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고린도전 › 기억, 기념, 그리고 결단

한완상 형제 | 2008.07.22 23:44:4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고전11:23-26
설교자
한완상 형제
참고
새길교회 2001.1.7 주일설교
고린도 전서 11장 23-26절; 마가복음 14장 9절

저는 올해로 만 96세가 되는 장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지금 심신이 지쳐 계시고, 기억력이 오락가락 하십니다. 때로는 사위인 저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며칠 전 막내딸이 오랜만에 찾아와서 외할머니를 뵙고 라고 물었는데 알아보지 못하자 막내딸은 마음이 아파 울었습니다. 직장 일로 바쁜 엄마의 사랑을 대신해서 정성으로 우리 막내딸을 길렀던 분이 바로 장모님이었습니다. 저는 깜박이는 장모님의 기억력을 체험하면서 인간의 본질,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존엄을 지니는 것은 그의 기억력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기억할 수 있는 한 비로소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 살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억력 상실은 가장 심각한 인간 질병인 것 같습니다. 가장 비참하게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질병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억력 상실 또는 치매는 남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남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곧 남과 자기와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소중한 것일수록, 치매는 치명적 결과를 낳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소중한 관계의 파괴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되면 자기자신도 누구인지 모르게 됩니다. 엄마가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에 걸리게 되면, 자식도 자신도 모두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데는 사회적 자아(social self)의 형성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 정체의식이 이뤄져야 비로소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기억력 상실증은 자기정체를 파괴시켜 인간을 인간이하 수준으로 떨어지게 합니다. 정말 무섭고 비극적인 질병입니다. 동물조차도 제 새끼와 이웃을 알아본다고 하는데, 기억력을 상실했다고 하는 것은 환자가 인간이하의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가볍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만이 치매에 걸리는가 하는 물음에서 비롯됩니다. 종교는 어떤가요? 종교치매, 또는 신앙치매는 없는가요? 있다면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역사적 예수를 오랫동안 잊고 있는 기독교의 오늘의 몰골은 어떠한가요? 이 같은 질문이 21세기가 시작되는 지금 이 시간에 저를 끊임없이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2001년 1월 첫 주일에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기독교와 기억력을 함께 잠시 생각해 봅시다. 하기야 모든 종교는 그 신도들의 기억력을 촉구시킵니다.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성현들의 말씀들을 제대로 기억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기억력과 회상력이 없다면 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더 더욱 신자들의 기억력을 소중히 여깁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일깨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사실, 광야의 40년간 방황의 쓰라림 등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 백성이 이집트에서 당했던 억울한 고통을 기억하여, 고아,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잘 영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역사 현실 속에서 직접 보여주신 그 사랑과 정의의 체험을 잊지 말고 대대로 회상하기를 원했습니다. 십계명도 그 절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또 절반은 이웃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지키도록 당부하는 하나님과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신앙치매에 걸리게 되면 이웃과의 사회적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과의 신앙관계도 붕괴되고 맙니다.

새로운 계약으로서의 신약의 의미도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기억하는데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신 영적 존재였던 역사적 예수께서 특별히 기억하라고 당부하신 사건이 무엇인가를 한번 찾아보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하기야 예수님의 말씀 모두를 기억하고, 기념하고,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그것을 실천해 내는 것이 예수 따르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당부하신 말씀이 있다면, 그것에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다 보람있고 바람직한 삶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이 본문들에 나타난 두 사건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된 것이어서, 우리의 기억이 이 사건에 대해 더욱 초롱초롱하게 살아나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한 여성의 행적을 예수님께서 기억하고 특별히 기념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여성은 창녀였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을 헤매며 비참하게 살아온 천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을 끈질기게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감히 근접해 보려고 모험을 시도했습니다. 비상한 신앙 벤쳐 정신을 지녔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몸을 팔아 소중하게 모았던 값진 향유가 가득히 담겨있는 옥합을 갖고 예수께 접근했습니다. 자기 전 재산을 들고 예수를 찾아온 것이지요. 그런데 그녀가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경건한 종교지도층의 집에 묵고 계신 예수를 그는 비상한 각오를 갖고 찾은 것입니다. 예수를 보자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전 재산인 옥합을 깨트립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향유를 예수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종교의 위선으로 가득했던 그 집안에는 헌신의 향기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에는 이것을 의미 없는 낭비로 본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비를 걸고 싶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천녀(賤女)의 고상한 행위를 말리거나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 그의 장례를 미리 치르는 것으로 받아드렸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은 회고컨대 남성들만으로 이뤄진 최후의 만찬보다 더 감동적인 헌신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여인의 헌신적 행적을 기억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헌데, 기독교의 역사는 그간 예수의 이 기억명령을 잊어먹는 쪽으로 펼쳐진 것 같니다. 초대 교회가 조직화되고, 그 속에서 남성들의 권위주의가 제도화되면서 이 여성의 행적은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이 여성의 행적만 잊어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당부도, 예수의 말씀도, 역사적 예수의 삶도 잊어먹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정착되면서 역사적 예수 전반에 대한 기억력 상실증이 더욱 심화된 것 같습니다. 사도신경을 보면 역사적 예수는 빈칸으로 남아 잊혀지고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여기에 예수님은 나시자 곧 죽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열린 밥상공동체 운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지고 무상의 치료 행위 속에서 뜨겁게 세워지는 감동적인 장면들을 친히 실천하신 역사적 예수의 삶과 말씀은 증발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바로 예수 치매증이라 해서 지나친 것일까요? 서구의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는 그후 천 육백년간, 이 여성의 헌신적 행적을 편안히 잊어 먹었습니다. 그뿐입니까 그 장구한 세월동안 예수도 잊어버린 셈이지요.

이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생각해 봅시다. 죽음을 예감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 함께 만찬을 했습니다. 이때 그는 떡을 떼어 주면서 떡 뗌의 뜻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나누면서 역시 잔 나눔의 깊은 뜻을 항상 되새기도록 권면하셨습니다. 기억력이 살아있는 한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올곧게 해석하여 그것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따르미의 삶이 바로 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떡을 떼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비움(kenosis)을 뜻합니다. 떡은 먹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요. 떡이 먹히지 않은 체 스스로 오래 존재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남들에 의해 먹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남에 의해 먹힘으로써 그 남들을 살리는 떡입니다. 이 같은 말씀은 당시 상황에서는 혁명적 발상이기도 합니다. 예수 당시까지 유대 근본주의자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자기를 채우는 강한 하나님이었지요. 남들 위에 군림하여 무서운 심판을 내리는 절대자였지요. 그런 뜻에서 유대인의 하나님은 즉자적 신(卽自的 神) 이었습니다. 즉자적 존재는 결코 자기자신을 비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을 비워 자기가 살찌는 것이지요. 헌데 떡이 되신 예수님은 남을 위해 자기를 철저히 비우시는 대자적 신(對自的 神)을 직접 체험하시고, 당신이 그러한 신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게다가 그 떡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 나눔은 자기를 비우는 사람들이 개별적 존재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유대를 갖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참다운 공동체란 원래 대자적 공동체요, 스스로 비우는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몸, 예수의 떡이라고 자처하는 교회가 스스로 비우기는커녕 더 많이 채우고 더 많이 키워서 자기 자식에게까지 확장시키려는 것은 예수님의 당부를 까맣게 잊어 먹었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신앙치매에 걸렸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떡을 예수님께서 자기 몸이라고 하셨는데, 몸은 유기체로서 각 부분간에 긴밀한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각 부분이 따로 놀게 되면 몸은 병들게 되어 깨어지게 됩니다. 몰론 부분들간에 차이는 있습니다만, 그 차이는 차별의 구실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부분의 고통은 반드시 전체의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되지 못하고 오히려 끊임없이 분열되어온 교회나 교파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최후만찬에 대해 심각한 치매증이 걸렸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잔의 나눔도 마찬가지입니다. 잔은 예수님의 피라고 했습니다. 피 나눔은 곧 생명 나눔입니다. 피로 맺은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헌데, 여기 피는 생물학적 피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한 차원 높은 피입니다.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흘리는 피이므로, 거기에는 감동적 자기 희생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피 흘림을 통해 남의 피 흘림을 막는 고상한 박애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희생을 통해 참된 평화를 이룩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에는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무력이 필요하겠으나, 에는 남의 피를 흘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희생을 먼저 해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도 숭고한 자기비움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성찬식을 주기적으로 거행하는 교회들이, 그리고 교인들이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온갖 세속적 분쟁과 갈등을 못 본체 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고 있다면, 이미 깊은 신앙 치매증에 걸려 있음이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예수 따르미들이 남북간의 냉전대결과 냉전 증오를 당연히 거부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 치매증에 걸린 신자들은 냉전증오를 더욱 부추겨 피 흘리는 일을 즐겨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기억력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 신자들이 예수 치매증에 걸린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합니다. 정신병 환자도 자기가 정신병에 걸렸음을 안다면 치료가 보다 쉬울 것입니다. 치매 증세를 지고 있음을 아는 것이 치유에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 치매는 고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치유는 현대의학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 치매는 회개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습니다. 작년 3월 교황이 지난 천육년간 교회가 저질렀던 죄를 회개했듯이, 우리 기독교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그간 심각한 신앙 치매증에 걸렸음을 통회자복해야 합니다. 특별히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 잘못을 통회해야 합니다.

특히, 성만찬에 임하면서 잊혀진 그 여성의 결단을 기억하고 기려야 합니다. 옥합을 깨고 예수님께 헌신했던 그 감동의 순간 순간을 회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지난 이천년간 교회 안에서 저질러진 성차별의 관행을 깨트리는 결단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성만찬에 임할 때마다, 卽自神을 믿어온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스스로 피 흘려 비우시고 스스로 떡으로 자기 몸을 내어놓으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떡과 잔을 나눌 때 對自神의 몸과 살을 나누는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떡과 잔을 나누면서 우리는 기억력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예수의 말씀과 삶에 대해 더 뚜렷한 기억을 해내고, 그것을 기리며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2001년은 한국 교회가 거듭나는 해, 한국 크리스찬들이 진정한 예수 따르미로 거듭나는 해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신앙 치매를 그리고 특별히 예수 치매증을 통열한 회개를 통해 치유해야 합니다. 성만찬은 바로 그 치유의 시간입니다. 그 통회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치유 받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것을 잊지 맙시다. 오늘도 떡을 떼어 나누고 잔을 마시면서 잊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상기합시다. 그리고 그 분을 기념하고 그 분의 삶을 살려고 결단합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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