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이사야 › 전쟁과 평화

복음 | 2007.11.15 08:04:3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사2:1-2
설교자
한태완 목사
참고
http://je333.com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 3:15)

지난 3천 년 동안 지구상에는 3천3백 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역사란 전쟁의 역사였다는 말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미소 간의 핵 경쟁이 한창 진행되던 때에는 실로 생각하기도 힘든 어리석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가진 핵탄두만으로도 그들은 지구를 41회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지구이므로 한 번만 파괴해도 끝날 일을 41회나 파괴할 무기를 마련한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날마다 3만5천 명이 식량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증오심과 싸움을 위하여 전세계가 쓰는 돈은 연간 5천5백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회 사업과 교육비를 대폭 줄이면서까지 무력 경쟁에 골몰하는 것은 비극을 넘어서 큰 죄악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국가가 경영되는 불합리한 모습인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소망을 말하라면 아마도 평화라고 입을 모을 것입니다. 오직 평화의 왕이신 주님만이 무기를 불사르고 전쟁을 그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죄와 욕심과 증오를 없애실 수 있습니다.
"저가 땅끝가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시46:9)

어느 교단 신문에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의 공익성 광고가 게재됐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에 두 교회의 당회실 풍경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별명이 ‘법이요’라는 장로와 ‘법을 잘 알고 지키시오. 그러나 주장하지는 마시오.’ 그런 뜻으로 사는 장로가 각각 선임인 두 교회가 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법이요’ 장로가 있는 교회는 오히려 탈법 행위가 많아서 항상 전쟁 분위기였고 후자가 섬기는 교회는 항상 평화로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전쟁과 평화’로 대비될 만한 교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광고는 ‘전쟁과 평화’는 ‘군림과 섬김’의 차이라는 한 마디를 덧붙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음 아프게도 분쟁에 사로잡힌 교회들을 종종 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으레 ‘군림의 횡포’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 된 자의 본이 아쉽습니다. 주님은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크리스천은 섬김의 사람들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 18)

이제 6.25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죽기도 하였고 부상도 당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미군부대에서 나온 ‘꿀꿀이 죽’을 먹고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등으로 어린 나이를 지내야 했습니다. 남부여대하여 내려가던 피란길, 밀기울 개떡의 맛 그리고 술 찌꺼기로 허기를 채우고 취하여 쓰러졌던 세월들을 그 세대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북한 공산당을 증오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반공교육 때문이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고, 가난 속에서 고생하는 이유가 그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전쟁은 죄악입니다. 그것은 집단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한사람을 죽인 것은 살인죄로 처형되고 전쟁에서 집단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면 전쟁 영웅이 되는 것은 모순입니다.
전쟁은 참혹합니다. 전쟁은 잔인합니다. 전쟁은 비참합니다 전쟁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전쟁은 끔찍합니다. 전쟁은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선 안됩니다. 더더욱 우리나라에서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게 하소서.”

구약성경 창세기 4장에는 최초의 살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목축을 했습니다. 그들이 각기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데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안색이 변하였고 아벨을 미워하여 돌로 쳐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각기 삶과 신앙에 대한 해석이 달랐습니다. 오늘의 말로 하면 이념과 사상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대한 분노를 동생에게 쏟아 살인을 저질렀고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흔히 한국전쟁의 원인을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 말은 우리 민족을 더욱 욕되게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 민족은 아무 생각도 없는 핫바지이고 꼭둑각시였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민족도 세계와 함께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공산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유주의로 갈라져서 싸웠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그것만 옳다고 주장하면 우상이 되고, 교만이 되고, 독재가 되고, 전쟁이 됩니다. 예수님은 전쟁은 고사하고 미움이나 욕설까지 지옥에 떨어질 죄악이라고 하셨으며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사이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십자가 위에 당신의 몸을 깨뜨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날에 여호와의 산 시온에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 인류가 귀를 기울일 것인데 사람들이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남북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은 모두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에 있어 의견의 차이로 대립이 격화되고 있어 걱정입니다. 그 어떤 주장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 앞에서는 날개를 접어야 합니다. 모든 발톱의 살기를 뽑아 버리고 이 땅에 평화를 이루도록 기도하여야겠습니다.

* 기도 : 자비하신 주님, 갈등과 불안 속에 사는 우리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평화의 왕을 맞아 들이게 하옵소서. 이제는 인간의 고집과 사상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평화의 세계를 이루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게 하소서. 평화의 왕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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