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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장섭 목사 | 2023.06.18 08:25:5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히11:1-4
설교자
배장섭 목사
참고

더 나은 제사               

본문말씀 히브리서 11장 1-4절

 

 1. 서론

 

 옛날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 ‘믿음’ 단락과 ‘믿음의 의’ 단락을 읽다가 ‘유대인들 중에 불과 족장 몇 명만 구원 받고 나머지 전부 구원 받지 못했다’는 주장을 접하고 충격을 금할 수 없었는데, 여러분은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이신칭의로 믿지 않고 율법주의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신칭의에 근거하면 족장들 역시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는 할례를 행했으며 메시아로 믿는 예수님조차 할례를 행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으니 족장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방인 역시 단 한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때 칼빈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그래서 이신칭의라고 주장하는 관련 구절들을 전부 원문과 문맥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완전 180도로 정 반대 되는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믿음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지금 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서 말씀하신 믿음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는데, 히브리서 11장 1-3절 말씀은 이미 지난 2주 전 히브리서 10장 34절과 관련하여 다루었던 것처럼 간략하게 정리하면 참된 믿음이란 약속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예언 성취에 근거하여 창조는 말할 것도 없고 천국이 존재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믿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만이 세상 유일하게 참 신 증명과 진위여부를 분별할 수 있는 종교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증명했기 때문에 넘어가고 그 다음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지금도 말하느니라”는 말씀을 가지고 ‘더 나은 제사’라는 제목으로 히브리 기자가 말하는 참된 믿음은 어떤 믿음을 가리키는지를 함께 생각해 봄으로 피차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데요. 

 

 2. 본론

 

 가인은 이 세상에 태어난 첫 번째 사람이며 아벨은 두 번째로 태어난 그의 동생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마땅히 예를 갖추기 위하여 창조주께 제사를 지냈는데, 문제는 똑 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지만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받지 않으신 정도가 아니라 히브리 기자에 따르면 아벨은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았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가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에 근거하여 ‘의로운 자’냐 아니냐가 결정되었습니까? 제사 행위를 통하여! 그것은 이신칭의와 정 반대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흔히 어떤 분들은 예배만 드리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무조건 다 기뻐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없지 않지만 그 또한 지극히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가인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역시 제사를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벨처럼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그 이유를 히브리 기자는 이 말씀에서 “믿음으로” 다시 말해서 믿음의 차이 때문이라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제사나 예배를 드려도 믿음으로 드릴 수도 있고, 믿음이 없이 드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바로 이것인 더 나은 제사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히브리 기자가 말하는 바로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그 점에 중요한데, 이 말씀으로는 사실 그 점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야 구약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런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한 우리 이방인들은 히브리 기자가 말하는 바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 기자가 인용한 바로 그 창세기 4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되는데, 말이 나왔으니 여담인데, 박사 논문보다 설교가 더 어렵습니다.^^ 왜? 

 교수님들은 이미 성경 지식이 풍부하기 때문에 어지간한 것은 생략하고 핵심을 다루어도 되지만 설교의 대상은 그런 성경지식이 풍부한 교수님들이 아니고 초신자에서부터 다양하기 때문에 초신자의 경우 그런 논문 식으로 했다가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신자에 맞추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일일이 상세하게 설명해 주면 교수님들은 식상하시지 않겠습니까?^^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는 설교를 듣는 것 같기 때문에 그런 교회 계속 머물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 분들은 다른 곳에 가서도 신앙생활 잘 하실 수 있으니 될 수 있으면 초신자에게 맞추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창세기 4장 2절에 보면 가인이 드린 예물은 농사짓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농산물 중 일부를 드린 반면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4절에 보면 양을 드렸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물의 종류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율법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깊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무엇이냐 하면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았다”고 증언하신 반면 아벨 같은 경우에는 양을 제물 삼았지만 단지 ‘양을 드렸다’라는 말씀하지 않고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율법에 보면 기름은 헌신을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 지낼 때 구별해서 바치라고 명하셨는데, 그것은 또 그렇다 치더라도 유월절에는 보리 첫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고 맥추절에는 밀의 첫 수확물을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왜? 그 의미는 ‘하나님은 내 인생의 첫 번째 되시는 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에 보면 첫째라는 개념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십일조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지 십분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으로 나누었을 때 제일 먼저, 첫 번째 것을 드려야 됩니다. 왜? 하나님은 내 인생의 첫 번째요,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시라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산물을 아무것이나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실을 우리는 그 다음 가인의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반면 자기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거나 자신을 돌아본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고 단지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분하게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제사를 지내면 하나님은 무조건 감지덕지하게 생각하시고 그 제물을 받으시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셔야만 되시는 분이십니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했는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느냐? 나를 요 모양 요 꼴로 내 버려두시는가?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대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식으로 원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과 똑 같은 모습인데,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자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니고 자기중심의 신앙이고, 내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존재해 주셔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을 해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내 목숨조차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그런 십자가 정신의 신앙이 아니고 나를 위한, 다시 말해서 내가 성공하고 내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대 그리스도들의 신앙생활을 놓고 보면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은 기복 신앙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지만 어쨌든 바로 그런 자세로 신앙생활하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할지라도 가인처럼 구원 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심지어 그 다음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다음 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경고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8절에 보면 가인 동생 아벨을 어떻게 했습니까? ‘쳐 죽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 마디로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경고조차 간단하게 무시하고 심지어 9절에 보면 하나님이 다 아시고 물으심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게 부정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하나님 입장에서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믿음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말라기에 보면 택함 받았던 유대인들이 버림 받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진술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고 예물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가인처럼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짐승을 드린 것이 아니라 눈먼 것 저는 것을 드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을 좇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온갖 죄를 범하면서 복 달라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 복 안 준다고 원망하고! 구약 성경 전체를 주의 깊게 한 번 정독해 보세요? 왜 그들이 망하게 되었는지! 이신칭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좇아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정 반대입니다.

 율법을 좇아 행하고 제사를 지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을 빙자하여 복된 인생이 되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 즉 하나님을 자기 성공을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믿었기 때문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백날 천날 신앙생활 해 봐야 소용없다고 히브리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던 바로 그 믿음입니다. 

 

3. 결론

 

 물론 우리는 그렇다면 도대체 왜 처음 태어난 사람인 가인이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거기에 반하여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 점을 생각해 봐야 되지만 시간 관계상 아쉽지만 그것은 다음에 기회가 주어질 때 생각하기로 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하는데요.

 마태복음 5장 20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 

 어떤 분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이유가 이신칭의로 믿지 않고 율법을 좇아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는 율법주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정말 그런 뜻으로 책망하신 것일까요? 

 성경 말씀에 대한 오해를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제가 예수님의 신학 논쟁에 대한 주제로 책을 쓰려고 하다가 요사이는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그만 둬 버렸지만 그 다음 21절에 보면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그 다음 22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무슨 뜻입니까?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생략하고 결론적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에 근거하여 율법 조항을 해석한 것인데,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좇아 순종했기 때문에, 즉 이신칭의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겉 다르고 속 다른, 그래서 그들을 책망하실 때 ‘외식자’라고 책망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순종해도 가인처럼 지켰던 것이지 아벨처럼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율법의 그 정신을 좇아 지켰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책망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그런 식으로 율법을 지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켜도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반면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처럼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신으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새 언약 백성들에게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명하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디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 서로 십자가 정신을 좇아 사랑하심으로 구원의 놀라운 축복을 누림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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