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 시간, 영원, 사랑

한완상 | 2008.02.26 23:16:2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전3:1-13
설교자
한완상 형제
참고
새길교회
성탄절이 지나고 나면 한 해가 곧 저뭅니다. 이 때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빠지기도 하고, 다가오는 새 해를 앞두고 두려움과 희망을 품기도 합니다. 이 때가 되면 시간의 뜻을 생각하게 되고 특히 그 과 의 의미를 다시 되씹게 됩니다. 회고해 보면,
10대에는 시간이 지겨워 새 해가 너무 느리게 오는 듯 했습니다.
20대에는 연말 연시가 가슴을 뛰게 하는 낭만의 기회였습니다.
30-40대에는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싼타 할아버지의 대역을 하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50대에는 이 기간이 얼마간 무서워집니다.
60대에는 두려운 마음으로 남은 생을 생각하고 지난날을 되새겨 보기도 합니다
하기야 나이가 몇 살을 먹었느냐를 따질 것 없이, 오늘과 내일의 삶을 진지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연말이라는 시간은 값진 자기 성찰의 기회가 됩니다. , , 그리고 과 같은 중요한 가치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병자년 마지막 주일에 전도서의 말씀을 거울 삼아, 시간과 영원과 사랑의 뜻을 새삼 되새겨 보는 것도 뜻이 있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사모하면서 살고 있으며, 짧은 인생 삶 속에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영원의 편린(조각들)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인간이 갖고 싶어하는 권력과 부와 명성을 모두 누렸던 인물이었지만, 그는 그의 삶의 체험 속에서 인간 노력의 허무함과 뜻없음을 깨달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람과 안개같이 덧없이 없어지는 인생 삶을 노래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시간 속에서 헤아려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성찰 주제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첫째,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점에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둘째,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게 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의 시작과 끝을 인간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셋째, 인간은 시간의 제약 속에서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살 때 가치 있는 삶을 살게됩니다.
위의 세 가지 주제를 오늘 우리 삶 속에서 은혜롭게 되새겨봅시다.

첫째 주제: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인생의 삶에는 기쁨만 있거나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서가 증언하듯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도 있습니다. 찾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도 있습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드리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심을 때도 기뻐하고 거둘 때도 기뻐하며, 지킬 때도 아름답고 버릴 때도 아름답다고 인식해야 합니다. 인생이 이와 같이 서로 다른 것들의 총체이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어떤 때에 처해 있든지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울 때는 울고 웃을 때는 웃음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싸울 때는 보람있게 싸우고, 평화를 이룩할 때는 가치 있게 일하므로 인간답게 사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답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기쁠 때 슬퍼하고, 미워해야 할 때 사랑하고, 세워야 할 때 허무는 등의 삶일 것입니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우리는 춤을 추어야 할 때 슬퍼하고, 소리쳐야 할 때 잠잠하지 않았던가를 조용히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특정한 시간 상황에서 자족만 해야 합니까? 그 상황을 뛰어 넘어 영원을 그리워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둘째 주제: 시간 속에서 영원을 사모하게 하심.
사람만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으려는 욕구를 끈질기게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공간을 어느 정도 정복했습니다. 이제 저 넓은 우주를 빼 놓고는 프론티어(frontier)가 거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정보통신 혁명의 덕택으로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택교육, 재택쇼핑, 재택 의료진료 등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공간을 정복한 인간은 이제 시간 정복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시간 정복은 현대 과학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과연 인간은 시간의 프론티어를 넓혀가서 마침내 영생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까? 비록 모든 종교가, 그리고 古今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영생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애썼으나 과연 신통한 효력이 있었습니까? 영화에서는 현재, 미래, 과거 사이를 들락거릴 수 있지만(Back to the Future란 영화), 실제로는 아직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한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강조하는 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不老草를 얻고자하는 마음과 같은 것입니까? 이런 질문 앞에서 우리는 그 정답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서는 먼저 하나님 하시는 일의 始終 모두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우쳐줍니다. 하나님의 뜻 전체를 투명하게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 점을 우리는 때때로 잊어버리고 마치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아는 양 하나님 뜻을 빙자하여 인간이 하고 싶은 것을 해 치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망령된 행동을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키려는 짓이야말로 가증스러운 짓입니다. 나는 지난 11월 이란을 여행하면서 모든 짓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내는 그곳 형편을 보고 놀랐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 한국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분열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파(예수교 장로회파)가 있고 그리스도파(기독교 장로회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파도 합동과 통합의 이름으로 합동파와 통합파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위선적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우리는 하나님의 뜻 전체를 훤히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이 은총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그 밝은 눈을 갖고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괴로움의 연속일 것입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반찬 속에 우글대는 온갖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투명하게 본다면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눈이 적당히 어두운 것이 은총이듯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음이 은혜가 된다는 점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하나님의 뜻 모두를 이해할 수 없다고만 가르칩니까? 비록 하나님의 일의 전체 모습을 알 수는 없을지라도, 중요한 뜻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셋째 주제: 시간 속에서 사랑하며 살라.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즉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측량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뜻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것은 곧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도 우리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다시 쳐다보고 그분의 가르침에 새삼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영원을 잇는 다리입니다. 즉 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려면 사랑(예수)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을 베푸는 삶만이 시간을 영원으로 이어줍니다. 바로 이 점이 不老草를 찾는 진시왕의 영생 욕구와 다른 점입니다.
어느 날 율법학자가 예수께 영생 얻는 길이 무엇인지 도전적으로 물었습니다.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사랑을 베푸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삶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종교 지도자와 달리 그의 독특한 시간적 상황(여행 중)에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사랑해야 할 때 사랑한 사람입니다. 허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랑해야 할 때 비겁하게 무관심했습니다. 상놈 사마리아인은 영생에 이르고 종교지도자는 영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사마리아인 상놈은 사랑의 다리를 통해 영생으로 건너갔습니다. 바로 이 점이 기복적 영생 욕심, 타임 머신 타고 싶은 욕심, 그리고 不老草를 얻고 싶은 인간 탐욕과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매 형제 여러분! 올해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았는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할 때 미워하고 미워해야 할 때 사랑하므로써 예수님을 욕되게 하지 않았는지, 이 해가 넘기 전에 고요히 자기 성찰을 해 보아야 합니다.
오는 해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남에게 화끈하게 착한 일을 하므로써 영원을 사모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영생으로 가는 다리를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곧 시간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삶임을 잊지 맙시다.
새 해에는 때마다 아름답게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울 때는 함께 울고 기뻐할 때는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아봅시다. 그러나 특정한 때에 자족하지 말고, 때를 넘어 영원을 사모합시다. 그렇다고 영원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혼자 영원히 살고 싶은 영생의 욕구, 불로초를 찾으려는 끝없는 이기심을 뜻하지 않음을 깨달읍시다. 오히려 그것은 제한된 특정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듯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뜻합니다. 이같은 사랑만이 시간을 영원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됩니다. 그 다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가오는 새 해에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 때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지녀 우리 이웃을 더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그것이 영원으로 가는 첩경임을 새 해에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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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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