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바닥을 친 신앙

김광수 | 2008.07.26 22:59:5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4:1-11
설교자
김광수 형제
참고
새길교회 2001.6.27 주일설교

바닥을 친 신앙


몇 년 전에 말씀 증거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저는 꽁무니를 뺐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부탁을 받았을 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철학을 전공한 저에게 이런 소중한 기회를 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이상스럽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과학자와 철학자와 사기꾼이 있습니다. 그 중 사기꾼은 교회에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기꾼은 사기만 칠 수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는 교회에 나올 이유가 있습니다. 과학자는 탐구 과정에서 자연의 신비를 직접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과학자의 45%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철학자가, 더구나 논리로 무장한 분석철학자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제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알고 의도가 의심스러운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기독교 신자인가?"

이 질문은 언제나 저를 긴장시킵니다. 이 질문은 저로부터 뭔가 떳떳치 못한 것을 노출시키고자 하는 저의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정한 철학자라면, 당신은 기독교 신자일 수 없다. 그런데 당신은 교회에 나간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진정한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에 나간다면, 당신은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며, 만일 당신이 사이비 기독교 신자로서 교회에 나간다면, 당신은 철학도의 정신을 짖밟는 위선자이다." 이 질문은 저에게 이러한 딜레마를 던져줍니다.

대개의 경우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어정쩡합니다. 신자들이 들으면 비신자 같고, 비신자들이 들으면 신자 같은 그런 아리송한 답을 합니다.

발설은 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도 마음속으로 저에게 같은 질문을 던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마 정대현 교수, 이명현 교수, 이주향 교수에게도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철학한다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그래서 오늘 이 자리만큼은 제가 어정쩡하게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잘못하다간 철학교수들이 단체로 망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답이 어떤 것이든, 저의 부족함을 다른 철학자들에게 일반화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저는 이 '믿음'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자가 되는데 일종의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왕십리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전도사 님(이규형)을 만나기면 하면 몇 시간 씩 붙들고 토론을 하였습니다. 토론이라기보다는 시비를 걸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찰 수 있는가?"
"예수가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였다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유다가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는 십자가에 메달리지 않았을 것이고, 이 경우 예수는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배신자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가 되도록 도운 공로자가 아닌가?"

저의 질문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님은 말이 막힐 때면 언제나 나의 믿음 부족을 문제삼으면서 토론을 종결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모든 의문을 얼버무리고 덮어버리기 위한 은유(隱喩)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풋내기 철학도였던 제가 믿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은 '증명'을 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믿음만으로 신자의 길을 가는 것은 미신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믿음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 증거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인간이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문제들을 다룬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중 [대심문관] 부분은 이 작품의 테마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카톨릭 교회의 부패상이 절정에 달했던 16세기 이태리 세빌리아에서 백 명에 가까운 이교도들이 화형에 처해진 다음날, 바로 그 [뜨거운 광장]에 예수가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재림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화형식을 주도했던 대심문관은 예수를 체포하여 하옥시키고, 한밤중 홀로 감옥으로 찾아가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의 재림을 바랄 텐데, 대주교의 입장에서 예수의 재림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심문관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구원 방식이 대다수의 인간에게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심문관에 의하면 대다수의 인간은 당장의 배고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을 만큼 선하거나 강하거나 현명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대중은 기적과 같은 증거가 있던지 빵이 생겨야 믿습니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이 되게 하라."고 사탄이 요구하였을 때, 예수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예수는 빵도 기적도 베풀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심문관은 바로 이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대심문관에 의하면 예수는 대중을 버린 것입니다. 예수는 소수의 엘리뜨 인간에게나 가능한 구원의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은 대중을 구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중을 구원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엘리뜨도 중요하지만 대다수의 대중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이런 취지의 극언을 합니다.

[우리는 면죄부를 팔아 대중의 죄의식을 없애주고 또 그 돈으로 빈민을 구제하는 등 잘 해 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비밀을 폭로하려는 '이단자'들은 화형에 처한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당신은 재림하여 '우리'의 일을 망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마땅히 화형에 처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요!"]

광야의 사탄은 예수를 시험만 하였지만, 대심문관은 이처럼 예수를 협박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믿기 위해서 증명이나 증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대중만이 아닙니다. 철학자들도 여러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였으며, 적어도 신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이유를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철학자들은 의심이 많아서, 어떤 주장이든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없이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신의 존재를 정당화시키려는 시도는 대표적으로 여섯 가지 종류가 있는데, 제대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5분 이내에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해 보겠습니다. 골치가 아파도 인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가 걸린 일이니까요.

첫째, '존재론적 증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도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완전하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무한히 자애로운 존재'로서의 '신'에 대한 관념은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사람이건 부정하는 사람이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이 불완전한 인간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신은 존재합니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우리 같이 불완전한 인간보다도 더 불완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요?

두 번째로 '우주론적 증명'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든 일은 원인이 있어서 일어납니다. 물론 원인이 되는 사건도 선행 원인이 불러일으킨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인과관계가 무한히 소급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선가 이 인과관계가 멈추고, 원인이 없는 원인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 '원인이 없는 원인', 즉 '스스로 존재하는 제1원인'이 '신'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목적론적 증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사극 '女人天下'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됩니다. 이를 보고 문정왕후(이인화)는 '사람이 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벌레들이 우연하게 그런 글자 모양으로 나뭇잎을 갉아먹을 수는 없다고 추리한 것입니다. 물질로부터 생명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수천 개의 원자들이 정확한 순서로 배열되어 단백질 분자를 형성해야하는데, 과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이러한 배열이 우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1/10260이라고 합니다. 이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고실험을 해 보겠습니다. 10억 마리의 원숭이가 있습니다. 10억이면 중국 인구와 맞먹는데, 이 10억 마리의 원숭이들에게 타자기를 주고 치게 합니다. 그것도 우주의 존재기간 동안, 즉 150억 년 동안 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중 어느 원숭이든 우연하게 'Shakespeare'라는 단어를 치게 된다면, 그 가능성이 물질로부터 하나의 단백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입니다.(Francis Crick, {생명의 출현}, 홍영남 역, 아카데미서적, 48쪽 참조.) 그렇게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결코 우연의 산물일 수 없고, 반드시 이 세상을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하고자 한 의도(정신, 목적)의 산물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물론 이 의도는 신의 의도입니다.

이러한 증명들 외에 '요청'으로서 신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행위를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선악 판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또한 합리적 선택의 결과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이성적으로는 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가정하고,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지를 판단해 봅시다. 여러분들은 신이 존재하는 편에 걸고 살던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에 걸고 살든지 해야 합니다.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어느 편에 거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신은 존재하든지, 존재하지 않든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존재한다는 편에 걸고 살 경우, 신이 실제로 존재하면 모든 것을 얻고,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에 걸고 살 경우, 신이 실제로 존재하면 모든 것을 잃고,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역시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손익계산을 해 보면, 신이 존재하는 편에 걸고 사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적이나 신비로운 체험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꿈을 꾸고, 구제할 길 없던 망나니가 하루 아침에 독실한 신자로 돌변합니다. 사실 철학자들의 증명보다는 기적이나 신비체험이 더 가슴에 와 닿고 사람들을 거꾸러지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김승옥 씨가 인기 소설가의 길을 그만 두고 전도자의 길에 들어선 것도 신비체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위의 여섯 가지 시도들은 모두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목적론적 증명은 과학자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특히 대다수 분석철학자들은 이 증명들에 설득되지 않습니다. 온갖 이유를 들어 이 증명들의 논리적 결함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연적 재난과 인위적 재난을 신이 존재하지 않는 증거라고 내세웁니다. 응답된 기도보다는 응답되지 않은 기도에 더 주목합니다. 대중은 빵과 기적을 박탈당함으로써 신앙의 바닥에 이릅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신 존재 증명'이 실패함으로써 신앙의 바닥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에 어떤 철학자들은 "신은 죽었다."라고 하기도 하고,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라."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철학자들의 엄격한 '청교도적' 자세는 철학이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많은 신앙인들이, 특히 새길교회의 신도들처럼 지식 수준이 높을수록, 신앙에 대하여 '철학적 자세'를 취한 끝에,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못이길 바랍니다.) 물론 지식 수준이 낮다고 해서 증거를 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경우 회의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독실한 신자가 고난을 당하고, 악행과 사술(詐術)을 서슴지 않는 비신자가 유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과연 정의의 하나님이 존재하는가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증명과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신앙의 무게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탄은 예수께 요구하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이 되게 하라." 그런데 예수는 마귀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마귀는 또 요구하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려 보아라." 예수는 이 요구도 거절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어렸을 적 이 구절을 읽으며, 아쉬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쯤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왜 사탄의 요구를 거절했을까? 사탄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줘 버리면, 사탄은 꼼짝 못하고 물러섰을 텐데, 왜 엉뚱한 말만 했을까? 저는 예수가 사탄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으니까 교묘한 변명으로 난처한 상황을 회피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때의 제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잘못이었던가? 함께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대라는 사탄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왜 거절하였을까요? 제가 예수의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해 알 수는 없지만, 감히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예증은 없다."는 논리를 예수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이 되게 하라."는 사탄의 요구를 분석해 봅시다. 이 요구는 조건문입니다. (논리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는 제 책임이 아니라, 저에게 말씀을 부탁한 분의 책임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돌을 빵이 되게 하여 이 조건문의 후건을 만족시킬지라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탄도 돌을 빵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사탄의 말을 들어줄지라도, 사탄은 다른 기적을 요구했을 것이고, 예수가 아무리 많은 기적을 베풀지라도 그 기적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결국 사탄에게 놀림만을 당할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지적했을 것입니다.

둘째, 증명이나 증거를 통한 믿음이 갖는 역설 때문에 사탄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고, 또 수많은 증거로 뒷받침될 경우, 믿는 행위는 더 이상 본래의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은 오묘하고 신비로운 힘을 잃고 한없이 가벼운 상식으로 전락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말하는 과학 법칙을 믿는 정도로 예수를 믿을 것입니다.

전도의 어려움을 경험한 분들은 여기서 무릎을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러면 모두가 믿게 되는구나. 그렇게 간단한 것을…." 이렇게 생각하며, 왜 하나님이 증명이나 증거나 기적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믿게 만들지 않았을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은 잘못입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간단히 믿을 수 있도록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믿음'이라는 경지에 그렇게 값싸게, 가볍게 도달하도록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을 경우의 믿음은 특별하지도 않고 자랑스럽지도 않습니다.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증거나 기적이 있어야 가능한 믿음은 유치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믿는 합리적 선택은 천박한 거래에 불과합니다.

저는 여기서 증명이나 증거를 통한 믿음의 기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증명이나 증거는 부족한 신앙을 키우는 데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이 뼈속 깊이 스며드는 '하나님과의 일체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거부하는 증명일지라도 감동되어 신앙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어린 시절 제가 그랬던 것처럼, 증명이나 증거가 없으면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사실 독단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증명이나 증거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많은 믿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 손수건(빨간 손수건을 꺼낸다)의 색깔을 우리는 빨갛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빨간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철학, 특히 인식론의 해묵은 쟁점들 중 하나입니다.

또한 증명이나 증거가 없으면 믿을 수 없다는 자세는, 앞에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사탄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우리는 터무니 없는 욕심을 기도에 담아 이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신앙의 확증을 위한 증명이나 증거를 원하고 그것이 충족되면 신앙에 활력을 얻고, 그렇지 않으면 낙심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왜 나쁜 놈들에게 벼락을 내리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증명이나 증거나 실용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도 없고, 또 예수를 믿는 것이 이익이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명'과 '증거'가 있고, 또 예수를 믿는 것이 손해가 되는, '바닥을 친 상황에서의 믿음'이야말로 진정으로 축복 받은 믿음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한 '가언명령(假言命令)'의 산물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편에 서게 하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의 산물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실 새삼스럽게 기적이 왜 필요합니까? 돌뿐만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돌을 빵으로 변하게 해보라는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쑥스럽고 유치합니까? 매 순간이 기적의 연속 아닙니까?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닙니까? 숨을 쉬는 매 순간 기적을 체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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