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전도서 › 우리 삶의 창조적 시간과 공간

최만자 | 2008.07.23 16:51:0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전3:1-11
설교자
최만자 자매
참고
새길교회 2001.1.28 주일설교
구정은 지난해를 조금 더 연장시켜 주고 새해 시작도 한번 더 할 수 있게 해주어서 시간의 흐름을 늦추어 주는 듯합니다. 해가 이렇게 훌쩍 훌쩍 가면 나이 먹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우리 모두 시간 안에 사는 존재들, 우리의 년수가 차면 결국 지금의 존재를 마감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자녀를 너무 일찍 잃어 가슴에 멍이 든 이들도 있고 배우자를 먼저 보내어 불행해 하는 분들도 있고 부모님과 이별하여 극심히 슬퍼하는 이들도 있고 형제자매를 더 볼 수 없게되어 낙망하는 이들도 있지만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법 안에서 보면 그 이별들은 지극히 짧은 순간이요 언젠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나는 나그네들이요 먼저간 이들과 같은 길을 갈 뿐입니다. 저는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없이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까마득한 멀고 먼 험난한 길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느새 저도 인생 6학년 문턱 앞에 다다라서 돌아보면 50 여년 세월이 정말 쏜 화살같이 휙 지나왔습니다.
이토록 급히 흘러가는 시간을 보면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적 한계상황의 우리 존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라는 심각한 종교학이나 철학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 이야기는 요즈음 사람들이 부쩍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근대적 시간과 우리 삶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새 천년이니 새 세기이니 하면서 전적으로 새로운 시간을 기대하는 관심에서 이 시간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 많이 회자되는 듯합니다. 우리가 미래의 시간을 특별하게 기다리는 것은 아마도 미래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입니다.
혹자들은 근대적 시간과 공간의 특성들이 인간의 삶을 상당히 비인간화시킨 부정적 측면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새 밀레니움, 새로운 세기는 이 근대적 시간개념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이어야 할 것을 기대합니다.
먼저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조절하고 통제, 관리하며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시간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냅니다. 우리의 삶은 시간에 맞추어 진행됩니다. 오늘아침 여러분은 11시 30분 새길교회 예배시간에 맞추어 모든 것을 진행함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배는 한시간 동안 진행되도록 짜여져 있습니다. 가끔 긴 설교에는 조바심을 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시간이 되면 끝내야 합니다. 따라서 중도에 끝나는 비극을 피하려면 우리는 해야 할 말의 분량과 말하는 속도를 시간에 맞추어 조절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직장에의 출퇴근 시간, 학생들의 등하교 시간, 시간표대로의 공부, 백화점의 개폐점 시간, 병원 예약 등 등 모든 것이 시간에 의해 움직입니다. 제 친구가 15-6년전 미국 이민을 갔는데 세탁소를 하는 미국인 이웃과 아주 친밀하게 지나게되었습니다. 어느 날 급히 세탁 맡길 옷이 있어서 달려갔는데 그 세탁소는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데 이 친구가 5시 5분에 갔습니다. 유리문 안에 주인이 있어서 친구가 옷 맡기러 왔다고 밖에서 몸짓을 했더니 그 친한 미국인이 팔목을 높이 쳐들고 자기 손목시계를 가리키면서 5분이 지났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그 친구가 느낀 황당함은 말 할 수 없는 것이었답니다.
이렇게 시간은 우리의 행동과 말, 사고를 제약하고, 그 흐름을 적당한 단위로 절단하여 채취하는 '시간'기계입니다. 째깍 째깍 거리며 우리 삶을 절단하는 시계-기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 개념이 근대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농경사회는 삶이 자연의 리듬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강제하는 것은 자연밖에 없다'라고 합니다.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일하기 시작하고 저녁 해가 지면 돌아와 쉽니다. 노동의 양과 방법도 각자 맡은 과업을 각자가 알아서 완수 수행하면 되는 과업-지향(task-orientation)적인 것으로, 자연적 리듬과 잘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노동생활을 자신이 조절하면서 살면 되었고 한바탕 일하고 한바탕 노는 형태가 반복되는 삶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생활은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낭비적이고 무책임하며 절박함이 결여된 게으른 태도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산업혁명이후 공장에서 기계화에 의한 대량생산, 분업화의 발달, 속도의 가속화 등의 생산양식 변화는 곧 시간의 효율성, 능률적 시간 활용을 최대의 가치로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최대로 활용,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높이 평가되어 노동자체가 아닌 [노동시간이 가치로] 정의되어진 것입니다. '시간 내에', '시간에 맞추어-혹은 더 빨리' 일하고 사는 것이 세상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가치를 최대화시키고 양산 한 곳이 공장이며 공장의 규칙에서 그 사실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작업시작 10분후 정문을 폐쇄한다', '기계가 작동중인 동안 자리를 비우는 직공은 한시간에 3펜스 벌금을 물어야 한다', '3분 늦게 온 노동자는 15분에 해당하는 임금을 벌금으로 물어야 하고 20분 늦게 온 노동자는 하루 일당의 1/4를 벌금으로 물어야 한다'는 등 노동 가치가 시간으로 계산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간-기계가 사람들의 활동만을 강제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까지 침투되어 특정하게 코드화된 행동 양상, 습관 양상으로 신체에 새겨지는 일종의 생체권력(bio-power)으로 까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보다 더 선호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한가지 일을 하면서도 주위의 모든 것에 대응하고 신속히 동작하는 사람, 예리한 시선, 생동감 넘치는 기민성 이런 것이 인정받는 행동이 됩니다. 이런 능률적, 효율적 행동 양상, 습관 양상들은 많은 것을 합니다. 시간은 낭비하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나고, 운동하고, 배우러 다니고, 이런 양상이 유행되어 우리 삶을 휩씁니다. 시간표를 쭉 세워놓고 바쁘게 움직입니다. 요즈음 낮에 집에 전화를 걸어 집에 있는 주부는 아주 예외적 경우들에 속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제가 아는 여자 전도사님 얘기가 자기교회 권사들 가운데 만날 약속이 취소되는 경우 그것을 어떻게 감당 할 줄 몰라 당황해서 자기를 불러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왜 바쁜지, 왜 그 일을 해야하는지 생각 없이 쉬는 것을 낭비로 생각하면서 무엇이든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쁘게 사는 근원이 근대적 시간가치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제 공간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공간에 따라 우리 행동과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상식적인 일일 것입니다. 학교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공장이나 집에서 하는 것과 다릅니다. 성당이나 교회나 절의 경내에서는 믿음의 여부와 무관하게 그 공간은 우리의 행동과 사고를 제약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말과 행동, 사고를 제한하고 특정한 형태로 반복하게 하는 '공간 기계'입니다. 근대적 공간이해의 특성은 공장, 학교, 집과 같은 공간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공장에서는 동일한 시간 동일한 공간에서 노동하게 함으로서 생산의 확대를 가져오게 되고 집단의 획일화, 통제화 그리고 같은 행동의 양식화를 가지게 됩니다. 근대적 학교 출현은 학생을 통제하는 양식을 갖게 되고, 후기에는 학급 분할 방식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사람을 등급화하여 통제하게 됩니다.
근대적 집은 사적인 폐쇄공간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근대이전의 집은 집안에 상점이 있거나 작업장을 가지고 있어서 집밖의 거리와 그렇게 확연하게 불연속적 공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산장 소위 공적영역과 삶의 장소 곧 사적영역이 분리되어졌고 근대에는 독자적 생활공간으로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으로 집이 철저하게 분리됩니다. 그래서 근대적 집 공간은 오직 사적 생활공간, 사생활 보호지역으로 폐쇄적 공간이 되어 공공성과 활동성이 제거되어졌습니다.
지금의 우리들은 상업화에 의하여 우리 공간이 통제와 획일화되는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 가까운 고속버스터미널에 센트랄 시티라는 새로운 타운이 형성되었습니다. 근사한 호텔이 들어섰고 이름 있는 백화점도 들어섰습니다. 그곳의 교통 지옥은 이전부터 심각했는데 지금은 더 복잡한 상태입니다. 건축기간 동안 사람들은 교통 문제등을 지적하면서 비인간화시키는 건축이라고 그 타운형성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건물이 완성되고 자리가 잡히면서 주위의 삶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의 결혼식이 거기서 치루어 지고 아이들은 신기한 새 공간으로 몰리고 하교 때 틈틈이 들리는 주된 생활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만남의 장소가 되어 호텔에서 모임을 갖고 쇼핑을 하면서 그 공간은 어느새 우리 삶을 지배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 공간에서 출현되는 패션이나 음식거리나 이런 것들이 우리 생활모습을 불원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제 손자는 그 곳 스누피 하우스에 다녀 온 후로 스누피 그림이 있는 옷, 물 컵 등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 동네에 살면서 거기 한번 안 가보면 촌뜨기가 되고 사람들은 거의 같은 형태로 그 공간과 연결되는 생활을 가지게 되어 삶의 양식들이 획일화되어집니다.
몇십년 전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공간이 생기기 시작하였을 때, 또 집들도 새로 많이 건축되던 시절에는 집들이가 잦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더 이상 가정집에서 모임을 잘 갖지 않습니다. 모두 밖에서 만나 즐깁니다. 아파트 안에 헬스클럽이며 골프연습장이며 수영장 등등의 시설이 갖춰지면서 4천만이 운동선수가 될 것 같이 모두 운동을 합니다. 어느 음식점이 어떤 음식을 잘하고 어디가 좋은 찻집이 있고,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몰려다닙니다. 아이들은 방학 때 일기를 쓰기 위하여 여행을 해야합니다. 공간의 차이가 생각을 다르게 만들고 삶의 형태를 결정 지웁니다.

이러한 근대적 시간 공간-기계가 성립된 것은 사람들의 활동과 행위를 획일화 양식화시켜서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규율과 체계와 연관되어집니다. 그리고 그 통제된 생활 양식들이 일반화되고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 하나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이 시간-기계와 공간-기계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나는 내가 아니라 근대성의 한 부분이요 근대성의 삶의 형태에 묶여 있는 한 부속품이 될 뿐입니다. 다시말해 지금 우리의 삶은 근대적 가치의 시간과 공간의 통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우리의 자유와 생명력을 감소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게됩니다. 우리의 하루 시간이 어디에서 어떻게 보내어지고 있는 것일까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근대적 시간과 공간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소리를 높이 외치게 됩니다. 우리를 효율성과 획일화에 길들이고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의 탈출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그의 글에서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한가로이 걷기, 듣기, 고급스러운 권태에 빠지기, 꿈꾸기, 기다리기, 시골고향 가기, 글쓰기, 포도주 한잔 마시는 지혜, 모데라토 칸타빌레라(절약, 절제의 윤리이야기)는 등의 소제목들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자는 느림의 영역을 삶의 방식으로 선택했는데 그것이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보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다리기 싫어서 정각에 점심식사 장소로 달려가거나, 수업시간에 제일 앞이라야 직성이 풀리고 상위권을 유지하기 위해 종종 걸음으로 다니는 걸음들이 그는 싫었다는 것입니다. 가끔 시골 농가를 방문하는 도시인들은 농가 주변을 슬쩍 보는 것만으로 농촌을 모두 안 것 같이 구는 것도 우습게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느림이 삶의 선택의 문제라고 합니다.
저자는 모든 인류에게 부여된 삶의 시간을 참되게 누리기 위해서는 나만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말하기를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 라든가 영원에 가까운 허무 속으로 숨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것은 오직 시간에 쫓기는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만의 리듬에 맞추어, 더 정확히 말하면 내 팔자가 내게 운명지어 준 리듬에 맞추어 조용히 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나를 내가 지켜 나갈 수 있기 위하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생각을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의 한가한 감상이라고 비난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명퇴이후 당장 먹고 살길을 걱정하는 이들, 수많은 실직자들이 노숙과 방황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더 바쁘게 일할 수 있고 더 능률과 효율성을 찾아야 할 판인데 왠 철딱서니냐고 ...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때 우리는 여유를 사랑하고 느림을 찬미 할 수 있는 사고와 행동이 더 필요하고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이 임금을 조금씩 줄이고 일자리를 나누는 고용제도를 선택하여 실직자를 줄이는 것도 느림이나 기다림의 철학이 있어야 가능하며, 실직이 불행만이 아니라 다른 삶을 창출할 기회로 만드는 계기를 가지는 창조적 사고도 통제된 획일화된 삶을 벗어날 수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IMF는 근대성의 부정적 결과입니다. 실제로 실직을 당한 한 사람이 자녀교육이며 살길이 막막해진 상황에서 처음엔 당황했으나 삶의 양식을 완전히 바꾸어 아이들을 직접 가르쳐 과외비를 없애고 절제의 삶을 가족이 즐거운 공동생활로 실천하는 등 삶의 양식을 완전히 바꾼 후 경제적 문제가 생각보다 2차적인 것임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성서본문을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설교시간에 성서를 뒷전으로 몰아놓고 세상이야기만 장황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는 성서가 권위를 가지는 것은 오늘 우리 삶의 문제에 생명력을 주기 때문이라고 믿고 따라서 성서는 오늘의 상황의 물음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상황이 텍스트이고 성서는 우리본문을 조명해주는 reference(전거)라고 생각함으로 우리 상황 곧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 본문 전도서 3장은 성서 안에 시간에 대해서 대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똑딱거리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관심을 두는 시간은 어떤 특정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순간, 또는 그 사건들이 변천되는 그 시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집니다. 이 전도서는 역사의 시작과 종말의 직선적 시간관을 가진 것이 아니고 동양적인 순환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어 히브리 예언자들처럼 역사의 시작과 종말로서의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합니다. 오직 일상적 삶의 매 순간순간들의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집니다. 이 다양한 삶의 때들은 시간-기계에 의해 발생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의 운행과, 자연의 흐름과 심지어는 인간자체의 심리적이고 생체적인 리듬을 따라 발생된 것들입니다. 인간은 이런 때를 받아들이고 기쁘게 살고, 살면서 좋은 일을 하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전도서 3장의 시간이해를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는 전도서는 모든 시간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시간의 주관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의 전환점이든지 혹은 개인 생활의 전화점이든지 간에 시간을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시간들을 받았습니다(시31, 롬14:8). 그러므로 시간의 운행은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 안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고 모든 때는 하나님의 운행하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인간은 그 하나님의 시간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전도서의 말씀은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때를 주관하신다는 이 말이 인간이 운명론적으로,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의존되어 살아감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이 자기의 출생에 대하여 아무 자유가 없으며 또는 죽음에 대해서도 거의 자유가 없습니다. 전도자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계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기계로 인간의 삶을 절단하고 통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도자가 하나님의 영역으로 해석하고 있는 이 시간의 자리는 인간사에서 결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삶의 사건들, 삶에서 수없이 경험하는 사건들이 인과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비한 비밀스런 영역으로 인간에게 주어졌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과거,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었지만 인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11절).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인간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실들의 의미를 잘 알 수 있기를 바랐지만 인간이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이 통제적으로 인간의 때를 운영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인간은 자연발생적 흐름의 사건들의 때를 알지 못하고 다만 그것을 신비의 영역으로 인정하며 사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인간 자신이 부여받은 그 시간들은 스스로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자연적 삶의 리듬을 따라 발생하는 때를 받아들이고 그 때를 여유와 기쁨과 최대한의 자기자신의 창조적 삶의 때로 만들어 가면서 사는 시간을 말해 줍니다. 바로 12-13절에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자연스런 리듬의 때를 받아들이고 기쁘게 살고, 살면서 좋은 일 하는 것, 이것이 시간에 대한 창조적인 느림의 철학적 이해와 상통한다고 생각됩니다. 전도서는 때는 하나님의 영역이며 인간은 그 신비로운 영역을 그대로 두고 경험하게 되는 때의 현실들을 최대한 자율적으로(기쁘게), 창조적으로(좋은 일 하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주관과 인간의 자율적 시간운영이라는 역설적 시간해석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 번째로 전도서의 교훈은 인생의 시간을 한 때, 한 순간으로 생각하고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수많은 때들..... 그 한 때, 한 때들은 모든 때를 전체로 연결하여서 보아야만 진정한 인생의 시간, 때를 여유롭고 창조적으로 지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읽은 글 가운데 왕진민 북경대 철학과 미학분야 부교수가 바이마르 국제 에세이 콘테스트에서 수상작 열편 중 6위에 입상한 '하나님의 장기판'(상제기국)이라는 글이 이 전도서 3장과 연관되어 생각납니다. 이 글에 나오는 우화가 있는데 신기한 시간대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하느님이 인류 창조사업을 완성한 후 그는 인간을 위해 놀이거리를 만들어 시간을 보내게 하자는 자비로운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시작은 되었지만 끝나지 않은 장기판을 펼쳐주었다. 하느님은 본래 승부가 나는 장기판을 펼쳐주려 하였으나 언젠가 결판을 낸 후 인간에게 놀이거리가 소실되면 그 후 인간은 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여 무승부 장기판을 펼쳐 놓았고 인간은 끊임없이 두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인간은 승부를 가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합니다. 장기두기가 오래 계속되면서 하나님이 펼쳤던 원래 국면은 흐려지게 되고 때로 기사들은 그 원래 국면을 회복하기를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에게 놀이를 주는 것이었고 승부를 얻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승부가 나지 않더라도 장기 두는 기술은 높아져 일종의 예술과 품격을 표현하는 경지를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장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두었고, 장기 두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많은 즐거움을 얻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에 아주 만족하게 생각하였다"는 우화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삶의 시간들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러나 근대적 시간이해처럼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을 승부를 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파괴되고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땅의 삶의 시간들은 무승부의 장기판입니다. 장기 두는 기술을 높이며 일종의 예술과 품격을 표현하는 경지의 삶, 그래서 즐거움을 얻는 삶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저 시간들, 우리를 통제하거나 유혹하는 저 근대적 공간들로부터 해방되어 들어갈 수 있는 창조적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한 시간을 받아들임으로서 주체적 자기시간과 공간을 가질 줄 아는 능력을 우리가 얻게 될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의 시간들을 깊이 드려다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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