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 여성없는 교회가 예수의 몸인가?

한완상 | 2008.07.23 16:56: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막15:41
설교자
한완상 형제
참고
새길교회 2001.2.4 주일설교
막15:41디모데전서 2장 11-12절, 3장 2절

새길 공동체가 곧 열네번째 생일을 맞습니다. 처음부터 이 공동체는 평등공동를 지향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평신도 교회라고 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조직적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목사 안수 받고 신학박사 받은 형제자매도 어디까지나 예수님 앞에서는 한낱 평신도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전도사 등의 통상적 교회직분의 칭호도 저희들은 쓰지 않습니다. 서로 자매 형제로 불러오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요, 평등하다는 신앙 때문이지요. 정말 자랑스러운 짧은 전통을 우리는 그간 누려왔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 아직도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는 남녀간의 차별이 없다고는 하겠지만, 아직도 性분업에 관한 한 우리 공동체에는 마리아보다 마르다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여성 스스로가 마리아의 역할 보다 마르다의 역할을 더 편한 것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물론 제 판단이 틀렸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 열네 돌을 앞두고, 21세기 첫해부터 새로운 전환점에 우리는 도달한 것 같습니다. 여성이 교회살림의 책임자로 뽑힌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에서 예수공동체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그의 짧은 역사적 삶 속에서 이룩하시려했던 하나님나라의 평등한 모습과 초대교회의 예수운동 속에 여성의 두드러진 헌신의 모습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길 공동체가 바로 이러한 예수운동의 공동체를 지향해야한다면, 더더구나 예수 제자들 중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여성 제자들의 그 헌신, 그 충성심, 그 믿음, 그 용기를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되돌아보고,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그들의 모범적 삶에 조응시켜야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하느님나라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처음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의 문하생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묵시 종말론적 희망을 지녔습니다. 역사 밖에서 무서운 심판 주로서 역사 안으로 개입해 들어오시어 선과 악을 구별하고 악을 징벌하시는 종말론적 신앙을 갖았던 것 같습니다. 헌데 세례요한은 무참히 정치적 순교를 당했습니다. 묵시 종말론적 신의 개입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때부터 당신의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역사 밖에서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 극적인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 누룩처럼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공동체 내적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계급의 벽, 지역의 벽, 인종의 벽, 성(性)의 벽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착실히 하느님의 평등공동체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첫째는 활짝 열린 식탁공동체를 펼쳤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대체로 식탁은 그 사회의 기존계급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일류 고급호텔의 프랑스 식당에는 상류계급의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허름한 시장바닥의 해장국집 식탁주변에는 주로 노동자들이 모여들게 마련이지요. 예수님 당시 식탁은 단순한 밥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계급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상류계급은 그들대로 따로 식탁에서 만났고, 하층민들은 하층민 밥상에서 서로 대면했습니다. 밥상간의 차이와 차별은 엄격했고, 철저하게 제도화되었습니다. 마치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변소나 식당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계급적 제약 속에서 예수님은 밥상공동체를 모두를 위해 를 위해 활짝 여셨습니다. 양반도, 상놈도, 주인도, 노예도, 이방인도, 유대인도, 남자도, 여자도 그 누구도 예수의 초청대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초청은 파격적이었고, 예수의 부르심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계급의 벽을 단단히 세워야만 기득권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당시 상류층 사람들은 이 같은 예수의 파격적 밥상공동체운동을 달가워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점잖은 상류층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과 비교하면서 , 등으로 비난했지요.(마태 11:18-19) 예수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술에 취하거나 밥을 많이 실컷 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식탁이 강요했던 부당한 계급적 차별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식탁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깨트리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새 하늘, 새 땅을 이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식탁 둘레에는 남과 여, 주인과 종,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차별 없이 둘러앉아 사랑과 우애, 평화와 환희의 담소를 하면서 음식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 이것은 가장 원초적인 인간 행위입니다. 이 같은 원초적 차원에서부터 존엄한 평등은 보장되어야만, 사회전반이 올곧게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밥상운동은 단순한 먹자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평등이 뜨겁게 이뤄지는 평등공동체, 사랑공동체 운동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예수님의 잔치비유도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나라를 잔치로 비유하셨는데, 그 중심 뜻은 세상의 온갖 변두리 인간들, 잡스러운 존재들, 지극히 작은 자들, 이를테면, 이방인, 과부, 고아, 나그네, 가난한자들, 병신들, 병자들, 왕따 당한 사람들, 뿌리 뽑힌 존재들, 핍박받는 자들, 바로 이 같은 인간들이 진정한 주인노릇을 하는 마당이 바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가난하여 치료비를 댈 수 없는 절망의 환자들, 몸도 병들고 정신적으로 저주를 받았던 환자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아픈 사람들, 한 몸만 아플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정죄 받았던 병자들을 고쳐 셨습니다. 몸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회·종교적 저주로부터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중병 환자를 고쳐주시면서,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지금도 다소 그러하지만, 예수당시에는 종교적으로 불결한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중병에 걸리면 초조하게 죽음의 그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몸과 마음의 아픔을 더욱 아프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이 없고, 종교적으로 불순하여 도무지 명의로부터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절망의 존재들에게 나음의 희망을 안겨주셨지요. 총체적인 나음을 무상으로 선사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은 흐뭇한 평등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예수님의 이 같은 하느님나라를 그의 제자들도 계속 세워보려고 힘썼습니다.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셨다고 믿었던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에서는 적어도 초기에는 평등한 하느님 공동체의 모습이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구체적 증거가 여성 제자들의 활약, 그들의 역할과 지도력이 뚜렷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모두가 교회의 중요 직분과 권위에 대한 동등한 접근(equal access)을 누렸던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중요직분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는 뜻에서 환치성(interchangeability)이 보장되었습니다. 이 같은 평등성은 초기의 에서는 보장되었습니다.

헌데 교회 규모가 커지고, 당시 로마 희랍적 제도의 영향을 받게되어 가정교회가 으로 커지면서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비전은 희미하게 되어갑니다. 구체적으로 여성의 역할과 지도력이 제약받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이 점차 사라지게 된 셈이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의 머리 수는 증가되었지만, 여성의 지도력은 사라지게 되었지요. 안에서는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바람직하지 않은 새로운 흐름, 反 예수적 흐름은 목회서신이 통용되면서 더욱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 같은 흐름을 뚜렷하게 반영합니다. 여자는 있어도 없는 듯해야 합니다. 그저 조용해야만 합니다. 여자가 부지런히 활용할 신체부분은 입과 머리가 아니라, 손과 발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머리와 입은 아주 불필요한 것, 심지어 불경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기에 교회 감독은 남자들의, 또는 남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여성 감독이라니, 그것은 모독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새길 공동체 자매형제 여러분
바로 이 같은 반 예수적 흐름이 목회서신들에 뚜렷하게 나타나고, 초대교회 안에서 여성들에게 종교적 재갈을 물리고 있을 때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서 기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름을 빌어 편지를 썼던 목회서신 기자들이 교회 안의 가부장적 규범을 강조했을 때, 거의 같은 시기에 쓰여진 요한 복음은 가부장적 규범 대신 사랑과 봉사의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골로새 서신이쓰여졌을 때 쓰여진 마가복음은 여성 제자들의 놀라운 역할과 지도력을 은근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가복음에만 주목해 봅시다.

본문(마가 14:9)은 예수님을 영광의 메시아, 세속적 승리자 메시아로 착각하여 그 열심히 추종했던 남성제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들과 퍽 대조적인 여성 추종자의 감동적인 모습을 부각시킵니다. 당시 남성제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예수님을 세속적 영광을 안겨다 줄 인물로 우러러보았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정치혁명가, 민족해방자로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승리자가 되어 왕과 같은 높은 자리에 올라서게 되면, 좌우정 자리 하나쯤은 얻어보겠다는 탐욕으로 예수를 열렬히 따랐습니다. 바로 이런 남성들의 천박했던 모습을 마가복음은 잘 폭로해 줍니다. 남성들은 고난의 종 메시아, 십자가에 허무하게 처형당할 메시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미국대통령 취임식 때 신임대통령과 함께 당당하게 펜실바니아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출세욕으로 가득 찼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들의 세속적 탐욕이 산산이 부서지게 되자, 그들은 한결같이 비겁한 모습을 나타내 보입니다. 예수를 결단코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를 비겁하게 배신했습니다. 어떤 남자는 결사적으로 도망치다 보니까 자기 옷을 홀랑 벗고 알몸으로 달아난 것도 제대로 몰랐던 것 같습니다. 너무 다급하고, 너무 겁에 질려 체면불고하고 스트리킹 한 셈이지요. 이것은 비극이기도하고 희극이기도 합니다. 결국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남성제자들은 비겁한 가짜 제자들이었습니다.

헌데 여성은 어떠했습니까?
먼저 무명의 한 여성을 봅시다.(마가14:9) 공관복음은 모두 이 여성을 이름 없는 천한 여성으로 부각시키고 있으며, 오로지 요한복음만 이 여성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적고 있습니다. 누가와 요한은 이 여인이 당시 관례에 따라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반해 마가와 마태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어느 증언이 더 사실에 가까울까요. 관례에 따른 행위일까요 아니면 관례를 깨는 파격적인 여성의 행위일까요? 예수님의 행위가 대체로 관례의 수준을 뛰어넘는파격성을 지닌 행위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이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 것 같습니다(이점에 관한 역사적 예수세미나 신학자들의 견해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 행위의 뜻은 무엇일까요?

도무지 여성으로서 해서는 안될 엄청난 짓을 한 것이지요. 지도자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일은 제관식 행사의 백미입니다. 왕이 될 때 대제사장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 예식으로 왕이 탄생되는 법입니다. 가장 신성한 직분을 지닌 남성 대제사장만이 이 예식을 집행할 자격을 갖습니다. 마치 부시대통령 취임선서는 미국 대법원장만이 받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부시대통령 취임선서를 워싱턴 사창가의 흑인 여성하나가 뛰어올라와 뎅키스트 대법원장을 밀쳐내고 받아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런 일이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정말 천지개벽할 노릇 아니겠습니까!

헌데 이 무명의 창녀가 예수님의 거룩한 머리에 자기 몸을 팔아 평생 모은 전 재산인 향유를 아낌없이 부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남성제자들은 더러운 세속적 탐욕을 지닌 체 스승을 따랐으나, 이 여성만은 예수님을 고난의 종 메시아로,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될 메시아로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성의 통찰력과 혜안을 어느 남성제자들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를 비롯하여 남성들은 모조리 작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졌기에 고난의 종 메시아의 정체를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 버림받은 쓰레기 같은 여성만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지요.

그래도 예수님은 이런 한심한 남성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배신자는 밤에 나가버립니다. 예수님에게 이 최후는 답답하고 아픈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헌데 제자들은 이 만찬의 뜻조차 이해를 못했습니다. 우둔한 남성제자들에 견주어, 이름 없는 한 여성의 는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장엄하게 당부하셨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

주님께서 어떤 남성제자의 행위를 보고 감동하시어 그것을 기념하라고도 분부하신 일이 있습니까?

마가복음의 또 다른 한 절에 주목합시다.(15:41)여기에는 예수의 공생애를 줄곧 함께 했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온갖 외로움과 괴로움을 예수와 함께 나누면서 동행했던 여인들의 이름은 이러합니다 :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이 네 이름은 베드로, 요한, 안드레, 예수의 동생 야고보의 이름에 가리어 역사의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이 여인들은 참으로 충성스러운 예수의 참 제자들이었습니다.

첫째, 이 여인들은 갈릴리부터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여기 는 희랍어 동사는 akolouthein 인데, 이것은 고난의 길을 따른다 또는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따른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성들처럼 출세하기 위해 따른 것이 아닙니다. 번쩍이는 왕관을 보고 따른 것도 아닙니다.

둘째, 그들은 예수를 섬겼습니다. 여기 는 동사는 diakonein인데, 스스로 종으로 자기를 낮추고 스승을 올리시며 섬긴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이 단어를 minister로 표현한 것도 뜻이 깊습니다. 목사와 장관을 minister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목사나 장관은 섬기는 자로서 같은 뜻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해방적 사역을 뒷바라지하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남성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까를 놓고,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길가에서도 다투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예수님의 그 처절하고 썰렁했던 심정을 여인들은 역지사지했던 것 같습니다.

셋째로, 여인들은 마침내 예루살렘까지 예수님과 함께 올라왔습니다. 는 동사는 synanabainein인데 이것은 고난의 길에 동행한다는 뜻과 예수의 처형과 그의 죽음의 증인으로 산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처절한 죽음의 증인이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예수 고난과 죽음의 역사적 증인으로 살았다는 것이지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값진 삶이지요. 남성들은 다 어디 갔을까요? 남성들은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그로부터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그러기에 고난의 현장에 남성 알리바이는 남성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만큼 여성들이 우러러 보입니다.

초대교회가 가정교회에서 으로 거대화되고 조직화되면서 가부장제도가 뿌리내리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비겁하고, 비열했으며, 비전이 없었던 남성제자들이 교회의 중요 직분을 독점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을 침묵시키고, 여성을 교회 주요직분에서 축출해냅니다. 이 같은 일은 거의 2천년 전에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그 얼마나 장구한 세월동안 여성은 교회 안에서 잊혀진 존재로 살아왔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제직분이 공고화되고 절대화되면서 여성은 변두리로 쫓겨났습니다. 변두리로 밀려났으되, 교회를 몸으로 섬기는 일은 더욱 열심히 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마르다로 교회는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라는 당부는 공허한 메아리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대신 교황과 성직자를 기념하시오 라고 하는 명령은 지엄한 듯 합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현주소라 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사랑하는 새길공동체 자매형제 여러분!
지난 14년간의 새길공동체 역사에서 여성이 운영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14년간이 지나서야 우리는 겨우 믿음의 철이든 것 같습니다. 이제야 예수님의 그 당부의 뜻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습니다. 이제야 이 무슨 길인지도 희미하게 나마 알 것 같습니다. 조혜자 자매의 운영위원장 됨이 한낱 한 여성의 직분 맡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2천년간 세계교회들이 잘못했던 가부장적 짓거리를 고쳐나가는 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의 가부장제가 한국의 유교적 가부장제와 짝하여 낳게된 한국교회의 反 복음적 관행을 타파하는 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일은 남녀 가릴 것 없이 하느님나라를 오늘 여기서 펼쳐내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꼴지 되기를 결단하고, 무명의 여성처럼 서로의 머리에 자기향유를 붓는 섬기는 일에 서로가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결단에서 비로소 하느님나라는 싹트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 기념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길 희망합니다. 다시 한번 조혜자 자매의 위원장 되심을 진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하드립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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