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이사야 › 민족의 구원과 자속적 기독교

이정배 목사 | 2008.09.15 12:10:1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사53:4-6
설교자
이정배 목사
참고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 새길교회 2006.6.18주일설교
이사야 53:4~6, 로마서 10:1~4

월드컵 첫 승으로 모두가 흥겨워하고 있습니다. 독일 현지 뿐 아니라 한국, 미국 그리고 심지어 아프리카 토고에서 일하는 한인들까지 한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지요. 외신에서는 한국의 첫 승을 민족적 일치를 이룬 응원열기에 있다고 보도합니다. 이제 내일 새벽이면 프랑스와의 중요 일전이 벌어질 것입니다. 모두가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겠지요. 하지만 이런 민족적 열기가 현충일과 6.25의 비극적 맥락과 연계되어 생각되어질 때 6월을 사는 우리의 양심이 편해 질듯 싶습니다.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이만큼의 삶이 허락되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월드컵이 민족의 당면 문제를 잠시 뒷전으로 돌려놓을 수 있겠으나 잔치가 끝나고 나면 민족적 차원의 난제가 우리를 더욱 힘겹게 할 것입니다. 6.15 정신의 구현을 비롯하여 FTA 협상, 6자회담 재개 그리고 예상되는 경제 불황 등 한반도를 힘들게 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저마다 분석과 비판은 하되 민족을 위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려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처럼 민족의 질고를 지고, 민족을 위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이 있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사람만이 주변에 가득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민족을 하느님의 의에 복종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건만 결국 자기 문제에 급급해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이런 현실에서 오늘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이끌고 기독교인 됨을 새롭게 정의해주는 한 사상가의 책을 설교의 내용으로 삼고자 합니다.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 하느님께서 이 민족에게 준 고난의 “뜻”을 찾으라고 강변한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읽었고 내용도 기억하겠지만 새삼 이 책을 떠올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평가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철학을 가르치고 은퇴한 장일조 교수는 이 책을 대학시절 읽을 기회가 있었으나 은퇴 시점에 읽은 것을 너무도 잘했다고 고백합니다. 늙은 철학자의 영혼을 다시금 불붙게 했다는 것입니다. 칸트 전공인 전남대 김상봉 교수는 한국 근대사에 있어 함석헌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사상은 없었을 것이라 하면서 일평생 함석헌 연구에 매진하겠다는 결의를 표한 바 있습니다. 저 역시 함석헌을 비교적 늦게 만났으나 그 분 안에서 제 삶을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나가게 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를 통해 새롭게 발견된 예수가 내 삶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목사로 먹고 살고 교수로 일하고 의사, 관직에 있고 기업을 경영한다 한 들 그것 자체로 자신의 삶을 공적이라 말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성서 말씀처럼 자신과 민족의 운명을 동일시하며 민족에게 “뜻”, 곧 하느님의 “의”를 찾게 하는 사명이 생겨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함석헌의 사상을 통해 6월을 사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새롭게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어느 민족에게나 역사관은 있게 마련입니다.  함석헌의 경우 오늘 읽은 이사야 53장에 근거하여 조선 역사와 성서의 고난 사를 만나게 하였습니다. 조선 땅에서 5천 년간 고난을 당해온 백성들, 민중들인 한에서 조선의 역사는 성서적 입장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언제든 고난과 장차 올 영광을 관계시키고 있지요. 이점에서 함석헌은 조선의 고난사를 세계사의 지평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조선 역사를 세계사의 온갖 더러움을 나르는 하수구로 본 것입니다. 조선의 고난이 더러운 세계 역사를 정화시키는 구속사적 도구라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의 고난이 우연히 발생한 것도 외세에 의한 것도 우리의 못남으로 인한 것이 아니며 오로지 신적 섭리 때문이라는 함석헌의 독특한 사관을 만나게 됩니다. 이후 1962년에 들어 함석헌은 성서를 “뜻”의 지평으로 확장시켜 냅니다. 이는 다석 유영모의 영향 하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유일 계시 종교로서의 기독교 틀을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서가 말하는 “고난”을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하되 기독교가 강조해온 대속적 고난이 아니라 자속적인 의미로 구원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렇게 외칩니다.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러 달래 살고 싶으냐?” 계속하여 말합니다 “대속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었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대속이 되려면 예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니라 같은 체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체험 속에서 그의 죽음은 내 육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됩니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 성립됩니다.” 바로 예수의 피만이 아니라 자신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함석헌의 자속적 신학이 성서를 넘어 “뜻”을 강조한 이유라 하겠습니다. 여기서의 “뜻”은 만인의 종교이자 열려진 실재(Reality)로서 “씨알”(백성)들 속에 간직되어 있는 진리를 일컫습니다. 물론 이 “뜻”은 역사 속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신 속에서 “뜻”을 발견하여 진리 투쟁의 도상에 부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역사 속에 존재합니다. 함석헌은 바로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이요 “씨알” 민중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뜻”을 찾는 일이며 자신의 피를 흘릴 수 있는 자속적 신앙입니다.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쓴 것도 우리 민족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기 위함입니다. 본 책의 내용을 짧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함석헌은 기나긴 세월(400년)동안 이 땅 중심부에 설치된 한사군, 그리고 고구려의 패망과 더불어 민족의 자기 상실이 발생했다고 지적합니다. 당나라와 손잡은 신라에 의한 한반도 통일은 조선을 스스로 소국으로 전락시킨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본래 하늘로부터 품수된 차마하지 못하는 ‘착함’을 지닌 조선의 세계를 향한 사명은 사라지고 중국을 모화하는 풍습만 갖게 되었습니다. 본래 평화를 사랑한 착한 민족인 조선이 고구려 땅을 지녔더라면 아시아 및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함석헌은 아쉬워합니다. 고려 역시도 고구려를 잇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98년간 몽고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볼모의 설움을 되갚고자 했던 공민왕의 북벌정책은 하늘의 민족에게 준 기회였다고 봅니다. 하지만 함석헌은 하늘이 이성계와 최영을 동시대에 낸 것을 원망합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민족의 고통과 고난을 치유하려던 꿈이 조각났기 때문입니다. 이성계에 의한 최영의 죽음을 함석헌은 현실주의에 의한 이상주의의 죽음으로 규정합니다. 최영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이상, 곧 “뜻”이 죽어 버린 것이라 본 것입니다. 스스로 참 자아가 되고 바탈이 되려는 정신, “뜻”을 상실한 민족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뜻”을 잊은 민족에게 더 큰 고통과 고난을 주기로 작정합니다. 덕없이 세워진 조선, 그 역사는 처음부터 피비린내 나는 형제간의 싸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조선이 낳은 위대한 정신, 성삼문마저 죽일 정도로 조선의 정신은 타락해버렸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뜻”이 있음을 알려준 당대 최고의 정신을 통채로 죽인 것입니다. 사육신의 죽음에 조선 혼(뜻)을 위한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의미 깊은 해석입니다. “뜻”을 잃은 민족을 향한 하느님의 분노는 계속 가중됩니다. 조선조 최대의 외세 칩입, 임진, 병자 두 전란으로 조선 땅은 쑥대밭이 되어버렸습니다. 당파 싸움으로 정신과 양심이 마비된 결과였지요. 이는 자아상실, 노예근성으로 인한 민족정신의 타락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민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순신과 임경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공을 세웠으나 죽어야만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누리기 위해 온 자가 아니라 정신을 잃어버린 민족의 제단에 자신을 바치기 위해 온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인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 민족의 정신을 서서히 깨어나게 하였습니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이 땅에 민중의 종교로 유입된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정신과 불화했던 천주교는 한국 사회의 개혁을 담당키 어려웠습니다. 제사 문제로 많은 순교자를 낸 것에 비해 사회 혁명은 미비했던 것입니다. 이어 들어 온 개신교 역시 주체적이지 못했고 사상적 빈곤에 허덕이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고 지적합니다. 교육기관을 세우고 병원을 세웠으며 민중 지향적 의식을 심어 주었으나 민족을 위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전문 종교인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유 불교처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개혁할 힘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급기야 하느님은 우리 민족에게서 자신의 눈길을 거둬 가시기로 작정합니다. 일본의 식민지 국가로 조선을 내치신 것입니다. 조선의 이름을 빼앗긴 아픔은 이전의 어는 역사와도 비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해방이 도적같이 임하였습니다. 함석헌은 이 해방을 하늘이 민족에게 값없이 준 선물이라 했습니다. 하늘만 바라고 36년의 고통을 견디어 온 민중의 뜻을 하늘이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씨알 민중에게도 책임이 면피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씨알 민중 자체가 진정으로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다르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 “뜻”을 찾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랜 고난의 역사를 살면서 우리 민족은 양심이 타락했고 나라생각(우환의식)이 부족하며 사상의 빈곤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하여 함석헌은 이 땅의 기독교로 하여금 불교, 유교를 다시 일깨워 함께 씨알 민중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점에서 다음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해방된 것이 없는데 ‘너는 해방되었다’고 선언한 것은 해방을 믿으란 말이다. 이제부터 진정으로 자기 해방을 하란 말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해방의 의미이다.” 따라서 함석헌은 민족 분단을 이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시험으로 통찰합니다. 자신을 해방시켜 자유와 통일을 이룰 수 있는가를 하늘이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이것은 고난의 “뜻”을 아는 자만이 대답할 수 있을 뿐입니다.

    분명 세계가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시대에 우리 모두는 살고 있습니다. 월드컵이니, FTA니 하는 것이 세계화의 들어난 현상들이겠지요. 하지만 민족 분단이란 산통을 겪으면서 모두를 해방시키는 진정한 평화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 함석헌의 사자후입니다. 이것이 고난 자체를 살았던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세계사적 사명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새 생명을 낳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아직도 해산할 힘을 갖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이런 바램이 요원한 듯 보입니다. 60년대 이후 함석헌이 보여준 정치 투쟁은 오로지 이런 힘을 키우고 가르치고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도 세계평화를 위해 자신의 몸을 고난의 실험장으로 만들고 자신의 피를 흘리는 자속적 신앙으로 살라는 권면입니다. “뜻”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며 그 “뜻”을 위해 피를 흘릴 줄 아는 생각하는 백성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민족을 구원하는 기독교의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함석헌의 역사관이 너무 낭만적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문제를 “뜻”의 부재에서 찾고 그 “뜻”을 얻기 위한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한에서 그 역시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준 예언자임이 분명합니다. 수난의 여왕, 거지 처녀 그리고 세계의 하수구로 명명된 민족의 고난사 속에서 우주정신(세계평화)을 붙잡을 사명이 우리 민족에게 있음을 강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뜻”을 찾지 못하고 뜻을 보지 못한다면 민족의 역사는 그냥 망할 역사가 되며 수없는 민중들의 고통과 죽음이 무가치해 지고 말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함석헌은 우주의 근원인 신이 스스로 깨는 인간의 정신 속에 있음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한 망망한 허공에 있지 않고 땅에 와있다. 땅 중의 땅, 흙 중의 흙이 어디냐? 네 가슴이요, 내 가슴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 속에는 하느님 아들 될 만한 씨가 있습니다. 단지 하느님은 잠자는 씨를 불러내어 이 세계를 당신의 역사로 이끌어 가실 뿐입니다. 예수 역시도 하느님의 씨알로서 하느님의 세계를 위해 불려 진 존재이지요. 예수처럼 우리도 우리 속의 씨알을 깨워야 합니다. 다시 한번 민족의 역사를 돌아보며 잊혀졌던 이상(뜻)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6월을 보내며 상업주의로 치달은 월드컵 경기를 보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족의 수난사를 세계사의 지평에서 성찰하고 “뜻”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신앙적 각성이 필요할 때입니다. 뭇 생명의 희생을 토대로 세워진 이 나라에 살면서 여전히 현실에 우리의 이상을 묻은 채 “뜻”을 찾지 않고 경제적 논리로만 인생을 산다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아시아의 변방국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가 품었던 꿈과 비젼에 대한 한국적 응답이라 믿으며 새길교회 성도들의 삶의 자리를 이곳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속적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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