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이사야 › 나는 너희 예배가 싫다.

류상태 | 2008.10.15 23:43:2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사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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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길교회 2007.3.25주일설교
11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12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13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4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16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17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19 너희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다.
20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배반하면, 칼날이 너희를 삼킬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오늘 노은기 형제님께서 대표로 읽어주신 본문 말씀이 매우 익숙하다고 느끼는 교우님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 비슷한 말씀이 아모스 5장에도 나오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장 21-24절)

하나님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제사를 싫어하셨다면,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싫어하시는 것은 아닐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싫어하시는 경우가 있다면, 어떤 경우에 그러한지 오늘 교우님들과 함께 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비는 수직으로 내려 수평으로 흐른다
“비는 수직으로 내려서 수평으로 흐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수직으로 내린 비가 수평으로 흐르지 않는다면, 그 물은 고이게 되고, 고인 물은 썩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은혜의 단비’라고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에 촉촉이 젖어보고 싶지 않은 분이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단비를 우리 자신들과 교회 안에 가두려고 하면, 그 물은 고인 물이 되어 곧 썩게 될 것입니다. 수직으로 내린 비는 수평으로 흘러야 한다는 원칙은 ‘은혜의 단비’에도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기독교, 사회성의 종교
모든 종교는 영성과 초월성을 추구합니다. 보이는 세계를 전부로 여기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영적인 것의 가치를 찾습니다.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해서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는 초현실적인 체험과 깨달음을 얻고, 그로 인한 깊은 은혜를 누리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가 일반적으로 깊이 추구하지 않는 기독교만의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실성, 역사성, 그리고 사회성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 하늘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땅의 가치도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그 점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이 가진 독특한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 멈추지 않습니다. 수직으로 내린 비가 수평으로 흐르듯이,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받은 깊은 은혜와 깨달음이 먼저 우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삶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대변혁의 동인으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예언자의 가르침이 정점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된 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보이시고 가르쳐주신 복음의 원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인데,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시면서, 성서 전체의 뜻이 바로 ‘경천애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도, 용서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죄지은 이웃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형성은 필연적으로 이웃과 사회로의 수평적인 관계 형성으로도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쉽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은 “그래, 그러면 네 이웃도 그렇게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테니 말입니다.

이렇게 초월성과 현실성의 조화, 영성과 사회성의 조화, 하늘과 땅의 조화, 이 조화된 신앙과 삶이 바로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쳤던, 또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그러나 이런 신앙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의 본능이 갖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너희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교우님들께 부담을 많이 드리고 있네요. 그러나 너무 부담 갖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저 역시, 주님의 말씀과는 한참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님의 말씀은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 구원을 주겠다는 조건이 아닙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아빠 하느님의 존귀한 딸아들이라고 먼저 선포하시고, 그 다음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딸아들답게, 그렇게 살아야하지 않겠느냐고 권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존귀한 하나님의 딸아들이듯이, 다른 모든 이웃들도, 다른 모든 생명들도, 모두가 존귀한 하나님의 딸아들이므로, 온 우주, 온 만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온 우주에, 죄와 악이 사라지고, 모든 부정한 것들이 새로워지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귀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이 편만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세상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그런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새길공동체의 미래
올해 우리 새길공동체는 창립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20년에 걸쳐서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이 공동체에 모인 것일까요? 왜 이 곳을 찾아온 것일까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왜 여기에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뜻을,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 거룩한 부르심에 동참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인 것일까요? 이 물음은 우리가 지금까지 물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물어야 할 숙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숙제를 잘 해내기 위해서 제 얘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제가 우리 새길공동체에 합류한지 이제 1년 8개월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문화원에 소속된 신학연구원으로 우리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새길교회와 새길문화원, 이 두 단체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지금 우리 교우님들 중에도 교회와 문화원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교회와 문화원의 관계에 대해 제 나름대로 이해해 온 바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수직성과 수평성,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어떻게 하면 조화 있게 실현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문화원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의 복음을, 예수의 정신을, 대사회적으로 실현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안고 연구하며 실행하는 기관의 탄생, 그것이 바로 문화원이라고 나름대로 이해했습니다.

교회와 문화원은 ‘새길공동체’의 두 축
그래서 저는 교회와 문화원이 우리 새길공동체의 두 축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제가 지금 ‘새길 공동체’ 라고 말했는데요, 겨우 일주일에 한번 만나 같이 예배드리고 잠깐 대화 나누는 게 전부이면서 무슨 공동체냐 라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완전한 ‘공동체’라고 하면 삶의 모든 영역을 함께 나누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생활의 모든 영역을 공유할 수는 없어도 뜻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역시 느슨한 형태의 공동체, ‘뜻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새길을 얘기할 때, ‘새길공동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와 문화원을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삶과 뜻을 함께 품고 실현해가는 공동체 말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사무실을 ‘문화원 사무실’이라고 많이들 부르더군요. 앞으로는 ‘문화원 사무실’이라고 하지 말고 ‘공동체 사무실’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원 일만 하는 사무실이 아니라, 분명 우리 교회 일을 하는 사무실이기도 하기 때문이고, 문화원과 교회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역할의 다름은 있지만, 둘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문화원의 역할의 다름은 무엇일까요? 저는 교회는, 하나님과의 신나는 데이트를 즐기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신나게 하나님과 데이트하고 교우들과 즐겁게 교제하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문화원은, 예수 정신, 새길의 정신을 대사회적으로 구현하는 센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수직성을, 문화원은 이웃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수평성을 담당하는 것으로 역할 구분을 하고, 이 수직성과 수평성을 통합하는 우리의 몸 전체가 새길공동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의 새길공동체 말입니다.

수직성과 수평성의 조화
그런데 제가 우리 새길공동체 교우님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좀 의아하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애정은 깊고 큰데 문화원에 대한 애정은 별로 없는 것 같은 분도 계시고, 문화원 사업에 대한 관심은 많은데 교회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시는 분도 계시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새길교회가 새길문화원을 낳았는데,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거나 자식이 어머니에 대해 시큰둥해 한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두 기둥이 세워졌는데 양자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위에 건설되어야 할 건물을 튼튼하게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교우님들 중에 하나님과의 데이트, 즉 수직성에 더 관심이 많고 이웃과의 소통과 교제, 즉 수평성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요. 어쩌면 우리 교우님들 중에 우리 사회, 즉 수평성에 대한 관심은 많은데 하나님과의 데이트, 즉 영성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은 아닌지요. 저는 우리 교우님들이 교회가 주로 담당하는 수직성이나 문화원이 주로 담당하는 수평성 어느 한 쪽에만 만족하지 않고, 교회생활도 재미있게 잘 하고, 문화원 사업이 추구하는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 새길 교우님들은 이미 문화원 사업에 깊이 참여하고 계십니다. 우선 새길교우로 등록하면 자동적으로 새길문화원 회원으로도 등록이 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둘은 한 몸이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내는 헌금의 상당부분이 문화원을 통해 새길의 정신을 대사회적으로 구현하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분은 문화원 사업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여건이 되신다면 시간을 내서 직접 참여도 하시고, 시간을 내기 어렵다면, 문화원 사업이 무엇이며, 어떤 보람된 일을 하는지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는 일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문화원이 하는 사업이 무엇인지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 설명해드릴 필요가 있겠네요. 문화원 정관에 보면 문화원 사업 내용이 10가지로 정리되어 나옵니다. 차례로 소개해 보겠습니다.

1. 사회정의와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연구 및 실천 활동
2.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위한 환경운동
3.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 통일을 위한 제반 활동
4. 기독교 사상 및 종교문화에 대한 연구
5. 한국 전통종교 및 신종교들과의 대화와 협력
6. 기독 공동체 운동 및 교회 갱신과 일치운동에 대한 지원
7. 각종 시민운동 단체와 봉사 단체들에 대한 지원
8. 청소년 문화운동을 위한 연구 및 지원
9. 본원의 목적에 부합하는 홍보 및 출판 사업
10. 기타 본원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업

저는 10가지로 정리된 우리 문화원의 사업 현황들을 보면서, 오늘날 교회들이 해야 할 핵심적인 요소들을 너무나 잘 짚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주제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공동체에 참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공동체에 어른들도 많이 계시는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 것인지 조금은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혹 제가 오버한 점이 있다면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쳐야 되겠네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삶이 따르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말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 음식에 맛을 내려면 자신이 녹아져야 합니다. 전혀 손해 보지 않으려 하면서 음식에 맛을 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촛불이 방을 밝히기 위해서는 스스로 타들어가는 자기소멸을 각오해야 합니다. 권리만 누리고 해야 할 의무에는 소홀한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 공동체와 아무 상관이 없는 허공의 말씀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우리 새길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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