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궁극이 | 2023.06.25 09:56:1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5:24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들의 말을 듣는 자는 아버지를 알게 된다. 왜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심은 우리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해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고 하는 거냐? 세상에서 아버지의 것을 아들에게 상속하는 것처럼 우리로 아들을 삼아서 신령천국을 주어서 그 세계를 누리게 하신다는 의미로 아들이라고 하는 거다. 예수님은 이 면을 염두에 두고 우리들에게 교훈을 하신다.

 

아버지와 아들은 인격적 애정적 의사단일적 수수관계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하면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은 당연한 거고, 이 안에는 무형적인 것을 서로 주고 받는 게 들어 있다. 마음이 안 통하면 물질도 안 간다.

 

하나님께서 눈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하는 것을 적절히 해 주시면 농사가 잘 되고 풍요로워진다. 인간들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든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인간이 살 수 없다는 거다. 안 믿는 사람들은 지구의 모든 법칙을 과학적으로 풀어서 말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물의 법칙을 만들어 놓은 것은 인간들로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하려는 거다.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아는 게 신앙인이다.

 

구약의 아합 왕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선지자를 보내니까 왕이 핍박을 했고, 이방여자 이세벨을 데려와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일을 하니 하나님께서 우로지택의 은총을 주기 싫어서 36개월 동안 비를 주지 않으셨다. 이 이치를 가지고 내 속을 보면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요롭지 못하면 그 마음은 쩍쩍 갈라진다. 생산이 안 된다.

 

왕이 죄를 지으니 하나님께서 36개월 동안 비를 주지 않으셔서 온 땅에 흉년이 드니 남자들이 많이 죽어나갔고, 이로 인해 과부가 많이 생겼다. 기근의 때에 여자들만 있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거다. 그런데 사르밧의 진짜 과부는 선지자를 영접해서 그 흉년 동안에 편안히 먹었다. 자꾸 생산이 된다. 담이 없는 집에는 오만 짐승이 드나들게 되듯이 사람의 정신에 구멍이 있어서 세상의 오만 유혹과 미혹에 그대로 노출된 사람이 있다. 신앙 면에서도 정신과 사상 면에 담이 없어서 세상에게 그대로 끌려가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요롭게 떨어져서 그 마음 가운데서 지혜지식도, 도덕성도, 사랑도, 긍휼도 풍성히 생산이 되어 나와야 하는데 이게 없이 살면, 즉 말씀을 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살면 그것으로 끝이냐? 아니다. 자기에게 말씀의 물이 없으면 자기 속에 귀신이 와서 살게 된다. 이러면 이 사람은 오만 잡된 정신으로 살게 되어서 정립이 없다. 이건 나쁘게 말을 하면 미친 거다. 일반적인 눈으로는 사람을 못 본다. 성령의 눈이라야, 주님의 눈이라야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다.

 

사람을 물고 쏘는 전갈은 축축한 땅이 아닌 메마른 땅에 산다. 이건 신앙의 이치를 가르쳐 주는 거다. 흉년이 들면 다른 곡식이나 식물은 말라죽는데도 마른 땅의 가시나무는 잘 자란다. 사람의 마음에 흉년이 들면 이 사람의 마음에 가시가 잘 돋는다. 산을 잘 타는 염소는 발가락이 갈라져 있어서 미끄럽고 비탈지고 경사가 심한 곳을 잘 다닌다. 성도가 구별 분별을 잘 하면 신앙의 깨달음이 높이 올라간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성경에 굽이 갈라진 것은 먹으라는 거다. 그래야 네가 신앙이 무장이 되고 정복을 하게 된다.

 

사람을 볼 줄 모르면 자기가 고통을 당하게 된다. 부부간은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로 되어야 한다. 겉모양을 보고 만나서 살면 여자의 외모가 쭈그러지면 남편이 싱싱한 걸 취할 게 아니냐? 여자도 마찬가지다. 이게 인격을 가진 사람의 세계냐? 자기 속에 세상성이 들어 있으면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게 된다. 믿는 사람이 주님과의 인격적 애정적 의사단일적 수수관계가 안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신앙심이란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바로 가지는 거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려야 한다. 자기의 마음 속에 든 게 아름다운 품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는데, 이스라엘 안에 처녀가 마리아 하나밖에 없어서 하나님께서 아기예수를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신 거냐? 수많은 처녀들을 두고 왜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신 거냐?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제일 귀하게 보셨기 때문이다. 온 세계의 처녀를 살펴봐도 마리아만큼 좋은 여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의 족보장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이 마리아의 신앙정신을 보는 거다. 또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보고 다윗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신앙자에게 흘러가는지를 보는 거다.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의 신앙정신이다. 자기의 정신에 따라 자기의 앞길이 막히고 열리고 한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의 사는 길을 말씀에서 찾아야 옳은 거다. 사람은 자기의 이해타산이 코앞의 임시적인 것만 보면 안 된다. 미래가 있어야 한다. 영원이 있어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진리이치를 못 들으면 이 면에 무식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인격적 관계성에서 되어지는 거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사단일, 신앙의 본질에 기준을 두고 사람을 봐야 한다. 사람이 100% 완전할 수는 없으나 바로 믿고 바로 깨닫고자 하는 마음만 있어도 이 사람은 그만큼은 믿을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정신없는 처녀는 결혼을 하면 교회에 나간다고 하는 남자의 말에 속아서 결혼을 한 후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남편 때문에 평생 속앓이를 하기도 한다. 사람을 볼 때 현재에서 바로 하는지를 봐야지 미래에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말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거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라고 하니까 마리아가 말씀대로 되어지이다라고 했는데, 마리아가 이 말을 받고 순종을 하니 하나님께서 거지가 되게 만들었느냐? 심지어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성모라고까지 하지 않더냐?

 

아들과 아버지는 직결이 되는 것인데, 무슨 직결이냐? 마음과 정신과 소원 목적과 도덕성이 직결이다. 직결이 아니면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전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교인들은 어느 교회를 가던 그 교회 목사님의 정신이 하나님의 정신과 직결인지를 봐야 한다. 직결이 아니면 안간 자기의 말을 하게 된다. 믿는 사람이 신앙 믿음성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온전케 되는 인격의 실상, 신앙의 본질이 아닌 것을 가졌다면 이 사람은 전도를 해도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병 낫는다이런 식으로 전하게 된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병에 걸리면 죽을 때까지 안 낫는다는 말이냐? 정말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이적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적은 껍데기다. 신앙에 있어서 이런 게 다가 아니니 이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인격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양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런 우리가 아들로 통해 아버지를 모른다면 아버지를 닮을 수도 없고, 아버지를 전하지도 못한다.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 아버지처럼 마음이 넓고 지혜롭고 도덕성이 반듯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자기의 성격 성질이 잘못된 것을 아는 데도 못 고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아버지에게 고쳐달라고 하라. ‘내 성격 성질이 이렇게 나쁘면 아버지의 얼굴이 말이 안 되니 나의 속사람을 고쳐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게 된다. 나를 고쳐주려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 먼저는 내 마음에 옳은 것을 깨닫고 싶고 옳게 고치려는 마음을 주신다. 이 때 옳은 것을 따라 살고자 하는 자기의 마음을 제해버리면 이건 성령 훼방 죄다. 이러면 맹렬한 진노의 불밖에 없다.

 

아들이 하는 일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밀착시키는 거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을 아버지와 화목케 하는 게 아들이 일이다. 이 화목은 나도 절반 물리고 아버지도 절반 양보가 아니라 아버지의 것은 영원히 좋고, 행복이고, 기쁨이고, 즐거움이니 나의 것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전부 버리고 아버지의 것을 가지는 거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인격적으로 밀착시키는 예수님의 일을 다르게 말하면 인간 나를 하나님과 질이 같아지도록 나의 수준을 영적 신령적으로 끌어올려서 하나님과 밀착시키는 거다. 의사단일이 되게 하는 거다. 어머니가 자식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은 자식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거다. 이렇게 해서 자식의 수준이 올라가면 어머니와 아들의 의사가 잘 통한다. 의사가 잘 통하면 사는 게 편하지만 서로가 안 통하면 사는 게 힘이 든다.

 

인간은 태어날 때 하나님의 것을 하나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이 아들을 알기 전에는 심판도 모르고, 영생도 모르고, 사망이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 이런 인간이 예수를 믿고서 믿는 그 날부터 진리본질의 교훈을 받으면 주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자라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고 이질적인 교회에 들어가서 이질적인 교훈을 받으면 주님을 닮는 것은 없고 종교적인 사역만 활발히 하게 되니 나중에 결과에 가서 보면 예수 믿은 게 전부는 신앙사기를 당하고 허송세월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분함을 어떻게 말로 다 하겠느냐? 믿는 사람은 거짓 것, 거짓 가르침, 거짓 교훈에 속은 분함을 알아야 그 원통함을 풀 수 있다. 이런 사람이 희망이 있고 발전이 있다.

 

세상사람들은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다. 인생은 뜬구름 같다. 지나가는 화살 같다. 지나가는 바람과 같다. 흐르는 물과 같다라고 하는데, 이게 전도서에서 말하는 세상사람들의 헛된 삶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은 잠깐 동안 나그네로 살면서 자기를 영원히 존귀영광자로 만드는 기간이라고 한다. 믿는 사람에게는 공수래공수거의 삶은 있을 수 없는 거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아왔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본질을 모른 채 세상사람들의 소원 목적으로 살아나온 연속의 삶이 오늘날까지 자기를 짓누르고 있지는 않느냐? 이제는 진리본질의 말씀을 붙잡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죽는 것에서 사는 쪽으로, 심판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께 소속이 되고 주님의 입장에 서야 한다. 소속은 주님께로 되어 있으면서 자기의 정신 사상의 입장은 세상으로 되어 있다면 인격적으로 주님과 단일이 되지 못한다.

 

믿는 사람들은 자타에게 생명과 영생으로 살리는 일, 영인성장을 위한 일, 속사람이 잘 커져가는 일을 해야 한다. 이게 예수 믿는 거다. 이렇게 되면 사건의 바람, 환경의 바람이 자기에게 닥쳐와도 이걸 자타의 구원에 이용 활용하게 된다. 자기가 속사람이 잘 성장이 되어 있으면 어떤 사건 환경이 와도 믿음을 팔아먹지 않고 넘어지지 않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건 환경의 바람에 불려 넘어간다. 이건 믿음의 가치가 없다.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남편이나 아내가, 자식이나 부모형제가 돈 바람에 날려가면 그걸 보는 사람은 저렇게 열심히 돈을 따라가니 돈을 많이 벌겠구나하면서 마음이 놓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마음이 불안하다. 하나의 예를 들면 믿는 사람이 생명보험을 드는 일이 있는데, 생명보험을 들어서 미리 준비를 하는 게 지혜로운 거냐, 보험을 들지 않고 자기의 생사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주어진 현실을 열심히 사는 게 지혜로운 거냐? 어느 게 믿음이냐? 내 생각은 보험에 들지 말고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은 생명보험에 들면 마음이 편해지느냐? 그리고 생명보험에 들면 아무런 사고도 당하지 않고 생명이 보장이 되는 거냐?

 

인간은 영육 결합체로 만들어 졌는데, 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 속의 인격과 성품이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령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영이다. 안 믿는 사람은 이걸 모른다. 예수를 믿어도 이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한다. 우리는 자기의 믿음이 흑이면 흑, 백이면 백으로 분명히 나누어져야 한다. 이게 흐릿하면 오만 잡된 이단과 거짓 것들이 들어와서 세상바람을 넣는다.

 

주님의 부활은 죽지 않는 생명이다. 아들 된 우리는 자타에게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일을 해야 한다. 자기가 이 일을 하고 있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거다.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죽어도 산다하는 이게 부활성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