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미가 › 칼을 쳐서 보습으로-구약성서에서 본 참 평화 현실

김이곤 | 2007.12.13 13:48:4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미4:1-5
설교자
김이곤 목사
참고
새길교회
서론

'평화'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오해는 실로, 오랜 역사를 계속해 왔다. 그것은, 인류의 평화정책과 평화이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오랜 세월동안 취하여 왔던 그 허구적 태도를 통하여 충분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동서를 막론하고 이 지구상의 모든 지성들이 입을 모아 절규했던, 이른 바, 라는 이념천명이, 결과적으로는 허구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계평화를 갈망하는 인류의 평화염원의 한 결실로 나타난, 소위, 국제연맹규약(1919, 6.28)이 세계 제 1차 대전(1914-1918) 직후에 이루어 졌으나, 그 규약이 체결 된지 20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세계 제 2차 대전"(1939-1945)이라는 거대한 평화 파괴의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것과 더욱이 "전쟁의 재앙"을 종식시키자는 유엔의 헌장선포와 서명사건이 있은 지 수주도 안 되어 "히로시마의 핵 투하"라는 전대미문의 인명살상 사건이 생겨났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웅변적으로 입증한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평화를 원한다고 절규하면서도 막상 평화를 이룩하는 방법을 취할 때 인류는 오히려 가공할만한 반(反) 평화적 폭력행위를 동원하여 왔다는 말이다. 즉 "전쟁의 재앙"을 종식시키는 수단으로서 인류는 원폭의 테러행위를 서슴없이 정당방위의 한 수단으로 또는 "힘의 평형" 이론이 평화수립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고 그러므로 인류는 "힘에 의한" 강압적 평화실현을 최선의 수단으로 채택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힘에 의한 평화실현", 그것이 참 평화의 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하나님의 유일한 인류 구원의 길로서 증언하고 있는 성서의 증언이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은 힘의 논리로서 계시된 것이 아니라 단지 십자가의 역설로서만 계시되었던 것이다. 이 계시는 곧 참 평화는 "힘의 논리"로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웅변적 증언이라고 하겠다. 실로, 전능하신 하나님조차도 이러한 십자가의 길을 평화수립의 유일한 길로 알고 그 길을 걸으셨거든 하물며 인간으로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인류의 지성은 여전히 "십자가의 역설"보다는 "힘의 논리"의 길을 평화 실현의 최선의 길인양 믿어 왔었다. 가령, "코오란이냐 칼이냐?" "성서냐 칼이냐?" 라는 외곡된 "의로운 전쟁" 논리나, "팍스 로마나(Pax Romana)" 또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와 같은 제국주의적 평화논리에 의하여 세계평화를 추구해 온 인류 역사가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심지어 이러한 제국주의 논리에 저항하는 "민중 이데올로기" 조차도 때로는 "힘의 논리"에 의하여 반 평화적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쇄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더욱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인류 지성의 최선의 평화정책 대안은 놀랍게도 실로 하늘도 어이가 없어서 웃으실만한, 이른 바 "힘의 평형" 논리에 의하여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진실로 "힘의 평형" 이론도 또한 그 적절한 평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은 핵무기 제한, 군비 축소, 동서독의 화해 등의 데탕트(d tente)적 국제여론의 비등함이 그것을 또한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참된 의미의 "평화" 실현은 기약 없는 미해결의 과제로만 남아 있으며, 반 평화적 위협은 이 지구상에 여전히 상존 해왔다. 왜 그런 것일까? 도대체 문제의 중심점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1. 화해. 회개를 전제한 평화 현실
그러나, 여기, 인류 지성의 평화 염원과 평화 추구 그리고 평화 고백 속에 들어 있는, 이러한, 그 깊은 "허구성"을 매우 예리하고도 철저하게 지적했던 자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기원전 7세기 경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던 예레미야였다. 그는 "평화로다! 평화로다! 라고 말들은 하지만 거기에 참 평화는 없다"(렘 6:14)라고 당시의 예루살렘 사회를 향하여 외친 바가 있다. 말하자면, 거기에 "거짓평화" 또는 "사이비 평화"라는 것도 있다! 는 것을 그는 증언한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거짓 평화"일까? "평화는 평화인데 평화가 아닌 평화", 그것은 또한 무엇일까?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것을 가리켜서 "평화 실천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단지 높이 들기만 하는 평화 깃발, 그리고 단지 크게 외치기만 하는 평화 구호들"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거짓된 평화 깃발과 거짓된 평화 구호의 가장 전형적인 예를 왜곡된 예루살렘 성전 신앙으로부터 발견하였다. 그는, 평화를 추구하며 또 평화를 창조하는 집인 예루살렘 성전이 오히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며,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그리고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자행하면서도 오히려 성전에 들어오기만 하면 마치 그 성전이 요술집이나 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렘 7:10)라고 말하는 그런 자기 모순적 현실을 가리켜서 그는 "거짓 평화의 현실"이라고 경고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전을 "도적의 굴혈"(렘 7:11)로 보는 저들이 감히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렘 6:15) "이것이 야훼의 전이다, 이것이 야훼의 전이다, 이것이 야훼의 전이다"라는 구호만 외치면 구원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인양 말하는 저들의 그 뻔뻔스러운 교조주의적 선포를 가리켜서 "거짓말!"(렘 7:4) "거짓평화!"라고 단호하게 잘라서 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거짓평화란 무엇이며 그리고 그 거짓평화는 왜 근본적으로 제거되지 않는가 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내려진 것이다. 즉 "거짓평화"란, 평화를 구체적으로 만들지는 않고 단지 구호만 외치고 깃발만 높이 드는 그런 성격의 평화론을 두고서 한 말이라고 하겠고 그리고 거짓 평화가 근본적으로 제거되어 참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거짓평화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현실"(렘 6:15) 때문에 온 현상이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성서 본문에 의하면 화해와 회개를 전제하지 않는 평화란 있을 수도 없으며, 있다면, 바로 그것이 힘의 평형 논리같은 그런 것이 "거짓평화"라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평화를 열망하는 자는 많아도 평화가 이 땅에 실현되지는 못하는 바로 그 궁극적 원인이라고 하겠다.
화해와 회개를 전제하지 않는 평화!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구약 성서가 말하는 "평화" 즉 "샬롬"은 그 어떤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한다던가 육체적, 물질적 안녕만을 의미한다던가 하는 그런 "부분적 개념"이 아니고 "전체적 통일과 조화의 개념"을 갖고 있는 이른 바 "구원의 현실"에 상응하는 그런 개념이라고 하겠다. 즉 질병, 전쟁, 사회적 계급투쟁, 빈부의 격차, 자연의 재해 등으로부터 자유한 "조화, 평등, 질서, 건강, 전쟁 없음 등을 모두 포함하는 유기적 통일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가리키는 것이 평화라고 하겠다. 물론, 이것은 결코 그 어떤 "영혼의 평정" 또는 "정신적 안정"과 같은 정적인 개념도 또한 아니다. 그리하여, "샬롬"의 폭 넓은 개념을 찾던 폴.핸슨(Paul Hanson)이라는 학자는 이 "샬롬"을 정의하여 야훼의 "공의"와 "긍휼"이 평형을 이루는 세계라고 보았다. 이 주장은 실로 부분적으로 만들어진 평화는 참평화가 아니라는 것, 즉, 하나님의 "공의만"으로도 참평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만으로도 참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언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공의"는 인간소외에 대한 야훼의 심판사건이요 "긍휼"은 인간소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구원사건이다. 말하자면, 야훼의 심판만으로 평화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야훼의 "심판 없는" 긍휼 또는 사랑만으로도 평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말 속에는 "평화"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정립하려는 진지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즉 구약성서가 말하는 참된 의미의 "평화"는 "공의"에 의하여 전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다음 "긍휼"에 의하여 그 전 존재가 새롭게 재형성되는, 이른 바 "전체의 통일과 조화"를 이루는 평화이어야 하고 그 구성 지체 중의 어느 하나라도 소외되거나 불행해지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거나, 만일 그것이 평화의 틀을 갖고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거짓평화"요 동시에 그것은 더 나쁜 "반(反) 평화적 역기능"을 하게 된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누구에게는 평화인데 다른 어느 누구에게는 반평화이거나, 또 내 몸의 어느 부분은 평화인데 어느 다른 한 부분은 반평화라면 그것은 결코 평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팍스.로마나" 또는 "팍스 아메리카나"와 같은 어느 한 쪽의 힘에 의하여 그 다른 한 쪽이 지배를 받는 그런 힘에 의한 강압적 평화구축은 "거짓평화"이며 그것은 더 나아가서는 결국은 "반평화"가 된다는 그런 말이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어느 한 쪽도 또 어느 한 부분도 평화가 아니면 그것은 이미 평화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동시에, 이 말은 "힘의 평형" 논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한 화해, 화합에 의한 전체적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평화는 이미 평화가 아니거나 아니면 거짓평화이거나 하다는 말이 된다. 즉 회개를 통한 화해에 의하여 그 둘이 본래의 원상태를 회복함으로서 모두 평화일 때에라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수립된다는 말이 된다.
요나 이야기는, 그러므로 화해 없는 평화는 그 어떤 평화도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표적 이야기라고 하겠다. 요나는 하나님의 "공의"만을 평화의 구성요소로 보았을 뿐, 하나님의 "긍휼"은 마치 반평화적 요소인양 생각했던 것이다. 즉 "요나"는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시사 재앙을 내리려고 하시다가도 뜻을 돌이키시는 그런 무한 용서와 무한 사랑의 "긍휼의 하나님"은 오히려 니느웨 백성을 스포일(spoil)시키고 종국에는 이스라엘과 앗수르 사이를 불편스럽게 하여 도리어 반평화적 현실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그는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이 요나와는 다르셨던 것이다. 즉 앗수르와의 화해 없이는, 그것이 비록 뼈를 마르게 하는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진정한 평화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화해는 참 평화의 절대적 전제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동시에, 요나 이야기는 또한 참 평화의 전제조건인 "화해"가 진실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야 하는 것을 알려 주는 대표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요나는 앗수르와의 화해를 "죽기까지 할지라도"(요나 4:9)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한 바가 있다. 왜 그런가? 그것은 진정한 화해는 자기의 옳음 자기의 의(義)를 포기하는 일인데, 이것이 지극히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해의 가장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철저히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서 화해의 제물이 된 바로 그 긍휼의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십자가 화해의 사건은 적대시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변화시키되,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를 포기함으로서" 이루어 낸 그런 평화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화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를 포기함으로서 비로소 이루어 진 사건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의 하나님" 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도우실 수 있고 그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창조하실 수 있다는 증언이 바로 이 사실을 두고서 한 말이다. 실로, 자기를 내어주는 고통, 자기를 내어주어 남을 사랑함으로 그 남과의 통일, 조화, 화해로 이루어 내는, 그렇게 함으로서 평화를 실현하는 그런 "창조적 아픔" - 자궁 진통의 아픔과 같은 "창조적 아픔" - 만이 오직 평화 창조의 유일한 길이라고 하겠다. 전능하신 하나님조차도 평화 창조를 위하여서 이 길을 걸으셨거든 하물며 인간에게서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평화를 창조하는 길이 바로 이러한 길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깨우쳐 일깨워 주는 유일한 장소로서 선택하신 곳이 바로 "고난의 역사"라는 곳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평화 창조의 역사를 간단히 일별해 봄으로서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하는 우리의 자세를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참평화"를 만들어 간 구약성서적 패러다임들
(1) 바벨론 포로기를 통한 철저한 자기정화의 이스라엘 구원사
이스라엘이 철저한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을 통하여 비로소 자기의 정체를 발견해 낸 곳은 논의의 여지없이 "바벨론 포로의 경험"이었다. 남 왕국 유다의 멸망과 신성불가침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초토화, 마른 뼈들로 가득 찬 해골 골짜기 같은 잿더미의 저 폐허 위에서, 비로소, 화해와 평화의 참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증거 했던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기원전 6세기의 기인(奇人) 예언자 에스겔이었다. 그는 전혀 희망 없는 조국, 마른 해골처럼 소망을 깡그리 잃어버린 저 폐허의 잿더미 위로 우뚝 솟아 나와 그 마른 해골들이 "지극히 큰 군대"로 재창조되는 기적의 환상을 보게된다. 그러나, 이 놀라운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그 순간, 바람 같은 주의 영이 갑자기 에스겔에게 임하시며 일깨워주신 말씀, 그것은, 놀랍게도, 솔로몬 이후 남과 북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이 4세기 세월의 그 고통스러웠던 긴긴 세월동안 반목하여 싸웠던 악몽의 분열시대를 청산하고 "그 둘이 하나로" 통일, 화해되는 평화의 세계 창조에 관한 약속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참평화의 창조, 4세기 세월동안 꿈에도 상상 못했던 그 통일 이스라엘의 실현이 바로 다름아닌 저 몰골의 마른 해골이 되는 경험, 이른 바, 황금보석으로 꾸며져 온갖 영화를 다 누렸던 저 화려한 예루살렘이 감히 마른 해골로까지 낮아지는 철저한 자기비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었다. 실로, 예언자 에스겔은 마른 해골의 골짜기 한 가운데 서서:
그 막대기들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줄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7)
라는 야훼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철저한 낮아짐, 철저히 깨어지는 체험, 자기부정의 체험, 자기의의 포기, 여기서부터 비로소 선민 이스라엘이 그의 하나님 야훼와 화해하는 평화의 창조, 즉 평화회복의 놀라운 신의 경륜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에스겔의 이러한 체험은, 그러나, 바벨론 포로 말기의 예언자, 흔히, "제 2 이사야"라고 불리는 한 익명의 예언자에 의하여서는 오히려 "어둠"을 창조하시고 그 "어둠" 속에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사 45:4,15), 이른 바, 자신을 역사의 지평으로부터 "감추시는" 그의 역설적 역사섭리에 대한 체험으로 좀 더 신학화되었다. 70년 세월의 바벨론 포로생활, 출애굽 해방을 주도하시던 그 당당하시던 야훼 신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식별키 어렵던 그런 그 어둠의 70년 세월을 진실로 인고(忍苦)로만 살아왔던 한 익명의 예언자 제 2 이사야는 그 70년 세월의 말미에 서서는 좌절 속에 있는 포로민들에게 돌연 전혀 새로운 희망의 평화 메시지를 외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심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나 야훼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또한 평화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야훼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바로 나니라(사 45:7).
아,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당신은 진실로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말하자면, 제 2 이사야는 여기서 진정한 평화의 창출은 진통하는 아픔의 회개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였다는 매우 심도 있는 신학적 반성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실로 70년 포로생활을 통한 옛 자기의 완전한 청산, 즉 포로 귀환을 통하여 이스라엘 회복에 이른 그런 평화 현실은 이스라엘 신앙인에게는 새로운 의미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참평화는 무엇이며 그 참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이스라엘은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치 예언자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전적으로 깨어져 무너지되 몰골의 마른 해골로까지 "자기붕괴"를 체험한 그 다음에야 비로소 "그 둘이 하나가 되는"(겔 37:17) 평화 현실을 체험하였듯이, 즉 4세기 세월동안 반목과 질시로 갈라졌던 그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섭리를 통하여 비로소 참된 의미의 평화 현실을 발견하였듯이, 다시 말해서, 몰골의 절망적 마른 해골이 전혀 새로운 재창조물인 "지극히 큰 군대"(겔 37:10)가 되어 "분열 없는 하나의 이념 아래 살게 되는"(겔 37:22) 그런 현실을 에스겔이 평화 현실로 보았듯이, 예언자 제 2 이사야도 또한 70년 바벨론 포로생활 동안 단지 침묵하시고 숨어 계시기만 하시며 그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의 그 공의의 심판을 깡그리 그 밑바닥까지 체험한 다음에야 비로소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고"(사40:5) "아름다운[평화의] 소식"(사 40:9)이 전해지는 그런 역설적인 긍휼의 현실이 바로 평화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즉 "복역의 기간이 끝나고"(사 40:2) 심각한 산고의 진통이 있은 다음이라야 평화 창출의 진정한 "기쁨"이 생산된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 2 이사야의 신앙적 전통을 철저히 계승한 제 3 이사야도 이러한 평화 창출의 역설적 역사섭리를 행하시는 그 야훼 하나님을 가리켜서 감히 "임신케 하고 해산케 하는 자"(사66:9)라고 하였으며 마침내는 그 야훼 하나님을 "젖을 빨리는 어머니"(사 66:13)라고 까지 명명하였던 것이다.
야훼께서 가라사대, ...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 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야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를 강같이,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사66:9-13).
그렇다. 바벨론 포로의 "쓴" 경험과 그 해방의 "단" 경험을 신학화한 이 예언자는 산고의 진통 다음에 새로운 생명을 가슴에 품고 젖을 빨리는 그 어머니의 "자궁"과 "젖가슴"의 그 "고통"과 "희열"의 역설적 조화를 다름 아닌 하나님의 평화 현실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궁의 고통을 "공의"의 현실에 그리고 젖가슴의 희열을 "긍휼"의 현실에 비유하는 해석은 결코 알레고리적 해석의 한 비약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평화 현실"은 어미의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세상에 태어난 그 젖먹이 새 생명이 희열에 충만한 채 그의 어머니의 젖가슴에 묻혀서 그 젖을 넉넉히 빨며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만족해하며 즐거워하면서 노는 "그 현실"에 비유될 수 있다는 해석은 논박할 여지가 없는 성서적 증언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해석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역설적 "평화 현실"에 관한 가장 명료한 성서적-드라마의 묘사는 시편 26편에서 잘 묘사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야훼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아,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 우리네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네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저들 이방인들도 말하기를, "야훼께서 저들을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라고 하는구나. 아, 그러하여라. 야훼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면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편).
그렇다. 참 기쁨, 진정한 기쁨, 이스라엘 회복의 환희, 새로운 생명의 창조에 관한 희열, 그것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고뇌" 없이는 맛볼 수 없는 기쁨이라는 그런 말이다. 그러므로, 봐이져(A. Weiser)라는 한 성서 주석가가 말한 것처럼,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의 "기쁨"을 누리는 하나의 관문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기쁨", 그것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진통의 과정 다음에 온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바, 평화 실현의 오직 하나의 통로요 관문이라는 것, 그리고 진통의 회개와 자기를 내어주는 아픔이 없이는 결코 평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평화" 메시지의 핵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성서의 평화 이념에 관한 최대의 신학적 진술은 역시 미가서 4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2) 미가서 4장의 평화 이데올로기와 평화수립방안
주지하는 데로, 미가는 이스라엘 정신사의 가장 주목할 말한 시기인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로서, 무엇보다 이스라엘 예언문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언서의 중심 사상을 종합 정리한 자(믹 6:6-8)로서 잘 알려진 예언자다.
① 미가서 4장에 나타난 예언자 미가의 평화이념은, 그 무엇보다 첫째로는, 야훼의 절대적 유일한 통치권 또는 하나님의 유일한 왕권이 통치하는 현실이 곧 다름 아닌 진정한 의미의 평화 현실이라는 그의 신학적 천명(미가 4:1-3; 사 2:2-4)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오히려 많은 이방 백성(믹4:2,3; 사2:2,3)들이 소리 높혀 외치기를, "야훼의 토라만을 유일한 통치이념으로 삼는 그 나라와 그 세계가 평화세계다"라고 예언자 미가는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예언자 에스겔의 해골 골짜기 환상 보도에서도 명백하게 선포된 사실이다. 즉 에스겔은 말하기를, 포로에서 귀환한 통일 이스라엘의 평화세계는 단지 "한 임금"(겔 37:22)이 다스리는 세계이며 그 "한 임금"과 맺은 계약이야말로 "평화계약"(겔 37:26)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 사실은 "참평화"란 오직 한분 뿐이신 신(神), "야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선언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즉 "야훼의 현실"이 바로 다름 아닌 평화 현실이라는 말이다. 사사기 기자에 의하면, "야훼가 곧 평화"라는 것이다(삿6:24). 그렇다면, 이라는 말은 무슨 뜻의 말인가? 물론, 이 말은 야훼께서 유일한 주권과 통치권을 가진, 신이 정치를 하는 현실 즉 신정정치의 현실, 말하자면 토라에 의해서 통치되는 현실이 평화 현실이라는 그런 말이다. 이 말의 의미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역시 시편 85:10 이 아주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인자와 진실이 같이 만나고
공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춤을 한다.
라고 이 시인은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시인이 같은 뜻의 말을 반복하고 있는 이 4개의 동의어, 즉 "인자", "진실", "공의", "평화"는 모두 그 히브리적 의미를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말들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표현의 평행적 구조에 따라 그 의미를 살펴보면, "평화"는 우선 "진실"과 , 를 이루고 있고 "공의"와는 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평화는 "본질적"으로는 "진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개역은 이것을 "진리"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한 곳은 역시, 신뢰성, 영속성, 정직성(참됨) 등의 의미를 가장 포괄적이고도 현실적으로 표현한, 민수기 11:12와 이사야 25:1의 "오멘"이라는 말에서부터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민수기는 이 말을 "아비"라고 번역했고 이사야는 이 말을 "성실"이라는 말과 짝 맞추는 말로서 "진실"이라고 번역했는데 그 문맥상의 의미는 모두 도움이 필요한 자 - 대책 없는 젖먹이 -를 돌보고, 지키고, 보살피고, 붙들어 주는 생산과 양육의 책임을 맡은 어버이의 기능을 설명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요 동시에 놀라운 학문적 발견이라고 하겠다. 말하자면, 젖먹이를 품에 안고, 돌보고, 지키며, 보살피고, 붙들어 주는 어버이의 "한 점의 거짓도 있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 현실"이 진정한 의미의 평화 현실이요 이러한 "오멘"(어버이)의 자녀에 대해서 가지는 그 관계 현실이 다름 아닌 평화 현실이라는 그런 말이라고 하겠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즉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오멘"(어머니)과 그 젖먹이 사이의 관계는 "인간소외"라는 것이 전혀 들어갈 틈이 없는 "샬롬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수기 11장은 이 "오멘"을 아비(또는 어미)로 번역하고 그것을 민족의 구원자인 모세의 지도자 기능에 부여했지만 예언자 이사야는 이 "오멘"을 예로부터 활동해 오신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의 기능으로 설명하였다. "진실"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아멘"이라는 말의 어근은 신뢰, 확고, 성실, 믿음 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말은 동시에 어린아이를 보호하고 지키는 일(민11:12), 자녀 교육행위(왕하 10:1,5), 유모의 양육행위(삼하 4:4), 그리고 자녀를 기르는 행위(애가 4:5) 등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참평화는 이러한 "어버이(어머니)의 긍휼"이 지배되고 있는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버이의 이러한 모성적 긍휼만으로서는 하나님의 평화 현실을 오히려 스포일(spoil)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반평화적 도구로 잘못 이용될 가능성도 있다. 그리하여 86편 시인은 이 말(평화)을, 본질적으로는 "오멘" 즉 어버이라는 말과 연결시키면서도 동시에 이말(샬롬)을 "공의"와도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결코 단순한 평행법적 동의어 배열에 의한 강조법에서 온 것으로만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샬롬"이 "진실"과의 관계에서만 설명될 수는 없다는 것, 이른 바, "공의"와도 관련시켜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배려가 그 배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실로, "평화"는 "오멘"과 "공의" 즉 모성적 사랑의 "긍휼"과 부성적 "공의"가 전혀 마찰 없이 조화를 이루는 야훼의 현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이른 바, 부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혹독한 경고, 채찍, 응징, 심판의 속성인 와 그리고 의 역설적 조화가 진정한 의미의 평화 현실이라는 말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야훼의 현실"은 야훼의 뜻(토라)이 유일한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는 곳에서만 볼 수 있는 현실이라고 하겠다.
② 예언자 미가는 이러한 야훼의 현실이 무엇을 실현해 가는 것인지를 매우 질서정연하고도 체계 있게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a) 첫째 야훼의 현실로서의 평화 현실은 우선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요구한다(믹 4:3)는 것이다. 이 말은 그러나 "칼과 창"을 제거하는 전쟁 종식적인 소극적 의미만을 갖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전쟁용 기구(무기)를 부셔서 농기구인 보습과 낫으로 바꾸는 적극적인 이념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파괴 이데올로기로부터 건설 이데올로기로, 소비와 죽음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생산과 삶의 이데올로기로, 정복 이데올로기로부터 평화 이데올로기로" 이른 바, 사회통념의 대 전환을 요구하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예언자 미가는 이 나라와 저 나라 사이의 잠정적 전쟁종식 뿐만 아니라 "다시는 전쟁을 연습도 하지 않는 사회"(믹 4:3)를 만들어 가도록 요구한다. 구약성서의 "샬롬"이 부분적 평화를 참평화로 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힘의 평형"이라는 논리로서 세계 평화를 미봉적으로, 잠정적으로 이룩해 보려는 UN의 노력이 참평화 수립에는 결코 크게 기여하지는 못한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렇다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완전한 평화에로 가는, 즉 "야훼의 현실"로서의 평화 현실로 나아가는 그 첫 단계를 예언자 미가는 이러한 정치·군사적 평화 현실에서 관조하였다는 점이다. 실로, 성서종교가 정치 문제에 개입하는 그 성서적 이유도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하겠다.
(b) 그 다음, 둘째 야훼의 현실로서의 평화 현실은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그 열매를 따먹어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아무도 없는 사회"(믹 4:4)를 만들도록 요구한다. 솔로몬의 시대를 가장 평화스러운 시대로 표현하려고 하였던 한 역사가도 - 비록 많은 예언자들과 역사가들이 솔로몬의 시대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고 또 그의 시대를 가장 이상적인 평화시대로 평가하였던 바로 그 사가 자신도 후일에 가서는 솔로몬의 시대를 혹독히 비판하였지만, 어찌했든, 한 성서 역사가는 그 이상적 평화시대를 가리켜서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부산에서 신의주) 이르기까지 각기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각기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사는 시대"(왕상 4:25)라고 정의하기까지 한 바가 있다. 물론, 이것은 개인주의 사회를 뒷받침하는 성서적 전거는 아니다. 이 말은 노동의 신성함과 그 노동의 정당한 보상이 외부세력으로부터 결코 강요받거나 침해당함이 없이 정당하고도 자유로운 노동과 그 응분의 보상을 받는 그런 사회가 바로 평화사회의 주요한 한 요건이 된다는 것을 증언하는 말이다. 성서종교가 평화사회 실현을 위하여 노동자의 권익문제에 개입하는 그 성서적 전거도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군사적 평화와 사회경제적 평화가 보장된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는 참평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성서적 신념이다.
(c) 그리하여 야훼의 현실로서의 또 하나의 평화 현실은 즉 셋째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각자의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정신적·신앙적 자유의 현실을 평화 현실로서 설명하였다. 물론, 이 말은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우리의 본문에 대한 번역상의 문제가 다소 예민하다고는 하더라도 미가서 4장 5절의 말씀: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야훼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라는 말씀은 통속적인 의미의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앞에 나온 두 가지의 평화 현실과 관련해 볼 때, 즉 정치군사적 평화 현실 그리고 사회경제적 차원의 완전한 평화 현실과 비교해 볼 때, 성서가 여기서는 오히려 정신적·신앙적 차원의 평화가 포함된 완전한 평화 현실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한 이념이 다른 이념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거나 일원화하려는 것은 결코 평화 현실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이나, 어거스틴의 의로운 전쟁이론이나 아랍계열의 "지하드"와 같이 거룩한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토라를 강요한다거나 코란을 강요한다거나 불경을 강요한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평화운동이라는 범주 안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가서 4장 5절(이사야 2:5와 비교)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메시지이겠는가? 그것은 비종교화 또는 탈종교화를 평화 실현의 한 요소로 보는 것일까? 아마도 그런 의미가 배재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아마도 종교나 이념만으로는 평화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교리의 차이를 가지고 갑론을박하고 종교의 차이나 이념의 차이를 가지고 시비를 하고 있는 것은 평화운동이라기보다는 평화를 저해하는 작용이라는 판단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주 최근(1988)의 한 성서 주석가(James Limburg)는 여기서(미가 4:5) 예배회중의 적극적인 평화운동 참여행위, 즉 "평화를 만드는 일"에의 참여를 강조하는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말하자면, 평화에 "관한" 말을 듣고, 긍정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평화를 찬양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일로 만족하는 것은 평화 실현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증언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주목할만 하게도, 미가서 4:5의 전반절과 후반절은 예배 회중의 행위를 히브리어 "할라크" 즉 "걷는다", "행한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 일관되게 얽어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평화를 만드는 일을 구체적으로 행하라는 그런 말이다. "평화"는 본질상 이념의 문제나 교조의 문제가 아니라(렘 6:14) "만드는 행위"의 문제였다. 이념이나 교리를 강요하는 일없이 평화를 "만들고" "실천하고" 하는 그 행위가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이다. 실로, 정치 군사적, 사회경제적, 그리고 탈 종교적, 탈이념적 평화 실현의 행위가 야훼의 공의와 긍휼 조화 아래 이루어 질 것을 성서는 요구하고 또 기원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평화 요구를 실현하는 길이 미가의 신학적 반성을 통해서는 어떻게 제시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③ 미가는, 놀랍게도, 이러한 평화 요구를 실현하는 길을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의 생산과정"(믹 4:9-10)에서 찾았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미가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평화]를 낳을찌어다, 낳을찌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광야에 거하며,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야훼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믹4:10).
그렇다. 평화는 그 어떤 정적인 상태나 그 어떤 환상적 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통의 과정을 거친 새로운 창조의 세계에서나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즉 미가 예언자가 이스라엘 평화를 실현하는 장소, 평화를 창조하는 장소를 "광야"와 "바벨론"("거기서"의 반복 참조)으로 설정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성찰로 보인다. 즉 고난의 광야와 불붙는 용광로의 바벨론의 평화 창조의 유일한 장소였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가 추구했던 가장 이상적인 평화세계로 상징된, 소위, 희년의 해에 찾아오는 세계도 또한 그것이 7 X 7=49, 49년 동안이나 쌓인 한(恨)을 말끔이 씻어낸 그런 평화의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기업(基業)으로 돌리는", "모든 것을 원점(출발점)으로 돌리는" 철저한 원상복귀와 그리고 자기를 이웃에게 평화를 위해 내어주는 행위를 요구하였던 것처럼, 예언자 미가도 역시 진통의 과정을 통한 철저한 재창조, 진통의 철저한 아픔을 통한 회개의 화해를 평화 실현의 필수적 전 단계로 보았던 것이다.
(3) 화해를 통하여 수립되는 평화
이와 같이 철저한 회개를 통한 화해가 비로소 평화 현실을 낳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패러다임은 야곱과 에서 사이의 평화 실현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야곱과 에서 이야기는 한 개인의 반목관계로부터 민족적 반목관계로 확대된 한 전형적인 형제반목 의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 이야기의 결론을 대 화해의 해피 엔딩으로 끝막음하고 동시에 그러한 화려한 화해의 평화 현실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매우 극적이고도 역설적인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야곱과 에서의 극적인 화해를 통한 평화 실현은, 실로 얍복 나루터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심판의 일격을 받고 무너지고 깨어진 야곱의 부러진 허리 사건과 더불어 비로소 그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창 32:22-32). 야곱은 그의 하나님으로부터 생산축복을 받은 바로 그 자리인 그의 "허리"가, 그의 사타구니가 무너지는(창 35:11), 소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깨어지는 그 철저한 자기 깨어짐의 경험을 통하여 비로소 형 에서와의 평화회복의 한 가능성("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다리를 절었더라", 창 33:3)을 내다보았다. 마침내 야곱은 형 앞으로 나아 오면서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창 33:3) 자기부정의 참회를 한 후, 비로소 형에게 "화해"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만한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아뢰었다. "형님,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 33:10)." 반목과 증오의 원수인 형의 얼굴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자기변화의 화해! 여기서부터 야곱은 비로소 참된 의미의 "이스라엘의 평화"(창 32:28; 35:10)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야곱.에서의 사건보다 더 극적인 평화 수립의 한 설화 패러다임은 나오미와 룻 사이의 고부간의 대화를 통하여 읽을 수 있다. 며느리 "룻"은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하여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어머니, 저로 하여금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저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저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저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시오니 어머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입니다. 만일 제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야훼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8).
고부간의 진정한 평화수립을 위하여 "룻"은 자신의 미래, 자신의 백성, 심지어는 자신의 하나님,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어머니를 위하여 내어놓고 그 어머니의 미래, 그 어머니의 민족, 그 어머니의 하나님, 그리고 그 어머니의 죽음에 자기의 것을 일치시키는 그런 "자기 버림"의 결단을 하였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비로소 얼어붙었던 산천이 흐르고 시내가 되어 녹아 내리듯 원수의 나라로 갈라져 있던 "유대"나라와 "모압"나라의 국경선은 눈덩이 마냥 녹아서 허물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과 일치시키기까지 하는, 즉 자기의 "의(義)"와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면서까지 "평화"를 창출하는 "룻"은 또한 동시에 남편의 가문(유다 가문)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젊음과 순결을 시아버지(유다) 앞에 과감히 내어 던져서 유다 가문에 평화를 창출하였던 저 "다말"과 함께 "평화 창출의 위대한 선각자"로서 영원히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야훼께서는 기드온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자신은 평화를 창조하시는 자라는 것, 아니, 자신이 곧 "평화"라는 것을 선포하시었고(삿 6:24)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시면서, 자신은 평화를 주는 자라는 것, 그러나 자신이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4:27).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자기의 의를 십자가에 내어 던지는" 진통의 아픔과 자기 희생의 화해를 통해 비로소 창조되는 평화이었기 때문이다. 결단코 힘의 논리에 의거한 평화 수립을 시도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평화에 관한 성서적 가르침의 비의(秘意)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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