면은 절대 무관심의 벽에 부딪히는 과부의 절망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 주면 모르겠는데 아예 꾸짖지도 아니하시고 응답도 아니하고 그냥 버려 버린 것입니다. 절대 절망을 뚫으려는 이 과부의 심정을 보십시오. 이 과부에게서 우리가 배울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절대절망의 문제에 부딪혀서 그 절대절망을 꾀뚫고 나가려는 이 과부의 태도에 우리는 놀라운 교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이 과부는 이 재판관에게 나올 때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더 이상 억울한 인생은 살지 않겠다. 여러분 이것이 인생의 큰 변화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냥 응답 안해주면 그 뿐이고 응답해주면 좋고 막 그렇게 두리 뭉실하게 인생을 살겠다면 이러한 사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이 과부가 자기 처지가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할지라도 그가 이 재판관에게 나왔을 때 그는 돌이킬수 없는 마음의 결단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더 이상 억울한 인생은 살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과부라 짓밣히고 무시하고 멸시받는 인생은 살지를 않겠다.
많은 병든 자들이 저에게 안수기도를 받으러 오는데요. 내가 44년동안 가만히 살펴보고 비교해 보니까 하나의 공통된 응답받는 사람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병들어 온 사람이 “나는 더 이상 이 병으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지 않겠다”. 그냥 낳아지면 좋고 안 낳아도 좋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주여! 낫게 해 주옵소서”. 이런 것이 아니고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나는 더 이상 이 병에 짓밟히고 끌려가지 않겠다. 더 이상은 이런 인생은 살지 않겠다. 나는 각오하고 단호하게 변화를 가져 와야 되겠다. 하나님의 보좌를 붙잡고 내가 몸부림치고 부르짖어 죽더라도 나는 더 이상 이와 같은 비참한 인생은 살지 않겠다. 나는 새로움을 가져 와야 되겠다”. 이러한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결단을 가진 사람은 다 고침 받더라고요. 여러분 이런 마음에 결단이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 과부가 도저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은 그런 처지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불의한 재판관에게 나올 때 그 마음에 무시무시한 결단을 내린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과부는 더 이상 억울한 인생은 살지 않겠다. 내가 죽더라도 이런 인생은 살지 않겠다. 그런 결단과 각오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어마어마한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크던지 작던지 마음에 결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저 희미하게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큰 문제든지 적은 문제든지 "내가 이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겠다. 이런 인생은 살지 않겠다". 그러한 마음에 결단을 할 때 거대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랬으니까 이 과부는 피맺힌 간절한 호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호소는 평범한 호소가 아닙니다. 피맺힌 호소입니다. 배속에서 우러나오는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똑같은 말이지만 그 배속에서 우러나오는 원한 맺힌 호소하고 그냥 머리속에서 나오는 호소하고는 틀립니다. 머리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냥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꼭 갚아 주소서”. 이런 정도겠지만 배속에서 넘쳐나온 원한 맺힌 간절한 호소는 애끓는 소리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여러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얼마나 피맺힌 간절한 호소를 했겠습니까? 큰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애쓰고 힘을 섰기에 그 피에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구멍으로 피가 솟아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은 너무 시끄럽게 기도한다. 통성으로 기도한다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요사이는 안하지만은요. 과거에는 그렇게 했다구요. 왜 답답하지 않으니까 통성으로 기도 안하는 것입니다. 답답한 사람은 피맺힌 호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답답한 사람이 많이 찾아왔다 그 말인 것입니다. 답답하지 않은 사람은 평안하고 좋은데 가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은 피맺힌 호소를 하기 위해서 우리 교회를 찾아 왔고 그리고 몸부림치며 부르짖었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과부는 낙심치 않기로 각오했습니다. 낙심같은 것 없습니다.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내리고 피맺힌 간절한 호소를 하니까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낙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호사스러운 것입니다. 평안하고 좋을데 낙심도 있지 아예 벽에 부딪히면 낙심같은 것 없어요. 죽기 아니면 살기지, 결사적이라는 말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사적인 사람이 무슨 낙심이 있습니까? 안되면 죽는 것이지. 낙심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부르짖었습니다. 봄이 오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고, 낙엽이 떨어지고 싸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오고 그 다음에는 곧장 눈이 내려서 눈보라 치면 눈을 덮어 쓰고라도 이 재판관의 집앞에 엎드려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갚아 주소서”. 외쳤습니다. 무시무시한 사람입니다. 보통은 겁이 안나지만 이렇게 나오면 겁이 나는 겁니다. 어머어마한 결단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재판관의 태도는 누가복음 18장 4절로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는 얼마동안 무관심했지요. 그가 집앞에 엎드려서 부르짖어도 아에 개같이 보고 그가 재판소에서 나올 때 또한 그를 따라 가면서 고함고함치고 와도 그는 무관심해 버렸습니다. 속으로 웃기는 사람 있네. 그리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봄이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오고 계속하니까 이제 귀찮습니다. 번거러워요. “와! 저여자 어떡게 해야 되겠나? 저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고 저거 정말 처치 곤란하다”. 아주 귀찮게 여겼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에 분노가 생겼어요. 이제는 대문앞 나가다가 분노가 있어서 “이렇게 계속할꺼야? 왜 남의 집앞에 엎드려서 고함을 치고 야단이야. 물러가!” 재판소 앞에 가면 “이게 뭐야. 관공소 앞에 나와 가지고서 고함을 치고 정말 이럴꺼야? 내 가만 안두겠어”. 분노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젠 마음이 번거로워졌습니다. 이제는 밤에 잘 때 그 부인이 나타난 꿈을 꾸기 시작해요. 아이 꿈이 그 여자가 삼발을 하고 막 달라드니까 이거 뭐 밤에 자다가 진땀을 흘리고 그런다고. 이건 뭐 아침 밥을 먹을때도 그 여자 생각이 나고 재판소에서 일할때도 그 여자 생각이 나고 아 이젠 큰일났습니다. 이제는 그 여자가 바깥에 있던 여자가 이젠 머리 속에 들어왔어요. 24시간 떠나지 않고 그에게 달라드니 그가 마음이 번거로워져서 나중에는 두손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래서 그는 그 과부를 위해서 문제를 풀어준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그 문제를 풀어 주고 과부는 문제 해답을 얻게된 것입니다. 이와같은 영적 심리적 전쟁은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 부르짖을 때 이와같은 전쟁입니다. 이런 전쟁이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지요. 수없는 좌절과 낙망의 언덕을 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시련과 고통을 단호하게 참고 나가면 우리에게 승리는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고 말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듣고 거기에서 교훈을 배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불의한 재판관이 손을 들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의하고 몰인정하고 무정한 재판관이 어떡게 손을 들었느냐 한번 생각해 봐라. 이 과부가 얼마나 마음에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하고 나오지 않으면 주님이 너희들도 내게 와서 기도할 때 이와같은 단호한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하고 나오라. 다리를 건너 왔으면 다리를 태워 버리고 다시 돌아 가려고 생각하지 마라. 응답받든지 안그러면 죽던지 비장한 각오를 해라. 결단을 내리라.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결단 내리지 않은 기도를 합니다. 친미적인 기도를 합니다. 예술적인 기도를 해요. 응답 받아도 좋고 안받아도 좋다는 그러한 중간 지대에 서있어요. 단호하게 다리를 건너지 못합니다.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 버려야 되요. 비장한 각오와 결단으로 주님께 매달려야 됩니다. 그렇게 하는 기도가 여러분 결국에는 철야기도도 하게 되고 금식기도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편안할 때 누가 철야하며 금식기도 합니까? 비장한 각오를 하게 되면 철야하게 되고 금식하여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서린 기도를 주님께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한서린 기도. 기도를 그냥 묵상하는 기도도 좋지요. 그것은 주님과 교통하는데 좋습니다. 조용조용하게 기도하는 것도 사람들 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이고 좋게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심히 답답한 사람이 그렇게 조용하게 있을수가 없습니다. 원한에 사묻힌 사람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여주리라”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용조용하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서린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칠줄 모르는 기도를 하라. 아에 그냥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자다가 일어 나서도 지칠줄 모르게. 조금 기도하다가 그만 둡니다. 봄이 오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가을이 오고 눈서리 치는 겨울이 와도 아예 지치지 말고 하나님게 맹렬하게 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끝없는 결심을 하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예수님이 또다른 비유를 말하기를 밤중에 한 친구가 이웃집에 와서 대문을 두드립니다. “누구요” “이웃집에 사는 아무개입니다”. “왜요.”. “밤중에 친구가 왔는데 떡 세 덩어리를 내가 빌리려고 합니다. 우리 집에 떡이 없어요.” “아니 여보시오. 지금 문을 다 닫고 애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일어나서 줄 수가 없어요. 날 밝은 날에 오세요”. 그러나 이 친구는 “아닙니다. 지금 내게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떡 세 덩어리가 필요하니 지금 떡을 주세요”. “난 지금 일어나서 나갈수 없어요”. 어떡게 했습니까? 이 사람이 그러면 물러 가지요. 그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자리 대문에서 대문을 두드리며 “떡을 주세요. 떡을 주세요. 떡을 주세요. 떡을 주세요.”. 마음이 답답하니 마음에 한서린 손으로 떡! 떡! 떡! 떡! 떡! … 한서린 기도에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형용사가 수식된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좋을 때 그렇게 기도하지요. 정 답답하면 외마디 소리를 하는 겁니다. 외마디 소리. 떡... 떡을 주세요. 떡, 떡, 떡, 떡… 병을 고쳐 주세요. 고쳐 주세요. 고쳐 주세요. 병을 고쳐 주세요. 뭐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여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시고 영화롭고 이럴 때는 좋을 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정 답답하면 그런 소리가 안나옵니다. “고쳐 주세요. 주님! 이 설움과 이 고통과 이 괴로움에서 몸부림칩니다. 더 이상 병에게 짓밟혀 살지는 않겠습니다. 더 이상 이런 삶은 나는 살수가 없어요. 주여 고쳐 주옵소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 이거 자다가 생각하니까 기가 막힙니다. 저렇게 고함을 치는데 애들 다 깨어났지요. 자기도 잘 수 없지요. 애들이 “아버지 빨리 가서 줘야죠. 못 자겠다 말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나가서 불을 켜고 부엌에 나가 떡 세덩어리를 들고 나가서 “당신의 친구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간청하기 때문에 내가 할수 없이 준다. 받아. 가져 가거라”.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 일어나 주지 않을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줄것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할 때 우리가 간청한다는 것 막 간절히 원한 서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9절로 10절에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여기에 주님께서 강조해서 말하지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이게 맹렬한 기도를 말합니다. 구하고 또 찾고 또 두드리고 맹렬한 집중적인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한 우리에게 배우기를 원하시는 것은 낙망을 포기한 태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부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무관심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협박을 당하고 공갈을 당하고 그래도 이 과부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가지 목표, 기도응답을 받겠다는 한가지 목표를 가지고 전진한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이 더디 오고 문제가 자꾸 악화되고 환경이 어려워지면 우리가 환경을 보면 낙심합니다. 눈으로 볼 때 낙심되고 귀로 들을 때 낙심되고 마음으로 느낄 때 낙심되고 이웃에서 와서 말하는 소리 들으면 낙심되고 좌절되고 절망합니다. 그런 소리 듣지 말고 오직 한가지 응답을 주실 분에게 전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환경이 응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집중해서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못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무얼 못하겠어요? 죽은자도 살리시고 없는것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못하시겠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 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 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낙망을 포기한 태도를 배워야 됩니다. 우리는 성경 마태복음 15장 21절로 28절에 보면 두로와 시돈 지방에 있는 스로보니게 여인의 기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들어와 시돈 지구에 제자들을 데리고 휴가를 갔는데 스로보니게 여인이 뛰어 나왔습니다. 이방 여자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내 딸이 흉악하게 병들었으니 고쳐 주옵소서”. 주님이 무관심했습니다. 아예 들은체 만체 했습니다. 계속 따라 와서 부르짖다가 안되니까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제자들을 붙잡고 “주님께 말씀해서 제발 우리 딸좀 낫게 해주시옵소서”. 제자들이 주님께 나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이 여자가 너무 부르짖고 따라오니 주님 좀 고쳐서 보내 주시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 이런 양 이외에는 오지 아니했다. 아직 이방인의 때에 오지 아니했다. 이방인을 위해서 내가 병고치고 가지 않는다.” 제자들이 가서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아직 이방인의 때가 안왔데요. 당신들에게 치료해 줄수 있는 기회는 없답니다. 이쯤되었으니 그냥 돌아가세요”. 그런데 이 스로보니게 연인은 예수님이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엎드려서 “주여 내 딸이 흉악하게 병들었사오니 고쳐 주옵소서”. 그 예수님께서 얼마나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는 주지 아니한다”. 이 개 사람아 물러가라. 그 말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그 말 들었으면 “뭐 어쩌고 어째? 개라고? 내가 뭐 안 나았으면 안 나았지 어디 두고 보자”. 그럴꺼 아닙니까? 얼마나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습니까? 그것도 사람에게 들은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본인에게 직접 들었으니 뭐 도저히 응답받을 가능성 없지 않습니까? 개라고도 말씀하셨는데 개에게는 자녀에게 줄 떡은 안준다고 했으니 뭐 이건 어마어마한 거부 반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로보니게 여인이 머리를 조아려 엎드려서 “옳소이다 주님! 나는 이방 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개들도 자녀의 밥상 밑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감동했는지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이말을 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와~~~ 예수님을 감동시킨 이 스로보니게 여인의 기도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여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 여인의 말에 의해서 감동되었어요. 절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자기를 지극히 낮추어서까지라도 개로 취급받으면서 까지라도 주님께 나와서 끝까지 부르짖어 응답을 받아내는 그와같은 낙망을 포기한 태도를 갖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말하기를 “하물며 하늘 천부께서 너희들을 그대로 두겠느냐” 누가복음 18장 6절로 8절에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어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이 불의한 재판관과 이 과부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불의한 재판관같이 이렇게 몰인정하고 무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지 않겠는가?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자라 했습니다. 성경 베드로전서 2장 (6절로) 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하나님이 직접 택하셨어요. 여러분 백화점에 가서 물건 택할 때 여러분 어떤 것 택합니까? 여러분 좋아하는 물건을 택하는 것입니다. 옷을 택할 때 좋은 옷을 택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택할 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택합니다. 왜 여러분을 택했어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좋아하기 때문에 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무거나 쓰레기 더미에 뒤져서 바구니에 집어 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 가운데 여러분을 좋아 하셨기 때문에 택하여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당신은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세요. 자 그쯤 되어도 얼마나 어마어마합니까? 재판관은 몰인정하지만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세요. 우리를 좋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오면 하나님 반색을 합니다. “아이고 오느냐. 아이고 반갑다. 잘왔다”. 이러한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얼마나 마음이 훈훈합니까?
마태복음 7장 9절로 11절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아! 이 말씀 감동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아버지도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느냐! 여러분 부모는 자식을 내리 사랑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자식의 요구를 다 들어 줍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 봤어요? 자식을 이기는 부모 있거든 한번 손 들어 보세요.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습니다. 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께 어떻게 우리를 보시겠습니까?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몸을 찢고 피를 흘리기까지 해서 우리를 값주고 사셨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물리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최대의 행복을 위해서 역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기도 응답 안해주시는 것 조차도 우리에게 행복이 되기 위해서 응답을 안해 주시는 것입니다. 응답 안해주시는 것도 응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함이 없는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금 기도하다가 그만 집어 치우는거 원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끝까지 이 과부처럼 봄이 오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겨울이 가도 간절함이 없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성경에는 말하기를 “밤낮 부르짖는 그 택하신 자”고 말했습니다. 밤낮 부르짖으라. 밤에도 부르짖고 낮에도 부르짖으라. 하나님께 나와서 막 어리광을 부려라. 부르짖으라. 하나님은 간절함이 없이 부르짖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19절에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나는 어제 저희 사무실에 신앙 상담을 오시고 안수 기도를 받으러 온 제3성전 임정숙 집사님의 간증을 듣고 상당한 감격을 느꼈습니다. 9년간 끈 문제를 우주에 재판자이신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여 끈질기게 기도해서 응답받았다. 그는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삼고 자기를 원고로 삼고 마귀를 피고로 삼고 예수님을 변호사를 삼아서 아예 문장을 만들었어요. 그래 가지고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94년도 남편의 퇴직금을 가지고 집 위해 기도한 후에 3년 뒤에 입주하는 좋은 조합 아파트에 계약을 하고 그 아파트 조합이 부도난 줄을 모르고 중도금을 6,300만원 치뤘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돈을 때이고 8년 동안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시댁과 친정에서 온갖 핍박을 당하고 남편은 장사를 해도 생활이 극히 곤란하고 다른 교회 다니다가 96년 2월에 제4성전에 등록해서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열심히 듣고 기도하고 소망과 꿈을 가졌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은 우주의 재판장이시며 사단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도둑이요, 예수님은 생명과 재산도 회복해 주시는 좋은 하나님인 것을 알고 기도문을 작성해서 하늘의 하나님 재판관에게 신청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고 사탄은 피고고 주님은 변호사로 생각하고 이 부부는 아무 힘도 없고 의지가 없으니 예수님 보혈 의지하여 억울한 문제 해결해 주시라고 재판관에게 예수 이름으로 변호사이신 예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재판관에 청구 기도를 하고 또 하고 끈질기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 4월 주일날 교회 와서 설교 듣는데 하나님께서 아주 어려운 재판을 이기게 해주신다고 제가 말씀을 해주시더랍니다. 그래서 아멘으로 받아 들여 믿음으로 기도하며 돌려 받으면 선교헌금을 반드시 심겠다고 하나님께 작정을 했습니다. 지난 2월 6일, 6일간 셀 식구와 아침금식기도를 드렸는데 작정예배 끝난 3일후 조합 아파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사무실에 와서 돈을 가져가라. 도저히 받을수 없는 돈을 끈질긴 기도로 낙심하지 않고 불퇴전의 기도를 한 결과에 9년 만에 400만원 제외한 5,900만원을 9년만에 돌려 받았습니다. 중보기도를 통해서 끈질긴 기도를 해서 하나님 재판관 앞에 승소 판결을 받았다고 내게 하나님께 약속한 헌금가지고 기도 받으러 왔습니다. 여러분! 이 자매님은 9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 돈은 도저히 받을수가 없는 것인데 9년동안 하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니 어지간하면 낙심할 만도 하지요. 9년이 말이 쉬워 9년이지 얼마나 깁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원한 즉, 마음에 한맺힌 소원을 가지고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이 집사님처럼 한맺힌 소원입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기에 여러분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삼고 예수님을 변호사로 삼고 기도문을 만들어서 주야로 불으짖었습니까? 성경에 보면 엘가나라는 사람이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첩인 브닌나는 아들을 쑥쑥 낳아서 자랑을 하는데 한나는 아들이 없어 첩에게 무시와 멸시를 당하고 그는 눈물로 세월을 지냈습니다. 남편과 함께 절기가 와서 하나님 성전에 예배 드리러 가서 예배 드리고 음식을 먹을 때도 브닌나는 애들하고 잘먹는데 한나는 눈물만 흘리고 안먹습니다. 남편이 네가 너희보다 열 아들이 있는 것처럼 먹어라. 먹어라. 그래도 안먹어요. 그는 성전에 올라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던지 목이 메어 말이 안나와요. 너무 목이 메어 입만 달싹달싹.. 그래서 제사장 엘리가 보니까 여자 하나가 와 앉아 가지고서 입만.... 그래서 엘리가 술이 취한지 알고 “이 여자여 술을 끊으라. 어데 술이 취해서 하나님 성전에 나와서 입만 딸싹딸삭하고 있느냐?” “제사장님 나는 술이 취한 여자가 아닙니다. 마음이 너무나 원한에 서려서 한이 맺혀 말이 안나와서 그렇습니다. 한 맺혀서 내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게 아들 하나만 주시면 내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이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엘리가 이 말을 듣고 알았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명년엔 아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나는 기뻐서 내려갔는데 일년후에 낳은 아들이 사무엘인 것입니다. 이 여자가 한말 들어 보세요. 나는 약한 여자가 아닙니다. 원통함이 많아서 기도할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원통하고 간절한 이 호소가 마귀의 진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최대한 빨리 응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81편 14절에 "그리하면 내가 속히 저희 원수를 제어하며 내 손을 돌려 저희 대적을 치리니"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6장 20절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다니엘이 기도할 때 첫날만에 응답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천사가 응답을 가져오는데 마귀가 그 군사와 함께 공중에서 스무하루 동안 응답 가져오는 천사의 응답을 막았습니다. 스무하루째 다니엘이 계속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하니까 천사장 미가엘이 와서 도와 주므로 응답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오늘날은 마귀의 정사와 권세가 깨어졌으므로 옛날 구약시대처럼 그렇게 지독하게 저항을 못하겠지만 그래도 사탄은 지금도 무시무시한 결단을 가지고 대적을 하고 훼방을 하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단호한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응답 받을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이 올지라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단호히 응답 받을 것을 믿어야 됩니다.
시편 145편 19절에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4장 13절로 14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주 너무나 너무나 어려운 환경에서 환경을 바라보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마리아와 마르다 보십시오. 오라버니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예수님이 그 무덤가에 와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감히 겁이 나서 돌을 옮겨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마르다가 울면서 예수님에게 “주여! 오라버니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마르다를 바라보고 “마르다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절대 절망에서 믿음을 가져라. 우리 인간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지 무덤에 들어갔다, 죽은지 나흘이 됐다, 썩은 냄새가 난다. 그건 인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써 해결할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믿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이외에 우리는 다른 것 하지 못해요. 어떡게 죽어서 썩은 냄새나는 사람을 살립니까? 그거는 하나님 문제지. 그러니까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꾸짖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환경에 칠흙같이 어둡고 옮겨 놓을 수 없는 큰 바위덩어리가 여러분을 막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끝까지 믿을 따름인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쇄하든지 나는 주를 믿습니다. 믿다가 버려졌다가 죽더라도 나는 주를 믿습니다. 기도에는 오직 응답 받기 위한 기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는 회개 기도도 있고 찬양과 예배와 감사의 기도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가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응답을 목표로 하는 기도를 할 때는 주님이 가르친 대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대결을 항상 마음속에 기억하십시오. 불의한 재판관을 정복한 과부의 기도를 기억하고 그 뒤에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 낙심하지 않고 크고 적은 일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여러분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너무나 많은 시련과 환란을 겪게 됩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오늘 주님이 가르켜 주신 이 불의한 재판관 앞에 나와서 부르짖어 기도하여 이 사람을 항복시킨 과부의 기도를 배우게 도와 주시옵시고 그와 같이 기도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이 재판관보다 수천, 수만배로 좋은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좋아하시고 응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믿음을 갖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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