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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없는 기독교-동정녀와 빌라도 사이의 공백

마태복음 한완상............... 조회 수 2588 추천 수 0 2004.03.11 14: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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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25-32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새길 공동체가 이제 만 17세가 되었습니다. 그간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베풀어주신 넉넉한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릴수록 우리의 부족함을 아프게 깨닫게 됩니다. 전문 목회자 없이 각자가 목자의 역할을 담당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하기야 예수님도 평신도였으니 그것은 마땅한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우리가 모두 다른 이들에게 목회자적 배려를 했는지,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과 동고(同苦)의 삶을 했는지를 계속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건물 없이도 주일마다 아름다운 코이노니아를 계속해 올 수 있었음에 감사하면서도 과연 우리가 일상의 삶 가운데서 모임과 사귐에 힘써 왔는지를 자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교하고 치밀한 교리에 매임 없이 깊고 뜨거운 신앙을 추구해온 것을 감사하며, 특정 교파와 교리에 구속당하지 않으면서 열린 신학적 탐구를 계속해 온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신학지평이 넓어질수록 우리의 신앙은 깊고 뜨거워졌는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17년 동안 대안적 신앙공동체를 지향해 왔음을 감사하지만, 그 대안적 성격이 과연 공동체 삶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들어 구현되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즉, 교회 리더십 행사에서, 예배순서에서, 말씀증거에서, 사귐에서, 그 대안적인 모습이 구현되고 있는지를 차분히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꼴찌(the last)와 지극히 작은자들(the least)이 정말 주인 노릇하여 새길다운 진짜 대안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17세가 되는 이 시점에서 경건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이 같은 감사와 자기성찰을 해내면서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메타노이아를 해내야 합니다. 21세기를 맞아 지난 2천년 가까운 장구한 세월동안 실물 예수 없이도 기독교가 존속해 온 사실에 대해, 그리고 역사적 예수(곧 실물 예수)없이 이미 두 세기를 보내고 있는 한국기독교(신·구교 모두)의 현주소에 대해 투철한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동정녀 마리아에서 빌라도로 직행하는 기독교 신앙고백의 문제를 오늘 성찰해 보겠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교회신앙고백이면서 지난 천년이상 교회의 교리문답의 골간으로 존중되어 온 사도신조를 보면, 거기에는 실물 예수의 모습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기원 5세기 이후 오늘까지 이 신앙고백이 거의 모든 기독교 종파들에 의해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암송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정말 놀랍습니다. 역사의 예수가 없는데도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도무지 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의 불감증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 아니겠습니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모두 역사적 사실(fact)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근본주의자들이 그렇게 말함), 또는 그것이 예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적 고백의 표현이라 하더라도(실존주의자들이 그렇게 주장함), 그 신앙고백의 내용은 실물 예수의 말씀과 행적과 삶의 주요 부분을 기초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실물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도신경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계 거의 모든 기독교 교회가 사도신조를 정통적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예수의 현실성(reality)이 실종된 사도신조의 내용을 확인하는 저의 마음은 그간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불편을 오늘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저를 불편하게 하고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의 실종을 조금도 허전해 하거나 불편해 하거나 놀라워하지 않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그 상투적 평안함, 그 관례적 인식, 그 기독교적 인식이라 하겠습니다.

  실물 예수는 선포자요, 증거자요, 실천가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이룩하시기 위해 구체적인 사역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선포자 예수가 선포된 그리스도로 변하게 되면서 역사의 예수는 지난 이천년 동안 박제화되고 만 것 같습니다. 찬란한 교리의 옷을 입고 있는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의 감동적인 선포와 역동적인 실천과는 무관한 신앙숭배의 대상으로 전락 한 듯 합니다. 예수가 선포자요 실천자라면 그리스도는 더더욱 선포자가 되어야 하고 더 뜨거운 실천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는 실물 예수 이상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역사의 예수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세계적인 천주교 신학자요 성서역사 학자인 크로싼(Crossan)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Christ is more than Jesus, but not less than Jesus."

  이 말은 참으로 실물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간의 관계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보다 더 위대한 존재일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역사의 예수 모습을 훼손하거나 축소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축소되고, 그리스도는 확장되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이어주는 중개인(broker)의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예수는 당시 유대 종교적인 브로커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아빠(Abba)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음을 선포하시고, 무상의 치유행위와 평등한 밥상공동체를 펼쳐 보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직통으로 체험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종교적 전문 중개인, 교리적 전업 복덕방, 신학적 전문 브로커를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뜻에서 실물 예수는 하나님을 항상 직접 체험했던 참으로 영성이 충만한 평신도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제도교회 틀 속에서 교리적 숭배의 대상인 그리스도로 변질되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개하는 독점적 브로커로 전락하게 된 셈이지요. 이렇게 하여 교리의 그리스도는 역사의 예수를 위축 또는 사상시키고 말았습니다.

  사도신조에는 예수의 부재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 고백문에는 적어도 복음서가 증거하고 있는 중요한 실제 사건들이 빠져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들의 역사성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겠으나 다음 몇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간에 얼마간의 공감이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시고 짧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가 서른 살쯤 되었을 때 광야에 나아가 깊은 명상을 하셨고, 그 명상 중에 시험을 겪으셨으나 이것을 이기고 성령 충만하여 갈릴리로 귀환 하셨습니다. 귀환하신 후 세례요한의 문하생이 되셨지요. 요한이 처형되자 예수께서는 독자적 활동, 곧 예수 운동을 펼치셨습니다. 그의 독자성은 아마도 복수의 신이 역사에 개입하여 심판한다는 세례요한 식의 선교를 뛰어 넘어 사랑의 대안공동체 곧 하나님나라의 건설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역사의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당신의 선교비전을 선포하셨고, 그 선포를 곧 실천하셨습니다. 그는 방랑자 카리스마로 어디서나 중병에 시달리는 병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당시 병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질서가 규정한 죄의 발현으로 인식되었기에, 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에 더하여 정신적 사회적 고통까지 환자들은 겪어야 했습니다. 이 같은 질병인식체계 곧 사회체제 자체를 예수님은 거부하시고 병자를 생물학적 균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질병을 사회적으로 규정했던 체제 자체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환자에게 새로운 자긍심과 정체성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낫게 하였소"라고 선포하심으로 새로운 자긍심과 자신감을 환자에게 불어넣어 주시어 새로운 존재로 자랑스럽게 우뚝 서게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실물 예수는 불온한 반체제 인사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마귀를 쫓아내신 것도 피해자를 그의 원래 인격으로 회복시켜 주신 치유행위였습니다. 귀신 들린 자는 자기의 인격적 주체성을 상실한 존재입니다. 거라사 지역의 귀신 들린 자는 로마군단의 떼마귀에 의해 자기 인격이 폭력으로 정복당했던 것이지요. 주인 아닌 존재가 자기를 주관한 것이지요. 예수의 마귀 쫓음은 인간의 인격을 그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인간해방 실천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이 실물 예수의 구체적 행적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밥상공동체를 펼치셨습니다. 밥상공동체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평등공동체였습니다. 계급의 장벽, 성의 장벽, 종교의 장벽, 지역의 장벽이 무너지는 새로운 대안공동체의 구체적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동적 선교활동을 통해, 사회·경제·정치적으로 억울하게 차별 받고 억압받았던 사람들과 격의 없이 사귀시고 담소하셨으며, 꼴찌와 짜부러진 인생들에게 희망과 희열을 선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 주인이 되는 그러한 평등공동체입니다.

  이 같은 실물 예수의 감동적인 모습은 사도신조의 그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의 존재는 태어나자 곧 빌라도에 의해 고난받고 처형받는 존재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살아 있는 실존인물 예수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의 죽음과 그 후의 모습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갈릴리 지역에서 감동적으로 활동하신 예수의 그 역동적 살아있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대신, 장사한 것, 사흘 지난 것,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 하늘에 오르신 것,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 거기서 산 자 뿐 아니라 죽은 자들까지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것, 등은 비교적 장황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역사의 예수는 없고, 교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표현은 상대적으로 긴 편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빌라도 사이의 그 엄청나게 허전한 빈 공간을 이렇게 채운다면 어떻겠습니까?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흑암의 세계에서 빛을 던지시사 병마를 쫓아내시고, 부당한 차별의 장벽을 허무시며, 꼴찌와 지극히 작은 자들도 주인이 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시다가 유대와 로마권력에게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 처형되셨으나 사흘만에 부활하시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세기를 맞았습니다. 새로운 세기에서는 염려스럽게도 '스스로 돈독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세계를 지배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평화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전쟁의 소리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염려의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고 있는 듯 합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점에서 우리 예수 따르미들은 실물 예수를 우리의 삶의 중심에 다시 정중히 모셔야 합니다. 평화와 사랑과 정의의 주님을 우리의 삶 한가운데, 우리의 신학의 중심에, 우리의 신앙고백의 핵심에 정중히 모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실물 예수를 모심에 있어 몇 가지 그 절박하고 올곧은 깨달음을 촉구하고 싶습니다.

  첫째 실물 예수는 영적인 존재로서 역사적인 사건들의 중심부에 서있었음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광야의 시험도 영의 힘에 이끌리어 체험하셨고, 그 시험을 영의 힘으로 이기시고 성령 충만하여 귀향하셨습니다.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았을 때도 성령의 힘이 작동했습니다. 그가 독자적 선교활동하기 위해 고향회당에서 메시지를 선포할 때도 성령의 역사를 강조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도,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비전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온갖 중병환자가 치유되고, 지체 장애자들이 온전케 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달된다는 사실을 세례요한에게 알려주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놀라운 사건은 영의 능력으로 예수가 일으킨 사건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역사의 예수는 그 영의 눈으로 자연을 보셨습니다. 주변의 밑바닥 인생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 염려할 때, 저 공중에 나는 새를 가리키시며 그들을 위로하셨고,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백합화를 지목하시고 격려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새와 꽃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씀하셨지요. 바로 그 역사의 예수는 사랑에 찬 영의 눈으로 인간과 자연과 사물을 관찰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실물 예수는 영적 존재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들과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않고 그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예수의 현존 체험, 그 영적 체험과 연결되는 것이지요. 부활의 그리스도 체험은 신비한 체험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물 예수의 비전과 프로그램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21세기에서 마땅히 해내야 할 과제, 이를테면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을 위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영성은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실존적 힘의 원천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오늘 우리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들을 올곧게 해결하기 위해 예수와 영적으로 끊임없이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합니다. 전쟁문제, 부패문제, 질병의 문제, 사회적 차별문제, 죽음의 문제 등을 풀기 위해 고뇌하는 오늘의 예수 따르미들은 항상 이렇게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이 문제를 보고, 해석하고, 접근하고, 해결해 나가실까?

  이러한 질문은 역사적 예수의 행적, 그분의 말씀과 삶을 구체적으로 알아야만 적절하게 올바르게 대답될 수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서 빌라도로 바로 뛰어 넘어가게 되면, 도무지 이러한 질문이 나올 수도 없고, 나온다 해도 적절한 해답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경구나 비유의 말씀이 그 분의 하나님나라 건설 프로그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우선 알아야 오늘 여기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은혜롭게 푸는데 필요한 실마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 따르미들이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해를 더 높여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5년 전 우리 새길 공동체도 역사의 예수를 함께 공부한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입장을 알아야만, 그분의 입장에서 오늘 우리의 문제를 조명해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지난 미국 대선 때 Gore나 Bush 모두가 예수님과 역지사지한다고 강조했습니다만, Bush가 당선된 뒤 그가 선제공격 정책을 21세기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데 재빠르게 활용했던 것 보면, 예수와의 역지사지도 엄청나게 오용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따지고 보면 신 보수주의자들은 예수의 참 모습을 모르기에 그러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영은 오히려 당신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어가거나 고통 당하는 그 많은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괴로워하시겠습니까?

  바로 그러하기에 실물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우리는 올곧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경직된 교리를 적용하여 이단을 만들어내어 핍박하는 일이나, 마녀를 만들어내어 화형 시키는 일을 결코 하시지 않았고 또 않을 것입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집단이나 문화를 악의 축으로 단죄하고 선제공격으로 박멸하려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고 또 않을 것입니다. 타민족이나 타종교를 차별하거나 궤멸하지 않았고 또 않을 것입니다. 지난 천오백 년간 제도기독교가 예수를 교리로 박제화 시키면서 저질렀던 온갖 부끄러운 짓들도 따지고 보면 예수 없는 신조에 매달렸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물 예수는 암탉 같은 하나님의 날개아래 모든 인간을 모으려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같은 자녀로 보호받고, 사랑 받는 존재임을 깨우쳐 주시면서 당신 자신이 그들을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품어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비워 남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주는 행위입니다. 바로 그 행위 속에 하나님은 살아 움직이십니다. 바로 그 실천 속에 우리는  갈릴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곱배기로 체험하는 것이지요.

  이 같은 영적 체험이야말로 오늘 우리 상황에서 아직도 미완(未完)으로 남아있는 하나님나라 사업을 추진하고 완성해나가는 데 있어 긴요한 힘의 원천이 됩니다. 그 체험에서 얻는 힘이 바로 그 작업을 추진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지요.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억울한 꼴찌들이 많고, 지극히 작은 자로 축소된 인간들이 허다합니다. 병들어도 경제적 능력이 없어 죽어 가는 인간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습니다. 위선과 부조리, 강압과 착취의 지배구조로 인해 억울하게 차별 당하고, 수탈 당하고 억압당하는 오늘의 '죄인'들이 허다합니다. 그만큼 예수 운동 곧 하나님 나라의 선교는 필요합니다. 이 같은 예수 운동은 아직도 미완의 과업으로 남아있습니다. 예수 따르미 공동체가 존재하고 활성화되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따르미의 삶은 실물 예수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목표로 그 예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난의 골고다 언덕을 지나가야 하는 괴롭고 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활의 그리스도 능력을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더욱 체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실망과 좌절에 사로잡혀 황혼을 바라보며 힘없이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다가오시어 떡을 떼시면서 힘과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듯이, 우리가 어려운 조건에서도 불우한 이웃과 함께 우리의 소중한 것을 떼어 서로 나누는 순간순간, 실물 예수는 영적으로 저희들과 함께 하십니다.

  실물 예수를 박제화해버린 제도기독교는 지난 천년동안 온갖 부끄러운 反예수적 행적을 저질러 왔음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특히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내세우면서 저질러지는 종교적, 신학적, 교리적 악행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교회갱신, 교회혁신이 절박하게 필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변혁은 영적 실물 예수의 복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난 날 역사의 예수를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뜨겁게 영적으로 만나는 공동체적 삶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새길 공동체는 그 역사의 예수가 부활의 그리스도로 이어 지면서 더욱 힘있게, 더욱 감동적으로 오늘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해방하여 새롭고 온전한 존재로 세워주실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뿐만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함으로써 오늘 상황에서 우리 새길의 예수 따르미들은 창조의 보전과 완성을 위해,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실현을 위해 더욱 헌신하기로 결단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사랑으로 서로 비우면서 서로 좋은 것으로 채워주는 뜨거운 체험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을 결단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길 공동체의 신앙고백이요, 이 고백이야말로 실물 예수를 중심에 모시고 부활의 그리스도의 영과 능력을 뜨겁게 체험하려는 예수 따르미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뜻을 가슴 깊이 품고 우리는 17년 전 1987년 3월 8일 새길 공동체를 세우면서 다음과 같은 창립의 뜻을 결연하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어두운 역사 한 가운데서 빛이 되시며 혼돈 속에서 헤매는 백성들에게 진리의 새 길을 제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고통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뜨겁게 기억하면서 마침내 이 땅위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뤄지는 그날을 향하여 오늘도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예수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기로 결단합니다. 바로 이 결단으로 여기 진리의 길이신 주님의 교회, 새길교회를 세우고자 합니다.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새길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려면, 우리는 매주, 매일, 매순간 개인으로 그리고 공동체로 실물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함께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의 삶을 모르고서 어떻게 그와 역지사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와 얼마나 깊게 역지사지해 왔는지 그리고 새길교회의 고백과 취지대로 과연 살아 왔는지를 깊이 자성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없는 기독교에서 그리고 실물 예수와 그리스도가 분열되어 있는 한국교회에서 예수 중심의 새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변할 수 없는, 결코 변해서도 안될 새길의 고백이요 다짐이요 선교과제라 하겠습니다.

주님, 당신의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모습을 기억합니다.
삭막하고 살벌했던 팔레스타인의 들과 산, 길과 언덕, 해변가에서
너무나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당신의 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병마를 쫓아주시고,
꼴찌에게 희망을,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해방의 기쁨을
무상으로 선사해주셨습니다.
그런 당신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당신의 영을 뜨겁게 체험하며 살게 하소서.
주님, 우리 주변에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과 싸움에 있어서
저희들은 연약하여 넘어지고 패배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부활의 그리스도 영으로 저희를 붙들어 주시어
당신의 사랑이 지배하는 당신의 나라를 세우게 하소서.
여기 자그마한 새길 공동체가 17세가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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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 데살로전 항상 기뻐하라 살전5:16-18  한태완 목사  2007-11-07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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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 골로새서 참사랑 골3:12-14  강종수 목사  2009-01-04 1537
672 골로새서 효도와 헌신의 축복 골3:20  이한규 목사  2008-12-23 1854
671 골로새서 성공적인 자녀교육 골3:21  이한규 목사  2008-12-23 1869
670 골로새서 삶의 노래-꿈꾸고 있는 사람 골3:16-17  한완상 형제  2008-05-16 1847
669 골로새서 인계철선 골1:13-23  조용기 목사  2008-05-13 2368
668 골로새서 하늘 문. 골1:15-20  민영진 목사  2008-04-18 2700
667 골로새서 화목하게 하소서 골1:20  한태완 목사  2008-01-18 2191
666 골로새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자 골3:12-15  한태완 목사  2008-01-16 4051
665 골로새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골2:6-7  한태완 목사  2007-11-15 2881
664 골로새서 감사하는 생활 [1] 골2:6-7  한태완 목사  2007-11-13 2864
663 골로새서 어머니의 봉사 골3:23  한태완 목사  2007-11-10 1897
662 골로새서 역지사지(易地思之) 골3:12-14  한태완 목사  2007-11-07 3493
661 골로새서 하나님이 주신 영성회복 골3:1-10  강종수 목사  2007-02-25 2272
660 빌립보서 그리스도인의 힘 빌4:13  한태완 목사  2009-03-03 1936
659 빌립보서 비전을 끝까지 고수하십시오 빌3:10-16  이한규 목사  2008-12-26 1913
658 빌립보서 거룩한 염려를 가지라 빌4:6-7  박찬희 목사  2008-11-25 2119
657 빌립보서 신앙의 경주 빌3:10-14  장윤재 목사  2008-10-26 2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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