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창세기 › 하늘과 땅 울림

박재순 목사 | 2008.07.16 22:00:4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창2:7
설교자
박재순 목사
참고
새길교회 2000.10.8 주일설교
왜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홀로 있기보다는 더불어 있고 싶어서, 자기만 위하지 않고 서로 위해 살고 싶어서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그리고 다른 생명들과 대화하고 서로 느끼고 사귐을 갖고 싶어서 인간과 뭇 생명들과 자연만물을 지으셨다. 모든 인간, 모든 생명이 저만을 위해 살지 않고 더불어 살고 서로 위해 살라는 게 창조의 동기이고 목적이다.

더불어 살고 서로 위해 사는데 필요한 것은 공명과 감응,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이다. 공명하고 교감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서로 울리고 서로 느낄 수 없을 때 영혼은 말라죽고 공동체는 무너지고 생태계는 파괴되기 시작한다.

사람은 본래 공명하고 감응하는 존재로 지어졌다.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 2:7) 하나님의 숨, 생기와 흙이 어우러져 사람이 되었다. 몸은 흙으로 된 것이고 영혼은 생명기운, 하늘 바람이다. 사람은 몸과 영혼, 흙과 하늘 바람이 서로 울리고 서로 느끼는 존재이다. 그래서 사람은 두 발로 곧게 서서 하늘을 향해 머리를 뻗고 있다. 사람은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이다. 사람 안에서 하늘과 땅이 서로 울리고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서로 울림과 느낌이 있을 때 삶은 풍성하고 자유롭고 아름답다.

친구 하나가 있는데, 외국으로 이민 갔다가 사업도 실패하고 가정도 실패했다. 50 이 넘은 나이에 아내와 자녀들과 헤어져 홀로 조국에 돌아왔다. 한국에서도 정말 반기는 이가 드물었고, 할 일도 찾을 수 없었다. 홀로 지방 도시에 가서 1년 간 지냈을 때의 심정을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밤에 홀로 있을 때, 누가 함께 있어 준다는 것, 누가 내 말을 들어주고 내게 말을 걸어 준다는 것은 큰 은총이고 복음이지요. 그건 복음의 일부가 아니라 복음의 전부입니다."

서로 울림과 느낌이 복음이고 은총이며 서로 울림과 느낌이 없는 삶이 지옥이고 죽음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지옥은 싫은 사람과 함께 사는 곳"이라고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태계의 위기를 말한다. 생태계의 위기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의 능력을 잃은 데서 온 것이다. 서구사회는 그리이스 로마 시대부터 정복전쟁, 계급투쟁과 권력투쟁을 통해 사회를 형성해 왔다. 따라서 서구사회가 주도한 현대기술문명에는 타자, 자연과 타인에 대한 지배와 정복의 동기, 공격적인 자세가 깊이 배어 있다. 현대 기술문명의 과학적 철학적 선구자인 데카르트와 베이컨은 철저히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 이용의 대상으로 보았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불, 물, 공기, 별들, 천체들 그리고 다른 모든 물체들의 본성과 행태를 알면, 우리는 이것들을 우리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으며...이렇게 하여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로 만들 수 있다." 자연철학자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인식하는 네 원인, 질료인, 형상인, 운동인, 목적인을 말하는 데 그가 말하는 원인은 그리스어로 '아이티아'(aitia)이며, 아이티아는 법정에서의 공격방식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인식하는 네 원인은 자연에 대한 공격방식이다.

자연과 타인은 인간존재의 고향이다. 인간존재의 고향인 자연과 타인에 대해 정복적이고 공격적인 서구사상에서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생명을 극적으로 찬양하다가도 쉽게 허무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자연과 타인에 대해 일치와 동화를 추구하는 동양사상에서는 생명이해가 생명윤리와 결합되고 자연친화적인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허무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구화와 생태학적 위기를 말하는 오늘의 시대에서 더불어 살고 서로 위해 사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다. 지구가 한 울타리 속으로 들어오는 마당에 싫으나 좋으나 함께 살 수 밖에 없다. 싫은 사람을 지구 밖으로 내쫓을 수도 없고 누가 싫다고 내가 지구 밖으로 도망갈 수도 없다. 지구화되면서 경쟁이 더 격화되고 인종, 종교, 문화, 정치의 분규와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생태학적 위기도 더불어 살고 서로 위해 사는 자연 생태계의 지혜와 힘을 배울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인류는 너무 오래 동안 탐욕과 경쟁의 삶에 익숙해졌다. 한국사회는 오래 동안 농촌의 마을 공동체에서 더불어 살고 서로 위해 사는 삶을 살아왔다. 공생과 상생, 함께 살고 서로 살리는 삶의 지혜와 힘을 익혀 왔다. 마을 공동체가 급속히 해체되고 도시산업사회가 되면서 함께 서로 위해 사는 지혜와 힘을 잃고 말았다. 한국인은 끼리끼리는 잘 산다. 지연, 학연, 혈연으로 묶인 사람들끼리는 잘 산다. 그러나 공적인 관계와 질서 속에서는 더불어 사는 일이 매우 서투르다. 도시산업사회에서 함께 사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가고 함께 사는 윤리를 익혀 가야 한다.

더불어 살고 서로 위해 사는 일이 저절로 되지 않는다. 함께 살기는 어렵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함께 살고, 서로 위해 사는 일에 단련되지 않으면 함께 살 수 없다. 내 손끝에 작은 가시가 박히면 아파 못 견뎌하면서 남의 몸에 대못이 박혀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의 몸이 아픈 것을 헤아리기 어렵고 남의 마음을 알아주기는 더욱 어렵다. 조금만 남을 헤아릴 줄 안다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남을 헤아리려면 남의 몸과 맘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몸으로 느낀다는 것은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지성이나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생명을 몸의 감각으로 직접 느끼는 것이다. 배로 느끼고, 창자와 자궁으로 느끼는 것이다. 지성이나 감정은 주관과 편견이 많이 들어간 것이다. 몸의 느낌과 생각은 주관과 편견이 배제된 비교적 순수한 것이다. 삶 자체, 진실에 가깝다.

"의식혁명"을 쓴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원초적으로 우주의 에너지장과 연결된 경이로운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는 컴퓨터와 같아서 참,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 "이 우주에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느낌과 행동, 의도가 모두 -순수의식-에 입력돼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의식의 한계 때문에 진실을 본다는 것이 어렵다. 인간이 사용하는 지각은 이원성의 영역이다. 진실은 지각 너머에 있다. 과학도 대상만을 쫓으므로 진실을 알지 못한다. 대상은 마음이 만들어낸 피조물일 뿐이다." 그에 따르면 진실을 얘기할 때 몸의 근육힘은 늘고, 거짓말할 때 약해진다. 몸은 정직하다. 거짓말에는 몸의 근육 힘이 약해지고 참 말에는 근육 힘이 늘어난다.

몸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고 순수하다. 믿음의 지식과 깨달음은 머리에서만 이루어질 수없고 가슴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 믿음의 지식은 몸으로 알고 깨닫는 데까지 가야 한다. 논어에 소인의 배움은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는데 귀와 입의 거리는 한 뼘도 못된다고 했고 군자의 배움은 귀로 들어가서 온 몸에 퍼져 손과 발에까지 이른다고 했다. 믿음의 지식은 귀로 듣고 온 몸에 퍼져 손과 발로 나타나고 삶 속에 녹아져야 한다.

몸으로 느끼고 생각한 지식, 몸으로 깨닫고 얻은 지식은 주관과 객관을 넘어선 근원적이고 통일적인 지식이다. 몸으로 보았다는 것은 인식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되었다는 것이고 몸과 마음이 하나로 꿰뚫렸다는 것이고 안과 밖이 하나로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도통, 견성이라는 말도 몸으로 본 것을 뜻하고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때도 눈이나 머리나 가슴으로 본 게 아니라 몸 전체로 마음 전체로 본 것을 뜻한다.

동양의 사상에서뿐 아니라 많은 언어들에서 몸으로 느끼고 생각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라훔)이 창자, 자궁(레헴)에서 왔고, 희랍어에서도 연민, 긍휼(스프랑크니조마이)은 자궁, 창자(스프랑크스)에서 왔다. 우리말에서도 '애(=창자)를 끊는 슬픔'이라고 한다.

창자의 느낌과 생각이 머리나 가슴의 생각이나 느낌보다 깊고 절절하다. 창자가 좀 비어 있어야 몸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고 삶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솟아나고, 밥이 소중하고, 함께 먹는 가족과 친구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1997년 12월에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농촌의 불가촉천민 장애인 청소년 교육센터에서 장애인 소년소녀들과 밥을 먹으며 함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가졌다. 불가촉천민에다 장애인이라니 세상에 무슨 희망을 가질 게 없는 아이들이었다. 초라하고 거친 음식을 먹고 몸은 바싹 마르고 배고픈 얼굴을 했는데 예배시간에 찬송부르는 소리는 쇳소리가 날 만큼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힘차고 절실한 찬송소리에 끌려서 자주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배고픈 창자에서 나오는 찬송소리가 그처럼 생명력 있고 영감이 넘치는 것을 보고 배고픔을 느끼는 시간이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굶주려서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죽는 사람에게는 밥이 생명을 주는 하나님이 된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창자에 밥과 물이 들어가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뜻이고 자연의 순리이다. 그러나 늘 배가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가끔 창자를 비워서 밥 없으면 죽는 연약한 생물임을 알아 겸허해지고, 하나님의 은총과 생명을 느끼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1990년에 미국 뉴욕에서 10달 동안 지내면서 텔레비전을 많이 봤다. 제일 보기 싫은 게 음식을 던지며 장난하는 장면이었다.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데 음식을 집어던지며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배가 꽉 차서 음식을 천하게 여기면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기 어렵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지도 않게 된다.

몸으로, 배로, 창자로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생명이 서로 울리고, 서로 느낀다는 것을 뜻한다. 공명하고 감응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믿고 사랑할 때, 긍정하고 받아 줄 때 삶은 서로 울리고 서로 느껴진다. 서로 잘 되기를 바라고 축복할 때, 몸과 맘이 열리고 서로 통할 수 있다.

예수는 누군가? 남의 자리에서 남을 느끼고 본 이다. 창녀의 자리에서 창녀를 보고, 세리의 자리에서 세리를 보고, 가난한 과부의 자리에서 가난한 과부를 보았다. 굶주린 사람의 자리에서 굶주린 사람을 보고, 병든 이의 자리에서 병든 이를 보았다. 몸으로 느낀 이, 우주 생명, 인류 생명과 한 몸 되어 느끼고 본 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남의 속의 속, 영혼의 중심에 들어갈 수 있는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 남의 속의 속, 영혼의 한 가운데를 차지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뿐이다. 하나님만이 영혼의 자유를 줄 수 있고 스스로 서게 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처럼 보고 느끼고 행동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느꼈다.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예수에게 감탄하고 놀라게 된다. 서른을 갓 넘은 젊은이의 말과 행동의 깊이와 높이를 헤아릴 수 없다. 풀 한 포기도 꺾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리고 고운 것 같은데, 분노에 차서 성전을 뒤엎고, 죄인들과 걸지게 먹고 마시는 분이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리고, 손이 범죄하면 손을 찍어 버리라고 말한다. 위선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하고, 헤롯을 향해 여우라고 말하는 분이 미워하면 살인한 것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없이 여리고 자유로운 분 같으면서도 한없이 굳세고 엄하다. 마음이 맑고 비었는데 단단하다. 어떤 때는 어린이처럼 단순하고 바보 같은데 어떤 때는 인생과 역사를 꿰뚫어 보고 때를 따라 기민하게 대응하는 영특한 사람 같다. 어떤 때는 번민하고 몸부림치며 안타까워하는데 어떤 때는 달관한 도인의 경지에 이른 분 같다. 지극히 자유롭고 열린 분이면서 말과 행동이 분명하고 뚜렷했다.

목말라 하고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예수, 우리와 같은 몸을 지닌 예수는 우리의 몸과 삶에 아주 가까이 있는 분인데,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는 분, 헤아리기 어려운 분이다. 우리 곁으로 온 예수지만 우리가 잡기에는 너무 크고 자유로운 분이다.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늘 새로운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이다.

예수가 이렇게 복합적이고 미묘하고 모순에 찬 인물이면서도 하나로 꿰뚫려 있고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삶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 다시 말해 자신의 몸과 영혼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렇게 진실하고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삶의 울림에 충실할 때, 몸과 영혼(마음)의 울림에 충실할 때 온전하고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는 생명의 울림에 충실했다. 몸과 마음의 울림에 온전히 내맡긴 삶을 살았기에 온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지금 여기의 삶에 온전히 자신을 바침으로써 우주생명의 중심과 통할 수 있었다. 예수는 버림받은 이웃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되는 삶을 살았다.

예수의 몸과 마음은 늘 하나로 울렸다. 예수 안에서 땅과 하늘이 늘 하나로 울렸다. 몸과 마음이 하나로 울리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울릴 때 삶의 기적이 일어나고 신비한 일이 생긴다. 한국전통종교의 경전인 천부경에 "人中天地一"(사람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을 흙과 하나님의 생기로 지었다는 이야기와도 잘 통하고,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으로 고백되는 예수의 삶과도 잘 통한다. 예수 안에서 하늘과 땅이 잘 울렸기에 예수는 참 사람이었고, 참 하나님을 드러낸 분이었다.

오늘 교회는 예수의 삶의 신비를 간직한 곳이다. 예수의 삶의 신비는 몸과 영혼의 서로 울림, 하늘과 땅의 서로 울림에 있다. 서로 울림(共鳴)은 서로 느낌(感應)이다.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이 생태계의 삶의 원리이고 본질이다.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이 더불어 삶과 서로 살리는 삶의 바탕이다. 이 바탕이 없으면 모든 공동체, 모든 문명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현대의 빛나는 기술공학이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인터넷의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는 몸과 마음의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이 약해지고 해소되는 경향이 있다. 현대기술사회에서 어떻게 몸과 영혼, 땅(흙)과 하늘의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을 익히고 키워나갈 것인가? 교회는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으로 충만한 예수의 삶을 맛보고 증언하고 실현하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

삶의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은 믿음과 사랑, 은총과 자유의 세계에 속한다. 믿음과 사랑, 은총과 자유 안에서만 우리는 서로 울릴 수 있고 서로 느낄 수 있다. 율법주의는 죄의식에 빠져 자기를 정죄하거나 자기의 공적과 자기 정당화를 위해 남을 정죄하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힌다. 율법주의는 자기의 자아와 남의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 안에 갇히게 한다. 자아에 집착하고 사로잡히는 율법주의는 서로 울림과 서로 느낌을 가로막는다.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은총과 자유의 세계로 들어갈 때 비로소 서로 울리고 서로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과 울리고, 이웃의 몸과 맘과 서로 울리고 서로 느끼며 자연생명세계와 공명하고 감응하며 교류할 수 있다.

예수의 생명이 빛이다. 어둔 세상에서 예수의 생명이 빛을 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한 몸 안에서 서로 울리고 느낄 때 예수의 생명이 빛을 낸다. 예수는 더불어 사는 이고 서로를 살리는 힘이다. 예수 안에서 더불어 살 수 있고 서로 위해 살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는 홀로 외로운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있고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는 우리가 각자 홀로 있지 않고 더불어 있으며 서로  
위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함께 사는 삶의 축제를 벌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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