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다니엘 › 시민사회를 위한 성서적 근거

권진관 | 2008.07.16 22:05:2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단7:11-14
설교자
권진관 형제
참고
새길교회 2000.10.29 주일설교
오늘날의 시대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란 말과 세계화란 말이 합쳐진 복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단어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현상은 전세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의해서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중산층의 근간을 이뤄 왔던 화이트 칼라들이 직장을 그만두는 사례가 늘었습니다. 한 예로 IMF 사태가 터진 이듬해인 1998년 이후 지금까지 (2000년) 전체 은행원의 40%가 감원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또한 주식시장은 급락세인데, 올해 초 종합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넘다가 10개월이 지난 지금 500대로 떨어져서 주식을 산 사람들이 대부분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요즘 거시적 경제지표도 좋고 이윤을 내는 기업도 많은데 주가가 이렇게 추락하는 것은 외부적 요인, 즉 외국인들에 의해서 주가가 결정되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돈이 돌지 않는다고 합니다. 은행에서 돈이 공장과 기업을 위해서 투자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소기업에는 돈이 돌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몇천 만원 짜리이지만, 모양새로 말하자면 아주 볼품없어 보이는 핸드백이 불티나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팔렸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건 비정상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현준이라는 젊은 벤처 사업가는 창조적인 정신으로 그야말로 모험(벤처)을 감행하여 기업을 일으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벌들이 했던 부패한 구태를 그대로 따라했던 것을 보면서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한마디로 강자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마음놓고 활개치면서 살찐 양들을 잡아먹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수들이 먹이를 덮치기 위해 먹이감을 이리저리 몰아가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을 보호해야 할 양치기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정부는 야수라고 표현될 수 있는 다국적기업이나 세계적 금융자본들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아예 문을 열어놓고 "어서 들어옵쇼" 환영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오늘날의 육식동물들은 약자들을 이리 저리 마음대로 몰다가 결국은 잡아먹어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어 버리는 약육강식의 정글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양을 공격하는 것이 예전에는 늑대 정도여서, 늑대와 겨루어 이길 수 있는 목자나 세퍼드만 있으면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양을 공격하는 야수는 늑대 정도가 아니라, 사자나 호랑이보다도 더 힘세고 무서운 존재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정부와 국가보다도 월등히 힘이 센 초국적 자본과 IMF는 우리 나라에 들어와 국가와 정부를 쉽게 굴복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가를 대신하여 기업과 국민들 위에서 호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크리스천들은 대안적인 비전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안적 비전을 성서에서 찾아봄으로써 이 시대 속에서 크리스천들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니엘서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서를 텍스트로 읽은 것은 이것이 가장 전형적으로 시민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다니엘서로부터 시작하여 이사야서, 미가서, 사무엘서 등 구약과 예수와 바울로 이어지는 성서의 맥락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안적인 사회의 모습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현재의 잘못된 사회를 대체할 시민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성서적 전거로 다니엘서 7장을 들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7장에는 네 마리의 야수가 등장합니다. 성서에서는 세계적인 권력(제국들)을 주로 야수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다니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짐승들은 바다로부터 올라옵니다. 성서에서는 강자들을 상징하는 짐승들을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그립니다. 그래서 아주 해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독수리의 날개와 사자의 머리를 합친다든가, 곰의 발을 덧붙여서 힘있고 포악한 모습이 되도록 합니다. 첫 번째 짐승은 사자의 모습에 독수리 날개를 가진 모습이었는데, 그 날개가 없어지고 사람처럼 발을 땅에 디디고 걸을 수 있었다고 하고, 여기에 더해서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등장하는 티라노사우루스라고 하는 공룡이 꼭 이 첫 번째 짐승과 비슷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육식 공룡은 정말로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처럼 영리하고, 사람처럼 발을 땅에 디디고 섰으며, 매우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짐승은 곰과 같은데, 고기를 많이 먹는 짐승이고, 세 번째 짐승은 표범처럼 생겼으나 몸에는 새의 날개가 있고, 머리는 네 개나 되고, 아주 권위가 있어 보였다고 합니다. 네 번째의 야수는 사납고 무섭게 생겼으며, 힘이 아주 센 동물이라고 합니다. 이 짐승은 쇠로 된 큰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으로 먹이를 잡아먹고, 으스러뜨리며, 먹고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아 버렸다고 합니다. 이 짐승은 뿔이 열 개나 달렸는데, 그 뿔들 사이에 새 뿔이 돋아나오는데, 나와서는 먼저 생긴 뿔 셋을 밀어내어 뽑아버렸다고 합니다. 이 새로 돋아난 뿔은 사람의 눈과 입을 가지고 있어서 거만하게 떠들었다고 합니다. 네 번째 나온 짐승은 힘이 셀 뿐만 아니라 그 뿔이 사람의 눈과 입을 가진 영악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이 네 마리의 야수들을 이길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야수들은 바다에서 올라왔는데, 사람과 같이 생긴 이 인물은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야수 대 인간이 대조됩니다. 야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의 대조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인자란 인간의 자식이지 남자 자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인간이 내려오고, 그 나라는 가장 야수적이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야수의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인간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 속에도 야수적이고 동물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흉포한 야수와는 달리 자기의 동물적인 생물체를 다른 동물적인 것들과 조화 속에서 더불어 살 수 있고, 더불어 삶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 세계 속에서는 야수들도 자연에 적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성서에서 나오는 야수들은 자연세계의 그 야수가 아니라, 인간세계 특히 독점적 권력인 제국의 야수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서에 나오는 야수들을 문자 그대로 동물 야수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인간 세계의 측면을 빗대어 말하는 상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전체를 삼중적 복합체로 볼 수 있습니다. 삼중적 복합체는 시민사회, 정치사회(국가, 정부, 사법제도, 의회제도), 경제사회(기업)로 구성됩니다. 교회가 시민사회의 영역에 속하므로 우리는 당연히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정치사회와 경제사회를 바라보고, 그것들을 개혁하고자 합니다. 시민사회의 주체는 시민(혹은 민중)입니다. 그러나 정치사회나 경제사회는 시민이 주체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정치사회에서 시민이 주체가 되는 상태는 직접적 참여의 민주주의일 것입니다. 경제시민에서 시민이 주체가 된다면 진정한 경제민주주의가 올 것입니다. 교회는 시민사회를 육성할 뿐 아니라, 정치사회와 경제사회를 인간의 얼굴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일에 노력해야 합니다. 즉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국가와 경제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것은 국가와 기업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국가와 기업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예수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민사회란 영어로 civil society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civil이란 말의 뜻이 중요합니다. 원래 civil이란 말은 라틴어의 civilis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civilis는 상냥한, 예절바른, 신사적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civilis란 말이 단순히 시민의, 시민에 관련된 이란 뜻이 아니라, 예절바르고 인간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시민사회를 헬라어로는 Politike Koinonia라고 부르는데서 재확인됩니다. civilis는 Koinonia입니다. 즉 civil이란 말은 서로 사귀고 어울리며 친교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시민사회란 말이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인간다운 사회, 즉, humane society, 친교가 일어나는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야수적인 인간들, 독점적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상호 평등한 친교를 맺는 그러한 인간적인 사회를 말합니다.

이사야 11장에 나오는 비전과 다니엘서의 비전은 서로 통한다고 봅니다.

그는 정의로운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이사야 11:5-9)

이사야 11장에서는 몇 가지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째, 잡아먹는 야수와 힘없는 동물 사이에 친교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원들이 친교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이리, 표범, 새끼 짐승들을 끌고 다닙니다. 서로 상극들이 함께 어울립니다.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새끼 염소, 암소와 곰, 젖뗀 아이와 살무사, 사자와 소가 함께 하며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없습니다. 둘째, 이 텍스트가 그리는 정경에는 삶의 기쁨이 존재합니다. 생명력있고 약동하는 어린 것들이 등장합니다 (어린 양, 어린 아이, 젖뗀 아이, 새끼 사자, 새끼 염소, 송아지, 새끼 곰). 특이한 것은 육식동물이 더 이상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사자가 풀을 먹으니, 표범이나, 곰도 가장 흔하고 보잘것없는 풀을 먹을 것이 분명합니다. 동물들이 먹어도 계속해서 자라나는 것이 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풀을 먹는 동물들은 어떠한 곳에 가더라도 풀만 자라는 곳이면 살 수 있습니다. 풀을 먹는다는 것은 평화적이라는 뜻과 평등하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약자나 강자 모두 평등하고 검소한 평화로운 삶을 삽니다.
어린 동물 중에서 가장 연약한 것은 역시 사람의 아이일 것입니다. 야생동물들은 태어나자 곧바로 걷고 제 앞길을 챙기는데, 사람의 아이는 가장 오랜 동안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자연 속에서 가장 약한 자는 역시 어린 아이, 특히 젖먹는 아이일 것입니다. 가장 약한 자가 안전을 보장받는 사회가 이사야 11장의 비전입니다. 이사야 11장을 전반적으로 보면 생명력이 넘치고, 평화롭고, 인간과 자연이 한데 어울리는 친교와 관계의 사회, 강자와 약자 사이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의 모습울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신자유주의의 사회 속에서 약자의 권익이 침해되고, 사회적 생명뿐 아니라 신체적 생명마저도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사야는 전연 대조된 사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장의 비전을 좀더 구체적이고 경제적인 관점에서 다시 그린 본문은 미가서 4장 4절의 말씀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일할 터전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밀려나고 있고 불안정한 고용으로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이랜드라고 하는 기업은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전형적인 기독교 기업입니다. 기업의 경영이념도 매우 기독교적인 것으로 흠잡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업에서 지난 몇년동안 끊임없이 노동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랜드 기업이념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영이념에는 사원들을 이웃처럼 사랑으로 대하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직장은 인생의 모든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이어야 하며, 사회의 지도자를 길러내는 학교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념은 다른 상반된 이념에 의해 가려지고 있습니다. 그 이념의 몇 구절을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 "저희는 정직한 성공을 통해, 정직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또 부자답게 살지 않는 부자, 존경받는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부자가 되더라도 재물의 소유주가 아닌 청지기의 면모를 보여주는 기업이 되고자합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말하면서 노동자들을 구조조정의 명분으로 절반의 직원을 해직시키고, 비정규직 직원의 수를 늘리고, 비정규직을 더 불안정한 도급직으로 바꾸고, 임금을 3년간 동결하거나 삭감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경영 또다른 이념인 "기업은 반드시 이익을 내야하고, 그 이익을 내는 과정에서 정직해야 합니다"를 우선하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여기에서 "과정의 정직"을 이랜드는 이렇게 정의하는데, "과정의 정직이란 바른 삶의 모습을 통해 주변의 많은 사람과 기관에 도전을 주고, 노력한 대가만을 이익으로 거두며, 떳떳하게 세금을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랜드는 채용된 노동자들을 위해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표명했으면서도, 이익을 위해서는 사랑이고 뭐고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노력한 만큼만 가져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은 세금을 내는 것과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익을 위해 철저한 계산만 있지, 얻은 것을 나누는 인간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에게로 가 봅시다. 예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4).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 되고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가 도대체 어떤 것인가를 알려 주는 말씀은 구약에서 오히려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 사무엘에게 와서 왕을 임명해 줄 것을 요구할 때 그 의미를 하나님이 사무엘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 , .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삼 8:7). 그리고는 그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많은 것을 빼앗기겠고, 마침내 너희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이다(삼 8:18). 이 말씀은, 왕이 처음에는 백성들 자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노동과 소유 중 일부만(왕의 밭을 갈게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게도 하고, 향유를 만들고 요리를 하게 하고, 포도와 올리브 중 가장 좋은 것을 거두어 가고, 모든 소출의 10분의 1, 삼 8:11-17)을 가져갈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것은 신분적, 신체적으로 백성들을 완전히 종으로 만들고 말 것이라는 왕권제도의 논리적 귀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세상 권력자가 왕이 되어 지배하는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핵심이었으며, 예수는 이 전통에서 이것을 구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 안에 이미 와 있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 나라는 기존의 어떤 체제와 동일시될 수 없고, 다만, 지금 가난한 자들이 주인이 되고 그들이 기쁜 소식을 듣는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왕국을 요즘의 이슬람 국가들처럼 종교가 지배하는 신정국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신정국가에서도 백성을 억압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메시지는 철저히 인간적인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종교법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애적인 하나님의 법이 지배되는 나라였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civil society였습니다. 예수의 인간애적인 사회관을 단적으로 말하는 두 가지의 예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조차도 주인이다."(마가 2:27) 모든 주의주장, 이데올로기, 정책과 제도 이런 모든 것들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이것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그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사회적 비전이 얼마나 인간적인(humane)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이윤과 권력의 극대화를 위해서 서슴없이 인간의 사회적, 정신적, 육체적인 생명은 죽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해, 예수는 기업과 자본이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진짜 주인이라고 선언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쫓겨나고 있는 이 상황을 보면서 이 사회의 주인은 맘몬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선언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가 오신다면, 그는 IMF나 외국 금융자본과 같은 맘몬 세력에게 좋은 소식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가난하고, 직업에서 쫓겨나고, 건강마저 잃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돌아가는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다고 선언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인간적인 사회관의 두 번째의 예는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 특히 압바라고 불렀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람어의 압바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아빠(Daddy)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도나이, 야훼, 주(퀴리오스)라고 부르기 보다는 보다 친근한 이름 아빠로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억압과 권위주의적인 나라가 아니라, 평등하고 우애적인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빠의 표현을 보다 발전적으로 해석하여, 맘몬의 육에 의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자녀이며,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 될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롬 8:17a).
예수 그리스도는 맘몬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눅 16:13). 바울에게 있어서 맘몬에 해당되는 말은 육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평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맘몬을 이길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이 세상을 살면서 죽음의 세력인 육을 제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리고 바울도 모두 맘몬의 육적인 세력에 대항하여 평등하고 참여적이며, 상생의 시민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도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인으로서 인간적인 시민사회를 건설하고 이것을 경제와 정치의 각 영역으로 확장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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