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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에서 성경 읽기

사도행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93 추천 수 0 2022.03.12 12: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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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6:8-10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20.2.4 주일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2020-02-04

성경 속에서 성경 읽기

행16:8-10

 

행16:11~40절에는 흥미로운 일화 하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악령’들린 한 소녀를 치유한 이야기죠. 그런데 그 소녀는 점쟁이였습니다. 남의 운명을 감지하는 존재죠. 그는 무언가 남들이 갖지 못한 언어를 가지고 있고, 남들이 모르는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비록 이 일화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도 않고, 심지어 단지 바울 영웅담을 위한 대상화된 몰 주체적 존재로만 취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속에는 당시의 사회와 사도행전 저자가 꿈꾸는 소통 상황에 대한 하나의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폭력이, 착취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점쟁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은폐된 소통 상황,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한 뒤에 바나바와 불화하여 갈라진 후, 소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니며 선교하던 중 꿈에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본 것을 계기로 그곳을 새로운 선교 개척지로 삼기로 합니다. 하여 본문이 묘사하는 대로, 소아시아의 트로아스를 출발하여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네아폴리스에 당도한 후 빌립보(Philippi)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그리스 이북 지역인 마케도니아의 항구도시로, 주전 356년,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 2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함으로써 도시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래, 소아시아와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군사적 상업적) 중요한 곳으로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주전 168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여 이곳을 네 지역으로 분할 하여 원로원의 속주로 삼았는데, 빌립보는 동부 마케도니아의 속주 수도였습니다. 후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 옥타비아누스, BCE. 63~AD 14)가 악티움 해전 이후 투항한 안토니우스의 추종자들을 이 도시에 이주시켜 정착하게 함으로써, 많은 유력한 로마인들이 거주하게 되어 도시의 정치적 위상이 더욱 격상하였던 곳입니다. 즉 이 도시는 고대 지중해 문명의 핵심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로마적 도시의 전형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거죠.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모임을 찾았는데, 성 밖 외 딴 곳에 유대인의 기도처(프로슠헤)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여러 신실한 여인들을 만났는데, 그중 루디아는 초기 바울 선교에서 매우 유력한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죠. 그녀는 비유대인 출신의 부유한 상인(고급의류)이었는데,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 곧 유대교 개종자의 한 사람(행16:14)으로 공동체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 이가 바울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자기 집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15절).

 

어느 날 기도처로 가는 길에, ‘점치는 귀신’ 붙은 소녀를 만납니다. 그리스어로 ‘퓌톤’ 은 ‘점쟁이 영’을 뜻하고, ‘퓌토네스’ 는 ‘복화술사’를 뜻합니다. 아마도 점치는 귀신 붙은 소녀는 복화술사처럼 거의 입을 움직이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감추어진 것들을 이야기하는 부류의 점쟁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고대인들에게 그녀가 말하는 것이 아닌 그녀 속의 영이 말하는 것으로 비추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주인들’에 의해 고용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이 복수로 나온 것은, 해석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죠. 아마도 점쟁이의 상행위에 이러저러하게 얽힌 복잡한 이권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고대 세계에서 ‘점’은 원래 신탁의 개인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때문에 점술사는 치부를 목적으로 점술을 사용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공익의 차원에서 존재하던 게 고대의 점술가입니다. 한데 도시화의 진척, 그리고 도시화와 (그 부수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전쟁 등으로 인한 급속한 인구 이동은 많은 사람의 비교적 안정된 기초생활을 불안하게 하고, 가치의 붕괴를 초래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불안하고 개인의 삶이 안정되지 못해서 자연스레 사람들은 신비주의적 종교나 점술사 등을 통해서 위안을 구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걸 이용하여 산업화하는 메커니즘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소녀 점술사는 바로 그 메카니즘에 속한 고용인 점술사였던 것이죠.

 

본문에 의하면 점술사 소녀는 바울 일행을 보자 그들의 신원(identity)과 지향 목적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떠벌렸다고 합니다. 여러 날을 그렇게 하자 바울은 귀찮아서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악령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점술을 둘러싼 당시 점술회사(조합)의 이권 행위를 방해한 것이고, 도시의 상업 질서를 교란시킨 셈이 됩니다. 결국, 이로 인해 바울과 실라(실루아노)가 로마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던 겁니다.

 

이 이야기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이 그를 구원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예시하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대목만 주목합니다. 또 부수적으로 다른 신이 아닌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점술의 주역임을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여기서 악령들인 소녀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못됩니다. 도리어 ‘악령’이라는 가치판단을 따라, 소녀도 은연중 비하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소녀에게서 악령을 추방한 것으로 텍스트는 충분한 선행을 베푼 듯이 묘사하니까요. 그러나 추정컨대, 이 이야기가 사실적 묘사라면 그녀는 생계 수단을 상실한 셈이 됩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들먹이며 소녀의 목숨줄을 끊어 놓았던 것입니다.

 

자, 여기서부터 우리가 읽고자 하는 성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 저자의 편견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동시에 대중의 불안감을 깊이 유념하지 않은 채 사회의 구축과 변화를 기도한 주류 사회의 시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즉, 점술을 한갓 사술로 보는 편견입니다. 점술가들은, 마치 태풍이 몰아친다거나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자연의 변화를 미리 알아차리는 동물의 감지 능력과 같은 예지력을 갖춘 존재들이죠. 동물들에게서 그런 것처럼 그것은 예민한 감각의 대가이며, 그런 감각은 소통 불가의 타자적 대상과의 소통을 통해 가능하게 합니다. 즉 점술은 인간의 언어 행위 속에 감추어진 감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의 소통수단입니다. 점술은 일상의 상위에 존재해서 일상적인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의미, 하나의 소통의 결과입니다. ‘누가 더 세냐’ 혹은 ‘뭐가 틀리고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시선은 ‘소통’으로 보지 않고 ‘뭐가 더 세냐’의 문제로 본다는 말이죠. ‘점술보다는 하나님의 능력’ 혹은 ‘소녀보다는 바울’이 더 세다는 시선으로 이 상황을 끌고 가고 있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저자는 바울이 이 소녀가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도로서 구원의 길을 선포하는 자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에 화났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숨기고 조심스레 해야 할 것을 폭로한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요? 그러나, 실재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기술한 사도행전에는 복음 전파를 굳이 숨기고 다녀야 한다는 ‘은폐의 동기’가 별로 부각 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동기였다면 점술 소녀의 증언은 오히려 득이 되었어야 하고, 환영해야 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에서 바울의 격분은 그 동기가 정당하지 않다고 볼 수 있죠. 텍스트는 사도의 격분이라는 권위에 찬 이미지를 구마 과정에 개입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사도는 이미 권위 있는 존재이고, 그런 점에서 대상들에게 자혜로운 이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다는 거죠.

 

여기서 바울은 소녀의 점술을 무가치한 것으로 봅니다. 로마제국 시대 도시 대중사회의 역경과 그 속에서 잉태한 신앙 유형은 한마디로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도행전 전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텍스트의 주된 관심은 신의 말이 인간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대중을 향한 신의 말의 ‘내용’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상한 말이라고 해도, 때로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 때문에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것이 있습니다. 소위 전도를 중심으로 피력된 사도행전의 점술소녀를 대하는 바울의 모습은, 아니 바울을 그렇게 그려내는 사도행전 시대의 종교는 그리스도교의 제국주의적 선교 행태를 보여주는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텍스트에는 루디아와 악령 들린 소녀가 대비되어 나옴으로써 자연스레 그들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류디아는 부유하고 점잖은 부류로 사도를 부양하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반면 신들린 소녀는 그 반대입니다. 훼방꾼으로 등장하는 거죠. 이런 대비되는 사건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루디아에 대비되는 점쟁이 소녀 같은 부류는 언제나 악령이 들린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오늘 우리가 지적하고자 하는 사도행전의 본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막힌 사회를 돌파하는 대중과 소통하며 사셨습니다. 귀신들려 공동묘지로 쫓겨난 남자와도 소통했습니다. 12년 동안이나 부인병 때문에 소외된 여인과도 소통합니다. ‘귀신’들렸다고 배제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어떤 언어적인 폭력도 가하지 않았고, 그의 삶을 더 절박하게 단절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는 세상이 소외시키고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구조를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희망이셨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과 그 일행처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점차 종교가 틀을 잡고 제도화되어 가면서 이런 예수의 본질적인 언어들과 삶은 변형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가 가진 그 혁명성이 조직화 된 기독교에 의해 시대와 타협하는 변수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의 혁명성이 변형과 타협의 변수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텍스트(성서)가 사도행전의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점치는 귀신 들린 소녀에 관한 본문은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뚜렷한 체제 내화(제도화, 권력화, 기능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변수는 그리스도교의 생명력을 긴 시간 존속할 수 있게끔은 하였지만, 동시에 많은 시대적 한계를 갖는 집단으로서의 그리스도교를 재탄생시켰습니다. 소통과 대화를 통한 인간 해방과 평등을 왜곡 제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인간(세상)과 대화하는 또 하나의 주된 통로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대화의 가능성을 잃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단지 루디아 같은 여자라면(대화의 세계가 패권주의적인 문명화의 주체,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로서의 인간이라면) 교회는 인간에 의해 비인간화된, 비 주체화된 대상 세계를 착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며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의 구조를 만들고 제도화된 교회는 이걸 변형시켜서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본문처럼 왜곡을 시켰지만, 우리는 성서 안에서 다시 성서를 읽어내서 소통과 화해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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