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이사야 › 하나님과 모성

조혜자 | 2008.01.10 13:04:19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사49:15
설교자
조혜자 자매
참고
새길교회
 오늘 제가 감히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 두렵고,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딴 길로 다니던 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앙심 깊은 장로님 가정에서 태어나 매일 아침 가정예배를 보며 자라났지만, 스스로의 신앙을 키우지 못하고 성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채로 거의 사십년을 살았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생각했던 하나님의 모습은 가부장적인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어려워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세상의 재미있는 일들에 몰입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길 때 눈치를 보아야 하는 분이었습니다.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하려고 했지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좌절을 겪으면서 저는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처럼 저를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을 느끼면서 그분께 저를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당한 억울함을 일러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하나님의 모성적인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머니의 특성들을 살펴보면서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특성들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란 누구십니까?
1. 어머니란 우리를 낳아주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9개월 동안 뱃속에 한 몸으로 품고 계시다가 큰 산고를 거쳐 이 세상에 내어놓으신 분입니다. 여성이 어머니가 되는 데는 희망과 고통이 발생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는 기대감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에게 임신은 자기를 분열시키는 급진적인 시련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정서를 체험하고, 자신의 몸의 변화와 아울러 관계의 변화, 생활의 변화를 예견하면서 이전의 자아를 없애는 경험을 합니다. 출산이 다가 올수록 진통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과정을 통해 자신의 육체가 둘로 나뉘고 자아와 타자가 공존했다가 분리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몸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낳는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9개월을 한 몸을 이루던 자식을 분리된 개체라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여기에서 어머니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자연스럽게 경험합니다. 새로운 관계가 여성의 전 존재를 변화시켜 어머니로 만듭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에서,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명령의 전형적인 실천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는 자식을 결코 잊지 못하십니다.
저는 얼마 전 최만자자매님이 쓰신 어머니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최만자 자매님의 어머니께서 일찍 혼자되셨다는 것, 그리고 만주에서 피란 내려오시면서 네 자매 중 둘째와 셋째를 피란 길에 잃어버리시고, 사경이 되어 찾아 나서셨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때보다도 더 넋을 잃고 정신없이 딸들을 다시 찾아, 온 길을 되돌아 가셨고, 다행히도 그 딸들을 찾아 내셨고, 항상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마다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성경에서 나오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생각했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찾아 나선다면, 자기가 낳은 딸을 잃은 어머니가 어찌 울며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낳으신 어머니의 속성과 관련된 하나님의 속성을 성경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사야 46:3-4에서 "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 너희가 늙을 때까지 내가 너희를 안고 다니고 너희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고, 안고 다니겠고, 또 구원하여 주겠다"고 우리를 낳으신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한편 오늘의 본문(사 49:15)은 어머니가 자식을 잊지 못함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심을 보여주십니다."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17: 25-28에서 바울이 아테네 연설에서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고 호흡을 주신 분이며, 이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요한복음 1:12-13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로서 난다는 것은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요한 3:3) 우리 크리스천의 거듭남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함을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해 니고데모는 어떻게 모태에 두번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어떻게 다시 납니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여성신학자 가운데는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 죄많은 존재가 하나님의 자궁을 경험함으로서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우리가 거듭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자신의 동체이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산고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인간의 원죄 때문에 여인이 산고를 거친다면, 인간의 죄를 끊으시기 위해 예수님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여인이 어머니가 되듯이 예수님은 인간의 몸에서 시공을 초월하신 존재로 바뀌셨습니다.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는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형제자매가 되셨습니까? 저는 우리가 동일한 하나님을 통해 새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 배에서 난 자식들입니다.

2. 어머니란 돌보시는 분입니다.
아기는 전적으로 무력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우선 물리적인 돌봄이 필요합니다. 어머니는 젖을 주고 먹을 것을 제공하며 옷을 입히시고 아플 때 옆에서 함께 하시며 위험에서 보호하십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아기는 첫 세상을 경험합니다. 어머니가 배고플 때 젖을 주고, 젖은 옷을 갈아 입히는 것을 경험하면서 신뢰를 배웁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통해서 세상과 접촉합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들어올려서 더 먼데 것을 보게 해주시고, 말도 못하는 아기에게 무언가를 계속 얘기해 줍니다. 아기를 안거나 업고 시장이나 이웃에 가실 때 아기는 스스로 볼 수 있던 한정된 세상과는 다른, 어머니가 보는 세상을 똑같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만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리의 1차적인 감각들, 그리고 최초의 사회경험은 어머니의 손과 눈, 몸, 목소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더위나 추위, 불이나 높은 곳 등, 물리적인 여러 위험에서 아기를 보호합니다. 아기는 어머니를 안전기지로 세상을 탐구할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삼풍 사고 때 젊은 어머니들이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막기 위한 몸짓으로 숨져있었다는 기사들을 기억합니다. 이러한 돌봄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키워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기와 햇빛, 물을 제공하고, 삶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을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떨어져 괴리된 높은 보좌에 앉아만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먹이셨고,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먹이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우리 새길교회에게 예배할 공간을 이렇게 허락하시고 매주일 만나와 같은 떡을 나누게도 하시며, 말씀으로 먹여주십니다. 이런 체험들과 관련해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젖을 제공하고 물을 주며 옷을 지어 입히시는 분임을 지적하는 말씀을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베전2:2-3; 요7:37; 데전 2:7-8; 시34:9/131:1-3; 욥10:10-12; 누18; 갈3:27). 그러나 이런 돌봄은 우리의 생명과 관련된 기본적인 것이지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요할 때보다는 가난할 때 하나님의 돌보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우리가 보는 세계, 체험하는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입니다. 아기들처럼 우리가 볼 수 있는 인간세계는 한정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비밀한 곳들을 보여주십니다.
아기가 자기를 돌보아주는 부모를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을 안아 들고 헹가래쳐 줄 때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므로 깔깔 웃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 위기를 느끼지 않고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전기지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므로 어려운 일들을 당하면서도 의연하게 기다리며, 감사하면서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어머니는 신체적, 물리적인 돌봄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가 친구에게 얻어맞고, 또는 괴한에게 쫓겨 두려움에 떨며 들어 왔을 때 우리를 품어주시던 어머니, 아파서 열이 나고 사경을 헤맬 때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간호해 주시던 어머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위로해주시던 어머니, 그분이 있었기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힘을 얻었습니까? 그래서 집에 왔을 때 기다리고 있는 엄마가 없다는 것은 큰 좌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 때는 어머니는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들 때 어머니는 우리의 쉼터였습니다. 어머니의 위로는 입에 발린 위로가 아닙니다. 나의 입장에서 나와 공감하는 위로입니다. 어머니는 무조건적으로 나를 수용하고 함께 아파합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위로하시며 돌보십니다. 하나님을 만난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그들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인정받을 때보다는 좌절상태에서, 그리고 신체적으로 무력해졌을 때 더 가깝게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간절히 그를 찾기 때문이지요. 지난 퇴수회때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형제, 자매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위를 반 이상 잘라내는 수술을 하고 죽음을 대면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과 깊이 만나셨던 형제님의 이야기, 남편의 수감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소망 중에 행복했고 감사의 시간을 보내셨던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방수같이 찾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런 모성적 특성이 우리를 하나님께 묶어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와 같이 긍휼하신 하나님의 속성은 출애굽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의 모습은 긍휼하심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떨기나무 속, 사르지 않는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 부르짖음을 듣고 내려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떨기나무 같은 고난받는 히브리 민중을 소멸시키지 않으시고 붙드시며 민중의 아픔 한 가운데 존재하면서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자에게 긍휼을 베푼다"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훔인데 이는 자궁을 뜻한다고 합니다. 즉 고난 중에 부르짖는 자들을 긍휼로 구원하고, 붙드시는 모성적인 속성입니다.

우리는 정말 복잡한 정보화시대의 경쟁 속에 살면서 여러 가지 시련과 좌절, 그리고 알게 모르게 지은 죄의 짐으로 짓눌려 있습니다. 그런 저희에게 오늘도 위로를 주시는 성령의 힘을 믿고 우리는 이 자리에 있습니다. 현존하시는 긍휼입니다.

3. 돌봄의 특성: 반복성과 자기희생
그러면 돌봄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이제 돌봄의 특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교회 재정부의 두 가정에서 젊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아기가 예쁩니까? 아기를 잠깐 보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한달, 1년을 기르실 수 있겠습니까? 아기가 예쁘기만 합니까? 어떤 할아버지는 매일 1시간씩만 아기를 데리고 와서 보여 주고는 가라고 며느리에게 요구했다고 합니다. 손자가 자기자식보다 더 예쁘다는 말도 있습니다. 기르는 부담은 없이 즐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아기를 한 인간으로 기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안아 주고 얼리는 일들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아기가 하는 의미 없는 말들에 대꾸해주고 말을 가르칩니다. 아기가 저지르는 반복된 행동의 잘못을 수정해 주어야 합니다. 어머니의 지속적인 사랑을 배경으로 아기는 말을 배우고 행동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게 됩니다.
미국에 제니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싫어하여 제니를 2층 방에 가두어두고 먹을 것만 방으로 들여주었습니다. 열세살이 되어서야 이웃사람이 그 사실을 발견해내어 고발했고, 제니는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니는 말을 하지도 못했고, 정상적으로 행동하지도 못했습니다. 반복적인 보살핌 없이는 우리는 동물적인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절로 큰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반복적인 보살핌이 있었고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희생을 생각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자신을 던져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구와 문제에 자신을 맞추고 조율합니다. 여러분은 어머니에게도 이루고자 했던 꿈과 소망이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머니노릇이라는 것이 본능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희생의 결단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성공한 여자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면담연구에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다중역할 가운데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은 교수의 역할이나 아내의 역할보다는 어머니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남자교수들은 여자교수들의 그 태도를 비판합니다. 직업의식이 없다든가, 철저하지 못하다든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일도 중요하지만 생명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이 교수직에 등한해서가 아니라, 자식을 위해서는 자신의 일을, 그리고 자신마저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박옥진 자매가 아들 철우가 폐렴에 걸려 아팠을 때, 대전에서 강의하고 저녁에 서울로 왔다가 또 다음날 아침에 대전에 내려가고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희생은 강요된 희생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어 주고자 하는 자발적 희생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복되는 돌봄과 희생의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어머니를 장소처럼 "거기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인격화하지 않게 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어머니의 희생은 어머니의 가치를 절하하여, 어머니를 인격체(you)로 지각하기보다는, '어머니'라는 보편개념이나 대상, 사물(it)로 지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권력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무시되었고 어머니가 하는 일들은 하찮은 것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시간은 역사적 시간(크로노스)과는 무관합니다. 많은 여성들은 어머니노릇을 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무시되어 왔습니다. 다 자라 대학생이 된 아들딸들은 자기들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가 부담스럽다고 합니다. 그들의 불만은 왜 어머니 스스로의 인생을 갖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사회가 무시하고 있는 "어머니"를 입으로만 미화시키면서 여성들에게 돌봄의 역할을 강요합니다. 자발적이기보다는 억압적인 돌봄입니다. 그래서 여성학자들은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고 부르짖습니다. '어머니'란 사회가 만들어낸 신화란 것입니다. 강요된 모성에의 도전입니다. 한편 이러한 돌봄이 가족이기주의나 자기자식에 집착하는 이기적 모성성을 보일 때, 신데렐라의 계모처럼 다른 생명을 짓밟고 억누릅니다. 정의가 없는 모성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모성은 필요하며 아주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생리적인 욕구에 지배되던 동물적인 존재가,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돌봄을 통해서, 생각하는 도덕적인 존재인 인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어머니의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장소적 시간은 구원의 시간(카이로스)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신 본보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버리시느냐고 절규하시면서도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상에서 그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으로 세상을 사셨기 때문에 왜 인간적인 욕심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러나 반복해서 죄에 빠지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사물(it)처럼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많은 인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즉 하나님의 모성적인 측면에 힘입어 거듭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때가 이르렀다"고 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희생은 권력 지향적인 인간들에게는 비웃음과 거부의 대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알지 못한다고 부정하였고, 십자가 앞의 군중들은 야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가장 비천한 죽음을 죽으신 사건을 통해서 인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시간(카이로스)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인간이 되었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우리의 원래 모습은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특성들은 더 잘 개발되었지만, 세상이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특성은 억누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닮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형상의 복원이고 거듭남입니다. 우리는 그가 지니신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신 모습 뿐 아니라, 사랑과, 은혜, 자비와 긍휼의 모습을 닮아야겠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확장된 모성성의 강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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