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자비로(사랑) 하나님처럼 완전하라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08 추천 수 0 2018.09.19 18:26:03
.........
성경본문 : 마5:38-4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8-01-23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자비로(사랑) 하나님처럼 완전하라 

마5:38-42

 

행복은 구하고 찾고 바라는 게 아니라 ‘현재를 선언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소위 ‘산상수훈’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요. 이런 예수님의 말씀들은 당시대를 지배하던 사회적인 가치나 윤리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인간 선언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4차 산업 혁명기에 인간이 갖춰야 하는 조건’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예수님은 시대를 넘어서는 인간의 방향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6가지의 대립명제입니다. 그러니까 6가지 유대교적 통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방향성을 예수님이 제시하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인간과 인간 삶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항상 제시해야 하는 것이고, 이런 변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투신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6가지 새로운 해석과 제시를 보겠습니다.

 

1.살인하지 말라-누구에게도 성내지 말라

2.간음하지 말라-마음속에 음심을 품는 것도 간음이다

3.이혼하지 말라-아내를 버리지 말라

4.거짓 맹세하지 말라-아예 맹세하지 말라

5.악을 악으로 갚아라-맞서지 말라

6.네 이웃을 사랑하라-원수를 사랑하라

 

처음에 예수는 구약성서를 인용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것에 대립하는 명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구약성서와 예수님의 말씀이 대립하는 것은 아니죠. 1,2,4는 누가복음에 나오지 않고, 3(눅16:18),5(눅6:29),6(눅6:27-28)은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는 1,2,4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누가는 마태복음과 같이 대립한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나 누가는 이 문서들을 쓸 때 예수의 어록이라는 문서를 참고합니다. 마태는 여기서 수집한 자료와 자기가 어디서 가져온 자료 1,2,4를 첨가하여 대립하는 문서로 만들어 좀 더 근사하게 편집을 하고, 산상수훈의 복판에 배치를 했습니다.

 

누차 말씀을 드리지만 마태와 누가의 말씀들 중에서 원본에 가까운 것은 누가복음의 문서들입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태는 마태 공동체의 필요성에 의해서 확장, 편집, 배열, 언어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3,5,6의 인간 삶의 방향성을 기본에 두고 마태복음의 6개 명제들을 구약성서의 율법과 관계 지으며 읽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6가지로 구분된 예수의 말씀 들을 읽노라면 이 제시가 율법을 철저히 지키라는 것인지 아니면 대립하라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마태는 이 궁금증을 덜어 주기 위해서 서문을 써 놓았습니다. 마태 5:17-20입니다. 한 번 읽어 볼 까요?

 

어때요? 구약의 율법을 더욱 철저히 지키라는 의미라는 거죠? 왜 이런 이해를 마태가 하고 있는가 하면, 마태복음을 쓰던 서기80년은 초기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와 경쟁을 하던 시대입니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반유대주의가 아니라 ‘기존 유대교의 율법보다 우월하고 완성된’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처음기독교인들 중에는 율법을 모두 부정하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마태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더욱 철저하게(완성되게) 율법의 가르침을 읽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이런 계명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계약에 근거해서 이뤘던 마을 공동체에 필요한 윤리였습니다. 그것을 지금 마태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여섯 가지 제시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5,6을 다루겠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누가 네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을 마저 대주라’는 말씀이죠. 교회를 다니나 안 다니나 알만한 구절입니다. 핸리 데이빗 소로우, 마틴 루터 킹, 마하트마 간디도 이 구절을 통해 비폭력저항 운동의 근거를 삼았습니다. 누가복음 6:29-30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는 배열순서가 다릅니다. 마태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결론의 명제가 뒤에 나오지만 누가에서는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마태에서는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고 한 다음에 세세하게 그 준칙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겉옷을 달라고 하면, 돈을 꿔 달라고 하면, 하는 제시어들이죠. 이런 경우에는 맞서지 말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 중에 ‘오리를 가자고 하면’이라는 제시어는 누가복음에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가 기록하는 이 세칙들과 누가가 생략한 한 가지 세칙의 배경에는 로마 군대 밑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제노동이 깔려 있습니다. 누가가 앞의 하나를 생략한 것은 누가복음이 쓰여진 곳이 로마이기 때문에 갈등의 소지가 있어서 뺀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의 율법을 넘어서는 어떤 지고한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나타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러니 예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가!’하는 것은 바른 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런 대립적인 제시를 하는 까닭은 억지로 부역을 지우고(오리를 가자고 하면), 생명유지를 위해 돈을 꿨는데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속옷을 달라하면), 저항하지 못하고 신음하는 갈릴리 농민들의 처지에서 그들의 신음에 응답하고자 했던 말씀인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당시대의 민중의 신음에 응답하고 계시는지 봅시다.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

 

손바닥으로 맞는 것은 조롱이나 부당한 벌로 간주되었습니다. 맞는 자에게 그것을 굴욕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오른뺨을 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건 손등으로 때리는 겁니다. 유대교 문헌에는 이렇게 때리는 것은 두 배의 모욕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왼쪽 뺨을 대어주어라’합니다. 폭력에 투항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항의의 수단입니다. 힘에 의한 항거, 농민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저항 수단은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왼뺨마저 대주라’는 말은 ‘저항하라’는 뜻이지 ‘무저항하고 감내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도발하라는 것입니다.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옷도 주어라.’

 

이 말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처지는 어떨까요? 돈을 빌리고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더러 겉옷도 주라고 합니다. 유대의 빈민 보호법은(신24:12-13)겉옷은 저당 잡을 수 없습니다. 잡더라도 해가 지면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제시는 최소한의 법마저 거부하라는 것입니다. 극빈자의 도전적인 의지가 들어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누가복음의 내용입니다. 거기에는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눅6:29)고 합니다. 누가복음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로마 안에 있는 교회이고, 이방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 즉 극빈자 보호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가는 강도에게 습격당한 경우의 정황으로 그려놓고 있습니다. ‘누가 네 이웃이냐’의 이야기도 강도만난 자위 이야기가 주제잖아요? 이게 누가복음의 특성입니다.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라.’

 

이 말음 군대나 권력이 백성을 억지로 징발하고 강제 노동에 동원하는 배경이 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밭에서 일을 하는데 갑자기 징발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오라는 명령을 받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명령 받은 거리의 두 배를 가라는 것이지요?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자, 이제껏 본 것처럼 예수님이 율법에 대한 명제들을 대립하는 것처럼 제시를 하는 것은 율법을 더욱 철저히 지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저항’을 권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순히 받아들여 노예로 살지 말고 저항하여 자존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42절에서 앞의 제시들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합니다. ‘달라고 하면 그냥 주고, 꾸려고 하면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태 공동체의 형편이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시어들은 가난한 자들의 저항이었던 반면, 마태의 이 요약은 마태 공동체 내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사랑의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일까요? 이른바 동태복수법(신19:21), 이는 이로, 눈으로 갚으라는 말은 잔인한 복수, 보복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무자비한 피의 보복을 하지 말라는, 받은 이상 되돌려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는 말은 이 배려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 걸은 더 나아갑니다. 우리가 흔히 뚝 떼어서 말하기 좋아하는 ‘온유한 사람은...’이라는 대목입니다.

 

마태는 율법의 완성을,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예수에게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처지와 연결지어 구약의 복수법을 통해 어떻게 승리자의 자리에 나아갈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고, 그 결론적인 제시들이 바로 산상수훈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여기사 설교를 잘라야 하는데 다음 말씀이 이어지는 대목이기 때문에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43절에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신약성서에 잘 나오지 않고, 마5:44, 눅6:27-28,35에만 나옵니다. 그러니까 ‘원수사랑’은 누가와 마태만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나 바울서신에는 이웃과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말합니다. 요한복음에는 형제사랑, 서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죠. 그러면 누가가 마태는 왜 ‘원수사랑’을 넣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할 대 가장 연상되는 사랑의 언어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마5:43-48, 눅6:27-36에 나오죠. 43절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레위기 19:18절을 인용한 것이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엣세네파 공동체 규율에 나옵니다. 엣세네 이야기는 신약읽기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이해를 거부하는 것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해 안에서, 마태는 악인에게 관대하고 원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는 이런 제시를 한 다음에 “하늘 아버지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

“고 합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누가에서는 ”너희 아버지가 자비한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 완전에 대한 권고가 6개의 대립명제를 마무리 짓는 일입니다. 사실 ‘완전’이라는 말은 마태가 즐겨 쓰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 ‘완전’이라는 언어는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일 테니, 우리로서는 누가의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권고가 맞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6가지의 삶의 원칙은 ‘자비로운 삶, 자비로운 나’로 귀결이 되겠습니다. 자비가, 사랑이, 사람을 완전하게 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5947 히브리서 예수님과 4차원 세계 히11:3  조용기 목사  2019-05-03 166
15946 시편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91:1-16  조용기 목사  2019-05-03 387
15945 요한복음 예수님과 니고데모 요3:15  조용기 목사  2019-05-03 249
15944 이사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상쾌함이니 사28:11-13  조용기 목사  2019-05-03 146
15943 요나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욘4:11  조용기 목사  2019-05-03 240
15942 고린도전 성령으로 씻음 받자 고전6:11  강종수 목사  2019-05-03 141
15941 디모데전 구속자 예수 딤전2:5  강종수 목사  2019-05-01 153
15940 요한복음 그 증언이 참이라 요19:31-42  김성호 목사  2019-05-01 116
15939 요한복음 높은 사람으로서 섬기라 요13:14  이한규 목사  2019-04-30 191
15938 요한복음 끝까지 사랑하라 요13:1-5  이한규 목사  2019-04-30 312
15937 요한복음 말씀에 순종하라 요12:44-50  이한규 목사  2019-04-30 324
15936 요한복음 바나바 성도가 되라 요12:24-28  이한규 목사  2019-04-30 421
15935 디도서 좋은 교회 리더가 되라 딛1:10-16  이한규 목사  2019-04-30 236
15934 요한복음 평화의 사자가 되라 요12:12-15  이한규 목사  2019-04-30 160
15933 요한복음 감사하는 태도를 가지라 요12:1-5  이한규 목사  2019-04-30 450
15932 요한복음 때를 아는 삶의 축복 요11:54-57  이한규 목사  2019-04-30 330
15931 마태복음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2) 마5:8  김남준 목사  2019-04-28 225
15930 마태복음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1) 마5:8  김남준 목사  2019-04-28 455
15929 마태복음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2) 마5:7  김남준 목사  2019-04-28 190
15928 마태복음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1) 마5:7  김남준 목사  2019-04-28 420
15927 마태복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2) 마5:6  김남준 목사  2019-04-28 165
15926 마태복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1) 마5:6  김남준 목사  2019-04-28 504
15925 요한복음 생수를 찾아서 요4:7-18  김남준 목사  2019-04-28 294
15924 에배소서 새해엔 어떻게 살까 엡5:15-17  김남준 목사  2019-04-28 332
15923 누가복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1) 눅3:1-3  김경형 목사  2019-04-28 200
15922 요한계시 서머나교회 계2:8-11  강종수 목사  2019-04-28 248
15921 열왕기하 심지가 견고한 신앙 왕하22:1-12  전원준 목사  2019-04-27 601
15920 다니엘 포로기를 사는 성도 단1:8-9  이익환 목사  2019-04-26 324
15919 에배소서 전투하는 교회 엡6:10-17  이익환 목사  2019-04-26 318
15918 에배소서 영광스러운 교회 엡5:25-27  이익환 목사  2019-04-26 260
15917 에배소서 부르심의 한 소망 엡4:1-7  이익환 목사  2019-04-26 513
15916 에배소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는 교회 엡3:8-11  이익환 목사  2019-04-26 297
15915 에배소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엡2:19-22  이익환 목사  2019-04-26 734
15914 에배소서 그리스도의 충만을 나누는 교회 엡1:22-23  이익환 목사  2019-04-26 271
15913 에배소서 교회의 비밀 엡1:9-14  이익환 목사  2019-04-26 392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