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빛과 소금

박재순 목사 | 2008.07.24 22:04:2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5:13-16
설교자
박재순 목사
참고
새길교회 2001.4.1 주일설교

빛은 자신을 태워서 남을 밝게 비추고 소금은 자신을 녹여서 남을 맛이 나게 한다.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태워서 어둔 세상을 밝게 하고 자신을 녹여서 삭막한 세상을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빛과 소금은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 자신을 태워서 나는 빛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둠이 빛을 가릴 수가 없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일수록 빛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소금도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 소금은 녹을수록 짠맛이 더 나서 소금의 존재를 알린다. 소금은 언제나 소금 맛을 낸다. 세상의 빛과 소금인 그리스도인은 숨길 수 없다.

 

그런데 오늘 한국땅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빛이 나지 않고 맛이 나지 않는 것 같다. 맛을 잃은 교회, 맛을 잃은 그리스도인이 많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짠맛을 내겠느냐? 그러면 아무데도 쓸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리니,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교회가 웃음거리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신뢰를 받지 못한다. 2-30년전만 해도 개신교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고, 교회의 말에 무게가 있었다. 이제 성장도 그치고 사람들이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되었나? 자기를 태우지 않으니 빛이 나지 않고, 자기를 녹이지 않으니 맛이 나지 않는다. 자기만 옳다 하고, 자기만 편하려 하고, 자기만 영광을 누리고 자기만 축복받으려는 신자들에게서 빛이 나지 않고 맛이 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오늘날 목사, 장로, 신자들에게서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교계에 이름있는 사람들 가운데 젊잖게 체면을 지키는 사람들도 하는 처신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건지, 죽은 다음에 심판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으면 죽은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모질고 옹졸하게 처신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욕심꾸러기가 죽어서 베드로 앞으로 갔다. 베드로가 "당신은 어떤 곳에서 살고 싶소?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오." 라고 말했다. 욕심꾸러기가 "황금을 산처럼 쌓아놓고,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 먹으며 건강하게 살고 싶소."라고 하자 베드로가 그를 크고 화려한 성으로 데려갔다. 그 곳에는 황금이 산처럼 쌓여 있고 좋은 옷이 널려 있고 맛난 음식이 차고 넘쳤으며 늘 건강했다. 처음에는 아주 행복했는데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를수록 따분하고 지겨워졌다. 천년 후에 다시 베드로를 만났을 때 그가 따졌다. "무슨 천국이 이렇게 재미가 없습니까? 다른 데서 살게 해 주시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다: "아니 당신은 이제까지 여기가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지냈단 말이오. 여기는 지옥이오. 당신이 지옥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내가 지옥으로 보냈던 거요."

 

저만 알고 저만 위하는 사람, 자기를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지옥에서 살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빛이 나올 수 없고 살맛이 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1차원적 인간이다. 제 본능과 욕심에 따라 움직인다. 내게 이익을 주고 나를 위해 주는 사람,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잘하고 친절하지만 나를 미워하면 나도 미워하고 내게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내고 나에게 욕하면 나도 욕한다. 나를 때리면 나도 때린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다." 이렇게 살면 세상은 어두워지고 살맛 없는 세상이 된다. 모두 저만 위하면 부패하고 썩은 냄새가 난다. 그러나 소금처럼 자신을 녹이는 사람은 살맛이 나게 하며 썩지 않게 한다. 빛처럼 자신을 태우는 사람은 어둠을 밝게 비추고 썩는 것을 막는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을 돌려대라고 했다. 내게 욕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축복한다면 내게서도 빛이 나고 나를 미워하고 욕하던 사람의 눈과 마음에서도 빛이 난다. 손양원 목사는 자기 아들을 죽인 놈을 양자로 삼고 사랑을 베풀어서 '사랑의 원자탄'을 터뜨렸다.

 

원수를 사랑하며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믿음이 부족한 우리가 늘 원수를 사랑하며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누가 내게 욕했다고 나도 그 사람에게 욕설을 퍼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화를 낸다고 나도 그 사람에게 화를 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나를 때린다고 나도 그 사람에게 주먹을 휘둘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내게 얼굴을 찌푸린다고 나도 그에게 얼굴을 찌푸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접시 물처럼 속이 뻔히 드려다 뵈는 사람이다. 그렇게 1차원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은 하나님도 영혼도 안다고 할 수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예수의 마음과 생각으로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누가 내게 화를 내도 나는 웃음으로 대할 수 있다. 누가 나를 욕해도 나는 그를 감싸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빛나고 맛 나는 삶의 새 차원이 열린다.

 

동학은 기독교의 영향을 깊이 받은 민중종교다. 동학의 2대교주 최해월은 여성을 높이 평가했다. 100여년 전에 상투 틀고 살았으면서도 민주적이고 여성해방적인 사상을 가졌다. 해월은 이렇게 말했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며 살림을 하는 여성은 신령한 존재이다. 그러나 여성의 마음은 편벽된 데가 있어서 화를 잘 낸다. 부인이 남편에게 화를 내면 남편은 부인에게 큰 절을 해야 한다. 한번 절해서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10번 큰절을 해야 한다. 그러면 도척같은 마음도 풀린다." 지금도 화내는 아내에게 남편이 큰절을 하고 화내는 남편에게 아내가 큰 절을 하면 그 가정에서 빛이 나고 깨가 쏟아져서 살맛이 나게 될 것이다.

 

믿는 사람의 삶에는 오묘하고 그윽한 데가 있어야 한다. 음흉하고 음험한 인간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접시 물처럼 뻔히 드려다 뵈는 인간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웅숭깊고 풍성해야 한다. 소금은 깊은 맛을 내고 빛은 7가지 오묘한 무지개 빛깔을 지니고 있다. 흔히 흑백논리에 빠져 치고 받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검은 색과 흰색만 있는 줄 안다. 검은 색과 흰색 사이에 회색밖에 모른다. 그래서 흑백논리에 빠지면 옳고 그르고 이기고 지고 치고 받는 것밖에 모른다. 그러나 흰색과 검은 색 사이에 1500가지 색이 있다고 한다. 가운데 길,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단 한 가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장로교의 신학과 제도를 만든 칼빈이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신학원리는 사람이 영광을 차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칼빈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자신의 신앙생활의 원리에 따라 제네바 변두리 주택가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비석도 반석도 없이 묻혔다. 이것은 "무슨 자랑할 것 있다고 죽은 무덤에 이름까지 남기느냐"는 칼빈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참 생명의 빛인 예수와 더불어 살면 빛이 나게 마련이다. 예수와 함께 '나'를 녹이고 태우면 빛이 난다. 그런데 빛을 자기에게 비추면 빛이 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지도 않는다. 우리의 빛을 우리 자신에게 비추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의 이름이 빛나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바보가 어디 있을까? 자기에게 빛을 비추고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면 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것과 같다. 한국교회에서 빛이 나지 않고 삶의 맛과 향이 나지 않고 선교의 활력이 나오지 않는 것은 믿음과 복음의 빛을 자신의 욕심과 낡은 생각으로 덮었기 때문이다. 제가 주도하고 제 이름을 내려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빛나지 않고 복음의 맛이 사라진다. 다른 사람에게 빛을 비추자. 그리하여 예수의 교회가 빛나고 복음의 힘이 넘치게 하자.

 

우리가 사람들에게 보일 착한 행실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착한 행실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게 하려고 애썼던 구식 율법의 공적이 아니다. 자기를 의롭게 하려고 자기 이름을 내려고 애쓰는 선행에서는 빛이 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말하는 착한 행실은 지금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걸맞는 삶과 행동거지이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터 온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동터온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고 돋보이게 하는 착한 행실이 아니라 자기는 녹아지고 태워지면서 하나님 나라가 빛나고 남이 살맛 나게 되는 착한 행실을 해야 한다. 서로를 살리고 서로 돌보고 서로 축복해야 한다.

 

한반도에서 아시아에서 예수의 이름이 빛나게 하자. 이제 한국교회는 아시아의 빛과 소금으로서 구실을 다해야 한다. 아시아 선교의 꿈을 꾸자. 오늘날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이 태평양 시대가 왔다면서 동북아시아에 주목하고 있다.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 '큰 평화 바다'의 꿈을 꾸자.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아시아 선교의 큰 꿈을 주신다.

 

새 천년이 시작되는 21세기 첫 머리에, 아시아 대륙의 끄트머리 한반도에서 우리는 '큰 평화 바다'(太平洋)를 봅니다. 아시아 대륙의 넓고 활달한 기상과 '큰 평화 바다'의 크고 깊은 품을 익히라고 우리를 이 곳에 살게 하셨습니다.

 

평화를 배우느라고 우리 겨레는 그렇게 오랜 세월, 아프고 부끄러운 일들을 겪었습니다.
진리를 익히느라고 우리 겨레는 그렇게 오랜 세월, 잘못된 길에서 헤맸습니다.
믿음을 키우라고 우리 겨레에게 그렇게 험한 시련을 주셨습니다.
이제 인류와 뭇 생명이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며 서로 살리는 지구생명공동체 시대,'큰 평화 바다 시대'를 맞았습니다. 이 시대를 바로 살도록 우리에게 대륙처럼 넓은 가슴, 바다처럼 큰 마음을 주시라고 기도하자. 우리의 마음이 흙처럼 낮아지고 하늘처럼 비어서 하나님 나라의 빛이 비치게 하자.
예수 안에서 우리는 아시아 대륙처럼 넓은 가슴, 태평양 바다처럼 큰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밥과 복음의 말씀에 굶주린 북한동포와 아시아인들과 함께 물질적 축복과 영적 축복을 나눌 수 있다. 그리하여 아시아에서 큰 빛이 비치게 하자.

 

나는 3년 전에 인도에 보름 동안 있으면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들을 만났다. 인도 10 인구 가운데 3억에 이르는 불가촉천민이 3,500년 동안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몸이 닿으면 죄가 옮는다고 접촉이 거부된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가를 볼 수 있었다. 몸의 접촉이 거부되면 인권이 박탈될 뿐 아니라 영혼이 파괴되는 것을 알았다. 초등학교 3학년 여자 어린이가 학교 수도에서 물을 먹다가 교사에게 맞아서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또 농촌의 불가촉천민들을 둘러보았는데 토굴 같은 집에서 8식구가 함께 사는데 저축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들의 집에는 문이 없었다. 그 까닭은 다른 계급 남자들이 언제든 와서 딸과 아내를 겁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외간 남자의 신발이 집 앞에 있는 것을 보면 불가촉천민인 남편은 1-2시간 다른 데 가서 있다가 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인간으로서 수치와 분노를 느꼈다. 아직도 지구상에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불가촉천민 장애인어린이들의 교육기관에서 하루 밤 하루 낮을 지냈다. 굶주려 보이는 바싹 마른 장애인 어린이들의 찬송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영감에 넘쳤다. 배고픈 창자에서 나오는 힘찬 찬송소리에 끌려 나는 그들의 예배시간에 자주 참여했다. 나는 그 어린이들의 눈빛에서 생명을 갈구하는 영혼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눈을 보면 우리 눈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빛이 비칠 것이다. 그러면 지금 허물어져 가는 한국교회도 살 수 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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