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한복음 ›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궁극이 | 2023.05.14 12:01:2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요5:14-17
설교자
김경형목사
참고
궁극교회 주일예배

514-17: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38병자가 왜 병이 난 거냐? 죄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자기가 죄를 지은 거냐, 부모가 죄를 지은 거냐, 날 때부터 죄를 가지고 나온 거냐? 본인이 죄를 지은 건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말씀의 이치의 세계에서는 누가 말을 할 때 누구의 기준으로 말을 하는 건지를 봐야 한다. 누가 말을 할 때 영적인 이치가 분명하면 이 말은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고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도 정확한 거다. 이 정확성은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남녀에게나 다 해당이 되는 거다.

 

그렇다면 38병자의 죄가 어떤 거겠느냐? 그 이전에 죄가 어떻게 성립이 되는 거냐? 죄가 형성이 되는 것은 생명과는 안 먹고 선악과를 먹으면 죄다. 선악과란 쉽게 말해서 자기의 주관성을 따라 되어지는 모든 언행심사다. 그러니까 자기의 주관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치, 영원히 잘 되는 이치를 버리면 이건 선악과를 따먹은 게 되는 거고, 그러면 이게 죄다. 이 죄를 다른 말로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 불순종이니 38병자는 말씀 불순종으로 산 거다.

 

38병자는 늘 침대에 누워 있었으니 이 사람은 건강함 몸으로 세상에서 잘 먹고 편히 잘 살기를 원할 것이고, 이런 생각과 정신은 하나님 앞에서 죄다. 마찬가지로 믿는 사람의 이해타산이 안 믿는 세상사람들처럼 세상에서의 부요를 가지려고 하면 죄다. 부자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부자가 되려는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은 죄다. 영적인 이치를 알면 부자가 되어도 가난해도 이 사람은 믿음의 일을 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일을 한다. 즉 예수님의 속성을, 가치판단을, 지혜지식을, 하나님의 도덕성을 닮는 일을 한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사시면서 이를 통해 우리들에게 구원의 이치, 삶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

 

38병자는 말씀 불순종으로 살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거다. 믿는 사람이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신앙정조를 파는 거다. 신앙정조를 팔고 세상의 그 무엇이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다고 하다가는 너는 그 날로 죽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곡식을 쌓아놓을 곳을 걱정하는 부자의 비유에서 하신 말씀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편하자는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다가 사건 환경에 넘어지면 거기에 붙잡혀서 일어나지 못한다. 부자는 부자에 붙잡혀서 못 일어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 붙잡혀서 못 일어난다. 이치가 그렇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은 가난에도 부자에도 안 붙잡힌다. 이게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는 정신이다.

 

세상사람들은 다 세상의 그 무엇에 붙잡혀 있다. 이건 하나님 앞에 죄다. 모든 사람은 인간창조의 목적관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야 하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건 환경을 주시는 건데 주어진 사건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목적으로 살지 않고 세상의 물질로 누리며 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다.

 

안 믿는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면 사는 게 힘이 든다고 하는데 믿는 사람은 가난해도 부자여도 그 가운데서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힘들어서 못 살겠다는 소리가 없는 거다. 우리는 깨닫지 못해서 힘이 드는 거다. 사람은 못 깨달아서 힘이 들고, 몰라서 힘이 들고, 게을러서 힘이 드는 거다.

 

야곱처럼 기도하면 복을 주신다? 그러면 야곱이 환도 뼈가 부러진 것은 기도를 오랫동안 해서 환도 뼈가 뭉그러졌기 때문이냐, 얻어맞아서냐? 얻어맞아서다. 그리고 씨름을 했다는 것은 입씨름, 즉 기도씨름을 말하는데, 자기 고집의 기도를 한 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 뼈를 살짝 치셨는데 부러져 버렸다. 그 후손들이 환도 쪽의 힘줄을 안 먹는다고 했는데, 이는 그 후손들이 고기를 못 먹을 정도로 좋지 않은 기도의 관례를 남겼다는 거다.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인간이 환경의 소산이 되면 죄다. 환경이 이리 가라하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하면 저리 가는, 즉 세상의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처럼 듣고 사는 건 죄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누구를 주격으로 사느냐?’ 이걸 말하는 거다.

 

영원 전, 창조 전에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정과 계획과 설계를 하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를 하고 계신다. 믿는 우리는 세상에 소원 목적을 두지 말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하시는 이 구원역사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자기 몸에 병이 오면 무조건 고쳐 달라고 한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다가 맞은 걸까?’ 하는 걸 생각을 한다.

 

욥이 왜 얻어맞았느냐? 욥의 재산을 다 뺏어가려고 때린 거냐, 영적인 축복까지 배나 주려고 시험을 친 거냐? 후자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마귀에까지 드러내 보이시며 욥의 신앙을 자랑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나도 육신의 목숨 초월, 인정정실 초월, 물질 초월의 신앙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네가 시험을 해 봐라라고 하시며 자랑을 하실 것 같다.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고침을 받은 38병자가 예수님이 핍박을 받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고쳤다고 말을 한 게 아니라 자랑스럽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을 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는 나를 볼 때 뭔가가 비범하게 보이고 대범하게 보이고 고상하게 보여져서 너 예수 믿더니 많이 달라졌구나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 믿더니 사람이 이상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비아냥거리고 핍박을 하는 것과 같은 거다.

 

나를 고치신 이가 예수다. 내가 38년 동안 병자로 살았으나 이제는 자유다. 이제는 성전 안에도 들어갈 수 있고, 예수도 만날 수 있고, 나는 자유다라고 하면서 자기를 고쳐주신 이를 나타내는 게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정상상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언행심사 속에서 예수님의 속성과 성품이, 그 지혜지식이, 그 도덕성이 나타나는 건 지극히 정상이다.

 

누가 잘못하는 것을 볼 때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는 나에게는 저런 게 들어 있지는 않은가?’ 라고 하면서 자기를 살피며 자기의 구원 쪽으로 생각을 하면 이 사람에게서는 의가 나가고, 선이 나가고, 예수님의 향기가 나간다. 이게 없으면 일반이 되고, 타락성이 나가게 된다. 사람은 자기 속에 든 대로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자기 아버지를 누가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야 하느냐? 기도를 하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가 하나님이 거룩히 여겨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 몰라서 미련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미련함을 나타내고, 마음이 좁은 걸 나타내고 하면 자기로 인해 아버지의 얼굴에 더러운 칠이 된다. 자기에게는 예수님의 얼굴이 들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학생이 학교에 빠지면 선생님을 보면 피한다. 이건 잘못해서 숨는 거다. 그러나 높은 사람 앞에 숨는 것은 잘못해서가 아니라 위엄과 신분이 달라서다. 그것도 모르고 높은 사람 앞에 나서서 대들면 이건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거다. 그러나 자기를 고쳐주신 분을 나타내는 건 정상이다.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건 정상이다. 숨기면 안 될 일이다. 나타내는 게 예수증거다.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께서 38병자를 고치시고 이제는 침상을 옮기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짐을 들고 가게 했다는 거다. 쉽게 생각을 하면 침대는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집에 놓여 있는 거다. 그동안 연못가의 행각에 가져다 놓고 늘 누워 있던 침상을 이제는 병이 나아서 집에 갖다 놓으려고 들고 가려고 하는데 유대인들의 말인즉 집으로 가지고 가지 말고 거기에 계속 누워서 똥 싸고 오줌 싸고 있으라는 거다. 이게 할 말이냐? 인간을 자유자로 만들어야지 어떻게 억압 가운데 살라고 하느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거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사람을 위해 안식일의 법을 만드셨다. 안식일에 말씀을 받아서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라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라고 만드신 거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왜 주일을 지키는 거냐? 안식 후 첫 날에 주님이 부활을 했으니 이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주일을 지킨다고 한다. 그러면 부활한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주일을 지킨다면 주일예배를 통해 부활한 주님을 만나서 인격과 성품이 영원히 안 죽을 자로, 산 자로, 부활성의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날자적으로 주일은 열심히 지키면서 소원 목적이 물질 이해타산으로 들어가 있다면 이건 주일을 지키는 게 아니다. 이게 말세교회의 현상이다.

 

주일은 예수님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해 있는 거다. 그렇다면 주일에 말씀도 받고, 심방도 가고 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날도 먹고 마시고 노는 위주로 살고, 주일날도 먹고 마시고 놀고 쇼핑하는 위주로 산다면 이게 뭐냐? 이룰구원에 대해 잘 모른 채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오늘은 주일이니 성경 한 장이라도 더 봐야지. 다른 날은 일하느라 심방을 못했으니 오늘은 심방을 가야지하는 게 있는데 진리교훈을 받는 사람이 주일에도 먹고 마시고 놀고 사고 팔고 한다면 진리를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으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케 하려고 주신 건데 유대인들은 단순히 문자대로 종교적 의식 순서 절차를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날 사람을 고치고 안식일에는 고치지 말아라라고 하는 거다. 이건 마귀의 말이다. 이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것도 눈에 거슬리지만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거슬린다. 그래서 사람을 온전케 해 주는 주님이 미운 거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주일의 또 다른 의미는 한 주 동안에 세상에 찌든 죄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주일에 씻는 동시에 새로운 말씀을 받아서 다시 또 세상에 나가서 생활 가운데서, 직장에서 사람을 향해 써먹을 수 있는 재무장을 하는 거다. 즉 새로이 말씀을 충전해서 일주일 동안 세상에 흐트러진 마음을 다듬고, 다시 나가서 예수님의 향기를 날리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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