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 성탄절, 그 오늘의 의미

이정배 | 2008.07.17 23:00:0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눅1:26-35,46-55
설교자
이정배 교수
참고
새길교회 2000.12.24 주일설교
어느덧 한해의 마지막 달, 12월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망년회, 송년회란 이름으로 옛것과 새것이 교차되는 이 시점을 의미있게 보내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온 삶에 대한 부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이 해의 남은 시간을 빨리 보내고 새해 맞기만을 간절히 희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은 시간을 새로운 날에 대한 기대 속에서 무가치하게 방치하는 경향도 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인인 우리에게 있어 12월의 남은 몇 날은 이 해의 찌꺼기가 아니라 새싹을 잉태케 하는 그루터기입니다. 한해의 말미에 있는 예수탄생은 하나님 자녀된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리는 지표로서 새로운 시간을 숙성시키는 은총의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에서처럼 시간의 끝에 매달려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입도록 하는 축복인 것입니다. 성탄은 이천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예수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 정신 속에서 재현, 반복되어야 할 현재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서 태어나소서."라고 우리는 노래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누가복음 1장 26-38절, 45-56절에 기록된 마리아에 대한 본문과 그를 중심하여 함께 연상되는 성서의 사건을 아우르며 성탄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수백년을 거쳐 민족의 고난을 경험해온 이스라엘민족들에게 있어서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은 긴급하게 당면한 일이었습니다. 로마 지배하의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 국가의 해방을 위해 메시아 탄생을 간절히 염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성서를 자세히 보면 이러한 기다림과 더불어 몇가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첫째는 메시아에 대한 대망이 민족차원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메시아 탄생을 원치 않았던 부류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정권에 빌붙어 자신들의 안락과 행복을 얻을 수 있었던 소위 가진 자, 기득권층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당시 이스라엘 왕 헤롯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메시아의 탄생소식을 전해듣고 자신의 위치를 염려한 나머지 두 살 아래 어린 아이 2만명을 죽인바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메시아를 기다리고 구원자를 바라는 사람들은 가난하며 억눌리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지고 부족한 것 모르고 자기 한계를 경험한 적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안정, 자신의 권위, 소유를 흔들어 놓는 위험한 존재일 뿐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남보다 앞서려고 안달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희미해지고 돈(물질)에 대한 신뢰만을 가슴에 가득 채우고 있는 시점에서, 네 것을 포기하라고, 네 자신을 희생하라고 말씀하시며 가난한 자, 낮은 자, 고통받는 자를 위해 오신 메시아가 혹시 우리들에게도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됩니다.

둘째는 모두가 메시아를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 오심을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며 매일 그 뜻을 묵상하고 그 징조를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당대의 사람들은 감나무에서 잘 익은 홍시가 떨어지듯 하늘로부터 메시아 탄생을 막연하게, 언젠가는 하며 기다렸지만 그 시점과 의미를 확신있게 알려고 하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시점에 이르러 유일하게 메시아 비밀을 알아차린 몇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진리만을 연구하던 동방박사와 밤새도록 양을 지켰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동박박사란 요즘말로는 학자들, 특히 철학자, 신학자를 말합니다. 근자에 학자들이 자신의 사명과 명예를 지키지 못한 채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본래 학자란 위의 것, 하늘의 징조와 변화, 시대의 의미들을 예민하게 듣기 위해서 명상하며 연구하는 존재입니다. 시대변화를 무감각하게 느끼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활동무대는 인간이 숨쉬고 먹고 살아가는 역사 한 가운데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징조를 알지 못하느냐고 외치신 예수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존문제, 질병, 가정내의 대소사등 실존적 문제에 사로잡혀 하늘의 변화, 역사의 징조들에 둔감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가 다반사입니다. 깊은 명상과 기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신문과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하여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기회 한 번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한 우리 시대를 향한 성서의 메시지를 놓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럴수록 오로지 하늘을 보며 진리를 추구하던 동방박사들의 모습이 마냥 그리워집니다. 또한 성서 안에서 우리는 성탄의 비밀을 터득한 목자들의 활약상을 봅니다. 목자들란 밤을 지새우며 양들을 이리떼로부터 보살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직업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우리 모두가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더럽고, 힘들고 보수도 적은 3D직업중의 하나라 할까요? 그러나 이들은 누가 보지 않았더라도 졸지 않았고, 게으르지 않았고 성실하게 양들을 보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말 성실한 민중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모두가 자고 있던 밤에 이들을 통해 메시아 탄생의 징조가 보인 것입니다. 힘들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일에 최선인 가난한 사람들, 쉽게 남을 속이거나 적당하게 거짓을 섞어가며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 속에, 마음이 가난한 이들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메시아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목자의 마음이 있다면 우리의 꿈은, 믿음은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째로, 이 글에서 결정적으로 말하고 싶은 사실은 동방박사나 목자들마저도 자신의 밖에서 발생되는 객관적 사건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때 그 메시아를 자신 속에서 잉태하여 낸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 예수 잉태 소식을 전해들은 마리아, 그래서 그 현실과 더불어 내적으로 투쟁(struggle)하고 있는 마리아의 고뇌 곧 마리아의 성탄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리아는 목수인 요셉이란 청년과 약혼한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다윗의 족보를 지니긴 했으나 가난했던 그러나 신실한 젊은 청년 요셉과의 결혼을 앞둔 마리아는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민족의 아픔, 메시아에 대한 대망도 잠시 잊은 채 자신의 결혼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네가 잉태하여 아기를 낳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편한 일입니다. 당시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처녀잉태란 자신의 인격적 죽음은 물론이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고 가족으로부터 등돌림을 당하고 고통이 수반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다음처럼 외칩니다. 아무리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하더라도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노라고! 절대로 그 일이 자신에게서 일어날 수 없음을 항변합니다. 어거스틴은 천사에 대한 마리아의 이런 반응을 당연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사에 대한 불신과 의혹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처녀성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고 가부장적 시각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외경에는 성령 잉태를 듣고 난 마리아가 하느님이 혹시 인간으로 변신하여 자신과 동침하는 것이 아닌가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마리아의 항변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서 안에는 이런 거부 의사가 한 두 번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제가 믿기에는 수십, 수백번 "하나님 안돼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라는 마리아의 절규가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라 하더라도 한 여인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꿈을 이처럼 산산이 조각나게 할 수 있겠느냐는 마리아의 항변을 온몸으로 긍정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메시아는 바록 원했지만 정작 메시아가 이렇게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의 계획을 송두리째 무산시키며, 핑계조차 될 수 없는 부끄러운 일로 다가왔을 때 마리아처럼 "안돼요."라고 외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해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위대함은 그 다음 말속에 있습니다. 오랜 고통, 번민 그리고 내적인 투쟁 끝에 그녀는 "당신의 뜻이라면 그것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가부장적 가치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신을 메시아 탄생의 도구가 되게 하겠다는 자기 확신의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대망하는 메시아 탄생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고백이지요.

첫 번째 성탄은 이렇게 해서 가능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엄청난 충격의 사건을 자신 속에 품어 안음으로써 예수, 모두가 고대하던 구원자 그리스도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첫 번째 성탄이자, 마리아의 성탄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마리아는 예전의 평범한 여인이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메시아를 탄생시킨 모태, 그 자궁은 정말 복이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어떤 예언자도 말하지 못했던 하느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여인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들을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메시아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공평치 못한 당시 사회권력구조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 곧 메시아 예수가 이룩해야 할 사명에 대한 비전을 힘차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 이후를 살고 있는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성탄절은 적어도 그 옛날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처럼, 주 메시아를 거추장스럽게 여긴 몇몇 사람들, 위에서 감 떨어지듯 기다렸던 사람들, 그리고 자신 밖의 객관적 사건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라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탄은 우리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기존의 생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지금까지 살아온 가치관으로서는 말도 되지 않는 엄청난 물음을 던지며 진리를, 메시아를 너의 가슴 속에서 잉태하려는 절대절명의 요구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슴이 진리를 잉태했던 마리아의 자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들의 삶, 자아의 죽음을 요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절대'라고 믿고 의지해왔던 가치관을 훌훌 털어 버리고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보화가 묻힌 땅을 사는 농부와 같은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분명 예수의 교훈은 세상이 주는 교훈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당시 유대율법은 암하렛츠, 곧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땅의 사람으로 규정하였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밥 한 그릇, 물 한 모금 주는 것이 곧 자신(하나님)에게 하는 것임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아침 9시에 부른 일꾼이나 제녁 황혼녁에 찾아온 일꾼에게도 같은 품삯을 주신 분이었습니다. 성탄은 바로 이 세상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의 가르침을 생명의 양식으로 믿고 살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얼마 전 타계한 모든 이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는 성탄을 보내며 전 세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We are called upon not to be successful, but to be faithful.(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불리워진 존재가 아니라, 진실하도록 불리워진 존재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남기고 떠난 테레사 수녀의 손과 발, 그 거친 모습은 그녀의 삶 자체가 바로 마리아의 자궁이었음을 우리에게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보다 다소 먼저 세상을 떠난 버나딘 추기경(이 분은 시카고 지역에서 소수민족을 대변하여 살았던 추앙받는 성직자였습니다) 역시 오랜 기간 암과 싸우면서 다음과 같이 죽음에 대한 생각할 거리를 남겨 주었습니다. 다음 내용은 [시카고트리뷴지]에 실렸던, 살아 생전 버나딘 추기경이 써놓았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한 지성인이자 신앙의 사람으로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고 말해야 하는 것은 내 자신이 죽음을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머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요, 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전 생애동안 신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순간 어떻게 죽어야 할까를 가르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느낍니다. 우리가 죽음을 자신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강화될 뿐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물론 센티멘탈한 감정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철저하게 복종시키기 위한 내적인 투쟁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 대한 우리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자, 죽음을 친구로 삼을 수 있는 능력과 불가분의 관계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자신의 죽음을 친절하게 받아들이는 일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도와주는 것은 결코 다른 일이 아닙니다. 죽음만이 진정으로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길게 인용한 죽음에 대한 버나딘 추기경의 마지막 고백속에서 저는 역설적으로 마리아의 성탄, 성탄의 오늘의 의미, 그 신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리아에게서의 성탄은 자신의 죽음, 곧 지금까지 이 세상과 관계 맺어온 자신의 삶의 포기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포기, 철저한 굴복이 있었기에-주님의 뜻이라면 그것이 나를 통해 이루워지다.-그녀는 여인으로 감히 말하기 어려운 마리아 찬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한해의 끝에 서서 기념하고 축하하는 성탄, 메시아의 탄생이 죽음과도 같은 마리아의 철저한 자기 굴복, 복종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음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죽음 속에서 비로소 우리들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며, 자신속에서 진리를 잉태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써 좁게만 살아왔던 우리 마음이 마음껏 밖으로, 타인을 향해 넓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된 형제들, 북녘동포들, 그들에 대해 닫혀져 있던 마음이 거두워지고 그들을 향한 마음이 열릴 때 우리는 메시아 왕국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한번 성탄의 절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신비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소리는 우리들에게 다음처럼 속삭입니다.
"너희의 가슴을 마리아의 자궁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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